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 정윤석 연출 | OPOT PICTURES, 2011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찬사 일변도의 평가를 받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인상은 지인들에게 들은 호평을 통해 미리 예감했던 대로였다. 이 다큐멘터리를 세기말적인 환멸의 기운을 고스란히 체화한 하드메탈적인 음악 정신의 승계자라고 칭해도 이상하진 않을 법하다.

트위터에서 김정은에 대한 선정적인 발언을 꺼내놓은 것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진가 박정근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영화에는 강렬한 음악적 퍼포먼스의 신명과, 그 신명을 구현하는 밴드들이 겪게 되는 정치적인 우여곡절의 내막이 첫 술자리에서 동석한 대학 새내기들처럼 어색하게 동존하고 있다. 물론 이 어색함을 감내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지속적으로 난감함을 표출하고 있는 이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밤섬해적단의 멤버들 본인인 권용만과 장성건이다.

작품 분석을 위해 기괴하리만큼 이지러져있는 이들의 대사를 인용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애초부터 악보 자체가 파쇄되어 있고 그 자리에 민감한 정치적 슬로건과 이해하기 힘든 동물적인 언어가 활개하는 이들의 음악을 선명한 가사를 통한 의미전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야를 막론한 정치세력은 밤섬해적단 앞에서 말을 잃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다. 세간의 부정적인 풍문을 빌어 법적 공방으로 몰아가려 하거나 섣부른 기준으로 이들의 정체성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납득되지 않는 촌극을 빚어낼 뿐이다. 물론 동시대 펑크신의 생래적 환경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의 내막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지금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논평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하려는 자체가 다큐멘터리 속 엄숙하신 보수주의자들의 언설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감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법리적 판단이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이유는 터무니없을 만큼 간단하다. 정작 연주자들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진술에서도 언급되듯이, 그들에게 북한과 레드 콤플렉스라는 소재는 그저 놀이의 소재일 뿐이다. 그러니 “놀이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는 활동”이라는 프리드리히 폰 쉴러의 지적처럼, 밤섬해적단이 한바탕 벌여놓는 난장판을 상징계의 질서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패착으로 돌아갈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특기해야 할 법한 문장이 있다. “북한이 똥이라면 남한은 오줌”이라는 권용만의 극중 대사다. 이 말은 권용만의 정치적 소속을 탐문하려는 이들에게 권용만이 조소적으로 발설하는 대사다. 하지만 동시에 이 대사는 남한과 북한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말하기보다는 역으로 그 추상명사의 범위와 정의를 설정하는 주체의 인식틀을 반영하는 것처럼 들린다. 유사한 예로 영화 속 국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남한이나 북한이 내적동일성을 전제하는 전체주의적인 체제로 인식되는 이유 또한 그것을 인식하는 집단 스스로가 그 체제의 강령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렇기에 권용만의 저 대사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역으로 밤섬해적단 스스로가 “똥과 오줌”과 같은 비체(鼻涕)의 형상으로 인지되기를 바라는 자가인식적 진술이라 들린다. 그들이 말하는 대상으로부터 역으로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이 은밀하게 누설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로부터 어떤 심오한 통찰이나 의미를 발굴해내려는 것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용한 시도일지라도, 권용민의 저 말은 “콧물, 침, 분비물들의 액체적인 ‘비체’가 더럽다고 혐오되는 이유는 그것이 동일성이나 체계, 그리고 질서를 교란시키는 비규정적인 성격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줄리아 크레스테바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줄리아 크레스테바, 『공포의 권력』). 물론 이는 형이하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소수자 정치학에서 자주 원용되는 관념이기도 하다. 크레스테바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성이 있다. 이 말은 비규정적이기 때문에 비체들이 혐오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완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헤게모니를 교란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우리가 소수자성을 전유할 수 있다는 여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논리나 의미의 그물망에 앞서 물신화된 밤섬해적단의 소란스러운 말과 행동, 무엇보다도 가사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동물적으로 구사되는 그들의 언어를 설명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정의라고마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명료하게 정련된 문장을 구사하지 않거나, 스스로조차 정체성을 헷갈려 하는(밤섬해적단의 북한이나 사회에 대한 극중의 어눌한 촌평을 주석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본인들의 음악적 연원이 무슨 장르였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가물가물하게 기억할 뿐더러, 그 사실조차 숨기지 않고 있다) 그들이 빚어내는 소동극이기에 다큐멘터리 속 어떤 인터뷰이의 말처럼 밤섬해적단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로서의 위치를 증언할 수 있는 (비)언어를 부각시킬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주류적 질서로 포획되지 않는 갈등과 계쟁의 퍼포먼스를 구연하는 것이야말로, 종종 체념과 무기력증에 빠져 소진상태에 처하게 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자구책으로 기능하기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밤섬해적단의 투쟁이 부질없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바보들은 결국 투쟁에 실패해버렸고, 감독은 결말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어둑시근하게 드리우는 검열의 그림자를 전경화한다. 다큐가 진행될수록 어지러운 메탈의 소음은 감소되고, 투쟁의 선율은 법정공방의 준엄한 절차적 판단 앞에서 맥아리를 잃는다. 이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정윤석의 선택은 단지 밤섬해적단의 음악적 활극을 낭만화하는 전략보다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그들의 음악과 낙관에 드리운 무력감의 그림자를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역으로 투쟁의 활력과 그들의 위치를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에서 찾기 힘든 조합이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그 생소함이 적극적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신 [email protected]

2 Responses

  1. 똥오줌비체

    밤섬해적단 영화가 똥이라면 이 글은 오줌이네요. 구체적인 논평이 불가능한 건지, 못하는 건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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