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평론가의 <검열이 더 독해진 시대>는 올해 2월에 웹진 이명에 게재된 글로, ‘현재와 같은 비난이라면, 여성에 대한 뮤직비디오는 그 어떤 것도 나올 수 없다.’는 부제의 글이다. 해당 글을 요약해보자면, 이종민 평론가는 글을 통해 NCT Dream의 “마지막 첫사랑”의 뮤직비디오와 그것을 둘러싸고 제기된 비판에 관하여 논한다. 글은 해당 뮤직비디오의 영상이나 연출에 대한 길지 않은 분석으로 시작된다. 바로 이어서 해당 뮤직비디오가 답습하고 있는 클리셰를 비판한다. 여성 교사를 향한 소년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구식’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뮤직비디오가 답습하고 있는 클리셰들은 분명 시대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이에 대해 “굳이 성적 메타포로 연결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장이 겨냥하고 있는 입장은 해당 뮤직비디오가 여성 교사를 성적 대상화하는 방식을 분석하며, 뮤직 비디오가 여성 혐오적 기재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시각들이다.

이러한 비판적 논의에 관하여, “굳이 성적 메타포로 연결해야 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던 이종민 평론가는 글을 이어나가며 스스로 답을 제시한다. 그는 뮤직비디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야기될 수는 있다고 본다.”며 비판의 성립 가능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연출 장면 하나하나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며 진행한다면 그 어떤 논리가 안 먹힐까.”라며 제기된 비판이 과잉 해석임을 지적하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이 글은 비판의 구색을 무난하게 갖춘 글처럼 읽힌다. 어떤 대상(뮤직비디오)과 그 대상으로부터 비롯된 현상(뮤직비디오에 대한 비판)을 먼저 정리한 후, 그 현상이 부당함을 지적하되 그것이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는 식으로 양보적인 태도를 동시에 취하기 때문이다. 일견 합리적이고 젠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종민 평론가의 글은 과연 합리적인 비판인가? 그리고, 그것은 좋은 비평으로 기능하고 있는가? 나는 단호하게 ‘아니다’라는 대답을 하고자 한다. 오히려 <검열이 더 독해진 시대>는 뮤직비디오에 제기되는 비판을 검열이라고 몰아세우며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글을 독자로 하여금 합리적인 비판인 것처럼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나쁜 비평일 뿐이다. 대답을 위해 이 글은 이종민 평론가의 글을 구조적으로 분석할 것이고, 글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검열”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주체가 은폐된 잡음

이종민 평론가는 글의 초반부와 중반부에서, 계속 ‘무언가(혹은 누군가)’에 의하여 뮤직비디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로 하여금 주지시키려고 노력한다. 세 번째 문단의 “그런데 이 뮤직비디오에서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잡음이 일어나고 있다” / 네 번째 문단의 “그러나 그러한 사회 구조이기 때문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시각은 우려스럽다던가, 나아가 “한국이 어떠한 나라인데 ‘여선생’을 꺼내느냐”는 식의 논리는 위험하다.”/ 다섯 번째 문단의 “그러나 현재 이 뮤직비디오에서 논란이 된다는 장면들”과 같은 문장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해당 글은 뮤직비디오에 관해 제기된 비판을 각각 “잡음” / “(위험한) 논리” / “논란”으로 계속해서 변용하며 서술한다.

그런데 조금씩 다르게 사용된 표현들임에도, 잘 살펴보면 공통점이 존재한다. “잡음” / “(위험한) 논리” / “논란” / “검열”은 모두 주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잡음은 어떤 물체의 진동으로부터 비롯되고, 논리는 발화자(서술자)에 의해 주장되어야 하며, 논란은 그것을 주고받는 주체들이 있어야만 한다. 검열 또한 검열하는 사람이나 기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어떤 현상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만으로는 현상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것이 유효한 분석이라면, 그 현상의 주체가 선제함(Pre-supposition)을 먼저 입증하고 그 후에 현상이 주체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술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종민 평론가의 비판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필요한데, <검열이 더 독해진 시대>에서는 그 증명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종민 평론가의 글은 논리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은폐된 기저에서 교묘하게 권위를 생산하고 유지하려는 주체를 파악하는 작업은, 권위를 생산하는 근원을 인식하게끔 하고 그것이 작동하는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작업은 권위가 목표로 하는 바를 알 수 있게끔 한다. 다시 푸코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비판은 ‘권위에 맞서는 것’이고, 그렇기에 맞서야 할 권위의 주체를 찾아내기 위해 비판의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은 비판의 기본적인 단계일 것이다.

사실 잘 살펴보면 그 대상이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지점은 해당 글의 의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글의 후반부에 쓰인 문장을 보자. 여섯 번째 문단은, “몇몇 이가 주장하는 ‘사회 분위기’와 ‘특정 장면 몰아붙이기’는 아마도 털털한 여선생을 넣어도, 청순가련 여선생을 넣어도 지금과 같은 결과로 해석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은 “몇몇 이”라는 주어이다. “잡음” / “(위험한) 논리” / “논란”처럼 주어가 필요한 표현들을 사용했음에도 그 주어를 일관되게 밝히지 않았던 이종민 평론가는, 글의 후반부에서야 그 주어를 “몇몇 이”라는 실체를 갖는 복수의 사람들로 규정한다. “몇몇 이”라는 주어는 (단수는 아니지만) 소수의 사람을 지칭하는 어구로, 꽤 구체적으로 대상의 규모를 한정하는 표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종민 평론가는 자신이 비판하려는 대상들이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정도까지, 그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글이 끝날 때까지 “잡음” / “논리” / “논란”의 주체들에 대해서 어떠한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실적인 상황들을 고려해보면,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2월 8일과 글이 공개된 11일 사이에 트위터를 비롯한 SNS에서 제기된 비판들과 웹진 아이돌로지의 오요 평론가의 글을 충분히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더 큰 의문을 마주한다. 그는 왜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비판하려는 대상들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 지점에서 이종민 평론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신의 글이 겨냥하는 대상들을 은폐했다는 의혹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는 글의 논리적 정당성을 더 확보할 방법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그것을 포기하고 대상을 언급하지 않거나 모호성을 내포한 “몇몇 이”와 같은 표현으로만 지칭한다. 비판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할 요소를 포기하고, 스스로 비-논리적인 지점을 만들어내면서까지 글이 은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해소되지 못하는 대상들의 문제가, ‘페미니즘 기반의 비판들을 논박하고 싶지만, 정면으로 맞서고 싶지는 않았던’ 이종민 평론가의 비겁한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유추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이 비판하려는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호명하는 순간, 그들의 행위를 직접 “잡음”과 “(위험한) 논리”이자 “논란”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비판이 검열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위한 논리적인 근거가 부재했기에, 자신이 논하려는 대상을 은폐함으로써 그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뮤직비디오에 대해 제기된 (이종민 평론가에 따르면, “검열”인) 비판들은 뮤직비디오의 시각적인 요소들이 성적 대상화를 수행하고 있는 방식이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암묵적인 권력 구도를 꼼꼼하게 분석하며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문학이나 미술, 영화 같은 다른 영역의 비평에서도 기본적으로 수행되는 ‘기술(Description)’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작품의 표면에 압도당하지 않고 스스로가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며, 비판과 평가를 위한 준비를 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다. 심지어 이종민 평론가 자신도, 웹진 이명에 게재된 여러 글에서 특정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음악 그 자체와 그것의 장르나 산업적인 성과 등을 기술한다. 그 자신도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 창작의 자유를 위협하는 “논란”이고, 줄어들어야 할 “잡음”이며, 위험한 “논리”라면, 왜 그의 글은 검열이 아니고 제기된 논의들은 검열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제 그에게는 숨길 것도, 또 숨을 곳도 없다. 이미 너무 많이 실패해버린 비평이지만, 그는 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분명하게 답해야만 한다. 왜 페미니즘 기반의 비판들은 “잡음”이자 “(위험한) 논리”이고, “논란”이며, “검열”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무엇에 의한 검열인가?

특히, 페미니즘 기반의 비판을 굳이 “검열”이라는 표현을 통해 평가절하하고 있다는 점은, <검열이 더 독해진 시대>의 악의성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다. 계속 언급하지만, 이종민 평론가는 글에서 “검열”을 사용한다. 해당 글은 검열에 대한 별도의 검토 없이, “몇몇 이가 주장하는” 혹은 “특정 프레임에만 가둬서 풀어낸” 입장을 모두 “검열”로 지칭한다. 그런데 검열은 예술과 관련된 논의에서, 특히 한국 대중음악에 관한 논의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할 개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검열은 표현의 자유에 어긋나기에 반드시 폐지되어야 할 제도로 늘 지적당해왔고, 실제로 많은 국가에서 폐지되었다. 게다가 과거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음악가들이 활동 금지를 당했던 한국 대중음악사를 놓고 볼 때, 특정 비판이 “검열”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와 의도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아무 고민 없이 검열이라는 표현을 쓴 부주의함에서 이미 좋은 비평으로써의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해당 글은, “뮤직비디오 감독은 어떠한 창의력을 발동시켜 그려낼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서 제기된 비판들을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는’ 검열로 호명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논리적 오류가 존재한다. 먼저, 그것이 어떠한 비판이건 간에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판은 예술 작품 안에서 실행된 특정한 선택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지만, 그 판단이 강제적으로 다른 선택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비판이 행해졌다고 해서 그 비판이 요구하는 방식이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기에, 비판은 창작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비판이 직접적으로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창작의 자유가 저해된다는 주장은 여전히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창작의 자유와 창작의 윤리를 구분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비판이 작동하는 지점은 창작의 자유가 아니라 창작의 윤리이다. 특정한 창작물의 비윤리적인 측면을 밝혀내고 그것이 기대어 있는 권위에 맞섬으로써, 창작자가 자신의 수행이 내포하고 있는 혹은 부재하고 있는 윤리에 대해 재고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여전히 비판은 힘이 없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기에, 창작자가 반성하고 고민하게끔 유도할 수는 있어도, 물리적으로 그 창작자에게 제재를 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비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같은 방식의 창작을 수행하더라도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어떠한 변화도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종민 평론가는 창작의 자유와 창작의 윤리를 혼동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에 제기된 비판들이 창작의 윤리에 대해 논한 것이 아니라 창작의 자유를 저해하는 검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오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해당 글의 가장 큰 문제는, 이종민 평론가가 “검열”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비평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몇몇 이가 주장하는” 혹은 “특정 프레임에만 가둬서 풀어낸” 입장은 합리적인 비판과 타당한 비평이 아닌, “검열”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곧 “(합리적) 비판/비평” vs “(비합리적) 검열”이라는 이항대립 구조를 형성한다. 문제는 이 이항대립 구조가 비평과 비평이 아닌 것, 다시 말해 비평과 비(非)-비평의 범주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검열이 비평이 아닌 것의 전부일 수는 없다. 검열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비평이 아닌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제된 비평 언어로 쓰여 있지 않거나 합리적인 분석 과정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검열이 되진 않는다. 때에 따라 좋은 비평이나 합리적 비판이 아니라고 평가할 수는 있어도, 검열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해당 글처럼 검열과 비(非)-비평을 동일하게 보려면, 검열의 재정의나 비평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 검열은 매우 명확한 정의를 가진 데 비해, 비평은 이미 서문에서부터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그 본질을 규정하기 어렵기에, 이러한 구조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논증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글은 검열의 정의를 검토하지도 않고, 비평에 관해 고찰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종민 평론가가 검열과 비평이 아닌 것을 동치 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검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거나 자신이 행하고 있는 비평이라는 행위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 “Things are Queer”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

페미니즘에 기반을 두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지적을 제기했음에도 “잡음”과 “(위험한) 논리”와 “논란”으로 호명되는 비판들. 제기된 비판들을 “검열”이라고 무책임하게 프레이밍하고, 스스로는 그것의 구체적인 대상과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 어떤 비평가. 명백히 비판이고 비평인 것은 검열로 부르고, 비판이나 비평이 명백히 아닌 것은 비평으로 부른다. 이제 모든 것이 검열로 불리고, 어떠한 것도 비평이라고 불리지 못한다.

“나는 묻는다.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1 | 전대한 jeondaehan @naver.com

  1. 김홍중, 『눈먼 자들의 국가』,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 문학동네, 2014, pg 147

One Response

  1. 최승건

    좋은 글입니다. 음악계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들이 매우 심한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은 성평등이라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인 가치인지 오히려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네요.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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