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상식의 수상목록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들. 옛날 이야기들. 그러니까 2011~2012년, 내가 막 한국의 ‘인디 밴드’에 입문했던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인터넷의 넘쳐나는 추천 글들을 보며 이러저러한 밴드와 음반을 찾아듣던 나는 늘어나는 호기심에 맞게 디깅의 영역을 더욱 넓힌다. 음원 싸이트, 블로그와 커뮤니티, 웹진, 구글링… 이 상황에서 나는 국내 대중음악을 어떤 식으로든 파던 간에 누구나 한 번 쯤은 만나는 곳에 다다랐는데… 바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은 다른 이야기고, 바로 한국대중음악상(이하 한대음)이다. 당시의 나는 그 수많은 수상작과 후보작의 리스트들을 보며 내가 이걸(물론 그 당시에는 록 밖에 모르는 바보였지만) 전부 다 들어버리겠다는 야심에 차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아마도) 정말로 그 록 음반들을 전부 들어버리고야 말았고, 다른 장르의 음반들(이를테면 흑인 음악이나 아이돌 팝이나 전자음악이나…)까지 듣고도 뭔가 성에 차지 않게 되었다.

지금-여기의 시점에서 한대음을 생각해본다. 그 몇 년 전의 옛날까지만 해도, 매년 한대음의 후보작과 수상작을 예측해보는 것은 큰 행복이었고, 이리저리 인터넷 생중계 주체가 바뀌는 본방도 2월 28일마다 챙겨봤다. 한대음 스스로도 나름 자랑하듯 ‘한국의 그래미’를 표방하는, 이 땅의 ‘유일무이’한 ‘음악성’ 위주의 시상식이라는데,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록만 듣던 시절을 벗어난 뒤 거의 최근까지도 한대음은 나에게 일종의 ‘정전(Canon)’으로서 작용했다. ‘한대음 키드’라는 낯 뜨거운 수식어를 굳이 만들어서 굳이 붙이기는 싫지만,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그게 나다. 아니, 나였다. 이 표현은 과거형이고, 시간은 다시 지금-여기로 돌아온다. 고등학교는 몇 년 전에 졸업했다.

최근부터, 나는 한대음 수상 결과를 예측하거나 후보작들을 찾아듣는 게 예전만큼 재미가 없어졌다고 느껴졌고, 게다가 어느 지점은 꽤 답답하게까지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대중음악 덕질과 비평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결국 불감증 같은 것에 걸렸기 때문일까? 다행히도(혹은 불행하게도) 그건 아닌 거 같다. 나는 다시 이전처럼, 한대음의 수상목록과 후보목록을 창에 띄워본다. 그리고 이전처럼 자세히 그 목록을 쳐다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하나의 구성된, 편집된 픽션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 구성과 편집을 바꾸면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눈치채지 못한 것들 또한 다시 보게 된다. 나는 어떤 시상식의 수상목록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위치를 바꾸고, 계산을 하고, 내가 여태껏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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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대음에 대한 막연한 의문, 그러니까 ‘이거 뭔가 이상하네’를 느낀 건 12회 시상식에서 로로스가 [W.A.N.D.Y]로 올해의 음반을 탔을 때다. 물론 알다시피 나는 로로스의 부정할 수 없는 광팬이며 [W.A.N.D.Y]의 수상은 한국 포스트록의 값진 (비평적) 성과 중 하나라고 본다. 중요한 건 로로스가 ‘모던 록’ 부문에 (한대음에 ‘포스트록’ 부문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위치한다는 점이었고, 이는 곧 3호선 버터플라이의 [dreamtalk]와 윤영배의 [위험한 세계]에 이어 모던 록 부분에서 3연속으로 ‘올해의 음반’이 나왔다는 의미였다. 나무위키에는 여기에 이런 주석이 달았다. “이로서 모던 록 장르에서 3년 연속 올해의 음반이 나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뭔가의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뭔가 굳이 주석까지 붙일 일은 아닌데? 그건 뭐랄까… 한대음에서는…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데, 이게 당연해야 하는 걸까?

2018년 현재까지 한대음에서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15개의 작품 중에서 [The The Band], [Just Pop], [Aresco], [가장 보통의 존재], [dreamtalk], [위험한 세계], [W.A.N.D.Y] 총 7장이 모두 ‘모던 록’ 부문에 있는 음반들이다. 거기에 더해 [Life Is Strange]와 [장기하와 얼굴들]은 ‘록’ 부문의 음반들이며 (사실 이 둘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한국 대중음악의 영원한 난제겠지만) 여기에 록과 장르적으로 교집합이 매우 많은 포크 부문에서도 [bleu]가 추가된다. 그렇다면 도합 10장의 음반들이 ‘올해의 음반’ 중에서도 록/포크 성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 수상작의 2/3이다. 남은 음반들은? 팝에서 2장, 랩&힙합에서 2장, 재즈&크로스오버에서 1장. 사실 팝에서 수상한 이적의 록적 기반과 조동진의 포크적 기반까지 고려하면 [나무로 만든 노래]를 팝-록으로써, [나무가 되어]를 (앰비언트) 포크-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억지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올해의 음반’을 탄 15장의 음반들 중에서 거의 대다수인 12장, 4/5의 음반들에 ‘록’적 경향이 다분하다. 여기서 또 질문이 든다. 2003년 이후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80%를 오로지 록/포크 혹은 그러한 경향의 음악들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당신에게 400쪽짜리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중에서 320쪽이 오로지 록과 인접 장르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면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사에 대한 10부작 웹 시리즈가 연재되는데, 8편이 오로지 록과 인접 장르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머지 장르들은 남은 80쪽 혹은 2편에 전부 몰아넣어져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책을 사겠는가? 당신은 그 글을 읽겠는가? 이건 너무 비약 같다고?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의 딱 절반을 오로지 모던 록으로, 60%를 록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모든 다른 장르들은 ‘나머지’로 몰아두고?

…나는 아니라고 본다. 21세기, 동시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려면, 록 이외의 장르들,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 흑인 음악과 지금까지 놀랍게 넓고 깊게 성장해온 아이돌 팝과 저류에서 악조건을 딛고 점차 탄탄해진 전자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본다. 20세기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분은 록과 포크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록/포크의 진행에 대한 서사로 지난 시대를 정리할 수 있다면, 21세기 현재는 그 바깥에서 전혀 다른 장르들이 생겨나고 발전하며 폭발하는 서사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록에 있어서도 다양한 분화와 발전이 있어왔지만, 21세기에는 20세기엔 전혀 없었거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장르들이 생겨나거나 관심의 중심으로 올라왔으며, 더 나아가 주류/비주류, 오버/언더, 수많은 경계를 넘어 영역을 넓혔다. 당장에 지금, 2018년의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흑인 음악과 아이돌 팝이 없으면 달리 무슨 할 이야기들이 있을까? 그런데 한대음의 경우에 ‘올해의 음반’들의 50%이 모던 록, 60%가 록, 80%가 록적 경향성을 띤다. 하지만 수상작이니까, 15장 밖에 없잖아? 그렇다면, 표본을 좀 더 넓혀보자.

 

이것은 15회까지 한국대중음악상의 ‘올해의 음반’ 후보작들이다. 맨 위에 굵게 표시된 음반들이 수상작들이다.

 

‘올해의 음반’ 후보작 및 수상작

 

15년의 역사 동안 한대음은 올해의 음반 후보로 5장 혹은 6장의 음반들을 올렸고 15회 현재까지 83장의 음반들이 ‘올해의 음반’ 후보작들이었다. 이 중에서 각 장르별로 후보작으로 오른 음반들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숫자는 장르별 수상작 수 및 퍼센테이지

 

이 수치를 서로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당장 ‘모던 록’ 부문만 해도 전체 후보작들의 37.4%를 차지한다. 이미지에서도 잘 느낄 수 있듯이 이는 1/3을 넘는 수치다. ‘올해의 음반’ 후보로 2번 이상 이름을 올린 음악인들은 3호선 버터플라이, 9와 숫자들, 검정치마, 브로콜리 너마저, 서울전자음악단, 스왈로우, 이승열, 코코어, 허클베리 핀, 단편선과 선원들, 정차식, 김사월, W, 나윤선으로 총 14명인데 이 중에서 9명의 음반들 중 적어도 하나는 모던 록 부문으로 들어갔다. 그 값은 64.2%. 조금 더 장르를 넓혀본다. 모던 록에 록과 포크, 헤비니스까지를 더해 넓은 의미의 ‘록’으로 범위를 확대한다면 총 51장, 전체의 64% 정도로, 이는 2/3에 가까운 수치다. 수상작들만의 경우에서는 60%가 넓은 의미에서 록이었으므로 오히려 그보다 더 많다. 팝 음반에서 록적 성향을 띤 이적이나 이승철, 이소라 같은 경우를 포함하자면 수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곧 한대음에서 ‘올해의 음반’을 결산하는 것에 있어서 록은 적어도 1/3, 많으면 2/3의 부피를 차지한다. 그 남은 자리에 (록적 성향이 적은) 팝, 댄스&일렉트로닉, 랩&힙합, 알앤비&소울, 재즈&크로스오버가 들어간다. 모던 록 음반이 3연속으로 올해의 음반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그 단어를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편향성’이라는 단어가 맴돈다. 애초부터 모던록/록 진영의 음반들이 후보로 많이 오르기 때문에 매우 당연하게도 더 많이 수상하는 셈이다. 간단한 논리다. 이것은, 내 생각에는, 한대음에 있어선 조금 (많이) 위험할 수도 있는 경향이다.

대체 왜? 일단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록의 거대한 부피에 가려진 다른 장르들을 찾아가본다. 내가 이전에 록을 좋아한 이후에 흑인 음악과 아이돌 팝, 전자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한대음에 대한 의문이 더 많아진 것은 이 장르들을 좋아하고 파게 된 이후부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종합 부분들의 후보작들에서 이 장르들을 찾기가 너무나 힘들었다는 점이다. 한대음 종합 부문의 후보작만 체크해 봐도 국내의 주요 록 음반들은 꽤 자세하게 찾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나머지 장르들에서는 그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이들 장르들의 넓이와 깊이가 록만큼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합 부문의 영역들을 돌아본다. 다행히도 ‘올해의 노래’의 경우에는 멀리는 조PD의 “친구여”부터 가깝게는 볼빨간사춘기의 “우주를 줄게”까지 팝 성향의 곡들 또한 수상을 많이 했고, ‘올해의 음악인’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나아 서울전자음악단-갤럭시 익스프레스-장기하와 얼굴들의 록 3연승 이후로는 팝(싸이, 선우정아, 이승환)에 이어 랩&힙합(딥플로우)과 알앤비&소울(박재범)에서도, 이제는 댄스&일렉트로닉(방탄소년단)에서도 수상자가 나왔다. 이것은 우선적으로는 다행이다. 하지만 ‘올해의 신인’ 쪽으로 가면 또 말이 달라진다.

 

‘올해의 신인’ 후보자 및 수상자

 

그러니까, 무려 8년 전의 윤하 이후로 모든 ‘올해의 신인’ 수상자들은 록밴드다(김사월X김해원 역시 록의 범주에 넣는다고 하면). 윤하까지도 데뷔 즈음에는 팝 록 성향이 짙었고, 윤하 이전의 수상자들 중에서도 록 성향이 전혀 아닌 음악인은 두번째 달 뿐이었다. 심지어 7회 차에선 두 개의 록 밴드가 상을 탔다. 곧 거의 모든 ‘올해의 신인’들이 장르적으로는 록이거나 록에 매우 가깝다. 물론 각 해마다 수상한 밴드들이 그 해 록 씬에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루키들이지만, 1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한국 대중음악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루키들이 모조리 밴드라는 것에는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난 8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장르들에서 얼마나 많은 신인과 루키들이 등장했던가. 그럼에도 그 수많은 장르의 신인들이 아닌 오로지 록 분야의 신인들만이 수상하는 경우를 보면, 특히 9회의 경우처럼 각기 다른 장르에서 쟁쟁한 후보들이 하나씩 올라왔음에도 록 부분에서 수상자가 나오는 것은 한대음이 오직 록만을 위해 다른 장르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는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아무리 그래도 예서나 우원재가, 비와이나 볼빨간 사춘기가,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나 우효가, 엑소나 자이언티가 그 해의 가장 뛰어난 신인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장르의 신인들이 록의 신인들에 비해서는 못 미친다는 이야기인가. 한대음에서 모든 길은 록으로 통하는 것인가. 흑인 음악 / 아이돌 팝 / 전자 음악에서 어떠한 새롭고 다양한 음악이 나오더라도, 한대음은 선정에서 그 모든 가능성들을 묻어버린다. 나는 그러므로 그 가능성들이 어떻게 묻히는지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특히 내가 계속해서 언급해온 흑인 음악 / 아이돌 팝 / 전자음악의 영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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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흑인 음악부터다. 다음의 목록부터 출발하면 좋을 거 같다.

 

역대 ‘올해의 음반’ 후보 중 랩&힙합 / 알앤비&소울 장르작

 

13장의 음반들이 있다. 여태까지 ‘올해의 음반’ 후보로 오른 흑인 음악(한대음에서는 랩&힙합 부문과 알앤비&소울 부문을 더했다) 음반들이다. 그 숫자는 13장이다. 이는 현재까지의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음반들의 수보다도 적다. 겨우 후보군에 오른 음반들이 말이다. 한국 흑인 음악의 15년을 단 13장의 음반들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2000년대 음반들이 7장, 2010년대 음반들이 6장인데, 한국 흑인음악의 동시대를 6장의 음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13장의 음반들 중에서 정말로 ‘올해의 음반’을 탄 음반은 2장이다. 그것도 모두 랩&힙합 부문의 음반들이고, 알앤비&소울 부문의 음반들이 여태까지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적은 없다. 수치를 향해 조금 더 들어가 보자. 그러니까, 이 문제는 이제 확률의 문제이다.

 

총 후보작 수 = 83
총 수상작 수 = 15
흑인 음악 후보작 수 = 13
흑인 음악 수상작 수 = 2

 

이 숫자들을 이용하면 다음과 같은 확률들을 계산할 수 있다. 누구나 계산기가 있고 산수를 배웠다면 할 수 있는 계산이다.

 

83장의 총 후보작 중 13장이 흑인 음악 후보작이다. = 15.6% (총 후보작 중 흑인 음악 후보작이 나올 확률)
15장의 총 수상작 중 2장이 흑인 음악 수상작이다. = 13.3% (총 수상작 중 흑인 음악 수상작이 나올 확률)
13장의 흑인 음악 후보작 중 2장이 흑인 음악 수상작이다. = 15.3% (흑인 음악 후보작 중 흑인 음악 수상작이 나올 확률)
83장의 총 후보작 중 2장이 흑인 음악 수상작이다. = 2.27% (총 후보작 중 흑인 음악 수상작이 나올 확률)

 

이 확률들을 이용해보면, 하나의 가정을 둘 수 있다. 그러니까 총 후보작 중에서 흑인 음악 후보작들이 나오며, 그 흑인 음악 후보작들 중에서 흑인 음악 수상작이 나올 확률은? 이것은 간단한 곱하기의 문제다. 총 후보작 중 흑인 음악 후보작이 나올 확률에, 그 흑인 음악 후보작 중 흑인 음악 수상작이 나올 확률을 곱하면 된다. 그러므로 15.6% X 15.3% = 2.3868% 이 값은 놀랍게도 총 후보작 중에서 흑인 음악 수상작이 나올 확률과 비슷하다.

똑같은 방식으로 83장의 후보작 중에서 31장의 모던 록 후보작들이 나오고, 그 모던 록 후보작 중에서 모던 록 수상작 7장이 나올 확률을 계산해보면… 먼저 앞의 확률은 언급했듯 37.3%. 뒤의 확률은 22.5%. 훨씬 더 높은 이 확률들을 곱하면… 8.3925%. 흑인 음악의 경우인 2.3868보다 4배 정도 높은 수치다. 영역을 넓은 의미에서의 록으로 포함하면 어떻게 될까? 83장의 후보작 중 51장이 넓은 의미의 ‘록’ 후보작들이고, 그 중에서 10장이 넓은 의미의 ‘록’ 부문 수상작이었다. 61.4%에 19.6%를 곱하면… 12.5%로 흑인 음악의 경우보다 6배나 높다. 그렇다면, 다른 장르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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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로지에 올라온 김윤하(그 스스로가 한대음의 오랜 선정위원이기도 했다)의 [아이돌 팬을 위한 한국대중음악상 공략집]은 아이돌 팝이 한대음에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기록으로까지 느껴질 만큼 절박하고 섬세한 글이다. 아이돌 팝이 어떻게 한대음에 ‘도전’해왔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아이돌 팝이 한대음에 ‘공략’되는지를 상세히 열거하는 글은 그만큼 아이돌 팝에 제대로 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는 한대음의 생태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다시 통계와 수치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여태까지 나온 아이돌 팝 음반 중에서 한대음의 장르 음반 부문에 후보로 오른 음반들이다. (태양이나 박재범, 지드래곤 등도 ‘아이돌 팝’으로 고려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장르적인 성격이 더 강하며 그 때문에 흑인 음악의 영역으로 올라왔기에 우선적으로는 제외했다)

 

‘최우수 팝 음반’ 후보 중 아이돌 팝 작품

 

15년의 긴 역사동안 20장도 안 되는 아이돌 팝 음반들이 한대음 장르 음반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마저도 15회에 5장이, 13회에 3장이 우르르 선정되었기에, 2012년까지로 시간을 한정하자면 9장 뿐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그 후보들 중에는 원더걸스로 시작한 2008년 이후의 소위 ‘2세대 아이돌 팝’들만이 존재하고, 그 이전에 분명히 있어왔던 수많은 아이돌 팝들(이를테면 보아나 동방신기 등)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더해 그 범위마저 SM 출신의 음악인들과 아이유/원더걸스 등으로 매우 좁게 국한되어 있다(물론 단일 노래 부문의 경우에는 조금 더 넓어지긴 하지만).

이 17장의 음반들 중에서 정말로 수상한 경우는 딱 3장이다. f(x)는 음반으로써는 거의 모든 활동을 커버하는 4장이나 후보로 올랐는데도 수상한 적이 없으며, 아이유 또한 3수만에 드디어 음반 부문에서 수상을 이뤄냈다. 아이유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83장의 ‘올해의 음반’ 후보작들 중에서 단 한 장의 아이돌 팝 음반이 있는데, 그게 바로 [Palette]다. 하지만 [Palette] 혹은 현재의 아이유는 여기에서 완전한 아이돌 팝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아이돌의 상큼함과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노련미까지 두루 갖춘”이나 “아이유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풍부한 감성의 노랫말로 다채롭게 표현하며 음악적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같은 표현들이 은밀하게 지시하듯 일종의 싱어송라이터로써의 진솔함, 곧 ‘진정성’을 가진 팝으로써 인정되고 판단된다. 곧, 싱어송라이터로써의 아이유가 아이돌 팝 음악인으로써 아이유(이를테면 “좋은 날”의 아이유라던지)보다 한대음에서 더 인정받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한대음에서는 훌륭한 아이돌 팝 음반을 아이돌 팝 자체로 평가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인정’하는 경우들이 빈번하다. 15회 올해의 음악인이 된 방탄소년단은 어떨까. ‘세계화’ 이전에도 방탄소년단은 지속적으로 음반 단위 아이돌 팝의 서사성과 완성도를 추구해왔고, 이른바 ‘학교 3부작’에서부터 [화양연화] 연작과 최근의 [WINGS]까지로 이를 탄탄히 실현해왔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과들은 빌보드 뮤직 어워드 등으로 전 세계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전까지는 한대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다가 올해에서야 “DNA”와 [Love Yourself 承 ‘Her’]가 후보로 선정되었다. “세계화”가 방탄소년단을 후보로 선정한 것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언급을 하긴 했지만, 한대음에서 방탄소년단을 어떻게든 ‘인정’하는 요소 중에서 하나를 차지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이는 아이돌 그룹 중에서는 원더걸스, 2NE1, 엑소에 이어 올해의 신인상 후보에 오른 트와이스가 대중적인 지지를 고르게 받은 아이돌 팝으로써의 완성도와 가치보다는 “평범한 기성세대들에겐 현실의 빈자리를 잠시나마 채워주는 한 줌의 미소”를 줬다는, 지극히 기성세대적인 시선으로만 국한된 이유로 평가를 받고 ‘인정’받게 된 경우에도, 아니면 아이돌 팝 중에서도 명반으로 손꼽히는 음반들을 여럿 만들었지만 음반 단위보다는 대표적인 수록곡들이 수상하는 식으로 ‘인정’된 f(x)의 경우에도 비슷할 것이다. 좋은 아이돌 팝 음반들은 좋은 아이돌 팝 음반으로써 대접을 받지 못하고, 김윤하가 지적하듯 “세대를 넘어 사랑 받는 히트곡을 불러”야 하고, 특히 “가능하다면 직접 곡을 써”서 “여러분의 아이돌을 멋진 싱어송라이터로 만들어” 진실됨, 진솔함, 진정성, 어쨌든 진(眞)자가 들어가는 진짜배기의 무언가를 만들어냈을 때에만 한대음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것도 간신히, 겨우겨우. 한대음에서 흑인 음악의 장소가 주목받지 못한다면, 아이돌 팝의 경우에는 그 장소조차도 마련되지 못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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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올해의 음반’ 후보 중 댄스&일렉트로닉 부문 장르작

 

한대음에서의 아이돌 팝에 대한 논의들은 전자음악과 연계해서 설명하면 더 좋을 것이다.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은 4회 때에 만들어졌고, 이전까지 전자음악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팝만이 ‘팝’의 영역에 있었다. 곧 한대음에서 4회까지는 ‘전자음악’이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곧 전자음악 혹은 그에 기초한 댄스 음악은 4회 이후부터 한대음에 겨우겨우 존재할 수 있던 것이다. 이 시기는 2000년대 중반 즈음으로 전자음악이 언더그라운드의 산발적인 시도에서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경계를 넘어가던 시점이었고, 그에 맞춰 동시대 아이돌 팝의 기틀을 꾸린 그룹들이 막 데뷔하던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즈음 만들어진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은 성장하기 시작한 두 장르에 대한 장소의 마련이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4회 이전에도 전자음악이나 댄스 음악은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한대음에서는 전혀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나마 마련되었다는 장소마저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한대음의 전체적인 장르 설정의 문제를 잠시 돌아서 경유해야 한다. 한대음의 오랜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각기 다른 장르 분야들이 생겨났는데, 댄스&일렉트로닉이 한대음의 초기 시절에 만들어진 것에 비해 2010년대에 들어와서 추가된 장르 분야들도 있다. 무려 포크와 헤비니스(현재 메탈&하드코어)인데, 이전까지의 주된 포크 음반들은 ‘모던 록’에, 헤비니스는 ‘록’에 포함되어왔다. 대표적인 예시가 아마 ‘모던 록’으로 분류된 포크 록 음반 [위험한 세계]나 ‘록’으로 분류된 스래쉬 메탈 음반 [The Paragon of Animals]일 텐데, 확실한 장르 판단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부재하는 것도 문제지만, 상이 10년도 넘어가는 시점에 와서야 포크와 헤비니스 분야가 신설되는 것에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그 필요성을 너무 늦게 알아차려버렸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으며, 그러한 포크와 헤비니스 장르 신설 작업들이 정말로, 하필 늦어도 너무 많이 늦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 이뤄져야 했는가 하는 의문 또한 든다. 21세기의 국내 대중음악을 통틀어서 생각해보면 포크와 헤비니스에서 좋은 음반들이 많이 나오던 때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헤비니스에게는 바세린, 삼청, 13스텝스, 폐허 등이 나란히 각자의 영역에서 두각을 보이던 2000년대 중반이 있었고, 포크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중반에 이아립, 스위트피, 루시드 폴, 재주소년, 김두수 등이 훌륭한 성과를 냈었다. 이 부문들이 만들어졌다면 한대음이 초창기에 막 정립되던 무렵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댄스&일렉트로닉 부문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상이 정립되고도 한참이 지난 10년 뒤라니, 너무 늦은 거 아닐까?

한편, 다시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으로 돌아간다. 한대음에서 전자음악에 대한 확연한 장르적인 이해가 부재하는 순간들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많은데, 지극히 소울과 훵크, 즉 흑인 음악에 기초했던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The Golden Age]가 밴드 극초기 때의 립싱크 컨셉으로 오인되어 ‘댄스’ 음반으로 분류된 사례나 비슷하게도 완연한 힙합에 기초했던 지드래곤의 [One Of A Kind]가 노래로써는 랩&힙합으로 분류되었지만 음반 자체는 댄스&일렉트로닉에 분류된 사례, 공중도덕의 [공중도덕]이 전자음과 노이즈에 기초한 ‘포크트로니카’ 음반을 선보였지만 댄스&일렉트로닉으로도, 심지어 포크로도 아닌 모던록으로 분류된 사례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또한 15회에 [Dystopian]으로 음반 부문에서 2회째 수상하게 된 이디오테잎의 [11111101]으로 수상했을 때 “일렉트로니카로 빚어낸 새 세대의 로큰롤”으로 평가받은 것 또한 음반의 전자 음악적인 부분보단 록적인 부분에 더욱 주목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도,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에서는 ‘일렉트로닉’보다 ‘댄스’에 더 많은 중점을 둔 음반들이 후보 선정과 수상에 있어서 주류를 이뤘고, 이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의 전자 음악 자체, 특히 비주류 음악인의 성과가 조명받지 못한 경우 또한 잦았다. 한편, 이러한 전자음악 소외의 과정에서 그 장소를 ‘빼앗은’ 것으로 오인된 아이돌 팝은 제대로 된 장소조차 마련 받지 못하며 이러저러한 다른 부문들을 난민처럼 오간다. 이 둘 사이의 안타까운 관계는 지금도 한대음에서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댄스&일렉트로닉 부문, 가끔씩은 알앤비 부문에 나타나던 아이돌 팝 후보들은 아주 최근에 들어와서야 팝 부문으로 대거 옮겨갔다. 이로써 다행히도 댄스&일렉트로닉 부문에는 주류적인 성향과는 다른 전자음악 음반들이 조금 더 많이 등장했지만, 또 반면 아이돌 팝이 팝 부문으로 몰려오면서 일반적인 팝이나 인디 팝이 자리를 잃는, 그야말로 자리가 부족해 이리저리 끼어 앉는 것 같은 상황이 매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팝 부문에서 14회에는 아이돌 팝 음반이 전무한 것에 비해 15회에는 아이돌 팝 음반만이 가득찬 게 그 혼란에 대한 약한 증명이 되지 않을까. 그에 비해 록을 기초로 한 장르들은 원래부터 모던 록과 록 둘로, 최근에는 포크와 헤비니스까지를 더해 넷으로 넓게 퍼져있다. 그렇기에 한대음의 장르적 편향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록에 많은 자리가, 그 외의 장르들에게는 적은 자리가 주어졌다. 처음부터 말이다. 어떻게 말하자면 일종의 불평등인 셈이다.

조금은 약한 증거의 사례들을 이어가자면, 현재 존재하는 장르명들 중에서 ‘&’가 들어가는 경우는 메탈&하드코어, 랩&힙합, 알앤비&소울, 댄스&일렉트로닉, 재즈&크로스오버인데, 이는 곧 록과 모던록, 팝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장르들이 &로써 묶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아이돌 팝을 중심으로 한 멜론 뮤직 어워드의 경우 록, 포크/블루스, ‘인디’, 랩/힙합, 알앤비/소울의 분류는 비슷하지만 댄스와 발라드를 여자/남자의 두 부문으로 나눴고 무려 트로트 부문이 존재한다. 한편 비슷한 성향의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의 경우 ‘보컬 퍼포먼스’는 여자 솔로, 남자 솔로, 그룹으로 또 ‘댄스 퍼포먼스’는 솔로, 여자 그룹, 남자 그룹으로 나뉘며 록은 ‘밴드 퍼포먼스’로, 랩/힙합은 ‘랩 퍼포먼스’로 들어간다. 물론 이 또한 한대음보다는 낫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돌 팝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기는 한다) 애매한 지표이긴 하지만, ‘댄스’와 ‘일렉트로닉’의 차이나 ‘소울’과 ‘알앤비’의 차이가 &로 묶일 정도로 넓지는 않다고 보는 입장에서 이러한 류의 장르 선정 또한 한대음의 장르적 편향성을 약하게나마 얼마 정도는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약한 증명들의 사례는 더욱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확실히 명시되기 시작한 장르별 선정위원들의 수를 세어보면 넓은 의미의 록(록+모던록+포크+헤비니스)의 선정위원들이 흑인 음악이나 댄스&일렉트로닉의 선정위원들보다 2배, 혹은 3배나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15회의 경우는 이렇다.

 

 

이렇게 아이돌 팝과 전자음악의 경우, 두 장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아이돌 팝이 댄스에 가까운 전자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오로지 댄스에만 국한되지 않거나 또한 아이돌 팝의 성향과는 완전히 다른 댄스(이를테면 하우스와 테크노, 그리고 일반적인 ‘EDM’ 등)를 선보이는 전자음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댄스&일렉트로닉’이라는 좁은 장르 선정의 한계 때문에 두 장르 모두가 마땅한 자리와 장소를 부여받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아이돌 팝’을 팝으로도, 댄스로도 봐 양쪽에 속하게 한다면 그 이외의 팝과 댄스, 전자음악의 자리들이 사라지며, 이 문제를 해결할라치면 ‘아이돌 팝’이 발딛고 설 장소가 위태로워진다.

아이돌 팝이 팝/댄스/전자 음악을 고루 수용하는 동시에 최근에는 알앤비와 힙합을 중심으로 한 흑인 음악을, 게다가 장르적으로는 오래 전의 FT아일랜드에서부터 최근의 데이식스까지 이어진 ‘아이돌 밴드’의 록과 심지어는 드림캐쳐의 ‘메탈’부터 [Modern Times]의 재즈까지도 수용하는 상황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온 지금, 장르의 정의나 선정에 대한 논의 없이 오로지 팝과 댄스&일렉트로닉으로 성기게 이뤄진 분류는 아이돌 팝이 대중적으로 오해되고 비평적으로 저평가 받는 동안에도 비평적인 장소를 전혀 마련 받지 못하고, 전자음악은 그 사이에서도 존재 자체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83장의 올해의 음반 후보 중 단 1장만이 아이돌 팝이며 그마저도 완전한 ‘아이돌 팝 음반’이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인정’받은 상황, 댄스&일렉트로닉에 속한 음반이 단 2장, ‘팝’으로 명명된 경우까지 어떻게 끌어오면 4장 가량 되지만 그 중에서 수상작은 당연하게도 전혀 없는 상황이 그 수치적인 증명이다. 이 모든 값들, 록에게 다분히 많은 지분을 내주는 대신 이외 장르들에게는 안 그대로 작은 파이를 더욱 더 작게 나누게 하는 그 값들은 곧바로 한대음의 록 편향성으로 이어진다. 그 길을 타고 죽 내려가고 또 내려가면, 결국 한대음의 전제, 기조, 밑바탕, 너무도 약하고 애매모호한 바닥에 닿을 수 있다. 내려가다가 잘못 밟으면 깨져버려 산산조각 날 것 같아 여태껏 아무도 내려가지 않은 그 바닥으로. 그곳으로 간다.

 

어떤 시상식의 동시대성

후보 선정부터 수상까지 한대음에 내재된 원리, 논리, 준거, 기준, 바탕, 그러니까 그 근본적인 전제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 전제를 바탕으로 한 원리와 기준은 대체 어떻게 작용하며, 무엇보다도 그 모든 바탕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지금까지 핥은 겉표면의 현상, 수치, 통계, 기표들은 단지 그 작용으로 산출된 값들에 불구할 뿐이다. 정말로 알아야할 것은 그 ‘기본 원리’ 자체이며, 나는 우선 겉으로 훤히 들어난 록 편향성에서 시작해 들어가보고자 한다. 장르적인 입장에서 한대음은 록에게 너무 많은 장소를 줬으며, 반면 그 이외의 장르(여기서는 흑인 음악, 아이돌 팝, 전자 음악의 경우)에는 너무 적은 장소가 부여되었다. 무엇이 한대음에게 록에게 그토록 많은 장소를 마련하게 했을까? 나는 우선, 한대음의 기본적인 목표로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한국 사회에서 대중음악을 예술적 창조물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상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우리는 대중음악의 다양한 예술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 대중음악 문화와 산업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 선정위원장 김창남 인사말

 

그러니까, ‘예술적’인 무언가, 곧 ‘음악성’의 문제. 나는 그것이 한대음의 수많은 문젯거리들을 하나로 모으는 키워드라고 본다. 인터넷 전역에 상업성 혹은 대중성보다는 ‘음악성’에 선정과 평가의 초점을 둔다는 설명이 돌아다니며, 선정위원장 김창남 또한 인사말에서 비슷한 뉘앙스의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음악성’을 추구하는 한대음의 경향은 한 쪽에서는 ‘한국인디음악상’으로 놀림 받으며 또 다른 쪽에서는 오히려 대중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냐고 욕을 먹고, (조금은 난데없지만) 신대철에게는 ‘한국평론가취향음악상’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한대음은 ‘음악성’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이야기하는 거 같지만, 과연 ‘음악성’이 정말로 비평적인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사실 평가의 기준은 모든 상들의 문제이긴 하지만, 대중음악을 단순히 ‘음악성’으로 판단하는 건 문학 작품을 ‘문학성’으로 판단하거나 예술 작품을 ‘예술성’으로 판단하고 사람을 ‘인성’으로 판단하는 것만큼 모호하고 애매한 기준이다. 물론 개인의 경우라면, 판단 기준은 개인의 취향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상의 경우에는, 단순한 취향 하나가 아니다. 무수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무수하게 다른 방식으로 모인 집합체이며, 그러므로 무한한 가능성의 취향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만나는 셈이다. 그 무한한 가짓수 사이에서 단 하나를 선정하는 것이 상이다. 상이라는 비평의 방식이다.

그러한 만큼 선정, 평가, 심사, 수상의 기준은 최대한 엄밀하고 정확하게 세워져야 한다. 무한한 취향의 조합에서 확실한 ‘단 하나’를 고르기 위해선 그 어떤 경우보다 더욱 튼튼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완벽한 엄격정밀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최대한 거기까지로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음반/노래/음악인이 다른 음반/노래/음악인들보다 뛰어나거나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의 근거가, 합리적 바탕과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왜 하필 이 작품인가? 왜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평가했는가? 개인의 측면에서 ‘취향’은 그에 대한 참 쉽고 좋은 판단 기준이지만, 상은 다르다. 단순히 취향으로만은 결정할 수 없으며 ‘음악성’마저도 그렇다. ‘음악성’만큼 애매한 기준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보다 더 확실한, 마땅한 기준이 존재해야 한다. 한대음에 부재한다고 느껴지는 것이 바로 확실한 기준이다. 어떠한 선정과 수상이 발 딛고 있는 땅 자체가 그렇게 단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결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론 그 ‘확실한 기준’은 비평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 조건 중 하나이며, 그러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취향’이나 ‘음악성’ 같은 단어들이 튀어나오며, 확실하고 명확하다고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관찰의 깊이와 관찰을 수행하는 음악 언어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좋은 음악이 된다. 음반은 시선의 깊이와 소리의 깊이를 일치시키며 조용히 완성되었다. 고백하고 탄식하고 보듬고 위로하는 음악이 얼마나 단순하면서 애틋하고 깊고 넓은지. 아득하고 아스라해서 한없이 간절해지는 마음이 펼쳐지는 동안 내내 일렁이게 된다. 영혼만큼 진실하고, 삶만큼 아름다운 음악은 묵묵히 순간에서 영원으로 나아가고 우리는 말을 잊은 채 듣는다.”

“여기에 노장에 대한 예우 같은 의미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다. 음악 그 자체만으로 음반은 올해를 가장 빛낸 앨범이다. 여전히 깊은 노랫말이 있고, 20년 세월을 담은 음악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쓸쓸함과 허무함 모두가 배어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는 놀라운 사운드 스케이프가 있다. 넓고 높고 아련하게 펼쳐지는 소리의 풍경에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가 더해지는 순간 세계는 그대로 더없이 아름답고 치열하게 완성된다. 앨범 제목과 같은 이 거목 같은 예술가를 우리는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큰 폭발력을 보여 준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옥중에서 발표했다는 논란과 화제성에 기댄 결과는 물론 아니다. 지방 소도시 출신의 뛰어난 재능의 음악인이 수면에 떠오르면서 겪었던 개인사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앨범은 절정의 퍼포먼스, 탄탄한 프로덕션, 그리고 견고한 구성미를 통해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 것 음악인이 펼쳐놓는 인간적 고뇌와 번민, 분노 그리고 약간의 행복감은 동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청춘에게 무엇보다 강력하고 따스한 위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앨범을 만들었고, 음반은 오랫동안 그의 재능을 알던 이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바로 그것이다.”

 

최근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음반들에서 음반과 음악인의 이름을 제외한 이 설명들은 과연 이 음악인들의 이 음반들이 그 해 최고의 음반이라는 기준을 제시했거나, 설득을 할 수 있는가. 물론 ‘선정의 변’이 항상 선정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weiv]의 경우에도 비슷한 류의 ‘연말 결산’이 “단 하나”의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기보다는 마찬가지로 ‘선정의 변’에 머무르기도 하며, 생각해보면 이는 상 혹은 ‘리스트’로써의 비평이 갖고 있는 문제점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설명들만으로 이 음반들이 그 해 다른 음반들과는 다르게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한 찬사 혹은 긍정적인 평가가 아닌가. 비평가는 애호가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취향과 기호가 있어도 그 취향과 기호에 대한 마땅한, 적어도 거기에 속해있지 않은 타인을 어느 정도는 이해시키고 설득할 수 있는 정도의 논리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아무리 주관성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더라도 비평은 어떻게든 그러한 합리성에 다가가는 것을 추구해야 하며, 이는 당연하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비평가는 그를 해내야 하고, 다수의 비평가가 모여 수상자를 고른다고 하면, 당연히 이를 더욱 치밀하게 해내야 한다. 그 수많은 음반들 중에서 호명조차 되지 않고 거론도 되지 않는 무수한 음반들 중에서 ‘단 하나’를 뽑는 일이다. 그 ‘단 하나’를 설명해야 하고 설득해야 한다. 왜 이 음반은 그 해의 ‘단 하나’인가?

위의 설명들은 그 ‘단 하나’가 ‘다른 하나’들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제시하기보다는 그냥 그 음반이 훌륭한 이유만을 제시한다. 곧 ‘단 하나’라고 판단하는 기준을 찾기 힘들고, 그나마 그 음반이 훌륭한 이유도 어떠한 ‘음악성’ 만으로 애매모호하게 판단되며 그 ‘음악성’ 또한 종종 ‘진정성’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듯싶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음악성’ 혹은 ‘진정성’은 록 중심의 담론들에서 이야기하는 ‘진정성’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진짜 악기를 진짜로 다뤄야 하고, 진지하거나 진솔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그러한 ‘진정성’. 지극히 록적인 진정성. 하지만 진짜 악기가 아닌 기계음에도, 알앤비 보컬과 랩의 노랫말에도, 산업적으로 구성된 팝에도, ‘진정성’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한대음은 지극히 록적인 ‘진정성’을 ‘음악성’과 등치시킨다. 애초에 한대음이라는 판도 자체가 록으로 기울여져있기 때문에, 이런 록적인 ‘진정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성’이라는 기준은 그 시작부터 이미 기울여진 데에다가 약하고, 무엇보다도 합리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만들어놓은 기준 바깥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합리적이지 않은 게 중요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설득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러므로 나는 한대음에서 말하는 그 모든 기준들이 ‘취향’의 다른 이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한대음에서 자주 장르 부문의 후보로 오르거나 수상을 자주 하는 음악인들- 로다운30, 화지, 나윤선, 9와 숫자들, f(x), 김사월, 정차식, 아시안 체어샷, 아이유, 이디오테잎, MC메타, 박근홍 등등(이 목록은 더욱 길다)의 경우 그들이 그렇게 빈번하게 후보에 오르는 이유를 ‘음악성’ 혹은 ‘취향’이라는 표현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냥 좋다. 그렇기에 훌륭하고 음악성도 있고 중요하다. 그래서 후보고 수상자다.’라는 논리의 전개는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좋음의 이유는 어디 있는가. 무엇이 이들을 좋게 하는가. 한대음은 그 모든 ‘좋음’의 근거와 기준들을 설득이 가능하도록 단단하게 잡아놓았는가? ‘음악성’ 혹은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확실한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한대음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음악성’들이 의미 부여를 하거나 판단 기준이 되지 않고 애매모호한 기표로써 사라질 때, 한대음이 수상자들을 결정하는 진짜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 기준은 단순히 선정위원들의 ‘취향’을 어느 정도 합쳐놓고 일치점을 대강 찾아놓은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 기준은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없다. 마땅하고 합리적인 기준으로써 실격이다. 무엇이 그나마 ‘음악성’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한대음에 부재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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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음의 록 편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특히 흑인음악의 장소가 부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는 동시대성이라는 (음악성과 마찬가지로 애매하긴 하지만) 또 다른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동시대성. 아감벤을 따라가자면 이는 오히려 ‘시대착오’와 어울리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동시대성이란 단어 그대로, 지금-여기라는 현상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본다. 동시대성이란 (대중음악) 장르에 있어서 지금-여기에 나타나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며 비평가는 그것을 가장 첨단의 지점에서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물론 이것이 “대세를 따르라!”는 1차원적인 명령이 전혀 아니다. 지금-여기에 나타나 지금-여기 자체가 되는 현상들을 따라잡는 것뿐만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며 결론적으로는, 비평하는 것이 비평가의 일이다.

그렇게 알맞은 짝의 예시는 아니지만, 문단에서는 세월호 사건과 여성주의 담론들 이후 윤리, 타자, 미학, 공감, 정치적 올바름 등 수많은 동시대적인 개념과 주제들이 작품으로서도 생산되었고, 비평도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통과하는 비평가의 입장에서 이 동시대적인 주제들을 탐구하고 사유하는 시도들이 나타나며 문단 전체를 채우고 있다. 곧 이 주제들은 문단이 가장 첨예하게 추구하고 있는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물론 비평이 언제나 동시대에만 접근해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동시대에 대해 가장 자세히 분석하고 해석하며 그것들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게 비평의 역할이다. 그런 입장에서,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장르적 편향성과 그에 의한 기형적인 형태는 상이 동시대성을 잃고 있다는, 시대착오성의 증거다. 동시대성과 시대착오성. 조금 더 나아가 본다.

[느리고 점진적인 : 록의 죽음에 대해]에서 정구원은 시대착오적인 록 순수주의자들마저 부정할 수 없는 “록은 쇠퇴했다”는 명제에 대해 상업성과 비평, 특히 동시대의 측면으로 접근한다. 그가 말하는 “록 음악이 그 자신의 역사상 최초로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유리된 시대”가 바로 지금-여기의 동시대다. 2010년대적인 동시대성이 흑인 음악으로서 맹렬하게 표출되는 반면, 대중적인 관심과 비평적인 접근 모두에서 유리된 록이 지금-여기에서 가고 있는 길은 “자신의 역사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가두기” 뿐이다. 이제는 50년이나 옛날이 되어버린 ‘록의 황금기’인 60년대에서부터 70~80년대까지 어느 정도의 상업적/비평적/동시대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록은 이후의 다른 음악들(이 경우에는, 뛰어난 흑인 음악)에게 그 헤게모니를 넘겨줬으며, 록의 쇠퇴와 흑인 음악의 폭발은 함께 지금-여기 대중음악의 동시대성으로써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영미권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반복하는데, 나는 지금 ‘대세를 따르라!’는 1차원적인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음반 판매량이나 음원 스트리밍은 (아이돌 팬층의 존재를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록보다도 수많은 종류의 팝이 최상단에 위치하며, 동시대 힙합과 알앤비를 중심으로 한 흑인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음반 판매량([The Anecdote] 초판 2만장의 빠른 완판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과 방송([쇼미더머니]와 [고등래퍼]를 중심으로 한)과 스트리밍(물론 [쇼미]와 [고등래퍼]의 음원들뿐만이 아니다) 등 다양한 지점에서 증명된다. 비평적으로는 2010년대로 들어오며 [아이돌로지]나 [힙합LE], [힙합플레이야] 등의 웹진들의 출현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한대음 자체도 2010년과 2015년에 흑인 음악 음반 두 장을 올해의 음반 후보에 올렸다. (다음은 2020년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2017년부터 한국힙합어워즈가 [힙합LE]와 [힙합플레이야]의 합작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잠시 이야기해야겠다.

한국힙합어워즈는 2017년에 제1회로 시작되어 올해 2회를 맞았다. 1회 차의 어워즈 소개에서 “90년대 말, 장르 음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약 20여 년의 세월을 쌓아 올리며 한국 힙합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현재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왔습니다.”는 회고적인 시작은 “한국 힙합 어워즈는 지금의 힙합 씬을 일궈내기 위해 치열한 열정을 기한 아티스트와 한결같이 이 문화를 지지해온 팬들에 대한 헌사가 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다짐으로 이어진다. 상은 한국의 흑인 음악이 20년 전부터 동시대까지, 불모에서 번창까지 이어진 시점에 서서 “한국 힙합 음악계가 새롭게 맞이할 앞으로의 20년”을 바라본다.

나는 왜인지 이 발문이 여태껏 비평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해온 흑인 음악에 대한 어떠한 동시대적인 장소를 기꺼이 마련해주겠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한대음이 넓은 의미의 ‘록’을 록/모던 록/헤비니스/포크까지로 나누고 흑인 음악을 단순히 랩&힙합과 알앤비&소울로 나눈 것에서 시작해, 여태까지의 불균형과 편향을 생각해보면, 한국힙합어워즈의 경우는 고무적이다. 장르를 위한 장소를 좀 더 넓고 좀 더 확실하게 만들어준다. 올해의 음반과 노래는 힙합과 알앤비 양쪽 분야 모두에게 동등하게 수여되고(한대음에서 알앤비가 힙합만큼이라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외에 흑인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프로듀서와 콜라보레이션에도 마찬가지의 영역이 주어진다(여담이지만 ‘과소평가된 음반’ 또한 흥미롭다). 힙합에서는 [작은 것들의 신]과 [Punch Drunk Love]가, 알앤비에서는 [Everything You Wanted]와 [나무]가 각각 ‘올해의 음반’이 되었다. 한국힙합어워즈는 이외에도 박재범을 2회 연속으로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하는 이례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스스로 정점에 이른 순간, 다음으로 개인의 영광만이 아닌 더 폭넓은 패밀리의 탄생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설득력 강한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며, TFO의 [ㅂㅂ]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앨범은 힙스터가 아니어도, 음악적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나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설득력 있는 동시에 재미있고 도발적이기까지도 한 선정 이유를 드러낸다. 이러한 한국힙합어워즈의 리스트는 ‘앞으로의 20년’까지는 불분명해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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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은 비평이 비평-권력을 취하고 행할 수 있는, 아예 비평-권력 자체가 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 다시 잠시 다른 영역을 인용하자면,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비평-권력의 행위가 [채식주의자]를 포함한 한강의 소설들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판매량)을 가져다 줬으며, 칸/베를린/베니스 영화제라는 비평-권력이 ‘한국 영화가 3대 영화제를 수상했다!’ 같은 낯 뜨거운 문구들을 불러내는가를 생각해보라. 집약된 비평-권력이 어떤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은 비평-권력이 모이고 거주하는 장소이며, 이런 비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권력을 행사하는 무기다. ‘무기’라는 조금 지나칠 수도 있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비평-권력은 여기서 긍정적인 방향(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동시대성을 확보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용되거나 오남용될 가능성 또한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대종상이 왜 욕을 먹으며, BIFF 또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 왜 아무도 이제는 이상 문학상에 열광하지 않고, 또 미당 문학상은 왜 수많은 비판들을 듣는가. 한편으로는 [문라이트]와 [셰이프 오브 워터]에 작품상을 주며 동시대의 마이너리티성에 대해 직시한 아카데미상이 비평-권력을 사용하는 긍정적인 방식이나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문학과지성사 문지문학상의 최근 수상작들이 문학적인 동시대성을 비평-권력으로써 사유하는 방식도 존재한다.

한대음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유일무이’하게 ‘음악성’을 가지고 심사한다는 상이 바로 한대음 아닌가. 대중음악 내에서의 비평-권력도, 뚜렷한 시스템도 모두 폐허로써 (비)존재하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그 비평-권력들을 모으고 행사하는 ‘유일무이’하다는 존재가 다름 아닌 한대음이다. 90년대의 연구자이자 비평가였던 김창남 교수부터 라디오 PD, 신문기자, 대학 교수, 음원 싸이트 기획자, 웹진 편집장과 필진까지 수많은 영역에서의 ‘대중음악 비평가’(그들이 왜 이 호칭을 쓰지 않는지는 의문이지만)들이 모이고 모여 선정위원을 구성하고, 이 땅에 미약하게 존재하는 수많은 대중음악 비평-권력들은 한국대중음악상이라는 자리에 하나로 수렴되고, 상은 비평에 있어서 나름의 절대적인 듯한 위치에 오른다. 당장에 나부터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한대음을 ‘정전’으로 뒀으며 이는 비단 예전의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대음은 어쩔 수 없이 지금-여기, 동시대 대중음악 비평의 핵이 되었다. 그 핵이 애매모호한 ‘음악성’의 기준과 록 편향적인 시대착오성에 곪아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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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llboard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딘가에서 많이 들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특정 장르에 대한 과도한 편향성과 그래서 빚어지는 비평-권력의 동시대성에 대한 의문… 한대음이 한국의 무엇을 표방했더라? 그래, 그래미. 그래미 어워즈(Grammy Awards). 그래미로 가본다. 사실 이전부터 그래미의 ‘Album of the Year’ 수상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러저러한 논란들이 있어왔지만, 2010년대로 들어오며 더욱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비판은 한대음에 대한 나의 의문과 궤를 함께 한다. 록(혹은 일반적인 팝까지 포함한)으로 대표되는 주류적인 장르들에 대한 과한 편향과 그 이외의 장르들, 특히 흑인 음악에 대한 과한 저평가가 그 비판의 핵심이다.

한대음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해볼까. 2003년부터 그래미 어워즈는 노라 존스(Norah Jones), 아웃캐스트(Outkast), 레이 찰스(Ray Charles), U2, 딕시 칙스(Dixie Chicks), 허비 핸콕(Herbie Hancock), 로버트 플랜트와 앨리슨 크라우스(Robert Plant & Alison Krauss),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아델(Adele), 멈포드 앤 선즈(Mumford & Sons), 다프트 펑크(Daft Punk), 벡(Beck), (또) 테일러 스위프트, (또) 아델, 브루노 마스(Bruno Mars)의 음반에 올해의 음반 상을 줬다. 이 중에서 직접적인 흑인 음악에 속하는 음악인들은 아웃캐스트와 레이 찰스, 브루노 마스 셋 뿐이며, 허비 핸콕의 재즈나 다프트 펑크의 디스코 성향을 더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U2, 딕시 칙스, 로버트 플랜트와 앨리슨 크라우스, 아케이드 파이어, 멈포드 앤 선즈, 벡의 록/컨트리 음악과 노라 존스, 테일러 스위프트, 아델의 팝 음악이 나머지 큰 부분들을 차지한다. 당연하게도 댄스 음악이나 전자 음악(물론 다프트 펑크도 있긴 하지만)이 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현재 동시대적인 흑인 음악이 작품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붐비다 못해 분출하는 중심지인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음악상이 놀랍게도 동시대를 달구는 장르의 음반과 음악인에 대해 그렇게 큰 비평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논란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더욱 더 성장하며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흑인 음악에 대한 그 어떤 관심도 그래미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5년에 ‘올해의 음반’이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To Pimp A Butterfly]가 아닌 테일러 스위프트의 [1989]에게 수여되어 논란을 부른 건 이미 유명하고, 비욘세(Beyoncé)의 [BEYONCÉ]와 [Lemonade],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의 [Channel Orange], 카녜 웨스트(Kanye West)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또 2017년에는 제이지(Jay-Z)의 [4:44]까지 수많은 음반들이 ‘올해의 음반’에 선정되지 못했다.

흑인 음악에 대한 장르-편향적인 무시에 가까운 선정은 그래미가 더 이상 동시대성을 갖고 있지 못하며 비평-권력을 그에 맞춰 새롭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장에 보수적인 성향의 <롤링 스톤(Rolling Stone)>마저 [To Pimp A Butterfly]와 [Lemonade] 등에 ‘올해의 음반’을 수여했으며, <피치포크(Pitchfork)>의 경우에는 켄드릭 라마(2015, 2017)나 칸예 웨스트(2010)는 물론 런 더 쥬얼스(2014)나 솔란지(2016)의 경우까지, <패즈 앤 잡(Pazz & Jop)>에는 칸예 웨스트(2010, 2013)와 켄드릭 라마(2015, 2017)는 물론 디 안젤로(D’ Angelo) (2014)와 프랭크 오션(2012)이 있기도 하다. 그래미에서 눈짓도 주지 않은 수많은 흑인 음악들이 ‘올해의 음반’으로서 평가된 모습들은 이외에도 많다. 그래미에서 동시대성에 대한 새로운 사유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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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한대음이 한국의 그래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시대착오성과 편향성, 노쇠화까지 따라가는 것일까? 사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 모든 현상들이, 여성주의와 타자에 대한 논의부터 장르적 편향과 동시대성의 부족까지 오가는 그 모든 문제들이 끔찍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했듯 국내 대중음악 비평의 시스템과 장소, (좋은 방향의) 비평-권력이 부재하는 현재에서 한대음은 좋든 싫든 가장 거대한 비평적 행사이자 정점이자 주류적 비평가들의 집합체로 지금-여기에서 그나마 미약하게라도 그 존재를 입증하는 대중음악 비평의 한 형태다. 그렇게 15년 간 작용해온 한대음이라는 시스템? 현상? 장소? 어쨌든 그 무언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삐걱거려 왔고, 이는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미 기울기는 회복할 수 없고, 회복하려고 해도 이미 기울어진 만큼 다시 돌아와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몸짓들이다. 그것이 이 땅의 “유일무이하게 음악성으로” 승부하는 상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하고 대단한 상이며 ‘우리’ 비평가들이 수호해야만 한다는 류의 이상한 신념과 믿음이 (적어도 X세대 이전의 주류-기성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나 ‘불평불만’들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주목되지 못한 장소의 흑인 음악, 마련되지 못한 장소의 아이돌 팝, 인식되지 못한 장소의 전자 음악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언급되었던 페미니즘을 둘러싼 온갖 문제들, 오요(OYO)가 [한국대중음악상에 대중다양성을 묻는다]에서 지적한 다양성 문제에 대한 접근법, ‘한국인디음악상’과 ‘한국평론가취향음악상’이라는 평가 기준에 대한 비아냥 사이에서 한대음은 길을 잃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누구도 길을 잃었다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여기에서부터 이렇게 가면 된다고,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참 잘 가고 있다고 말한다.

한대음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록 중심의 시상식이 될 것이다. 이 문장에 너무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길게 해본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한대음은 올해의 음반 후보로 절대다수의 록 음반과 간간히 팝 음반이 오를 것이며, 아주아주 훌륭하게 평가 받지 않는 이상 흑인 음악, 아이돌 팝, 전자음악이 오를 리는 없을 것이다. 수상은 물론 높은 확률로 그 해의 어느 정도 훌륭한 록 계열의 음반이 탈 것이며 그 음반은 또 높은 확률로 모던 록 부문의 음반이다. 올해의 노래는 아마 그 해를 빛낸 적절하게 대중적인 노래 중 하나일 것이며 올해의 음반인은 어쩌면 또 새로운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예상하건데 올해의 신인은 거의 반드시 록 밴드다. 넓디 넓은 헤비니스/모던 록/록/포크 분야에서 한대음이 사랑하기 그지없는 록 음악인들의 음반이 그보다 좀 더 대담하거나 새롭거나 어쩌면 더 훌륭한 다른 음반들을 제치고 후보에 오르고 수상할 것이며 흑인 음악은 장르 부문으로 물러나고, 아이돌 팝과 전자음악은 여전히 좁은 자리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고생할 것이며, 글에서 (내가 장르에 대해서 잘 모르는지라) 언급하지 못했던 재즈와 크로스오버도 장르 부문에서 조용히 지낼 것이다. 공로상은 20세기의 록/포크 음악인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으며 특별상은, 뭐, 알 턱이 없으니 넘어간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상은 록으로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흑인 음악, 아이돌 팝, 전자음악의 장소는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선정의 경향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정도는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늙었을 것이다. 설득력 있는 이유 대신에 애매모호한 수사들이 기준을 흐릴 것이다. 여성주의적 문제 제기나 한대음 자체의 비평-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와도 상은 묵묵부답이거나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대중음악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게 된다면 할 말은 단 하나 뿐이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감히!’의 태도를 가진 수많은 반응들(나이도 어린 게! 글도 적은 게! 글도 잘 못 쓰는 게! 잘 알지도 못하는 게!)이 나올 것이 뻔하며 나는 이 글에서도 그런 반응이 꽤(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쏟아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 때 록덕후였고, 한대음-키드였던 나는 이제 더 이상 록덕후만도, 아니고 한대음을 절대적인 정전으로써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애초에 한대음이 ‘절대적’이었던적이 있었는가. 아델이 그래미 트로피를 비욘세에게 쪼개주는 것처럼 이랑도 트로피를 경매에 부친다.

솔직히, 지금-여기의 나는 이제 ‘유일무이’와 ‘음악성’이라는 단어 모두에 의문이 든다. 한대음은 ‘유일무이’하지도 않으며, ‘음악성’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록쪽으로 드리워진 기울기가 만든 그림자에 수많은 다른 장르들이 가려졌고, 그러한 모양새로 상은 점점 침몰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시상식은 바뀌어야 한다. 전복되어야 한다. 내부적 시스템부터 외부로 이어진 연결고리들까지,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사유되고 새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미 이어져 온 것들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만, 모든 걸 해체하고 전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끄럽고 힘들다. 지금 그 어렵고 시끄럽고 힘든 과정이 조용하기 그지없는 대중음악 비평의 모든 곳에 존재해야 한다. 한대음도 마찬가지다. 비평은 원래 어렵고 시끄럽고 힘든 과정이다. 지금-여기에 그 어렵고 시끄럽고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 장르와 동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와 논쟁이 존재해야지만 한대음은 뿌리 깊게 이어져온 록 편향성과 노쇠화, 시대착오성과 도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는 어쩌면 한대음을 둘러싼 조롱과 비아냥거림, 무관심과도 멀어져 조금 더 동시대적인 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만약에 그 때가 찾아오면 한국의 참으로 미약한 대중음악 비평-권력은 조금 더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이며 비평의 장소도 그에 맞춰 조금 더 새로워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때는 이미 한대음의 역사에서 찾아왔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대음은 그 찾아왔었을 변화가 찾아오도록 행동하지 않았다.

지금-여기의 시점에서는 우선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문제이다. 당연히 문제이다. 왜 문제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문제가 무서운가? 문제가 너무 어렵고 시끄럽고 힘든 고민의 과정을 가져올 것 같은가? 그러라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 아닌가? 문제는 풀어내야 한다. 기어이 풀어내야 다음으로 조금이나마 넘어갈 수 있다. 여기 문제가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아니 이 경우에는 ‘우리’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풀려면 최대한의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유가 필요하다. 한대음이라는 문제. 대중음악 비평에서 가장 큰 문제가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우리가 문제풀이 실력을 잊어버리기 전에. 문제가 거대해져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가 더 이상 풀 수조차 없는 문제를 마주하기 전에. 문제가 재앙이 아닌 문제로써 남아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다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문제를 풀어야할 뿐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 나원영 [email protected]

 

5 Responses

  1. 소년의 노래

    아 정말 너무나도 날카롭고 정확한 지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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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ㅇㅇ

    수치로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래프를 똑바로 그려야되는 거 아닌가… 저 원 그래프 개판으로 그려진 거 보고 신뢰도 급 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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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영상

    이즘이나 웨이브도 똑같음. 흑인음악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미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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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퓨퓨

    수상작에서 록이 점점 줄고 있는게 대놓고 보이는구만 뭘..역대통계 들먹이는건 뭐니??그리고 말이 록이지 신해경도 록으로 분류되는 마당에.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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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심키타

    한대음이 이정도로 길고 난해하게 까일만큼 영향력이 있는 시상식인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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