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도둑(이제는 공중도덕이 아니다)의 새 앨범 [무너지기]에서는 많은 것들이 무너진다. 나는 방금 ‘무너진다(Crumbling)’고 썼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무너진(Crumbled)’ 음악이 결코 아니다. 이미 무너진 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하나의 객체이다. 무언가 무너졌다면, 그 자리에는 잔해, 잿더미, 소음…처럼 다른 어떤 것만이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무너지고 있는(-ing) 것은 역설적으로 무너지기 이전의 상태에 의존한다. 우리는 무너지고 있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대상의 과거 모습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유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자는 새로운 이름(혹은 고유 명사)이고 후자는 새로운 술어(혹은 속성)이다.

[무너지기]는 무너진 것은 아니다. 공중도둑의 음악은,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갖는 많은 이들의 말처럼 무척 독특하고 실험적이긴 하지만, 기존의 대중음악이 정초해왔던 모든 규칙과 문법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홀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너지기]는 이미 무너’진’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상태에서 박제된 혹은 무너’지고’ ‘있는’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오히려 공중도둑은 이전까지의 대중음악이 공고히 해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찰나를 자신의 음악 속에 전시함으로써, 영리하게 새로운 무언가와 그렇지 않은 음악의 경계 위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물을 것이다. 도대체 [무너지기]에서는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언어다. 표층적으로 [무너지기]의 언어는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만 같다. 앨범 전체에 걸쳐, 썸머 소울(Summer Soul)과 공중도둑은 혼자 혹은 함께 노래한다(이것이 음악임을 감안한다면, 이를 두 사람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두 보컬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거나 노래한다. 이는 [무너지기]에 끊임없이 노래되고 말해지는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너지기]에서 언어는 존재론적 층위에서만큼은 분명하게 인식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의미론적 층위에서도 [무너지기]의 언어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가? 이펙터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 듯한 느낌을 주는 보컬의 질감은 언어의 의미 전달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킨다. 게다가 썸머 소울 특유의 뭉개는 발음은 가사를 보지 않고서는 어떠한 말들이 노래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든다. 즉, [무너지기]에서의 언어는 존재론적 층위가 아니라 특정한 메시지나 서사를 구현하고 전달하려는 의미론적 층위에서 무너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언어가 의미론적 층위에서 무너지고 있음으로 인해 언어의 존재론적 층위가 부각된다. 40분 남짓의 앨범에는 말이 아닌 목소리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층위만이 부각되어 남은 언어는 말보다는 (목)소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을 옮겨 적는다. “모든 생명체 중 인간만이 말을 갖고 있다. 목소리란 실상 단지 기쁨과 고통을 나타내는 데에만 쓰이며, 이런 점에서는 다른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이들도 본능적으로 기쁨과 고통의 감정을 가지며, 이를 서로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또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데 쓰인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지각 및 기타 도덕적인 감각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가정과 도시를 만들기 때문이다.”1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 상태의 언어가 소리의 위계 또한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음악에서, 특히 대중음악에서 언어는 의미론적 층위에서의 가능성 덕분에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언어를 음악적으로 표상하는) 보컬은 대중음악에서 기타나 드럼 혹은 신시사이저와 같은 악기들처럼 하나의 소리인 동시에, 직접적으로 어떤 메시지나 서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다. 그러나 [무너지기]에서 언어는 특권의 근간이었던 의미론적 층위에서 무너지고 있음으로 인해 무력해지고, 이내 다른 악기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동시에 공중도둑은 [무너지기]에서 흔히 로파이(Lo-Fi)라고 일컫는 스타일에 기반하여, 음악에서 선별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음악적) 소리’가 아닌 ‘소음’으로 여겨지며 배제되어 왔던 노이즈나 잔향 같은 요소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그것들을 비-음악적 소리에서 음악적 소리와 비슷한 위치로 격상시킨다. 물론 ‘익스페리멘탈(Experimental)’과 같은 접두어가 붙는 실험적인 세부 장르의 음악이나 즉흥 음악 혹은 노이즈 음악과 같은 몇몇 영역에서는 이러한 시도들을 일찍이 해왔지만, 팝이나 포크에 가까운 음악에서 이렇게 소리의 위계가 무너지는 풍경을 담아내는 일은 2018년의 국내에서는 흔치 않다.

이처럼 공중도둑의 새 앨범 [무너지기]에서는 많은 것들이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무너’진’ 음악이 아니라 무너’지는’ 음악이다. 어쩌면 무너진 음악은 음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무너짐 이후의 음악은, 우리가 사유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음악의 범주 바깥의 무언가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있던 모든 음악적 규칙들과 문법들을 벗어난 것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공중도둑을, 겉보기에는 본능적이고 제멋대로 같지만, 사실은 무척 영리하고 전략적인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대중음악에 대해 갖고 있던 규칙들이 무너지는 장면을 재현하고 전시함으로써, 전례 없던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하지만, 사실은 (김세철의 말처럼) 누구보다 팝을 위시한 무너지기 이전의 대중음악을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공중도둑이 정말로 ‘무너진’ 음악을 바랐다면, 그가 마치 외줄 타기를 하듯 아주 미묘하게 붙잡고 있는 것들(언어나 소리 등등)을 다 놓아버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무너지기]는 무너지기 전의 (대중)음악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그것이 선제 되지 않으면 공중도둑의 음악은 그저 이상하고 어색한 무언가로 전락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무너지기]는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둘러싼 진술들을 향한다. 새로움, 전위, 전복, 실험 따위의 비평적 찬사가 모두 무너지고 있음을 (어쩌면 이미 무너졌음을) 드러낸다. 어떤 대상이 정말로 (대중)음악을 해체하는 무언가라면, 우리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언어와 범주를 마련하기 전까지 그것에 대해 말할 수조차 없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선뜻 긍정의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새롭다거나 실험적이라거나 평가하면서도, 어떻게든 기존의 언어들만으로 그것의 단면들을 포착해낸다. 사실 나조차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술은 고작 “공중도둑의 [무너지기]는 무너지는 음악이다.” 뿐이다. | 전대한 [email protected]

 

  1.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3a. 10~18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역. 새물결. 2008. 중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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