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8일 저녁 8시 쯤, 용인시 55사단 신병교육대. 나는 입대한 지 막 6시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고, 입대한지 6시간이 된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렇듯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 전혀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대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이러는 것보다는 조금 더 익숙하고 행복한 곳에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이런 질문을 하다가 주어진 상황에 체념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런 질문들은 훨씬 더 존재론적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조금 많이 우울해졌다. 대체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진짜로, 왜? 나는 셀 수 없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것보다도 아쉬워하고 화나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 2017년 2월 28일 저녁 8시 쯤, 나는 적어도 하루나 이틀 뒤에 입대했어도 볼 수 있었던, 적어도 알 수 있었던 걸 보지도 알지도 못한 채 입대를 했다는 것에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1년 뒤에는 똑같은 대상에 대해 1년 전과는 전혀 다른 ‘아쉬움’에 대해 쓰긴 했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다.) 한편-

2017년 2월 28일 저녁 8시 쯤,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이하 ‘한대음’) 시상식이 열렸다. 소란의 고영배가 사회를 맡았고,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 부문. 전년도 수상자인 트램폴린이 시상자로 올라왔다. 러브엑스테레오, 룸306, 아슬, 야광토끼. 네 후보를 제친 수상작은, 키라라의 [moves]. 따뜻해 보이는 검은 코트를 입은, 엄청 놀란 표정의 수상자가 헐레벌떡 시상대 위로 올라간다. 정사각형에 블랙홀 같은 구멍이 파인 상패(같은 시상식에서 이랑이 경매에 내놓았던 바로 그 상패)를 든 채로, 수상자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감사…합니다…우아…”로 시작해 “항상 우리 존재 파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준비도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여러 아무 말들이 튀어나온, 하지만 아무 말이기에 그 마음이 있는 그대로 튀어나오는 수상 소감. 그 수상 소감은 소소하게 이야기되었고, 제14회 한대음 시상식의 (이센스 등장이나 이랑의 경매마저 제치고!) 명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수상자, 키라라가 그 수상 소감을 말했을 그 때, 나는 “나는 여기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따위를 속에서 혼란스럽게 굴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 시상대에서의 키라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 글은 아마도 키라라의 수상 소감에서, 정확히는 그 수상 소감의 마지막 몇 마디들에서 시작되었다. 원래는 [moves]의 수상 이후 2년 만에 나온 키라라의 세 번째 정규 음반이자 STQ 프로젝트 시절까지 포함하면 다섯 번째 정규 음반인 [Sarah]에 대한 글이었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경로로 키라라라는 음악인 자체에 대한 글이 되었고, 그보다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더해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글은 결국 키라라의 수상 소감 마지막 몇 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며, 그 몇 줄 때문에 내가 키라라에 대해서 뭐든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글을 썼다. 2017년 2월 28일 오후 8시 쯤, 어쩌면 (무키무키만만수의 “투쟁과 다이어트” 풍의 샤우팅으로) “왜 내가 이러고 있나”를 되내이던 나에게 필요했을 게 그 수상 소감 마지막 몇 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 가야할 것들이 있다. 아니 사실 많다. 그 몇 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키라라의 음악에 대해, 소리에 대해, 감정에 대해, 어쩌면 키라라 자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야기해야 하니까. 사실 그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나는 조금 많이 조심스러워진다. 아니 사실 엄청나게 많이 조심스럽다. 내가 키라라에 대해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은 키라라의 음악, 키라라의 인터뷰, 키라라의 글 등 여러 텍스트들을 어찌 되었든 내가 자의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불가피하게도 결국 나의 이야기와 생각과 엮으며 생각한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불가피한 해석, 아니 오해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펼치려고 한다. 부디 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쁘고 강한

그런 마음에서 우선적으로는, 가장 표면적인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적절할 것 같다. 키라라에 대한 여러 말들과 표현들. 그러니까 “키라라는 예쁘고 강합니다.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 같은 구절, 아니면 키라라가 여러 차례 언급하는 ‘뿌숨’의 미학, 눈송이나 겨울의 이미지, 근작에서 드러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 물론 키라라라는 이름에 대해 지극히 한(국)남(성)적인 젠더 감수성 부재를 천박하고 저열하게 드러내며, 그것도 모자라 동료(?)들에게 모종의 동의와 공감을 바라며, 호모소셜한 연대의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는 구린 표현도 있지만, 이는 물론 당연하게도 깔끔히 무시하면 되는 일이고 이제 일절 언급할 일이 없을 것이다. 여하튼, 키라라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가장 표면적으로 많이 접하는 건 바로 이 ‘예쁘고 강한’, 정확하게는 [moves]의 첫 트랙 “키라라”에서 나레이션으로 나오는 위의 구절이다. 키라라는 예쁘고 강하며, 우리는 춤을 춘다.

나는 이 구절이 키라라의 음악에 대한 훌륭한 요약(그러니까. ‘오래된 미래’의 장기하와 얼굴들이나 ‘브레이브 뉴 사운드‘의 실리카겔이나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평가들이 이 문구를 거의 모든 곳에 인용해대면서도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 건 확실히 게으른 짓이지만, 키라라가 예쁘고 강한 음악을 하는 건 확실하므로 이 문구는 적절하게 좋은 요약이다. 이쁜 시부야케이와 강한 빅비트라는 굉장히 이질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전자음악의 두 하위 장르들을 놓고 키라라는 둘의 결합을 상상했고, 그 모든 모순이나 역설, 양가를 품고 이를 실현해냈다. 코넬리우스(Cornelius)와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를 한 자리에 두는 게 키라라의 음악이자 능력이며, 그 소리는 이쁘고 강하다. 아니 강하고 이쁘다. 어쨌든 이 문장에서부터 그 소리에 대해 시작해보자.

시부야케이와 빅 비트의 조합이라고 썼지만, 이 장르적인 결합만이 키라라의 “이쁘고 강함”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장르에서 출발해 파고들면, 키라라 특유의 소리들이 어째서 이쁜 동시에 강한지를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자면, 키라라의 거의 모든 음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멜로디와 비트. 물론 이는 엄청나게 대충 나눈 것이므로 설명을 더한다. 우선, 키라라의 소리에는 아주 명확한, 깔끔하고 확실한 멜로디 라인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자면 록에서의 리프라고 봐도 무방하다(인터뷰 키라라 본인마저 스스로를 로커로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키라라의 여러 대표곡들에는 특유의 멜로디 혹은 리프가 존재하는데, 이 리프는 곡이 진행되는 내내 일종의 주선율로써 반복되고 당연히 변주된다. 전자음악 중에서도 실험적이기보다는 나름의 정형을 따르는 종류들(하우스나 테크노 등으로 시작해 죽 이어져 내려오는 계보)의 핵심이 ‘반복’에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키라라가 만들어내고 반복하는 리프와 멜로디 라인은 동시대의 국내 전자음악인 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이다.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멜로디 라인 혹은 리프는 크고 시끄럽게 쿵쿵 박혀대는 베이스 비트와도, 고명이나 향신료처럼 뿌려지는 샘플링이나 이펙트와도 깔끔히 분리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제14회 한대음 때 상을 겨룬 야광토끼나 아슬, 룸306이 짙게 뭉개지고 왜곡된 노이즈를 몽환적으로 뭉뚱그려진 색채로 활용해낸 것과 비해 (러브엑스테레오는 그 사이 어딘가 정도 일 것 같다), 그 어떤 음악인들보다도 명징하게 소리들을 나누고 구분하는 키라라의 방식은 독보적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리프와 멜로디가 ‘이쁜’ 성질을 갖는다. 이 리프들은 주로 다양한 질감과 재질의 소리들로 펼쳐진다. 때로는 전기 기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피아노나 신시사이저가 생각나기도 하고, 종종 칩튠이나 8비트/16비트 사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소리들은 최대한 잘 들리는 위치에서, 맑고 밝은 상태를 유지한 채로 (왜곡이 있더라도 배경음이나 베이스 등 다른 소리들과 쉽게 섞이지 않고) 제시된다. 이 밝고 맑은 소리들이 주선율이자 리프의 역할을 하며, 키라라의 음악에서 이쁨을 맡는다. 하지만 이 이쁜 멜로디와 질감의 소리만이 있었다면 키라라의 음악은 단순히 상큼 발랄한 칩튠이나 하우스, 시부야케이 밖에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강함이 들어온다.

키라라의 강함은 곧 빅비트와 연계될 것이다. 일단 빅비트라는 이름 자체부터 큰-박자라는 직관적인 해석이 가능하듯, 이 장르는 최대한 크고 강력하고 무겁고 시끄러운, 쿵쿵대고 쾅쾅대는 베이스를 기초적인 비트로 삼는다. 한 가지 재밌는 게 있다면 90년대 초중반 당시 영국에서 장르가 형성될 때, 프로디지(Prodigy)나 케미컬 브라더스, 팻 보이 슬림(Fat Boy Slim) 등의 선구자(?)들은 록에서(특히 6070의 사이키델릭) 여러 요소들을 끌어와 빠른 박자를 통해 그 특유의 강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록적으로 강력한 드럼을 중심으로 한 베이스 파트의 소리들, 여기에서 빅 비트는 그 자체로 강함의 성질을 띄며 키라라가 만드는 비트로 들어간다. 키라라는 언제나 거대하고 시끄러운, 높은 볼륨의,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뿌수는’ 비트를 모든 소리들의 기반으로 삼았다. 아무리 이쁜 소리를 들려준다고 해도, 그 큰 비트, 시끄러운 비트가 키라라의 강함을 만들어낸다.

거의 모든 경우에 키라라의 소리는 가장 기초적인 베이스, 킥 드롭의 비트, 쿵쿵쿵쿵이 반복되는 비트를 기반으로 삼는다. 여기서 변주가 되는 건 또 다른 베이스나 드럼 사운드가 들어오는지 아닌지, 또 그 소리가 얼마나 크거나 작은 지다. 이 비트가 커지면 당연히 음악은 훨씬 더 록적이고 강한 빅 비트 성향으로 가고, 반대로 작아지면 이 소리들을 다양하게 조율하는, 시부야케이의 성향으로 기운다. 곧 키라라의 음악은 베이스+드럼-빅비트-강함과 멜로디+리프-시부야케이-이쁨의 두 요소를 다양한 방식과 방법으로 합쳐내는 것에서 나온다. 이 두 요소들의 분리를 이분법적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키라라의 방식은 이분법을 넘거나 깨부순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뤄두도록 하자.

이 이쁘고 강한 소리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 함께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두 개의 특성을, 그것도 각각의 특성이 매우 정확하고 명징하게 들리는 와중에도, 합쳐내려는 점이다. 만약에 키라라가 이쁜 소리와 강한 소리를 약간의 왜곡과 변주로 섞어 놓았다면, 그 소리에는 ‘이쁘고 강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키라라의 소리가 이쁘고 강할, 강하고 이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쁨과 강함의 어쩔 수 없어 보이는 근본적인 부조화까지도 담아내며 이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 이쁘고 강한 소리는 곧, 어떠한 상충되고 모순되는, 지극히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두 영역 사이의 충돌과 그로 인한 해체, 그리고 합체에서 나온다. 너무 한자어들을 많이 썼나. 소리에 대해서는 이제 잠깐,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Snow”

 

눈송이와 눈보라

사실 비평적으로는 조금 기이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항상 키라라의 소리들이 왜 하필 ‘이쁘고 강한’ 지가 궁금했다. 그러니까, 왜 키라라는 이쁘고 강한 소리를 만들고, 이쁘고 강한 음악을 하는가? 물론 키라라 본인이 수상소감에서 말했듯 “쿵 하면 쿵, 짝 하면 짝”(이 또한 여러모로 인용되는 표현이다) 하고 소리가 나오니까, 이쁘게 짝, 강하게 쿵, 하고 소리가 나오니까, 그렇게 이쁘고 강한 음악이 나오니까, 그런 셈일 테다. 그럼에도, 키라라는 왜 이쁘고 강한 소리를 만들고 싶어 했을까? 나는 몇 가지 방향으로 이 이상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는 키라라의 소리와 음악뿐만 아니라 말과 이야기들도 함께 이야기되겠지만, 나는 그 말과 글을 거쳐 다시 소리와 음악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한 번 더, 또 다른 키워드를 거쳐야 할 거 같다.

내가 ‘이쁘고 강하다’ 다음으로 접한 키라라에 대한 문구는 뿌숨이었다. ‘부숨’이 아닌, 강력한 된소리의 뿌숨. 키라라는 여러 글에서 자신의 음악이 뿌수는 음악, ‘Shift’ 키를 눌러서 써야 하는 뿌수는 음악이라고 이야기했다. 키라라 스스로가 말하기를 이 뿌수는 음악은 (1) 댄서블한 전자음악이고, (2) 음량이 큰 음악이며, (3) 음악가가 정말 온몸을 날려 최선을 다해 퍼포밍하는 음악이다. 이러한 뿌숨의 미학? 태도? 방식?은 오래 전부터 ‘키라라 월드’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뿌숨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키워드를 하나 더 거쳐 이야기해보자면, 겨울과 눈송이(혹은 스노우플레이크snowflake)의 이미지가 있다. 키라라는 겨울과 눈송이를 사랑한다. 여섯 갈래로 뻗어나간 눈송이 모양은 키라라의 로고처럼 쓰이며, 그에 더해 일종의 테마로써 겨울과 눈송이와 그와 함께 엮을 수 있는 다양한 노래 제목의 단어들이 있다.

하지만 이 겨울과 눈송이는 <러브 액츄얼리>나 <러브 레터> 등의 사랑과 낭만 가득한 느낌이 아니라 적어도 <투모로우>나 <설국열차> 정도로 파괴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이 지극히 파괴적인 눈의 이미지는 어떠한 멸망이나 종말, 망함으로 곧장 이어진다. 키라라의 초창기 대표곡인 “Snow”를 비롯해 여러 노래들에 대해서 키라라는 종종 ‘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망하는 상상’이나 ‘너무 화가 나서 세상이 다 무너지고 망하는 상상’을 했다거나 ‘눈보라를 맞고 얼어 죽는’ 내용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눈보라가 치고, 모든 게 다 뿌서져 버린다. 모든 게 새하얀 눈 속에 묻혀버리고, 얼어버리고, 산산조각 나고, 아주 그냥 다 망해버린다. 키라라의 음악은 어쩌면 그러한 겨울의 눈송이와 눈에 의해 뿌수고 뿌서지는 음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눈송이와 겨울의 뿌숨이 어떻게 ‘이쁘고 강함’으로 이어지는 걸까, 그리고 이는 키라라 월드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보기엔, 우선 키라라가 상상하는 뿌숨, 겨울의 눈송이가 모든 걸 뿌수는 광경이 ‘이쁘고 강함’이 아닐까 싶다. 알다시피, 눈송이는 이쁘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눈송이는 작다. 작고 약하다. 작고 약하고 섬세하다. 작고 약하고 섬세하고 이쁘다. 우선적으로, 눈송이는 아주 작고 약하다. 무려 36.5℃나 되는 체온과 닿으면 바로 녹아버린다. 하지만 그 작고 약한 몸뚱아리 안에 수많은 섬세한 무늬의 결정들을 간직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쁘고 섬세하다. 가장 약하고 작은 이쁨을 가진 게 눈송이다. 하지만, 이 눈송이들, 작디 작고 약하디 약한 눈송이들이 모이고 모이면, 거대한 눈과 얼음과 빙산과 눈보라와 설국과 극지방과 겨울과 추위를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눈보라나 겨울, 추위는 모든 걸 뿌술 수 있는 엄청난 강함을 가진다. 어쩌면 이런 눈송이의 성질이 이쁘고 강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나만의 해석이지만.

키라라의 공연은 종종 매우 훌륭하고 멋진 기하학적인 영상들과 함께 한다. 키라라의 상징적인 눈송이 기호가 온갖 영상 속에서 날아다니고 움직이며 어떤 경우에는 아예 눈이 펄펄 내린다. 어쩌면 그 광경이, 이쁜 눈송이들이 모여 정말 겨울을 만들어내고, 그리고 모든 걸 부수는 과정은 아닐까. 키라라 음악에서 이쁨은 시부야케이적인 멜로디 라인, 또 개별적인 눈송이로 이어진다. 그리고 강함은 빅비트의 베이스 비트, 그리고 개별적인 눈송이들이 모여 만든 눈보라와 겨울로 이어진다. 눈이 담고 있는 각기 다른 성질들. 하늘에서 한 송이 한 송이씩 펄펄 나릴 때의 눈송이는 이쁘다. 하지만 그 눈송이들이 뭉치고 합쳐져 눈보라가 되면, 강하다. 곧 이쁨이 강함을 구성하고, 강함 속에는 이쁨이 있다. 그리고 이 이쁘고 강함은 모든 걸 뿌순다.

그런 생각을 갖고 다시 뿌숨으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키라라의 음악은 이쁘고 강한만큼 잘 뿌수는 음악이기도 하다. ‘뿌수는 음악’이라고 하면, 음악보다는 태도, 기타를 부수거나 앰프를 터트리거나 무대를 폭파하거나 하는 뭔가 펑크적이거나 실험적인 태도(혹은 퍼포먼스)들이 우선적으로 생각나지만, 여기서는 당연히 음악 그 자체다. 그리고 ‘음악을 뿌수는 음악’이라고 하자면, 가늠이 갈 것이다. 샘플링과 리믹스, 해체와 재결합, 인용과 재인용. 키라라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 지점에 대해서 확실히 하거나 주목을 하는 시선이 많지 않다는 게 항상 이상했다.

 


“Rain Dance”

 

뿌수고 다시 만들기

대표적인 두 곡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Sarah]에서의 “Rain Dance”와 [moves]에서의 “FEATHERDANCE”. 절묘하게도 제목이 모두 댄스로 끝나는 이 두 곡은 샘플링된 음악과 소리의 조각들을 이쁘고 강한 소리로 재결합한다. 이 해체와 재결합의 소스 또는 샘플은 “Rain Dance”의 경우에 (국내 전자음악 씬에 있어서도 전설적인 위치에 있을) 015B의 “텅 빈 거리에서”고, “FEATHERDANCE”의 경우에는 흐른의 목소리와 진샤의 기타 소리다. “텅 빈 거리에서” 같은 경우에 이 노래는 이미 존재하는 원곡으로써 샘플링되고, 흐른과 진샤의 경우 이미 연주하고 녹음한 소리들이 원본으로써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키라라가 이 소리들을 갖고 해내는 건, 당연히, 소리를 뿌수는 것이다. 물론 뿌수는 것만도 아니다. 뿌숴서, 다시 조립한다. 이쁘고 강하게. 이미 존재하는 원본의 세계는 그 과정에서 철저히 해체되어 산산조각난다. “Rain Dance”에서 느낄 수 있는 원본으로써의 “텅 빈 거리에서”는 간간히 들려오는 잘게 조각난 부분들(이를테면 ‘유리잔-’하는 식으로)로써만 알 수 있으며, 그렇게 샘플링된 소리들은 015B라는 원곡 혹은 원본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키라라의 이쁘고 강한 소리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FEATHERDANCE”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기타 소리는 멜로디를 만들기보다는 킥이나 하이햇 등의 비트를 만드는 역할이 되고, 목소리조차 분절적으로 나뉘며 멜로디의 흐름이 되기보다는, 기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잠깐의 음계를 담은 비트 자체가 된다. 원본의 세계는 그렇기 키라라의 이쁘고 강한 힘에 의해 철저히 뿌서져 산산조각 난다.

사실 이 두 곡은 키라라가 샘플링으로서의 뿌숨을 활용하는 가장 가시적인(이기보다는, 가청적인?) 예시다. 생각보다 키라라는 소리를 부단히 뿌수고 합치는 음악들도 여럿 만들어왔다. 이를테면 “걱정”은 한 줄로 잇자면 ‘어, 안녕하세요? 저기요, 있잖아요,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잘 지내요?’ 하는 안부 인사를 조각내어 음악 이곳저곳에 배치한다. “Stay”는 키라라가 음악을 만드는 작업하고 노동하는 소리 그 자체를, 특히 마우스 클릭 소리(이는 “걱정”의 첫 시작에서도 들린다)를 이용한다. 있다와 함께 한 “SLEEPTALK” 또한 “FEATHERDANCE”와 비슷하게 있다의 목소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쪼개고 뒤튼다. 특히 “Water”에서는 보글거리고 찰랑거리고 하는 물소리를 샘플로 삼아 13분의 대곡을 만들어 이러한 뿌숨의 또 다른 극점이 된다. 생각보다, 키라라는 많은 소리들을 뿌순다. 그렇다면 이 뿌숨이 방법론적인 게 아니라, 내용적으로 드러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또 뿌숨이 내용으로도 방법으로도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Tell Me Why”와 “FISSURE”가 그러한 사례들이다. 전자는 “걱정”과, 후자는 “SLEEPTALK”와 나름 비슷한데, “Tell Me Why”는 키라라의 질문들(결국 ‘왜?’로 간편하게, 어쩌면 ‘아니 씨발 왜?’나 ‘대체. 뭐 때문에, 이유가 뭐냐고요?’로 격하게 뜻이 통하는 질문들)과 마지막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그것 봐 너도 모르지’의 메시지를 샘플로 삼는 동시에, 재미있게도 이 질문들을 해체한 뒤 음악과 함께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뿌숨을 내용이자 형식으로써 표현해낸다. 묻고 묻고 또 묻고 계속해서 묻는 이 과정은 “Tell Me Why”에서 키라라의 뿌수는 방식으로 해체되어 이쁘고 강하게 조립된다. 내용의 뿌숨과 형식의 뿌숨이 일치하는 순간인 셈이다. (이러한 과정은 [moves]에서의 히든 트랙인 “Buy My Music”에서도 꽤 비슷하게 펼쳐진다.) 여기에서 뿌숨은 원본의 해체인 동시에 내용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FISSURE”에서는 조금 다른 내용과 방식으로 표현된다. 정확하게 잡아낼 수는 없지만, 곡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소리로 다양한 말을 하는 게 (나는 이게 키라라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녹음한 다양한 소리들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샘플링 된다. 웃는 것 같은 소리도 있고, 따지는 것 같은 소리도 있으며, 짜증에 찬 것 같은 소리도 있지만, 모든 소리들이 다 왜곡되고 뿌숴지면서 애매해진다. 그리고 이 뿌숴진 소리들 위로 또 다른 목소리들(“FEATHERDANCE”와 비슷한 식으로 비트가 되는 목소리들)이 올라오며 이 뿌숴진 말소리들 또한 이쁘고 강한 소리의 부분으로써 이용된다. 결론적으로, 키라라는 원본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리들을 가져다가 뿌숴서, 다시금 이쁘고 강한 소리들로 합쳐낸다.

키라라는 뿌순다. 원본을 뿌순다. 어쩌면, 그러한 원본들이 가득한 세계를 뿌순다. 키라라의 음악은 세계를 눈보라로 뿌수는 걸 어느 정도 바라며 만들어졌고, 그 세계를 뿌수는 열망(?)을 이쁘고 강한 소리로써 풀어낸다. 이 뿌숨은 방식적으론 소리를 뿌수는 것이고, 내용적으론 세계를 뿌수는 것이기도 하다. [KM]을 비롯한 키라라 만의 리믹스 작업들이야말로 그 뿌숨의 미학을 가장 잘 들려주는 작품들일지도 모른다. 사실 키라라의 리믹스 작업들은 [KM]의 인디 록과 전자음악인들 만이 위주인 것도 아니어서, 강수지나 양수경의 노래들이나 (어쩌면 015B도 여기에 속할 지도…) 심지어 “Beat It”도 적극적인 뿌숨의 대상이 되고, 공연의 경우까지 가자면 키라라 스스로가 스스로의 음악을 ‘소스’로써 다른 곡들과 함께 리믹스하고 매쉬업하기도 한다. (이 쯤 되면 매우 메타적인 리믹스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든, 신해경이든, 키라라 본인이든, 키라라의 리믹스는 여전히 뿌순다. 키라라의 방식으로. 물론 [KM]은 원곡이나 원본의 여러 요소들을 어느 정도 보존하는 형태의 리믹스와 오로지 키라라의 이쁘고 강한 소리에 맞춰 뿌숴지는 형태의 리믹스가 공존한다. (신해경의 “다나에”를 두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뿌수며 리믹스하는 게 대표적이다.) 여하튼, 그것이 무자비한 산산조각이던 산뜻한 리믹스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키라라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뿌숴 키라라만의 이쁘고 강한 세계를 만든다. 뿌숨은 키라라가 세계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망해서 그냥 산산조각내 버리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다시금 자신만의 이쁘고 강한 키라라 월드로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키라라는 이쁘고 강하다. 그리고 키라라는 뿌순다. 세계를 뿌숴서 이쁘고 강하게 만든다.

 

정체성, 감정들

내가 생각하는 키라라의 소리와 음악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렇게 두 가지다. 그렇다면 왜일까. 키라라는 왜 세계를 뿌숴서 이쁘고 강하게 만들까. 여기에서부터 키라라의 말과 글,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펼쳐 본다. 그리고 이 말과 글의 시작은 다시, 키라라의 수상 소감이다. 2017년 2월 28일, 아마도 20시쯤이었을 것이다. 키라라는 [moves]의 수상 소감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저 그냥 소원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말하면요 왠지 이루어질 거 같아가지고, 그냥 빨리 말하고 갈게요… 친구들이 자살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살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열심히, 어 할 수 있는 거 있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항상 우리 존재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1년 뒤, 키라라는 시상자로써 다시 한대음에 등장한다. 한 인터뷰에 의하면 키라라는 이 자리에서 “이거 방송 나가면 EBS에서 나가지 않나요? 성소수자가 EBS에 나오면 편집되는 것으로 아는데 제가 나와도 되나요?”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멘트는 아쉽게도 생방송이 되지 않을 때 나왔다. 그런 지라 EBS의 유튜브 채널에 오른 15회 한대음 시상식을 보면 키라라는 단지 후보작과 수상작만을 호명하고, 출연이 끝난다! 개인적으로는 한대음에서의 이 두 장면을 보면 아쉬운 걸 넘어서 무언가가 참 슬프게 느껴졌다.

제14회 한대음에서의 수상 소감 이후 키라라는 계속해서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해 왔다. “소감 중에 ‘성소수자’라는 네 글자를 말하지 못한 게 아직까지도 한이거든요. 그것은 시상식이 생중계되고 있었고, 저의 부모님이 보고 계셨기 때문인데요. 그 자리에서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결국 말하지 못했고 어떻게든 퉁치고 싶었던 말이 ‘친구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알아들을 사람들만 알아들었겠죠?”1, “그런데 상 타러 올라가 수상소감을 하는데, 성 소수자 트랜스젠더 이런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는 거예요. 인터넷 생중계로 보고 계신 부모님 때문에요. 그래서 `자살하지 말자`라는 말로 대신했던 거죠. 그 때 느꼈던 혼란이 오래갔어요.”2  “다음 수상소감에서는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꼭 이야기해야 할 거 같아요. 올해 시상하러 올라와서 생방송이 안 되고 있을 때 하긴 했는데, 좀 치사했던 것 같아요.”3

이 수상 소감에서 주로 부각된 것들은 결국 “친구들이 자살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쿵 하면 쿵 짝 하면 짝 정도였다. “그 수상소감 후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페이스북의 어떤 채널에서, ‘친구들이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저의 수상소감을 ‘가난한 인디 음악가의 생계유지’의 맥락으로 해석해서 만들어진 카드 뉴스 컨텐츠가 올라온 적이 있었어요. 결국 제가 내려달라고 해서 내리게 되었지만.”4  사실 내가 맨 처음 키라라의 수상 소감을 들었을 때도 비슷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키라라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수상 소감에 대한, 또 키라라의 음악에 대한, 그리고 키라라 본인에 대한 생각은 여러모로 달라졌다. 사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지 잘 모르겠다. 글에서 개인적인 이야기와 생각들을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다가 모조리 지웠다.

그나마 내가 잘 알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만 쓰자면, 키라라가 정체성에 대해서 한 고민들은 키라라가 키라라의 음악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 작던 크던 영향을 끼쳤다. 키라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사실 이 두 문장을 엮으며 그 사이를 채울 수 있는 문장들은 여럿 있을 것이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 그러한 고민들을 잠시 잊거나, 피하거나, 아니면 치료해 주거나, 아니면 그 고민들을 음악으로써 풀어내고 이야기하거나, 또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고민과 음악을 잇거나. 여러 가지 것들을 상상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오직 키라라만이 알 것이고, 나는 그저 그 고민들이 키라라의 음악에 어찌 되었던 다양한 식으로 녹아 있다는 것만을 지레짐작할 뿐이다. 여기서 내가 키라라의 음악을 듣고, 그의 말과 글을 아주 조금 접해본 사람으로서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건, 그 고민들이 과연 음악과 소리로 어떻게 드러났느냐 추측하는 정도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쁘고 강함’과 ‘뿌숨’에 대해, 키라라의 고민을 빌어 다시 생각해본다. 키라라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젠더에 대한 고민, 퀴어로써의 고민이다. 이분법적으로 나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젠더 영역에서 이 쪽 아니면 저 쪽 중 그 어느 쪽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또한 그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존재 자체가 부정 당하는 퀴어의 위치에서 키라라의 고민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고민들은 자연스럽게, 어떠한 감정이 된다. 키라라의 여러 말과 글들에 의하면 그 감정들은 슬픔이고, 분노고, 짜증이고, 혼란이고, 절박함이고, 외로움이고, 힘듦이고, 우울이고, 두려움이고, 절망이다. 물론 당연히 그것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직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만, 나머지는 안 돼.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외의 무언가들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상황 속에서, 키라라는 정체성에 대한, 또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며 수많은 감정들을 품어왔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고민과 그 고민에서 나온 감정들이, 키라라 월드를 구성하는 어떠한 분위기나 태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곧 소리와 음악으로써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인을 포함한 많은 창작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키라라의 경우 그 이유는 오로지, 또 지극히 감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원류에는 고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키라라의 모든 음악과 소리들은, 지극히 감정적인 소리와 음악이다. 키라라만큼 그 감정을 고스란히 음악과 소리로 들려주는 사람은, 그것도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또 제대로 무엇보다도 멋지고 즐겁게 들려주는 사람은 나로서는 접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키라라는 어떻게 그 정체성의 고민과 감정을 음악과 소리로써 담아냈을까.

 


I love my dad, but he always make me sad.

 

역설과 모순

키라라의 이쁘고 강함과 뿌숨, 또 해체와 재결합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가끔씩 언급을 했지만, 키라라의 음악과 소리는 이분법적인 영역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경계를 해체한다. 어떠한 식으로 말인가. 이 이분법적인 경계의 해체는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키라라의 경우에는 이 모든 것들, 절대로 섞일 수 없거나 합쳐질 수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을 모조리, 한 번에 담아내는 식이다. 그러니까, 우선적으로 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쁘고 강함이 그렇다. 이쁨과 강함은 종종 섞일 수 없는 것으로, 함께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럼에도, 키라라는 둘을 함께 담아낸다. 이쁨과 강함이 서로 만나며 필연적으로 충돌이 발생하고, 그 과정 속에서 튀어나오는 부조화와 상충과 양가와 역설과 모순이 키라라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시부야케이와 빅비트는 이쁘고 강하게 합쳐질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각 요소들을 감싸고 있는 편견이나 기존의 통념들, 이분법은 뿌숴진다. 키라라의 이쁘고 강한 소리는, 그렇게 이분법적인 세계의 구성을 뿌순다.

그렇다. 뿌숨이다. 키라라가 뿌숨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도, 세계를 뿌수고 키라라 월드로써 다시 만들어내는 것도 어떻게 보자면 이분법 앞에서 모순과 역설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며 이를 해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키라라에게 있어서 세계는, 이분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이분법적인 구성을 따르지 않거나 속하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찍어 누르고 없는 셈 취급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키라라는 그 세계에 존재하는, 아니 슬프게도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고민한다. 이는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까요”하는 고민이기도 하고, 자신을 “Shit”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하는 것이 대해 “I love my dad, but he always make me sad.”하는 고민이기도 하며, 결국 세계와 자신에 대한 고민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고민들은 키라라의 소리와 음악에 담긴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세계에 대한 고민은, 그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 절망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그 지점에서 세계가 눈보라로 망하기를 바라는, 온통 눈에 덮여 다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사실 당연할 테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큼 끔찍한 건 없으며, 그렇게 존재를 부정하는 세계는 당연히 원망과 파괴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키라라의 음악에는 그러한 마음과 감정이 있을 것이다. 이분법적인 세계가 온통 다 망해버리기를 바라는 열망. 뿌숨은 아마 여기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키라라는 음악으로 세계를 뿌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말과 소리들을 산산조각내고 뿌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재료로 쓴다. 그렇게 키라라 월드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재밌는 건 키라라가 이렇게 어떠한 역설과 모순의 태도로 세계를 뿌수고 다시 만드는 작업에는 단순히 이쁘고 강한 소리나 뿌숨의 내용과 방식뿐만이 아니라 감정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했듯, 정체성/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며 키라라는 슬픔부터 분노까지, 흔히 긍정/부정의 이분법적인 구조에서 ‘부정적’이라 받아들여지는 감정들을 겪는다. 키라라는 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음악에 담아내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말했듯 세계가 망하기를 바라거나, 그런 세계를 뿌숴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렇게 ‘부정’적인 방식,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고 알 수 없고 절망적인 감정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들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사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도 이상한 거 같다. 키라라의 음악은 신난다. 슬프게 신이 난다.

키라라의 전자 음악이 다른 그 모든 장르들을 이전에 우선적으로 댄스 음악, 춤추기 위한 음악이라는 점부터 이야기해볼까. 사실 이에 대해서는 키라라의 온스테이지 무대에서 김윤하가 명민하고 사려 깊은 문장들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키라라의 감정들은 슬프거나 화나거나 하는 식이지만, 이를 담아내는 음악은 반면 밝고 귀여우며, 명랑하고 경쾌하고, 무엇보다도 신난다. 엄청나게 신난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기억하자면, 키라라를 대표하는 문장은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로 끝난다. 키라라의 음악은 춤추는 음악이다. 춤이라는 표현 방식이 슬픔이나 분노라는 감정과 엮어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키라라의 슬픔과 분노는 댄스 음악으로써 표현된다. 스스로가 또 말했듯, 키라라는 울면서 춤추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키라라의 음악은 슬프게 춤출 수 있는 음악이다.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을 신나고 경쾌한 춤으로 들려주는 음악이다. 그리고 그 ‘슬프게 춤추기’가 언제든지 가능한 음악이다.

“Snow”나 “꽝”, “Tell Me Why”나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까요”, 아니면 “Blink”나 “Earthquake”, 또 “AVALANCHE”나 “HAIL” 같은 여러 대표 곡들, 아니 그냥 이 모든 음악들에서 키라라는 그렇게,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그 고민들에서 나온 감정들을 온갖 양가와 상충, 모순과 역설을 이쁘고 강하게 뿌수고 합치는 소리로써 들려준다. 키라라의 음악 자체에 그 모든 역설과 모순이 머금어져 있다. 이 모순과 양가는 젠더 이분법의 세계와 퀴어의 정체성 사이에서.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과 밝고 신나는 음악 사이에서, 이쁜 시부야케이의 멜로디와 강한 빅비트의 베이스 사이에서, 세계를 뿌수는 것과 다시 조립하는 것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키라라의 음악 또한 그 모순과 역설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똑같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키라라의 음악은 그 모든 모순과 역설을 들려주는 음악이다.

키라라의 음악에서 이분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 이쁜 동시에 강한 게 가능하고, 슬프면서도 기쁜 게 가능하고, 우울한 감정으로 신나는 음악을 만드는 게 가능하고, 세계를 뿌수면서도 다시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고, 이분법적인 젠더를 온통 무너뜨려 거대한 무한한 빛깔의 무지개 스펙트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애초에 그것들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분법적인 구성 속에서 그래 보였던 것뿐이지. 그럼에도 세계가 계속해서 이분법을 우세적인 방식으로 고수할 때, 키라라의 음악은 모순과 역설을, 그 모순과 역설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온갖 혼란과 혼돈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며 이분법 자체에 맨몸으로 맞서고, 이 세계를 뿌술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낸다. 키라라 스스로 그 세계를 망하게 하는 걸 상상하며, 정말로 그런 세계를 망하게 하는 음악을 만들고, 매우 당연히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이분법적인 세계는 아주 조금이라도 허물어지고 새롭게 쌓인다. 그리고 키라라만의 세계가 생겨난다.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스로, 하지만 기어이. 그러므로 키라라의 음악은 계속해서 상충하는 것 같은, 이분법적으로 나뉜 온갖 요소들이 모든 방향에서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원자들이 충돌해 거대한 핵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키라라의 음악은 그렇게 발생한다. 모순과 역설, 양가의 충돌 속에서.

나는 키라라의 음악과 소리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키라라의 음악은 이쁘고 강한 음악이다. 뿌수는 음악이다. 감정적인 음악이다. 끝내 당신을 춤추게 하는, 울면서 춤추게 하는 음악이다. 세계를 망하게 하는 음악이다. 쿵 하면 쿵 짝 하면 짝하는 음악이다. 매일을 살기로 다짐한 당신을 위한 댄스 음악이다. 그리고 모순과 역설로 이분법을 파괴하는 음악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제 다시, 2017년 2월 28일 20시쯤으로 돌아간다.

 


“걱정”

 

사라, 움직이다 Sarah, moves

지금 생각해보자면, 2017년 2월 28일 20시쯤의 내게 필요했던 키라라의 수상 소감은 아마도, “친구들이 자살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와 “항상 우리 존재 화이팅입니다”였을 것이다. 내가 나중에 이 수상 소감을 알게 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아있던 구절은 그것이었다. 친구들이 자살 안 했으면, 그리고 우리 존재 화이팅.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로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맘에 짧게 쓰자면, 2017년 2월 28일의 나는, 아니면 그 전이나 후의 어느 시점(그리고 현 시점)의 나도, 언제나 어느 정도는, 계속해서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그랬다. 물론 기쁠 때도 재밌을 때도 많았지만.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의 나는 계속해서 언제나 어느 정도는, 그런 상태였다. 어느 정도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뭐 그렇거나. 일종의 기본적인 기본값으로. 나를 그렇게 슬프거나 우울하게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나 자신이 가장 큰 이유였고, 세계도 그랬다. 이 고민은 정체성 문제이기도 하고,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 문제들이었다.

그러는 긴 시간동안 나는 여러 생각들을 했고, 여러 가지 것들을 접하고, 여러 글을 쓰고, 그랬다. 그런 과정에서 죽음 혹은 삶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문제, 혹은 고민이었다. 뭔가를 깊게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다보면 언제나 그쪽으로 돌아왔다. 물론 절대로 결론에 닿을 수는 없고, 그러므로 결국에는 이 모든 감정과 고민 모두를 평생 동안 안고 가야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 감정과 고민을 너무 많이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Sarah]가 나오기 전후로 개인적인 죽음을 하나 겪었다. 상을 치른 후에 [Sarah]를 들었고, [Sarah]에 대한 키라라의 말과 글을 접했다. 위에서 말했지만 나는 최근에 계속해서 삶과 죽음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왔는데, 직접적으로 겪은 누군가의 죽음과 맞물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우선은 이렇게까지만 이야기해야할 것 같다. 이 글은 키라라에 대한 글이니까.

키라라는 [moves]와 [Sarah]의 전후로 퀴어로써의 정체성을 가진 친구의 죽음을 겪었다고 한다. 스스로 음반을 만든 계기에 대해서 “친구의 죽음입니다. 친구가 죽었는데요. 그 친구가 죽으면서 제 삶과 주변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밝혔다. [Sarah]가 “슬프고 화나고 절망하고 절규하는 내용”이라고 이야기했듯, [Sarah]는 그 죽음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며 만들어진 음반이었다. “이 친구도 자살할까 봐 무서웠고, 저 친구도 자살할까 봐 무서웠고, 저도 자살할까 봐 무서”워서 음악을 만들었고, 이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모순과 역설의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그 모든 모순이나 역설의 과정에서 가장 거대한 것 중 하나가 아마도, 아니면 당연히,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일 테니까.

이러저러한 죽음을 직면하며 이에 대해 생각해온 키라라는 당연히 역설적이고 모순적이게도, 살아있었다. 키라라의 음악은 세계가 망하기를, 완전히 끝나버리기를 바라는 음악이었지만 반대로 그 망하기를 바라는 음악은 키라라 월드를 만들어냈고, 죽음에 대한 경험이나 생각과 가까웠던 키라라는 계속해서 살아 있다. 주위의 친구가 죽고, 매우 슬프고 우울하고 혼란스럽고, 화나고 짜증나고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키라라는 살아 있었고, 살아 있다. 그리고 키라라는 다시 한 번, 그러한 모순과 역설의 과정을 [Sarah]로 담았다고 생각한다. [moves]의 모순과 역설이 어쩌면 감정에 대한 모순과 역설이었다면, [Sarah]의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모순과 역설이 아니었을까.

[Sarah]를 들으며, 또 그 이전의 음악들을 들으며, 나는 키라라의 말과 글에서, 또 소리와 음악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고민을 어렴풋이, 아니면 넌지시, 어쨌든 많이 느꼈다. 정체성과 존재, 또 감정에 대한 고민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아니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고민들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고민. 생각해보면 키라라는 계속해서 그것들에 대해 생각해왔고, 이를 키라라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해왔다. 그 모든 이쁘고 강한, 뿌수는, 울면서 춤추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소리와 음악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였을 지도 모른다. [Sarah]는 단지 이를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이야기한 음반일 뿐이다. [Sarah]를 들으며 ‘살아남기’야말로 키라라가 이번 음반에 담은 가장 중요한 감정인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 감정은, 감정이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태도나 마음가짐인 것 같지만. 자살하지 않기, 계속 살아가기. 그러니까 존나 버티기.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기. 그리고 이 모든 걸 계속하기. 계속하면서, 계속 살아남기.

키라라의 음악이 모순적이고 역설이라고 한다면, 이는 일차적으로는 이쁨과 강함을 합쳐내는 소리와 음악의 층위에서 그렇고, 그 다음 차원으로는 세계를 뿌수고 다시 만드는 개념적인 층위에서 그렇고, 더욱 파고 들어가면 정체성과 감정에 대한 고민의 층위에서도 그러하며, 결국 가장 밑바닥에는 삶과 죽음에 있어서의 층위에서도 그렇다. 살아있는 것은 사실 죽어가는 것과 다른 게 없으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나 언젠가는 죽어 사라지고 없어진다. 이것은 그 어떤 것들보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대적인, 가장 진리와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아니 어쩌면 그러나, 키라라는 살아 있는 채로, 살아서 이것을 이야기한다. 키라라가 키라라일 때, 아니면 그 이전의 STQ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아니면 그 이전의 누군가로써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또 어쩌면 정체성과 존재과 감정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채로,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 있어서, 지금 시점으로는 가장 최근의 이야기인 [Sarah]에서 키라라는 하나의 바람, 그러니까 “Wish”를 말한다. [Sarah]에서도, 아니면 키라라의 모든 삶과 음악의 과정에 있어서도 가장 빛난다고 생각하는 이 바람에는 다른 사람들도 살아있기를, 남아있기를 바라는 걱정과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있는 채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그렇게 [Sarah]는 죽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반이지만, 지극히 삶, 오로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또한 모순과 역설이 되어 키라라의 음악을 움직인다.

거의 1년 전에 나는 갓스피드 유! 블랙 앰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에 대해 이야기하는 2017, GY!BE, ∞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를 인용했다: “관계와 외로움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양쪽 모두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육체적 자신뿐 아니라 정신적 자아에도) 갇혀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연관되어 있다. (…)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느끼는 덫에 걸린 듯한 기분, 외로움, 죽음의 감각을 격화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인정하게끔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일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덫에 걸린 듯한 기분’, 압도적인 세계나 압도적인 절망, 결론적으로는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 풍겨나는 두려움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다. 월리스는 이러한 두려움과 또 결론적으로는 압도적인 죽음을 인정하고 맨 몸과 맨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걸 창작하고 표현하는 그 모든 일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예술이든 음악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키라라의 경우에도 지극히 마찬가지다. 키라라는 그 모든 정체성과 감정, 삶과 죽음에 대한 ‘덫에 걸린 듯한 기분’을 쿵 하면 쿵하고 짝 하면 짝하는 음악으로 들려준다. 스스로가 이 모든 고민의 과정에 정면으로 맞서며, 가까스로 또 기어이 버티며, 그렇게 생겨나는 역설과 모순은 수많은 방향에서 충돌하고 폭발한다. 그 과정에서 또 수많은 것들이 나타난다. 눈송이와 눈보라처럼 이쁘고 강한 소리가 탄생하고, 세계를 뿌수는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이 생겨나며, 수많은 대립하는 감정들을 한 번에 그러안아 담는 태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채로 죽음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모든 과정이 발생한다.

내게 키라라의 음악과 소리는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 대한 소리와 음악으로 느껴졌다.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자살하지 않고 삶을 계속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 세계를 버티고, 그 모든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이고 또 표현할 수 있는지. 키라라는 그것들을 키라라 만의 소리와 음악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듣기로는, 그 음악은 맹렬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음악, 더 나아가 살아 움직이는 음악,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음악, 다른 사람들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도 키라라 본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음악이었다. 키라라에게는 그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키라라는 사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했다. 사라는 성소수자다. 사라는 슬픈 사람이고 외로운 사람이고 맨날 절망하는 사람이다. 사라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사라는 움직인다. 사라는 살아 움직인다. 살아 움직이며 살아 움직이는 음악을 만든다. 그 음악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수많은 모순과 역설이 서로 맞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폭발이다. 그 폭발의 과정에서 모순과 역설은 있는 그대로, 그러나 항상 살아 움직이며, 그러니까 변화하며 존재할 수 있다. 어떻게 보자면, 우리는 모두 변화하는 존재다. 변화는 어쩌면 살아있음과 그렇게 다른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라, 아니 키라라의 소리와 음악은 그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리고 그 소리와 음악은 죽지 않는다.

그 살아 움직이는 소리와 음악은 키라라의 경우에 이쁘고 강하며, 세계를 뿌수고 다시 만든다. 정체성과 감정을 이야기하고, 죽음과 삶을 이야기하며,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키라라는 계속해서 살아 움직인다. 아주 생생하고 팔팔하게, 몸을 흔들고 뛰어대고 소리치고 울고 춤추고, 굿판을 벌이듯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게다가 그 음악과 소리는 다른 사람들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움직임에 반응하며 함께 울면서 춤을 췄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고, 그나마 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아마 이렇게 글을 쓰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키라라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음악을 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썼다.

키라라의 음악은 살아, 움직이는 음악이다. 자살하지 않으며 계속 살아가는, 우리 존재에 화이팅을 외치면서 계속 싸우는, 살아 움직이는 음악. 그리고 아직도 키라라는, 여전히 음악을 한다. 부단히 세계를 뿌수고 새로 만드는, 이쁘고 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음악. 저기, 사라가, 키라라가 움직인다. 살아서 움직인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고맙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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