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호 | Non​-​self 비자아 | Chinabot, 2019

미래가 예전 같지 않습니까?

 

(과거의) 미래가 그립습니까?

마크 피셔(Mark Fisher)는 베리얼(Burial)에 대해서 이야기1하며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의 표현을 언급한다: “정글(Jungle)에서 개러지(Garage)를 거쳐 투스텝(2-step)으로 이어지는” 레이브 음악의 전통에서 “영국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의 하드코어 연속체(hardcore continuum)”라고 불렀던 과거, 1980년대에 시작되어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을 지나 1990년대에 폭발했던 ‘과거’가 2000년대 중반에 베리얼을 통해 다시 소환된 것이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형상으로. “사람들은 이후 몇 년이 채 안 돼 (베리얼을 통해) 이 연속체가 귀환했음을 감지했습니다. 지속될 수는 없는 귀환이었지만요. 사람들이 감지한 것은 훨씬 암울한 21세기 관점에서 90년대의 집단적 희열로 귀환했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베리얼이 21세기가 일종의 중단된 시간임을 조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사실은 우리가 20세기에 기대했던 미래들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점에 기초해 관점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두 번째 사랑의 여름’에서부터 1990년대로 이어지는 레이브 씬의 사람들이 당대 영국에서 블레어를 중심으로 한 노동당 정권의 정치사회적인 맥락과 연결되며 어느 정도의 희망적인 인식을 머금었던 것에 비해, 그러한 인식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인 2000년대 중반에 등장했던 베리얼은 이 모든 것들, 10년 하고도 몇 해 전에 약에 취해서 들떴던 막연한 낭만의 감각이 사라진 후,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레이브’를 들려준다. 더 이상 그 이름처럼 미쳐 날뛸 수 없는 시기의 레이브. 사이먼 레이놀즈가 [레트로 마니아]에서 표현한 것에 따르면: “예컨대 “Night Bus”는 클럽에서 놀고 나와 런던 변두리행 심야 버스를 타는 고독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트랙은 밀레니엄 이후 집단적 목적의식이 사라진 현실에 관한 야상곡이기도 하다. 가사는 ‘90년대 이후 우리는 모두 야간 버스를 탄 신세’라고 말한다.”2

베리얼은 어떤 인터뷰에서 1990년대의 레이브 음악들이 모두 희망적이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음악이 일부 슬프게 들리는 건, 당시 그게 미래처럼 들렸는데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런 음악이 여전히 미래처럼 들린다.” 「미래가 그립습니까?」라는 이름의 대담 혹은 인터뷰에서 마크 피셔는 “오늘날의 하이퍼-가시성 시대에 우리가 정말로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조금 기이할 겁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새로움에 관한 모종의 대중적 경험이에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사라져 버린 거죠. 또 잃은 건 실험적인 것, 아방가르드, 대중적인 것의 순환입니다. 대신 우리는 ‘실험적인 것’이라는 상표를 얻었죠. 메인스트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저만의 틈새시장을 보유하고서 확고히 자리 잡은 장르들 말이죠. 그리고 조직적인 선전에도 불구하고 메인스트림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과거보다는 한층 덜 도전받죠. 왜 그럴까요? 지금은 저 같은 사람도 저만의 틈새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연도에 영국에서 태어나서, 대중음악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과 새로움에 대한 열망(레이놀즈는 80년대의 포스트 펑크와 90년대의 레이브를 종종 그러한 음악이라고 『레트로 마니아』에서 언급했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본 이 둘은 ‘레이브’가 존재하지 않는 레이브를 들으며 존재하지 못했던 미래에 대해서 떠올리고, 절망한다. 마크 피셔는 2017년에 자살했고, 1990년대 레이브 씬을 이끌었던 프로디지(Prodigy)의 키스 플린트(Keith Flint)도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거의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표면적이고 인공적으로만 존재하는 레트로와 노스탤지어만이 되풀이될 뿐이다. 그 시대를 점점 더 사람들이 기억하는 ‘최근’으로 넓혀가면서.

 

불안으로 클럽을 해체하기

베리얼의 대표작인 [Untrue]가 나온 지도 10년이 넘게 지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안개 같은 미세먼지 속에 갇혀있으며, 애초에 존재했는지부터 잘 모르겠고, 전자음악에서 클럽 중심의 댄스 음악은 다시금 일종의 아방가르드로 향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순환해서 돌아오는 실험성.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이라는 장르명 아래에서 우선은 새로이 정의된 이 음악들은 ‘해체된 클럽 음악’ 혹은 정구원이 표현했던 ‘철거튠’3으로써 클럽 음악을 규정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잘게 해체하고, 때려 부수며, 철거한다. 이 과정 속에서 댄스/클럽 음악을 느슨하게 엮어주던 하우스나 테크노, 베이스(Bass) 같은 장르들은 처참히 깨뜨려지고, 인더스트리얼과 노이즈, 플런더포닉스(Plunderphonics) 등 조금 더 아방가르드한 성향이 한 때 ‘가장 대중적’이라고 불렸던 장르의 조각들 위로 단숨에 덮어씌워진다. “불안은 이제 댄스 플로어까지 침투한다”는 정구원의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어쩌면 베리얼을 중심으로 한 2000년대 중반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들이 과거와 다르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린 시대의 고독한 그리움을 담았다면, 2010년대 후반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은 기본값이 되어버린 ‘전망 없음’ 자체로부터 나오는 불안을 담아낸다.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마찬가지로 그리워할 것도 없다. 우리를 가장 신나게 해주었던 것들마저도 산산조각 났고, 그 모든 산산조각 난 조각들은 다시 산산이 조각날 것이다. 아무도 그 조각들이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제는 전망 없음이 댄스 플로어를 침투한다.

레이브 이후로는 20년, ‘레이브 이후’의 이후로는 10년이 지난 후, 현재의 런던에서 황재호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글리치 이미지들을 주로 제작한다. 주로 얼굴을 비롯한 ‘몸’ 자체가 글리치와 함께 잔뜩 뒤틀리고 부풀려져 뭉개진 형상으로 변한다. 그와 함께 그러한 몸에 담겼을 일종의 자아 혹은 주체성도 당연하게도 불쾌한 골짜기를 타고 기이하게 왜곡된다. 이 과정에서 황재호는 여러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음악들을 담아 [Non-Self 비자아]를 만들었는데, 레이브와 레이브 이후를 지난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클럽 씬과 이어지는 황재호의 소리들은 그 뒤틀려진 신체의 이미지와 맞게 인더스트리얼한 질감을 띠면서 둔탁하고 거칠게 뭉개진 비트가 주가 되어 나타난다. (앨범 소개문은 ‘노웨이브의 미니멀한 해체를 떠올리게 하는 거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4라는 표현을 쓴다.) 사실 여기까지만 두고 보면 황재호의 작업은 2010년대 중후반부터 나타난 소피(SOPHIE)나 아르카(Arca)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소리들과 크게 다르진 않다. 불교에서의 ‘무아’를 기조로 삼아 ‘생명 존재의 불변하고 영구적인 영혼이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5을 담아냈다고는 하지만, 우선 장르적으로 [Non-Self 비자아]를 듣자면 몇 년 전부터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란 범주 하에 주요한 관심을 받은 여러 이름들이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Non-Self 비자아]가 재밌는 건 황재호가 이런 보편적인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사운드에 더하는 몇 가지의 다른 요소들, 그의 개성이 될 만한 다른 특징들이다. 우선적으로는 그의 작업들을 비롯해 음반 커버와 뮤직비디오에서도 나타나는, 디지털 글리치의 방식으로 뒤틀린 신체가 있고, 가끔씩 등장하는 비슷한 맥락에서 뒤틀린 ‘한국적’ 소리들이 있다. 이 뒤틀린 ‘한국적’ 소리들은 또 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DAEBOOK”에서 거칠고 지저분한 베이스와 함께 등장하는 꽹과리, 그리고 그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는 금과 쟁의 소리가 있다. 어떻게 보자면 잠비나이가 [차연]에서 마찬가지로 강하고 무거운 메탈풍 노이즈에 국악기를 섞었던 “Grace Kelly”나 “Wardrobe” 등의 선례와 같은 맥락에서 이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잠비나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존에 국악기가 들려주는 소리들에 들어간 ‘한국적’ 맥락들은 잔뜩 망가져버린 클럽 음악의 무거운 소리들과 함께 얽혀 이질적으로 충돌하며 비슷한 효과를 낸다. 이 충돌은 황재호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진다. 어쩌면 “Ageing Process”에서 등장하는 특유의 강렬한 비트들에서 마찬가지로 “DAEBOOK”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며, [Non-Self 비자아] 이전에 나왔던 “Image”에서는 거문고와 해금의 소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 있어서 황재호는 기본적으로 해체된 클럽 음악에 국악기의 소리들을 마찬가지로 해체시킨 채로 올려놓으며 그의 소리들을 만들고, 이 둘의 부조화가 충돌할 때 자연스럽게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징이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특징’마저도 결국에는 이미 존재하던 소리들을 잔뜩 해체한 결과물로써, 제대로 된 형체의 소리가 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부서져 산산조각난다.

더욱 인상적인 ‘한국적’ 소리는 “Sad Relationship, Nami”에서 드러난다. 제목이 지시하듯 곡은 나미의 “슬픈 인연”을 인용하되,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의 방식에 맞춰서 뒤틀어놓았다. 황재호는 여기에서 나미를 비롯한 80년대의 가요들이 담고 있었던 ‘한국적’인 일종의 낭만주의를 처참하게 때려 부수면서 원곡의 멜로디와 소리들의 조각을 이리저리 조절하고 꼬아놓은 채로 등장시킨다. 베리얼이 90년대의 레이브를 가져오며 여기에 이 때 느꼈던 낭만과 과거와 미래 양쪽에 대한 향수를 더하되 결국에 이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다는 비애를 담은 것과 비슷한 셈이다. 전용현이나 나이트템포(Night Tempo)가 각각 ‘좋았던 시절’인 8090의 한국 가요와 7080의 일본 ‘시티 팝’에 들어가 있던 낭만을 퓨처 펑크를 바탕으로 되살리거나 (마찬가지로 나미를 인용하되 그 속에 있던 낭만을 오히려 강조하고 원곡을 상대적으로 덜 훼손한 전용현의 “가까이 하고 싶은 그대” 리믹스와 이를 비교해보자) <토토가>와 <응답하라> 시리즈의 설정으로 대표되는 8090 가요를 중심으로 ‘과거’의 곡들이 ‘다시 한 번’ 시장 친화적인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교해보자면, 황재호의 과거 인용은 이들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전에 “슬픈 인연”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나미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함께 곡이 이전에 갖고 있던 의미는 황재호가 다시 불러오며 파괴하는 과정에서 상실되었다. 그것들이 빠진 뒤에는 감상적인 현악기와 피아노가 들어간 전주가 전자음에 의해 방해받은 채로 황재호가 만들어놓은 무너진 세계를 장식할 뿐이다. 베리얼의 소리들이 폐허 이후의 세계에서 폐허 전을 어느 정도 기억해낼 수 있거나 적어도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지니고 있던 것에 비해, 황재호가 만든 소리는 이미 그 이전을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난 폐허에 서서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감정과 기억을 망가진 조각으로나마 담으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뒤틀려진 형체의 소리들이 등장하며, 이 시도는 ‘실패’한다. (황재호의 음악 자체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찢겨진 육체성과 자아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황재호가 언급하는 것과 비슷하게 고정 불변의 실체로써의 ‘나’가 존재하지 않는 제행무상의 경지에 이르러 오온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그 소리들을 즐긴다는 건 어떠한 ‘세속’에 너무 많이 의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만, 불교에서 그러한 무아/비-자아의 상태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하는 오온 중에서 색(色)이라고 불리는 몸, 즉 육체가 존재한다는 걸 떠올려본다. 조금 많이 시니컬하게 보자면 결국에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몸은 당연하게도 어떤 식으로든 해체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Non-Self 비자아]에서 고유한 ‘육체성’이라 불릴 수 있는 사운드들은 우선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조리 해체된다. 물론 그 이후 다시 재가공의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일단은.

어떻게 보자면 이러한 요소들의 육체성, 온전한 형상으로 있을 때에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지만 그런 만큼 언제나 끔찍한 모양새로 해체될 가능성이 다분한 이 육체성들은, 그러므로 음악을 비롯한 작품을 구성하는 나름의 고유한 주체성, 어쩌면 ‘자아’를 갖고 있다고 비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말했듯이 온전한 형상으로 보존되어 있을 때에만. 이 소리와 개념들의 몸체가 잔뜩 해체되는 순간 그 안에 담겨 고유한 의미를 만들어내던 ‘자아’마저도 해체된다. 그리고 [Non-Self 비자아]에서 소리에서 일어난 육체성의 해체는 자아 해체 과정과 함께 발생하며,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이전의 클럽 음악에 내재되어 있던 낭만이 당연하게도 해체되어 산산조각 난다. 이 낭만을 차지하는 여러 요소들 중에는 “미래가 주는 흥분” 혹은 “새로운 형식이 주는 자극”, “훨씬 순수하고 강렬한 희열”, “최고의 SF가 선사하는 무섭고도 행복한 황홀감”, “무한함이 불러일으키는 현기증 같은 감각”6 등의 90년대적인 ‘감각’이 있겠고, 레이브와 클럽 파티에서 겪을 수 있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운드적 육체성에 있었던 낭만의 희미한 잔여와 그리움, 노스탤지어 등이 베리얼 등 포스트-레이브 음악의 자아에서 이를 표현하는 육체와 함께 드러났다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전에 반짝 유행했던 베이퍼웨이브(Vaporwave)와 퓨처 펑크(Future Funk)는 이 둘 모두를 잠시간 인공적으로 재현하며 허구에서라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클럽 사운드의 육체성과 연계되는 자아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낭만’의 개념들은 이렇게 산산조각 났다.

기존의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의 경우에는 이 정도까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겠지만, [Non-Self 비자아]에서 드러난 다른 특징들을 생각해보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사운드와 국악 소리 간의 부조화적인 충돌에서 드러나는 어떠한 ‘로컬’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잔뜩 찌그러진 국악기들의 소리들처럼 산산조각 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어쩌면 황재호가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과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있을 텐데, 애초에 오래 전부터 ‘로컬’ 씬 자체의 의미는 어느 정도 적용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로컬’한 특징들이 이러한 식으로 뒤틀리는 경우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황재호 또한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일종의 로컬성을 추구하는 자아를 부쉈다. 당연하게도, 이 둘을 합쳐 ‘로컬’하고 ‘낭만’적인 80년대의 가요마저도 다른 요소들처럼 산산조각 났다. [Non-Self 비자아]는 이렇게 우선 육체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시각과 청각 양쪽에서 해내고 그 육체성에 담긴 클럽 음악의 자아마저도, 낭만과 로컬 양쪽의 영역에서 마찬가지로 해체한다.

과거의 클럽 음악에서 ‘자아’는 온전하게 존재하는 클럽 음악의 육체성에 담겨진 채로 그 열광을 오롯이 즐겼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 육체에서는 지극히 감각적인 경험과 흥분이 떠났고, 그렇게 육체들은 껍데기만이 남은 채로 과거를 기억해내려 애썼고 할 수 있을 때 그 기억들에 의존해 매달려 추억을 가까스로 되살렸다. 그마저도 희미해지자 공허한 육체의 껍데기를 채우기 위해 이것들을 탐닉할 수 있는 인공적인 자아가 만들어졌고, 육체마저 제 기능을 못하자 인공적인 육체마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에 이 모든 것들을 추구하는 자아도 소리들의 육체성처럼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과거를 더 이상 즐기지도, 기억하지도, 복각하지도 못한 채로 산산조각 난다.

사실 이 육체성과 자아 중에서 무엇이 먼저고 더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은 믿지 않고, 차라리 뇌나 심장 같은 지극히 물리적인 육체들이 제 작동을 하기에 자아나 주체나 그런 것들이 기능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고, 메를로퐁티의 몸과 살 개념7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입장에서 [Non-Self 비자아]를 구성하는 온갖 육체적인 요소들이 산산조각 날 때, 그 육체에 담겨 있던 그 나름의 ‘자아’마저도 함께 산산조각 났다고 느껴졌다. 그것이 불교적인 무아나 비자아의 경지로 올라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에 [Non-Self 비자아]에 정말로 무아 혹은 비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자어를 해석한 그대로 ‘나’와 ‘자아’ 모두 존재하지 않거나 부정된다는 점에서 무-아이자 비-자아가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흥분과 새로움의 낭만을 추구하던 이 자아들은 더 이상 그것들을 옛날처럼 즐길 수도 없고, 그나마 이를 불러올 수 있었던 육체마저 산산조각 나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육체와 자아 모두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디컨스트럭트된 소리를 리컨스트럭트하기

이러한 육체-자아의 해체 과정에서 재밌는 건, 어느 게 먼저랄 것 없이 육체성과 자아가 모두 [Non-Self 비자아]에서 처참하게 조각났음에도, 이것들이 다시 또 다른 형태로 합쳐진다는 점이다. 철거는 진작에야 끝났지만, 아직 그 이후의 가공 작업이 남아있다. 여기에 어느 정도 핵심이 존재한다고 본다. 물론, 이전에 온전했던 육체-자아의 형상으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다. 찢겨나간 육체와 자아가 여전히 기괴하게 조각나 살아있는 채로, 그로테스크하고 고어하게 뭉쳐졌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어쨌든,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은 하쉬 노이즈나 훨씬 더 극악한 소음들로 가득 찬 형식의 소리들이 그러는 것만큼 완벽하게 그 육체를 노이즈의 믹서기에 갈아버리지는 않았다. 육체를 뜯고 찢고 썰어서 고깃덩어리로 만든 다음, 그 고깃덩어리를 다시 다른 방식으로 합쳤다. 그럼에도, 이 육체는 ‘작동’은 한다. 옛날의 방식을 기억하거나 추억하지도 못한 채로. 해체되었다가 다시금 뒤틀려서 합쳐져, 더 이상 육체로써 기능하지 못하는 육체와 자아로써 의미를 갖지 못하는 육체-자아가 된 채로. 어쩌면 B급 호러 영화에서 끔찍한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된 희생자들처럼, 입이 없지만 기어이 소리를 질러야 하거나 클리셰에 가득 찬 ‘죽여줘…’를 중얼거리면서. 어쨌든 간에, 그 몸뚱이 혹은 고깃덩어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그러므로 계속된다. 죽는 게 더 나을지라도, 뭐 아무튼 간에 계속해서.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조금 더 계보적인 관점에서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 의미심장한 것은 레이브 컬처와 거기서 출발한 수많은 하위 장르 대표되던 ‘클럽 음악’ 자체를 해체하지만, 이를 완벽하게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철거된 잔해를 끌어와 다시금 다른 형상을 만든다는 점에 있다. 해체와 재결합. 하지만 이 재결합의 과정은 해체된 조각들을 안정적으로 다시 쌓아내는 방식의 샘플링을 이용한 매쉬업과 리믹스, 그리고 안정적인 플런더포닉스 성향의 음악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애벌런치스(The Avalanches)의 [Since I Left You]의 아름다운 결합을 비롯해 해체와 재결합의 묘한 경계에서 인공적인 노스탤지어를 겨냥한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thrix Point Never)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들어 보자.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 클럽 음악을 해체하고 다시 결합할 때 이 결합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해체 과정에서 드러나는 온갖 날카로운 단면들과 흙먼지들, 온갖 조각들과 덩어리들이 전부 다 드러난 채로 괴물이 된다. 이런 특성을 이전에 들려줬던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요소들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에서 그토록 자주 쓰이는 것은 그 때문이고, 또한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뒤틀리고 찢긴 육체들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에서 (아니면 아인스튀어첸데 노이바우텐(Einstürzende Neubauten) 등의 공연장에서) 주로 느껴지는, 철거 현장에서 풀풀 날리는 거친 먼지 같은 소리의 질감이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뜯겨나간 살점과 같은 질감으로 바뀐 셈이다.

이를테면 아르카의 대표적인 음반과 믹스테잎의 커버와 뮤직비디오 등 곳곳에서 나타나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 음반 제목이 그대로 언급하는 ‘뮤턴트’의 형상들이 가장 대표적이다. 소피의 “Faceshopping”에서 불쾌한 골짜기를 따라 디지털화된 얼굴이 번쩍이는 빛과 함께 온갖 방향으로 꼬이고 펄럭이고 눌리고 잘리고 터지는 광경도 그렇다. 암네시아 스캐너(Amnesia Scanner)가 “AC A.W.O.L”의 뮤직비디오에서 입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클로즈업하거나 아이샤 데비(Aïsha Devi)가 “Light Luxury 光华”의 뮤직비디오에서 부분적으로 괴물이 된 육체들과 수많은 살들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조금 더 재미있게도, 보통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신체들은 고어 영화들의 아날로그한 방식이 아닌 좀 더 첨단의 디지털 이미지에서 편집된 채로 펼쳐진다. 황재호가 음악 외적으로 계속한 시각 작업들도 이와 완벽하게 이어진다. 그의 작업들에 등장하는 ‘몸’에 아마도 담겨 있었을 나름의 고유한 육체성은 디지털 글리치 효과를 받아 온통 뒤틀리고 뭉개진 채로 산산조각 났다. 물론, 이 경우에는 온전한 이미지 속에 들어있는 자아도 마찬가지다. “Non-self”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이것이 둔탁한 베이스에 맞춰 온전한 디지털상의 육체들이 뾰족하거나 둥그런 형태로 불어나고 줄어들고, 또 모였다 흩어지며 그와 함께 이미지가 깨지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비슷하게 “Image”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트에 맞춰서 이미지들이 뒤틀리는 형상으로 이것이 나타나며, 보통 일종의 화보나 광고와 비슷한 이미지들에 담긴 본래의 의미들은 이 과정에서 그 형상과 함께 깨진다.

클럽 음악의 소리들을 조각조각 분열시킨 다음 끌어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형상을 만들어, 기어이 그 찢겨나간 육체성과 자아의 조각들을 끔찍한 몰골이 합쳐진 채로 유지하는 게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의 수법이다. 그러므로 이 음악에서 드러나는 소리들은 우선적으로 기괴하고 끔찍하다. 그럼에도, ‘댄스 음악’으로써 부분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Non-Self”를 비롯한 여러 곡의 리듬을 맞춰서 몸을 흔들 수 있다. 다만 낭만을 모조리 잃은 채로. 일종의 불편함과 이질감,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을 머금은 채로. 해체된 육체의 조각들을 다시 재결합하고, 찢긴 자아들의 파편들을 다시 기우며, 낭만을 잃은 몸과 마음은 계속 뒤틀린 댄스파티를 기어이 계속하며 몸을 흔들고, 살덩이와 뼛조각과 장기들이 덜렁거리며 피와 살점을 여기저기에 흩뿌려댄다. 2010년대 초중반을 채웠던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는 인공적인 낭만을 담을 수 있는 인공적인 육체를 만들어내며 어쨌든 ‘육체’가 유지보수 상태로나마 지속된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져 낭만을 몽땅 잃었을 때, 그 때문에 무너진 육체성과 자아는 그럼에도 기어이 없는 낭만을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되어 불안만을 가진 채 댄스 플로어를 떠돈다.

 


“Non-Self”

 

 

종언-이후-다음-세계에서 상상하기

그것이 실제로 도래했건 도래하지 않았건 간에, 만약에 ‘종언’이 존재하고, 이를 사이에 두고 종언 이전과 종언 이후가 있을 때, 종언 이후에서 종언 이전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간대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리고 종언 이후는 종언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계속된다. 이미 모든 게 다 망가져버렸지만, 아무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 세계.8 이 종언-이후-다음의 세계가 시작된 이후, 먼저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낭만을 어느 정도 유지한 채로 뒤튼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그 특유의 인공적인 낭만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들었지만, 낭만의 탐구마저 흐지부지 끝난 뒤에 등장한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은 존재하지 않았던 즐거움과 낭만이 있던 시기 자체를 안쪽에서부터 해체해나갔다. 그렇게 보면 베리얼의 시대를 지나 2010년대 초중반에 유행했던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 다음으로 등장한 언더그라운드 전자음악의 조류가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라는 것이 마치 정해진 순서나 주어진 운명을 따라가는 것처럼 나타난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계속해서 언급했듯이 이 모든 육체성과 자아의 문제는 결국 과거의 미래 감각이 주었던 일종의 낭만에 달려있다. 한 때는, 낭만을 즐겼다. 나름대로의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낭만을 기억했다. 과거의 미래를 떠올리면서. 그 다음에는, 낭만을 인공화 했다. 과거의 미래가 가능했었을 수도 있었던 평행우주의 현재를 만들어가며. 이제는, 그 인공적이고 허구적인 낭만마저도 즐길 수가 없다. 그 낭만이 있던 과거를 규정하는 소리들은 유효성을 잃었기에, 당연하게도 결국 쓰레기 처리업자들의 손에서 산산조각 나거나 철거업자들의 솜씨로 무너지고 도살업자의 손놀림에 해체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은 그 낭만의 철거 작업을 전위 혹은 후위, 어쨌든 사운드와 장르의 경계에서 도맡고, 낭만과 낭만의 기억과 인공화된 낭만과 인공화된 낭만의 기억과 그 모든 진짜와 가짜의 티끌까지도 몰아낸 뒤 남은 두툼한 육체들을 조각낸다. 하지만 이 몸뚱이들은 다시 이상한 형태로 스스로를 붙인 뒤 계속된다. 결국 낭만이 있었던 텅 빈 자리에 온갖 불안만이 거칠게 몰려 들어간다. 미래는 과거에 끝났고, 미래가 끝난 현재는 계속된다.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 고 정지돈과 금정연이 그랬고, 잠깐의 비약을 해본다. 이미 사라진 과거의 미래를 수집하며 언제나 불가능에 부딪히지만, 그 조각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거친 조각끼리의 접합부가 드러난 채로 합쳐내며 어쨌든 계속하는 정지돈. 과거와 미래, 과거의 미래, 미래의 과거를 탐구하고 생각하고 나타내는 방법들의 변화.

20년 전, 그러니까 프로디지를 비롯한 레이브 음악과 10년 전의 베리얼이 들려줬던 음악, 그리고 2010년대 초중반의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를 지금 황재호를 비롯한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을 나란히 두고 보면 일종의 괴물대백과 사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몸을 흔들고, 땀을 흘리고, 소리 지르는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써 레이브가 존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베리얼을 비롯한 포스트-레이브 음악들은 유령의 형상으로, 낭만의 잔해를 좆으며 떠돌지만 레이브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비트로 구성된 육체를 가지지 못한 채로 조용하게 런던 시내를 떠돌아다닐 뿐이다. 잠시 동안 이 유령은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가 만든 인공적인 육체 속에 들어가 로봇처럼 살 수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하고 결국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강렬한 비트로 구성된 육체가 돌아온 것이다. 20년의 시간이 지나서, 온통 썩어 들어간 채로 살점이 덜렁거리고 온갖 뼈와 근육, 뇌수와 내장이 다 핏물을 뚝뚝 흘리며 드러나고, 그 조각들이 기괴한 방식으로 합쳐진 채로. 그러니까, 유령과 로봇과 좀비. 그래도 더 많은 괴물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아닌 것’들이 남아있다. 어쩌면 이 맥락 속에서 다음에 등장할 ‘사람이 아닌 것’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에 나타난 이 몸뚱이들, 분명 멀게는 30년 가까이는 20년 전에 짜릿한 하드코어 레이브 비트들이 주는 순수한 쾌락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던 몸뚱이들이 유령과 로봇의 상태를 거쳐 ‘좀비’로서라도 다시 돌아온 것에서는 또 다른 의미심장함을 느낀다. 전위와 실험성의 반복적인 등장. 적어도 90년대의 레이브, 00년대 초중반의 포스트-레이브, 10년대 초반의 베이퍼웨이브/퓨처펑크, 10년대 후반의 디컨스럭티드 클럽을 함께 두고 보았을 때, 가장 처음에 있었던 ‘몸’의 소리와 가장 유사하게 들리는 소리를 가진 것은 현재의 소리들이다. 이 소리들은 어쨌든 레이브 이후 등장했던 소리들 중에서는 가장 레이브와 닮았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급진적이고, 극단적이고, 과격하다. 그것이 비록 오랫동안 되풀이된 실험성에 의거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20~30년 전의 레이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약에 존재한다면) 디컨스트럭티드-클러버들 또한 그 거친 비트에 맞춰서 조각났다가 다시 합쳐진 몸을 격하게 흔들어댈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던, 조금은 더 희망적으로 생각해볼 구석이 있다면, 결국에는 몸이 돌아왔으니까. 이 거칠게 뒤틀려지고 분해된 소리들에 반응할 수 있는 육체성이라도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전과는 완벽히 똑같이 않더라도, 어쩌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속에서 새로운 방식의 레이브를 즐기고, 심지어는 새로운 방식의 ‘미래’를 모색해볼 수 있지 않을까. 육체성과 자아를 다시금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미 과거에 꿈을 꿨던 미래와 과거에 바랐던 전망은 현 시점에서 모두 잊혀졌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말은 우선적으로는 현재의 전망-없음을 지시하고 그것이 가장 와 닿기는 하지만, 그 전망-없음은 동시에 새로운 미래와 전망의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그 사이클이 시작될 수 있다. 그 사이클이 비록 언제나 반복되는 아방가르드의 귀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다시 한 번 무너져 내리겠지만 말이다. 정지돈과 금정연은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기 이전에 사실 이러한 문장을 먼저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정연은 메일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to the future이라고 답했고 금정연은 다시 we are the future라고 답했다.”9그렇다.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전 같아지지 않은 미래를 바탕으로, 다른 미래, 다른 전망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미래다, 라는 비약은 어쩌면 정말로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종언의 이후의 다음의 세계에서, 일단은.

2015년에 어느 정도 주목을 이끈 믹스테잎 [PRODUCT]에 이어서, 소피는 작년에 첫 정규 음반 [Oil of Every Pearl’s Un-Insides]로 많은 주목을 이끌었다. 이 열렬한 관심에는 트렌스젠더로써 그의 퀴어성(queerness)를 숨기지 않고, 음악과 그에 수반하는 이미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세계에 균열을 낸 점이 많은 의미를 차지했다. 하지만 물론, 소리의 측면에서는 소피가 PC 뮤직(PC Music)이 한 두 해 전 선보였던 버블검 베이스(Bubblegum Bass)를 그만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이를 파괴적인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맞물려서 들려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타이니 믹스 테입스(Tiny Mix Tapes)은 2018년 연말 결산에서 이 모든 특징들을 함축해서 “세계의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 소피가 던지는 급진적인 제안은 단지 우리 자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성보다 더 급진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10라고 그의 음반을 평했다.11 나 또한 그러한 급진적인 가능성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 다시 가져온 급진적인 육체성에 담겨져 있고, 어쩌면 균열을 일으키고 전복을 다시금 시작할 수 있다고도 본다. 단순히 그 기괴한 육체들이 존재할 뿐이더라도. 거기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계(Whole New World)를 상상할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Oil of Every Pearl’s Un-Insides]의 마지막 노래 제목처럼 심지어 가상의 세계(Pretended World)일지라도 말이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어쨌든, 나는 이 기이하고 으스스하게 해체된 육체들이 적어도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되살릴 마음조차 없고, 그렇지만 여전히 기생충처럼 살아있는 무언가를 이상한 방식으로 되살리며, 다른 모든 때와 다르게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이 한 순간을 어느 정도 대표하고, 좀 더 나아가 새로운 형식의 미래와 전망을 상상할 수 있는, 형체이자 소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비슷한 방식으로 돌아온 실험성과 아방가르드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모든 게 다 망가지고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완벽하게 무너지거나 망하지 않은 세계다. 언제까지나 최후의 종언을 끝없이 유예하면서 계속되는 그 세계의 끝, 세계의 최후의 마지막 결말의 끝.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은 그러므로 더 나쁜 쪽으로, 0 이하로 갈 여지가 아직도 충분히 많으며, 어쩌면 그 이후의 새로움을 상상할 수도 있는 이 세계의 배경음악이다. 미래가 예전 같지 않고, 모두가 이 세계 속에서 뒤틀린 낭만과 노스탤지어의 육체에 파묻혀 절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절망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이르다고, 그럼에도, 실로 수많은 것들이 어쨌든 계속되고 있다고, 그럼에도, 나는 느낀다. 일단은. 심지어 이러한 꼴이더라도. 일단은. 그 계속되는 방식이 아무리 뒤틀렸더라도, 일단은. 음악이 나오고, 나는 몸을 흔든다. 일단은. 그러면 뭐라도 되겠지, 일단은. 그렇게 다시 한 번 미쳐 날뛰다보면, 뭔가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그리고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똑같은 노래가 아흔아홉 번째 흘러나오기 시작한다.12 김사과는 「매장」을 ‘매장’이라는 이름의 장으로 끝내는데 여기에는 Burial, “In McDonalds”, Untrue, 2007이라는 주석이 달렸다. 마크 피셔의 사후 사이먼 레이놀즈는 「왜 베리얼의 [Untrue]가 이 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자음악 음반인가」에서 피셔를 인용하며 베리얼을 설명한다: “한 때 레이브로 광란에 차있었던 버려진 공간으로 걸어가거나 그곳들이 절멸된 채로 유기된 걸 보는 것과 같다. 조용한 에어 혼은 레이브라는 과거의 유령처럼 타오른다.”13 14낭만의 유령들마저 사라지고, 결국에는 유기된 육체를 가진 좀비나 괴물만이 그들과 비슷하게 해체된 음악을 들으며 떠돌아다니는 클럽들.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 미래가 무엇인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기에 다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나이브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러니까, 나는 20세기 끝자락에 태어났지만, 20세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21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점점 성인이 되어가고, 21세기는 기어이 20세기를 먹어치우고 있는데다가, 20세기는 이제 훨씬 더 기억하기 힘들어지는 과거가 될 것일 테고, 21세기는 어쨌든 내가 죽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나는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에서 내가 20세기를 기억하지 못하므로 20세기의 대중음악과 문화적 유산에 경험적으로 빚진 것이 전혀 없다고 쓴 적이 있다. 2010년대가 천천히 끝나가고 있고, 내년은 2020년이다. 20세기는 이미 20년 전의 일이고 더욱 더 멀어질 것이다. 끝은 또 하나의 시작, 시작은 또 하나의 끝. 모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시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 나는 끝나가는 미래의 마지막 끝자락이 만들어놓은 균열에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고 똑같은 노래가 이제 백 번째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렇다. 미래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 나원영 [email protected]

 

Rating: 8/10

 

수록곡
1. DAEBOOK
2. Ageing process
3. Transience
4. Non-self
5. Sad Relationship, Nami
6. Looking back

 


“DAEBOOK”

 

  1. 앤드류 브로크스, 「미래가 그립습니까? : 마크 피셔 인터뷰」,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2014
  2.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4, 375쪽
  3. 정구원, 「JELLVAKO “Vision”」, [weiv], 2019
  4. harsh industrial sounds recall no-wave’s minimalist deconstruction
  5. the belief that there is no unchanging, permanent soul or essence in living beings
  6.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4, 404쪽
  7.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주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주체로써 ‘몸’과 ‘살’의 개념을 제시했다. 현상의 장을 감각하는 주체는 객관적인 정신 혹은 자아가 아니라 몸과 신체 등이다. 이렇게 육체/자아의 이분법은 몸과 살을 통해 해체되고, 더 나아가 세계를 지각하는 것에서 이어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자체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게 몸은 ‘육화된 의식’으로써 지극히 구체적으로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8. 김사과, 『천국에서』, 창비, 2013, 330쪽.
  9. 정지돈, 금정연 『문학의 기쁨』, 루페, 2017, 240쪽. 이는 이상우, 『프리즘』, 문학동네, 2015, 291쪽에서 재인용됨.
  10. At a time when global healing seems impossible, SOPHIE’s radical suggestion is simply that our selves are possible, and there’s nothing more radical than possibility.
  11. Jazz Scott, 「2018: Favorite 50 Music Releases」, Tiny Mix Tapes, 2018
  12. 김사과, 『02』, 창비, 2010, 245쪽.
  13. like walking into the abandoned spaces once carnivalized by raves and finding them returned to depopulated dereliction. Muted air horns flare like the ghosts of raves past.
  14. Simon Reynolds, 「Why Burial’s Untrue Is the Most Important Electronic Album of the Century So Far」, Pitchfork,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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