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미래는 양립할 수 없는 결정이다. 모든 사건은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여야 하지만, 어떤 사건도 하나 이상일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사건이 과거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현재도 미래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사건들도 그렇다. (J. M. E. McTaggart, “The Unreality of Time”)1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이며,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너무 당연한 동어반복적 문장 같지만, 시간 개념에 관하여 더 제시할 수 있는 문장이 없기에 우리는 이런 뻔한 문장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시간에 관해서는 이 동어반복적인 문장 외의 모든 문장은 모순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즉, “과거는 현재다.” 혹은 “현재는 미래이다.”와 같은 문장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모순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 모순을 피해 가기 위해 애쓴다.

이는 음악에 대한 비평적 진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음악 비평가들이 어떤 음악에 대해 논할 때 과거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으면서도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잔나비, 백예린, 죠지, 구원찬, 도시(dosii) 등등 ‘뉴트로’라는 표현 하에 아주 느슨하게 하나로 묶이는 동시대 음악가들에 대한 비평적 진술들이 대표적이다.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만든다.”, “과거지향적인 음악이다.”, “옛 시절의 감성을 복원한다.”, “19xx년대의 음악을 재해석했다”, “과거를 재현한다.”…… 과거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현재의 음악을 논하는 데 있어서, 어쩌면 이런 방식은 앞서 언급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용된 소리들이 환기하는 분위기나 악기 구성과 같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음악들과 유사하다는(혹은 공통점을 갖는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해 보인다. 이를테면, 언급된 음악가들이, AOR이나 시티팝처럼 과거’적’인 음악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은 장르들부터 015B와 토이를 연상시키는 90년대의 발라드,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국내에서의 소프트 팝/록까지, 익숙한 과거의 장르들을 양식적인 측면에서 노골적으로 떠오르게끔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양식적 측면에서 과거와의 유사성만을 논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라면, 이들 음악을 다룰 때 굳이 과거를 ‘지향’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저 과거와 현재의 유사성에 대한 정확한 기술만으로 충분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음악 비평가들의 ‘뉴트로’를 둘러싼 비평들은 과거를 ‘지향’하고 있다. 내 의문은 이렇게 (‘뉴트로’ 그 자체보다는) ‘뉴트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비평의 과거지향을 향한다. 대체 왜 많은 비평들이 지금-여기의 음악에서 과거로 향하는가?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과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대체 왜? 하지만 아무도 이 질문들의 답을 들려주진 않는다. 나만 쏙 빼놓고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별다른 정당화도 없이 과거지향적 비평을 당연하다는 듯 수행한다.

(후술하겠지만) 많은 비평가들의 이러한 지향 뒤에는 ‘과거적인 음악으로부터 2019년 동시대의(혹은 청년들의) 감성을 알 수 있다.’ 따위의 전제가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감각들과 경험들을 어떻게든 과거의 것들로 환원시켜 분석해보겠다는 목표 하에서, 이 전제는 별다른 검증이나 정당화 없이 맹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 전제는 오직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가 그 이전 상태의 결과이며 앞으로 있을 상태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그의 눈 앞에 나타날 것이다.”2라는 라플라스의 모델이 성립할 때에만 비로소 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라플라스식 모델은 이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폐기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미, 과거의 모든 변수들을 알고 있더라도 그것으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확실하게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결정론적 모델이 헛된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뉴트로’를 둘러싼 맹목적인 과거지향적 비평과 그 기저에 자리한 음험한 어떤 믿음(혹은 얄팍한 어떤 소망)에 대해 비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비판에 앞서, 문제 삼았던 문장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한다. 모두 공통으로 과거를 경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교묘하게 과거와 현재를 직접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발화자가 명백한 모순임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해당 진술들은 모두 특정한 방향성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과거지향적인 음악이다.”라는 진술의 경우, ‘지향적(intentional)’이라는 방향성을 내포하는 개념을 사용하여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고자 하는’ 음악이라고 은연중에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노스탤지어’라는 표현 자체가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기에, 노스탤지어 개념을 포함하는 진술에서도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현(represent)’, ‘재해석(reinterpret)’, ‘복원(restore)’처럼 ‘다시(re-)’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 사용된 경우에도 현재에서 과거의 대상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진다.3

흥미롭게도, 이러한 방향성은 심리철학에서 다루는 지향성(Intentionality)과 유사해 보인다. (심지어, 우리는 앞서 ‘과거지향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노골적으로 지향성 개념을 포함한 경우도 보았다). 지향성이란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한 지칭(Reference to an object)’을 의미한다. 이때,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은 “의식을 갖고 지각, 사고, 판단 등을 하는 정신적 행위의 주체가 외부 세계의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그런 행위의 대상으로 가짐”4을 의미한다. 더 넓게는, 지향성은 “대상, 속성, 사태에 대하거나(be about), 표상하거나(represent), 나타내는(stand for) 마음과 심적 상태의 힘”5을 뜻하기도 한다. 지향성을 세부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지향성은 우리의 다양한 심적 상태들 중 믿음이나 희망, 의도 등과 같은 상태들에 만연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혹은 무언가를 믿고, 무언가를 소망하며, 무언가를 의도하는 등 외부 대상을 향해 그 심적 상태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향성은 방향성과 비슷해 보인다. 심적 상태로부터 외부 대상을 향할 때, 지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뉴트로’로 분류되는 음악들에 관한 비평적 진술들이 포함하는 과거로의 방향성과 앞서 살펴본 지향성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역으로 지향성이 그러하듯 그 방향성을 전제로 삼는 어떠한 믿음이나 희망 혹은 신념 따위를 추론해보고자 하는 유비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그렇다면,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는 비평적 진술들은 어떤 믿음이나 신념을 함축하는가?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음험한 어떤 믿음 혹은 얄팍한 어떤 신념을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과거를 ‘굳이’ 지향해야 할 만큼 혹은 과거로 ‘굳이’ 향해야 할 만큼, 과거가 현재보다 더 나은 무언가(였다)라는 믿음이다. 심지어, (앞서 잠깐 언급했듯) 과거는 아주 엄청난 시간이어서 결코 그것과 동일시될 수 없는 현재까지도 표상할 수 있다는 기괴한 문장까지 마주하게 된다.

이제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믿음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지향성을 내포한 모든 진술들이 어떤 믿음이나 신념을 함축한다면, 그 믿음이나 신념의 주체는 바로 진술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살펴본 비평적 진술의 방향성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신념이나 믿음의 주체는 곧 그 진술의 주체인 비평가이다. 그렇다면 ‘그’ 비평가는 누구인가?

나는 그들이 X세대 언저리의 비평가(들) 혹은 그 자장 안에 있는 비평가(들)이라고 생각한다.6 가장 대표적으로는 차우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잔나비에 대해 설명하며 “이런 옛날 감성을 반영한 잔나비의 노래가 정확하게 겨누는 게 2019년 동시대 청년들의 마음”7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그 근거로써 스스로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언급한 “노스탤지어”를 언급할 뿐이다. 또한, IZM의 김도헌은 잔나비의 2집 [전설]에 대한 리뷰에서 해당 앨범을 “’세련된 촌스러움’이란 수식처럼 더 잔잔하고 부드러우며 영롱한 감성의 복원”8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해당 글이 끝날 때까지, 과거 음악들과 잔나비의 음악 사이의 양식적 연관성 외에는 어떠한 것도 언급한 “감성의 복원”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음악취향Y의 박병운은 “…훨훨 날던 꿈속 공간은 21세기에 이렇게 재현되었고…”9라고 표현하지만, 그 공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재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논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들은 현재의 음악을 다루면서 과거를 지향하지만 왜 그렇게 과거를 지향하는지, 더 나아가, 왜 과거를 지향해야 하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끝내 우리에게 뒤따라오는 물음은 ‘왜 그렇게까지 믿어야 하고 소망해야 하는가?’ 이다. 어떤 작품이 과거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작품에 대한 비평까지 과거지향적일 필요는 전혀 없다. 게다가, 이제 과거는 큰 의미부여의 대상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얄팍하고 납작하고 평면적인 취향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백예린의 음악을 떠올려보라. 앨범 [Our Love is Great]은 시티팝이 들려줄 법한 분위기를 앨범 전체에 걸쳐 품고 있지만, 시티팝의 문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또한 라이너노트나 인터뷰 등을 통해 AOR이나 시티팝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기에, 그것들과의 특별한 역사적 연관성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앨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윤석철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컨템포러리 재즈의 악기 구성이나 카더가든과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 낸 R&B의 흔적들이다. 다만, 백예린이 공백기 동안 커버했던 “La La La Love Song”의 잔상이 모종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는 있겠다. 이렇듯 지극히 동시대적인 요소들로 이 앨범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기에, “시티팝”을 비롯한 과거의 것들은 백예린 앨범의 수많은 구성 요소들 중 하나를 평범하게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예린 “La La La Love Song”

 

이를 앞서 언급했던 ‘뉴트로’로 호명되는 음악들 전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동시대의 음악들에 담긴 과거의 요소들조차도 병렬된 수많은 “서울-플랫”10의 일부일 뿐이다.11 적어도 내게는 이러한 사실이 꽤 자명해 보인다. 허나, 그들은 이를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어쨌건 그들은 동시대의 음악으로부터 과거를 끊임없이 ‘지향’한다.

(과거의) 플랫함이 그렇게 두려운가? 더 이상 과거의 것들이 유서 깊은 역사나 진정성의 소중한 증거가 아니라, 아주 납작하고 평면적인 소비 기호의 하나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가? 하지만 나는 과거가 그렇게 플랫해져 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아직도 과거를 잃고 싶지 않아 하는 이들이 더 두렵다. 그리고 나는 과거를 포장하기 위해 과거의 요소들로부터 동시대와 미래까지 도출해낼 수 있다는 철 지난 라플라스식 모델을 신봉하는 그들이 가장 두렵다. | 전대한 [email protected]

 

 

 

  1. J. Ellis McTaggart. 1908. “The Unreality of Time”. Mind. 457-474
  2. Pierre Simon Laplace. 1814. 『확률에 대한 철학적 시론』. 지식을만드는지식. 조재근 역. pg 30.
  3. 위와 같은 진술들이 방향성을 포함하는 진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진술들이 함축하는 바는 사실 “백예린의 음악은 과거의 음악이다.”라던가, “잔나비의 음악은 1970년대의 소프트 록이다.”와 같은 모순을 포함한 문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백예린의 음악은 분명 현재의 음악이고, 잔나비의 음악은 2019년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4. 정성호. 2008. “지향성의 개념과 탐구방향”. 철학, pg 123.
  5. P. Jacob. 2003. “Intentionalit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6. 물론 내가 사례로 든 비평가 중에서 차우진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X세대에 해당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나머지 두 비평가가 속한 매체(IZM과 음악취향Y)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큰 비약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7. 차우진. 2019. “잔나비는 왜?”. 디에디트.
  8. 김도헌. 2019. [전설] 리뷰. IZM.
  9. 박병운. 2019. [Single-Out #241-3]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음악취향Y.
  10. 김뺘뺘. 2017.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 (1)”. 옐로우 펜 클럽.
  11. “서울은 플랫해서 슬프고 한스럽다. 900원짜리 아메리카노에 800원짜리 핑크빛 마카롱을 곁들여 산책을 하면서 미세먼지를 한바탕 뒤집어쓰면 그저 애환이 밀려든다. 기괴하면서도 기발한 태극기 패션과 생존형 농성 텐트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어딘가 한 구석이 쓸려 무너져 버리는 심상은 가시지 않는다. 평소보다 약간 비싼 저녁을 사 먹으며 그것이 “YOLO” 라이프 스타일이라며, 혹은 가성비는 괜찮았다며 분수없는 지출을 정당화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프레임이 여럿으로 갈라진 K-POP 아이돌 뮤직비디오 리액션 클립을 수없이 돌려본다.”(김뺘뺘). 2019년의 서울은 다음의 문장이 이 문장들 뒤에 따라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로우-파이하게 연출된 뮤직비디오가 있는 ’시티팝’ 딱지가 붙은 노래들을 유튜브를 통해 듣는다.” 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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