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9년 9월 11일 월요일
장소: 서교 B+
질문, 정리: 나원영 [email protected], 정구원 [email protected]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의 두번째 인터뷰이는 잠(Zzzaam)의 박성우와 최소희다. 1990년대 후반에 결성되어 2004년까지 [낮잠], [Requiem #1], [거울놀이]라는 세 음반을 연달아 내고, 드럭부터 빵까지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는 등, 잠은 00년대 초반 인디 록의 가장 열정적이고 중요한 밴드였다. 이 당시의 치열한 원동력을 돌아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원영: 잠의 첫 결성은 1997년에서 1998년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최소희 님께서도 99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당시에 멤버 분들이 어떻게 만나서 잠을 결성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성우: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집에서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도저히 기억이 안 나더라구요.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최소희: 그래? 나는 살짝 기억나는데? 아, 근데 너가 드럭에 왜 왔는지 모르겠어. (웃음) 나는 드럭에 원래 있었는데, 네가 왜 왔는지 모르겠더라고. 저는 드럭에서 밴드들이랑 친해졌어요. 고3 때 제 사촌 언니 따라서 드럭에 처음 갔는데, 어떻게 밴드들이랑 알게 되어가지고 친하게 지내면서 거기에 놀러가는 애였어요. 음악은 중학생 때부터 하고 싶어하긴 했는데… 사실 저는 록 음악이 베이스가 아니거든요. 흑인음악, 힙합, 소울, 이런 걸 많이 들었죠. 진짜 제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지금은 완전 힙합이 대세잖아요. (웃음) 그 때는 진짜 없었어요. 친구들 찾기가 너무 어려워서 향뮤직이나 《GMV (지구촌영상음악)》 같은 잡지 독자 코너에 ‘친구 찾음’ 이런 거 올리고 펜팔 구하고 (웃음) 그런 식으로 친구 만나던 시기였죠.
그래서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었고,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어쩌다가 드럭에 갔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분위기도 너무 좋고. 주로 그 때는 크라잉넛이 인기가 많았는데, 저는 옐로우 키친 좋아했어요. 순주1 언니를 너무 좋아했죠. 옐로우 키친이 크라잉넛이랑 낸 스플릿 앨범([Our Nation])에 실린 “Betty Sticked The Fork In Her Eyes”를 너무 좋아했어요. 크라잉넛 오빠들이나 이런 사람들한테 저 이거 기타를 좀 알려달라고, 테마를 배워가지고, 기타 잘 칠 줄도 모르는데 그거를 배웠어요. 근데 금방 치게 됐어요 그러면서 기타 옆에서 조금 치고 이랬는데… 그러고 나서 너네가 나한테 베이스 치라고 그랬지.
박성우: 97년? 저도 고등학교 졸업했을 때였는데, 드럭에 공연 보러는 몇 번 갔었어요. 소희처럼 저도 백스테이지라고 하는 음악 감상실에 구인 광고를 내서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 친구가 드럭에 있었어요. 그 친구가 잠의 드러머였었는데, 걔가 밴드하지 않을래 하고 제안을 해서 드럭에서 시작하게 되었죠. 소희의 경우에는… 그냥, 쟤는 소희구나, 그 정도?
최소희: 그냥 아는 애. 그냥 술 몇 번 먹고.
박성우: 술도 마셨나? 이 친구가 흑인음악 좋아했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되게 좋았어요. 음악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
최소희: 내가 힙합 바지 입고 그랬거든요. (웃음)
박성우: 그래서 눈여겨보고 있었던 거 같아요. 드럭에서 잠 드러머가 그 때 기타 치고, 저도 기타치고 같이 하던 밴드가 있었는데, 그 밴드가 그냥 흐지부지되었어요. 근데 거기서부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우리가 왜 시작을 하게 되었는지…
최소희: 그냥 뭐, 우리 밴드 해볼래, 뭐 이렇게 했겠지, 너랑 민수랑.
박성우: 그렇겠지, 근데 그게 과정이 기억이 잘 안 난다? 술 마시다가 그랬나?
최소희: 아무튼 그래서 제가 영입된 거예요. 여기서 애매한 건 제가 99를 먼저 했는지 잠을 먼저 했는지 그 부분인데…
박성우: 99는 나중이었지. 그 베이스가 기완이 형2이 준 거잖아.

 

최소희: 그래서 잠을 먼저 시작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났는데, 드럭에 절 데리고 간 사촌 언니가 강아지 문화 예술이라는 레이블에서 뭘 했어요, 팀 같은 거 만들어서, 보컬을 했었거든요.
정구원: 밴드를 하셨던 거예요? 뮤지션으로?
최소희: 네, 그 언니가 거기서 뭔가 준비를 했는데, 합주하고 그랬다고 들었어요. 언니가 원래는 삐삐밴드 보컬을 하려고 했어요. 삐삐처럼 생겼거든요. ‘삐삐밴드’란 이름도 그 언니가 지은 이름이에요. 아무튼 그러고 나서 강아지 문화예술도 그 언니 때문에 가게 됐는데, 기완이 오빠가 베이스를 구한다, 어디 베이스가 없냐 해가지고 이 언니가 저를 소개를 한 거예요. 근데 저는 그 때 완전 초짜였거든요. 베이스 잡은 지 몇 개월도 안 된 그런 애였는데, 가서 오디션은 봤어요. 내가 칠 줄 아는 거를 살짝 쳤는데, 기완이 오빠가 하자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베이스도 주고, 펜더(Fender) 베이스를! 잠에서도 그 베이스를 아주 잘 썼죠.

 

나원영: 99 얘기가 나온 김에 질문을 드리려고 해요. 99의 음악을 들어 보면 포크, 록, 랩 등 굉장히 다양한 장르가 합쳐졌고, [스케치북]에서는 다양하게 모인 녹음된 소리들을 샘플링하거나 전자음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런 99의 독특한 조합들이 어떻게 나타났고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까 흑인음악에 관심이 있으셨다고 하신 것도 있고요.
최소희: 99 같은 경우에는 거의 기완 오빠가 작업을 혼자서 다 했어요. 그 때는 미디(MIDI) 같은 것도 잘 안 되어 있어서 그 오빠 테이프 레코더로, 강아지 문화 예술에서, 혼자 녹음 다 받아가지고 편집하고 그런 식으로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한 역할은 그냥 베이시스트 정도. 전 곡에 다 연주한 것도 아니었어요. 몇 곡 정도만 했죠. 모든 아이디어는 기완 오빠가 냈고요. 그 분이 시인이니까 그 연장선에서 자기표현을 했던 거라고 할까요? 저는 거기서 도움만 주는 역할이었죠.
나원영: 사실 성기완 님이 중심에 있었다고 하셔도, 다양한 스타일을 다양한 분들이 하나로 합쳐서 음반을 만들려면 연주하시는 분들도 참여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봤어요.
최소희: 그렇죠. 그 앨범의 색깔이 여러 가지잖아요, 근데 기완이 오빠가 음악을 좋아하는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까… 록 음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흑인 음악도 되게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 걸 시도를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새롬3이라는 래퍼도 제가 아는 친구가 아니라 오빠가 직접 구해서 진행했어요.

 

나원영: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시기는 ‘인디’라는 시도들이 조금씩 정착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시도하는 과도기적인 때라고 느껴집니다. 이 당시 씬에서 인기 있었던 밴드들(가장 유명하게는 언니네 이발관이나 크라잉 넛 같은 밴드들)보다 좀 더 실험적인 부류의 인디 록을 만들거나 즐기는 사람들 사이의 대략적인 분위기가 어땠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최소희: 제 생각에는 우리가 과도기라기보단 부흥기에 활동했던 거 같아요. 인디 밴드가 이제 알려지기 시작하던 그 때.
박성우: 인디가 소개되고, 크라잉넛은 살짝 메이저에 걸쳤을 때. 저희가 밴드를 시작할 당시에는 옐로우 키친이 드럭에서 활동을 안 했고,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 본, 위퍼 등만이 활동하고 있었어요. 제 기억을 되돌아보면 소희 얘기처럼 인디가 막 사람들에게 소개되던 시기였는데, <6시 내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에 스팽글이나 드럭 같은 데가 한 번씩 나오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최소희: 맞아, 그 때 TV에 좀 많이 나왔어요.
박성우: 그 때는 인터넷도 잘 안 되던 시절이었고… 그래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졌던 분들이 홍대 쪽에 하나 둘씩, 클럽 쪽에 와서 공연을 관람하거나 그랬던 것 같아요.
최소희: 크라잉넛은 TV 출연하고 막 유명해지고 이러고 있는데, 그 때 저희는 이제 드럭에서 한 달 동안 공연을 시작한 그런 상태였어요. 그렇게 공연을 하고서는 스팽글에 갔고, 그리고 빵에도 갔고, 번갈아가면서 공연을 했어요. 스팽글에서 공연했을 때가 1집 내기 전이었는데, 공연을 셋이서 하면 관객이 진짜 없었어요.
박성우: 드럭에서 크라잉넛하고도 한 두 번 공연을 했었던 것 같은데, 크라잉넛은 그 당시에 뭐 거의 일주일에 한 사일을 쭉 공연했거든요. 지금처럼 큰 무대가 아니라 좁은 곳에서 정기적으로 늘 공연을 했는데, 우리는 거기에 같이 참여하는 정도였죠. 드럭에서 처음 공연을 했을 때 한 서너곡 정도 연주했었나 싶어요. 그러고 나서 소희가 드럭 아저씨가 싸웠고…
최소희: 나랑 드럭 아저씨랑 싸웠다고? 내가 아저씨랑 왜 싸워?
박성우: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최소희: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그 때가 크라잉넛하고 노브레인이 유명할 때니까, 펑크가 막 부흥할 때란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펑크를 기대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공연하면 담배 피는 타임이라고… 그래서 한 달 정도 공연을 했는데 여튼 드럭 아저씨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한다 이런 얘기를 들었나? 그래서 싸웠나? 아니면 그냥 우리가 나갔나…
박성우: 아 너 그거 때문에 욱해가지고 싸웠겠네, 딱 그거네… 그리고 처음으로 스팽글을 갔을 때 기억나는 게… 코코어랑 같이 했었죠. 마이 앤트 메리, 은희의 노을, 이런 밴드들하고도 같이 공연했고. (드럭 공연할 무렵에도) 스팽글에서 어떻게 연락이 왔었는데, 저희도 거기서 공연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드럭은 약간 패밀리 개념이 있어서 가도 되나 싶었죠. 드럭 아저씨가 너네 스팽글도 간다며? 그런 얘기도 했었는데. 근데 때마침 싸워가지고 나가게 돼서 스팽글을 갔고…

 

최소희: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부흥기’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면, 처음에 저희가 공연을 할 때에는 진짜 관객이 막 두 명밖에 없었어요. 근데 저희가 공연을 하다가 한 명이 화장실 가서, 제가 “반 이상이 빠져나가서, 다시 돌아오면 진행을 하겠다” 이런 멘트 했던 기억이 나요. (웃음) 한 명도 없어서 그냥 쉰 적도 있고요. 그 날 스팽글 사장님(조성숙, 김현희)들이 “야 우리 오늘 그냥 술 먹자 한 명도 없으니까” 이런 적도 있거든요. 스팽글에서도 그 정도로 사람이 없었지만 그냥 그런대로 공연을 해 나갔어요. 근데 1집 내고 나서던가? 뭔가 그 때부터 슬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2집을 냈을 때부터 관객이 조금 많아졌어요. 빵이 꽉 차고, 뭔가 그런 시기를 지났던 거 같아요. 그런 밴드들도 많이 생기고.
박성우: 스팽글이 좀 안타깝죠. 99년에 없어졌나? 우리가 드럭 나오고 스팽글 위주로 활동하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스팽글에 전체적인 관객이 얼마 없었던 거는 아니고, 당시에 인기 있던 밴드도 있었고, 고정 팬들이 있는 밴드들이 몇 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잠은 그 당시에 완전 초보 신인 밴드여서… 그래도 비슷한 몇 팀들을 묶어서 섞이거나… 껴들어서 같이 공연하는 그런 팀 중 하나였어요.
정구원: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클럽별로 밴드나 스타일이 훨씬 더 갈리고 분리되어 있던 것 같아요.
최소희: 좀 그랬던 거 같아요. 우리는 재머스나 롤링 스톤처럼 헤비한 하드록 하는 데에는 안 갔으니까요. 그러니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스팽글이나 빵에 모이는 거예요.
박성우: 클럽이 일단 별로 많지 않았던 것도 있었어요. 지금은 클럽 외에 소규모라도 전문 공연장들이 많아졌지만요. 빵도 그 때는 이대 후문에 너무 멀리 있어가지고 아예 가지도 않았었는데, 스팽글이 없어지고 나서 이제 빵 쪽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 같아요.

 

나원영: 그러면 클럽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그런 음악들을 좋아하고 만드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건가요?
최소희: 그랬던 거 같아요. 다 그렇게 만나지 않았나? 데이슬리퍼처럼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다 그렇게 만났던 거 같아요. 슬로(쓰루 더 슬로)도 그랬고.
박성우: 그런 팀이 몇 팀은 있는데, 사실 드럭 같은 곳은 말씀드렸다시피 그 당시에 약간 ‘패밀리’ 개념이 좀 있어서 음악적으로 달라도 같이 다닌다, 그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스팽글 같은 경우는 제 생각에는 전혀 안 그랬어요. 서로 다들 되게 수줍어했고, 그 때 한창 어려운 시기, IMF… 우울… 이런 느낌인 것도 있었고. (웃음) 술자리는 많이 다녔는데 음악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런 게 있진 않았던 것 같아요.

 


“낮잠”

 

나원영: 잠이 처음에 낸 음반 [낮잠]에 대한 질문입니다. [낮잠]을 듣고 처음으로 든 인상은 슈게이징이나 노이즈 록 계열의 인디 록이 사이키델릭하게 섞였다는 느낌이었습니다. ‘Zzzaam’이라는 멋진 언어유희에 걸맞게 사운드가 나온 느낌이었어요. [낮잠]을 만드실 때 어떤 과정이나 영향을 받아서 이런 분위기나 사운드가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최소희: 피드백이란 클럽이 있었어요. 스팽글 문 닫고 빵 갈 무렵에 우리가 거기서 놀았지. 빵이랑 피드백이랑 같이 다녔어요. 그런데 피드백에서 먼저 저희에게 제의를 했어요. 앨범 녹음을 하자고. 그래서 “농담”을 피드백에서 처음 녹음했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잘 진행이 안 돼가지고, 에이 못해, 못해먹겠다, 그러고 나서 우리끼리 해보자, 이렇게 결정을 했어요
박성우 : 추가로, 이 즈음 카바레사운드에서도 녹음제의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하다가.. 결국엔 안 되었지만요.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 드럭을 나오고 스팽글 활동을 하다가, 스팽글이 문 닫고, 피드백과 빵 활동을 하며 라이브를 통한 연습과 경험으로 녹음의 과정을 자연스레 밟아온 듯해요. 그 때 영향 받았던 밴드들로 분위기나 사운드도 어느 정도 만들어졌고요.

 

나원영: 피드백에서 녹음하려던 걸 그냥 자율적으로 녹음하는 걸로 간 거군요.
최소희: 그 때 채송화라는 밴드가 있었어요. 김남윤 덕분에 알게 된 것 같은데, 우람4이랑 박열5이 그 밴드에서 활동했거든요. 근데 박열이라는 애가 레코딩에 관심 있었어요. 걔가 레코딩을 해 보자고 하더라구요.
박성우: 그 팀도 공연 자주 하는 팀은 아니었는데, 피드백에서 몇 번 같이 공연한 적은 있었어요. 그래서 녹음은 그 당시 펑크 밴드 중에 배다른 형제라는 밴드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 이라기보다는, 그분들 얼굴도 한 번 못 봤네요. 박열이란 친구가 그분들과 친분이 있어서… 그 때문에 녹음을 한 거고 거의 연습실에서 드럼, 베이스, 기타, 웬만한 건 다 거기서 녹음했네요. 기찻길 옆 고깃집 골목에 있던 연습실에서.
최소희: 열이네 집에서도 녹음을 했었던 것 같은데… 아, 노래 녹음했었다.
박성우: 노래랑 간단한 기타 같은 걸 거기서 했죠.
최소희: 박열이란 친구가 피리과랑 피기비츠(PIGIBIT5)란 밴드도 했었고, 던바 레코드도 차려서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 때부터 관심이 있었구나 싶어요. 제 솔로 3집도 걔 녹음실에서 몇 곡 했던 게 있고요.

 

나원영: 그러면 [낮잠]을 만들 때 이렇게 만들고 싶다, 아니면 이런 것처럼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랬던 게 있었나요?
박성우: 너무 다양한데, 그 당시에 생각했던 건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많이 들었고, 오늘도 오랜만에 들었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그리고 우리가 커버했던 곡들이 제일 영향을 많이 준 거 같아요. 벨벳, 소닉 유스(Sonic Youth), 픽시스(Pixies), 그 정도? 그렇게 세 밴드를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최소희: 그리고 저희는 어떻게 보면 라이브로 연주했던 곡이랑 그렇게 많이 다르진 않아요. 물론 거기에 트랙이 쌓이고 이런 건 있지만, 기본적으로 라이브랑 별 차이가 없구나 싶어요.
박성우: 재밌는 게, 예전에 잠 홈페이지가 우리하고 친한 음악 하는 친구들한테 하나의 커뮤니티 같은 역할을 했었거든요. 사람들이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웃긴 것도 올리고, 축구 얘기도 하고. 근데 거기에 누가 대뜸 ‘시규어 로스(Sigur Rós)랑 비슷한 거 같아요’ 이런 글을 올렸거든요. 근데 저는 시규어 로스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런 음악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최소희: 그리고 모과이(Mogwai)도, 채송화 애들은 되게 좋아했는데, 우리는 ‘야 잘 모르겠다’ 이랬고. (웃음) 저희는 말한 것처럼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소닉 유스, 픽시즈, 페이브먼트(Pavement), 이런 팀들을 좋아했어요. 아 맞다,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도 좋아했고요.

 

나원영: 그러면 페이브먼트나 소닉 유스, 픽시즈 같은 밴드들에서 받으셨던 어떤 인상이 있었을 텐데, 그거를 가지고 [낮잠]의 곡을 만들 때 이런 걸 해보고 싶다, 고 생각하신 게 있으신가요?
박성우: 노이즈 같은 거는 당연히 소닉 유스의 영향을 받았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최우선을 개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까처럼 뭐나 뭐랑 비슷하다 들으면 아 씨 진짜, 뭐 이런, 이랬었고… 당시에 삼인조로 활동했었는데, 삼인조에서 최대한 독특하고 더 풍성한 사운드를 내려고 신경을 썼던 거 같아요. 당시에는 연습실도 따로 없었는데 드럭이나 스팽글에선 연습을 할 수 있었긴 했어요. 없어지긴 했지만… 연습실을 돈 내고 구하는 것보다는, 그 당시엔 라이브가 거의 연습이었거든요. 연습을 막 해서 공연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어떻게든 해야 되니까 투닥투닥. 어쨌든 그런 식으로 삼인조의 한계에서 최대한 라이브를, 얼마나 더 독특하고 더 풍성한 사운드를 낼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셋이서 나름 음악적인 센스들이 다 있어 가지고 잘 어우러졌죠.

 

나원영: 소희 님의 경우에는 어띤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셨나요?
최소희: 1집 때 같은 경우에는, 성우가 보통 거의 테마를 만들어 와요. 그것을 뼈대로 삼아서 합주하면서 완성해가는, 그런 식으로 했던 거 같아요. “낮잠” 같은 곡에서 기억에 남는 게, 코드가 두 개였나? 반복적인 부분이 있는데, 사운드 메이킹을 성우가 하고 나면 고조되거나 하는 부분에서 베이스 코드를 조금 더 넣는다거나, 드럼이 갑자기 다듬이질 하듯이 치는 부분을 넣는다거나 했어요. 서로 만들어가면서. 그런 부분이 참 재밌었어요. 지금은 다들 미디를 하니까, 다 완성해간 다음에 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연주자들한테 그러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 정말 그냥 날것을 가지고 만들어 나갔던 거죠.
박성우: 맞아요, 2집 때도 사실 그랬는데, 멤버들의 케미컬이 좋았어요. 그냥 리프 몇 개 만든 다음에 이렇게 한 번 해볼까? 하면 그냥 알아서들 해주고, 거기서 또 다른 게 나오고…
최소희: 그러다가 성우가 노이즈 넣고 갑자기 막 올라가면서… 그렇게 했던 거 같아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밴드 하기가 되게 어려운 거 같기도 해요.

 

 

나원영: [낮잠]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소량 배포했다고 알고 있고, [Requiem #1]도 마찬가지로 자체 제작을 통해 조금만 판매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음반을 내시고 난 뒤에 나름 팬이 생기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해서 팬 분들을 만나고 교류를 하고 홈페이지까지 만드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2009년에 쓴 어떤 블로그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잠 홈페이지에서 활동을 했는데 잠이 해체를 해서 뭐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런 글이 있더라구요.
정구원: 2016년에 “우포찾”에서 잠을 다뤘을 때, 거기 댓글을 달아주신 분도 있었어요.
박성우: 1집은 정말 그냥, ‘한 번 내보자’ 해서 만들어진 거에요.
최소희: 생각이 나는 게, 앨범 속지를 흑백으로 프린트했는데 한 사람씩 얼굴을 넣었거든요. 싸서 그랬나? 아무튼 그 속에 멤버들 얼굴을 하나씩 잘 안 보이는 걸로 해가지고 사진을 하나씩 넣었어요. 근데 성우가 홍명보를 넣었어요. (웃음) 얘가 축구를 너무 좋아하니까…
박성우: 후회하고 있어요. (웃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아무튼 그런 다음에 충무로 가서 인쇄를 했는데, 그것도 또 크기랑 사이즈가 안 맞아서 다시 뽑았었죠. 그리고 공CD를 100장 산 다음에, 그 당시 민수(드러머)한테 다섯 장씩 들어가는 CD 굽는 기계를 빌려서 열심히 굽고, 케이스랑 표지 수작업으로 조립해서 팔았죠. 뻑난 것도 있어서 교환도 해 주고.

 

나원영: 그렇게 해서 들은 분들이 팬이 되신 거겠죠?
박성우: 네, 대충 예상은 했어요. 라이브보다는 조금, 약간 더 반응이 있을 거다… 퍼플레코드 쪽에서 정산 받아서 피자랑 맛있는 거 먹고. 그 당시로선 굉장한 사치를 부렸었죠.
최소희: 1집은 저희가 수작업 해서 처음에 만든 걸 다 팔아가지고, 더 굽고 그랬어요.
박성우: 수요가 있으면 공CD 더 사서 스티커 붙이고, 표지 넣고… 나중에는 표지가 다 떨어져서 CD만 구워주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인들이 달라고 해서.
최소희: 스트레인지 프룻이라고 아세요? 거기 사장님이 잠 1집을 되게 좋아해요. 가면 틀어주시거든요. 그 분이 또 약간 오디오 매니아라서, 거기서 들으면 사운드도 좋더라고요. (웃음)

 

나원영: 홈페이지도 1집 내신 뒤에 만들어진 건가요?
박성우: 네, 인터넷이 막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에 굉장히 빨리 시작했어요. 김남윤이라는 친구가 그런 걸 또 좋아했고.
최소희: 참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녹음에 관심 있던 애들이 지금까지 녹음실 하고 그러더라구요. 그 때는 얘네들이 나중에 뭐가 될지 잘 몰랐는데, 이렇게 되려고 그 때 그거에 관심 있었나보다 싶어요. 우리가 녹음실도 차리게 된 게 약간 김남윤이 주도하지 않았나?
박성우: 맞아. 주위에 운 좋게도 그런 사람들이 하나씩 있어서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홈페이지도, 거의 그 당시 인터넷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라 도메인 따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최소희: 맞아, 그런 거 남윤이가 다 했었어. 아, 그리고 우리 병따개 나눠준 게 2집인가?
나원영: 병따개요?
최소희: 네, 병따개를 디자인해가지고 나눠줬어요. 그거 디자인도 김남윤이 했어. 그 시기 포토샵으로. (웃음) 미디에도 관심 있었고…
나원영: 병따개를 고르신 큰 이유가 있었나요?
최소희: 맥주 좋아해서. (웃음) 아직도 있어요, 집에.
나원영: 일종의 굿즈였네요.
최소희: 그렇죠, 어쩜 그 때 굿즈를 했다니까.
박성우: 저도 하나 있었는데, 계속 쓰다보니까 떨어지더라구요. 처음에 자석이 떨어지더니 겉부분까지 다 떨어져 나갔고. (웃음)

 

2집 당시 만들어진 병따개

 

나원영: [Requiem #1]에서는 5인조로 멤버 개편이 일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3호선 버터플라이로 활동하신 김남윤 님도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고요. 그 덕인지 [낮잠]과 멜로디나 분위기의 면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지만, 소리가 좀 더 겹겹이 쌓인 느낌입니다. 좀 더 시끌벅적해지거나, 빨라지거나, 사이키델릭해진 곡들이 많아져서 스타일 자체도 다양해진 것 같고요. [Requiem #1]을 만들 때에 [낮잠]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소희: 그 때 딱 연습실이 생겼어요. 석관동, 돌곶이역에. 지금은 한예종 근처. 연습실 겸 녹음실이었어요.
정구원: 그러면 잠만 그 연습실을 쓰셨던 건가요?
최소희: 네, 거기가 그 무렵에 (임대료가) 쌌어요. 우리가 왜 그 멀리까지 갔겠어요. (웃음)
박성우: 그래도 그 근처에 지하철이 있어서 그나마 나았어요.
최소희: 6호선 라인.
박성우: 비 오면 물 찰까봐 엄청 걱정이었는데.
최소희: 맞아 맞아… 아무튼, 그 때부터 멀티 트랙으로, 컴퓨터로 녹음하기 시작했어요.
박성우: 네. 그 무렵에는 인터넷이 완전히 들어왔고, 그리고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김남윤 그 친구의 주도로 장비 같은 것도 갖췄어요. 5인조가 된 것은… 민수(드러머) 언제 나갔냐? 1집 끝나고 나갔지?
최소희: 응 1집. 연습실 만들기 전에 나갔지. 드러머가 나가면서, 채송화 드러머였던 우람이를 섭외했어요.
박성우: 그리고 기타를 치는 나나라는 친구도 영입했고.

 

나원영: 또 다른 밴드가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분들이 참여를 하신 거네요.
박성우: 네, 서로 그냥 알게 되면서… 나나 같은 경우에는 공연도 많이 보러 왔고요. 같이 한 번 해보지 않을래? 그런 식으로 영입을 했죠. 우람이 같은 경우에 드럼도 그렇고, 남윤이도 늘 주위에 항상 있었고.
최소희: 남윤이는 1집 녹음 때부터 도와줬으니까요.
박성우: 원래는 그냥 음악 친구인데 늘 주위에 있었어요. 다른 밴드에서라든지, 주변에서 같이 음악 하는 친구들이었죠. 저희가 당장 드러머가 나가서 공연을 못하는데, 구인 광고를 올릴 수도 없었고요.
최소희: 근데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 다 비슷했던 거 같아. 아까 말했던 밴드들을 다 좋아했어요.
박성우: 많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공통된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그냥 해보자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2집을 녹음하고, 공연도 계속 죽 이어갔고.
최소희: 5인조로 공연을 하니까 더 풍성한 사운드가 되었어요. 남윤이가 키보드에, 나나가 기타. 기타가 두 명이고 하니까. 공연도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여성 멤버가 세 명이나 있다는 것도 특이했을 테고…
박성우: 남자 관객들이 많다는 게 느껴지긴 했는데, 그런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최소희: 그런 게 진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때만 해도 여성들이 그렇게 밴드하고 그런 케이스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원영: 그러면 음악적으로 달라졌던 게 있었나요, 아니면 그냥 [낮잠]에서 하던 거를 계속해서 해보자, 하는 거였나요?
박성우: 기존에 꾸준히 이어져 온 대로 했는데, 대신에 멤버가 추가가 되었으니까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다양해진 거죠. 거기에 연습실까지 생겼고.
최소희: 그 때만 해도 같이 공연하는 팀들 보면 키보드가 있는 팀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남윤이만 막 바리바리 싸들고 왔고. 지금은 공연장들이 키보드 기본으로 다 가지고 있지만 그 때는 없으니까 다 지고 왔어야 했어요. 근데 우리는 키보드가 있으니까, 예를 들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Heroin” 같은 곡을 할 수 있었던 거죠.
박성우: “Heroin” 아니야. “Venus in Furs”야…
최소희: 아 맞다. (웃음) 그것도 건반 들어가잖아.
박성우: 그 때는 여섯 명이 했어요. 영은이6가 연주하는 바이올린까지.
최소희: 맞아, 영은 씨도 있었지…
박성우: 규모가 컸어요. 영상 남아 있으면 보고 싶은데…

 

정구원: 올해 존 케일(John Cale) 내한 왔었는데 혹시 보셨나요?
박성우: 아 정말요? 죽은 거 아니었어요? (웃음)
최소희: 참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게 느껴져요. 기억에 남는 게, 우리가 2집 냈을 무렵에 페이브먼트 보컬, 스티븐 말크머스(Stephen Malkmus)가 내한 공연을 왔었어요. 게스트는 언니네 이발관이었고요. 우리가 그걸 보러 대학로로 다 갔어요. 또 스티븐 말크머스 공연에 페이브먼트 백밴드가 필요하니까, 잠 멤버들을 비롯해서, 주위 음악하는 친구들이 기타 베이스 드럼, 해서 같이 연주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러 간 것도 있어요, 스티븐 말크머스야! 막 이러면서. (웃음) 그 때 마타도어(Matador Records) 사장이랑 메리 티모니(Mary Timony)랑 스티븐 말크머스가 같이 빵에 왔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했어요.
나원영: 우와.
박성우: ‘우와’ 할 만한 건 아니고…
최소희: 좀 자존심 상했어요. (웃음)
박성우: 그 때 빵 사장님이 한 말이, 자기 동생이 말크머스 통역을 하는데 얘가 여기 술 마시러 온다, 너네 빨리 와서 공연해라, 이런 거였어요.
나원영: 허, 그렇게 부르는 건 좀 아니네요.
박성우: 그래도 뭐 저희는, 가서 한 탕 뛰어주고, 그런 거죠. (웃음)
최소희: 아무튼 와 말크머스야! 이러면서 공연을 봤던 시기가 있는데, 그 이후로 커다란 페스티벌도 많이 생기고, 내한 공연이라는 게 되게 일상적인 게 됐어요. 유명한 뮤지션들도 오고, 위저(Weezer)는 몇 번이나 오고.
정구원: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런 게 흔한 기회가 아니었던 거죠?
최소희: 없었어요 진짜. 페스티벌도 없었고…
박성우: 페스티벌 하나 있지 않았나? 트라이포트. 거기 갔었어요.
최소희: 인천 갔었어요. 표도 없이. (웃음) 그냥 우리끼리, “야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않겠냐?” 그러고 갔는데, 비 때문에 중단됐어요, 그래서 그냥 동네에서 술 먹고 갔지…
박성우: 공연을 보는 건 전혀 목적이 아니었죠. (웃음)
최소희: 놀러간 거지.

 


“Venus Noire”

 

박성우: 그리고 [Requiem #1]에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사실 개인적으로 3인조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더 많은 사운드를 내는 게 좋은데, (2집에서는) 그게 됐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각자의 개성들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고요. 실제로 우리가 합주실이 있으니까 그게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같아요. 키보드의 개성을 살리고, 기타나 드럼도 살리려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잘 안 된 거 같고…
정구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 그런 각오로 하셨던 거죠?
박성우: 네, 합주실이 완전히 갖춰진 것도 있고, 또 연습할 때 바로바로 녹음을 할 수 있다는 게 컸어요.
최소희: 맞아요, 연습할 때 마이크 하나 놓고 막 쳤던 적도 있었어요.
박성우: 연습할 때 곡이 아니라 잼 식으로 하는 것도 바로 녹음해서 들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살려보고, 아니면 버리고… 1집보단 확실히 더 좋은 조건이었죠.
최소희: 그리고, 미디는 없었지만 성우건 나건 간에 녹음실에서 그냥 혼자 이것저것 해 봤어요. “나 오늘 가서 잘게” 한 다음에 혼자 가서, 드럼도 쳐서 녹음해보고, 거기에 덧입혀서 악기도 넣어보고, 건반도 쳐서 넣어보고. 이런 식의 시도들을 굉장히 많이 해 봤어요.
박성우: 이런 시도가 3집까지 이어졌어요.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음악적 황금기라고 할까요?
최소희: 우리가 혼자 하는 작업이 좀 많아지지 않았냐?
박성우: 아무래도 그렇지. 멤버들이 또 나가고 그러다 보니까. 녹음실도 갖춰져 있고, 밴드의 케미컬보다는 거기에 기대지 않고도 일정하게 하나를 딱 만들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약간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저랑 소희, 남윤이 같은 경우에는 어쨌건 음악을 계속 하려고 했어요. 공연을 하고, 녹음을 하고, 경험이 쌓이고 하다 보니까, 실력은 계속 늘어났어요. 그리고 생각하고 열정이 있으니까 계속 그 쪽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이 부분에서 나머지 멤버들의 격차가 좀 더 벌어졌어요. 단순히 실력의 문제는 아니었고….
최소희: 열정의 차이가 벌어졌다고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저희는 1순위가 다 음악이었어요. 합주하는 게 1순위고, 약속 이런 건 다 미뤄! 미루면 돼! 이런 식이었죠.
박성우: 그런 부분 때문에 스트레스가 좀 있었어요.

 

나원영: 아무튼 많은 걸 시도해볼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데, [Requiem #1] 이후 [거울놀이]에서는 드러머로 도재명 씨가 들어오셨죠?
박성우: 재명이 얘기를 하자면, 2집을 낸 뒤 그 앨범으로 활동한 다음에 개인 사정으로 나나랑 우람이가 밴드를 나가게 됐어요. 그렇게 됐는데, 당장에 급한 게 드럼이니까. 근데, 소희가 그 때 처음으로 구인 광고를 했어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최소희: (웃음) 뮬에다 올렸나? 아무튼 이전엔 한 번도 그런 구인 광고를 올린 적이 없어요. 다 알음알음 만났지.
박성우: 광고를 올릴 당시 상황이 3집 녹음이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쯤일 거에요. 녹음만 할 수는 없고 합주하면서 공연도 해야 하니까. 장기적 관점에서 걱정이 돼서 구한 거에요.
정구원: 드러머를 빨리 구해야 한다, 그런 압박 비슷한 게 있었나요?
최소희: 그랬을 수도 있어요. 제가 좀 성격이 급하거든요. 지금 생각나는 게, 잠에서 재명이가 악기를 전공으로 배웠던 최초의 전공자에요. 실용음악과 출신. 전공자를 처음 봤는데 너무 잘하는 거예요. (웃음) 우린 맨날 우리끼리 ‘그냥 뭐’ 이렇게 했는데, 어머 얘 왜 이렇게 드럼을 잘 쳐? 그런 느낌.
박성우: 그래서 광고를 올리고 재명이를 구인했는데, 운 좋게 잘 맞았어요. 재밌었고. 전공자니까 ‘이렇게 해줘’라고 부탁하면 적어도 어느 정도 이상은 해 줬어요.
최소희: 전공자의 전문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부분을 처음 느꼈던 거 같아요.

 

나원영: 그런 부분이 [거울놀이]를 만들 때에 차이를 가져온 게 있었나요? 사이키델릭의 비중이 슈게이징보다 훨씬 더 늘어나는 등 앞선 두 앨범과의 차이가 보입니다. 건반이나 철금 같은 악기들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박성우: 아, 그런 뮤직박스 같은 소리는 철금은 아니고 오르골이었어요. 키보드로 만든 거예요.
정구원: 노이즈 록이라기보다는, 1집이랑 2집이 좀 부스스한 느낌이라고 하면 3집은 되게 도로로롱,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앨범 커버가 그걸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박성우: 앨범 커버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첫 시안이 백설공주 같은 게 그려진 그림이었어요. 3집은 1집하고 2집과는 달리 카바레 사운드에서 냈는데 그 때 처음으로 디자인을 맡겼거든요.
최소희: 우리가 컬라이더스코프, 만화경을 좋아해서 그 이미지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디자이너 분한테 얘기했거든요. 그 때 기억나는 게, 그 디자이너 분께 컨펌받는 자리에 저희 말고 다른 팀도 나와 있었거든요. 거기에 페퍼톤스가 있었어요. 첫 EP([A Preview])가 나올 무렵이었는데, 디자이너 분이 저희 거랑 페퍼톤스 거 두 개를 같이 하신 거예요.
박성우: 여하튼 뭐, 그 때는 좀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초안 다음에 나왔던 게 지금 커버에요.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면, 저는 개인적으로 오르골이나 뮤직박스 같은 걸 매우 좋아해요. 이 소리는 항상 들어갔어요. 1집 첫 번째 노래에, 2집에. 3집도 첫 번째 곡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소희가 하지 말라 그러더라구요. 지겹다고. (웃음)
최소희: 미안. (웃음)
박성우: 그리고 3집의 경우 작업이 이전보다 개개인별로 진행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멤버들이 많이 나갔다 보니 합주가 잘 안 되었지만 녹음은 할 수 있었으니까요. 소희도 녹음을 하고, 저도 녹음을 하고.
최소희: 각자 진행한 거죠. 그걸 모아서 합치는 식으로.
박성우: 재명이가 새로 들어오긴 했는데, 3집 작업 때 사운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건 전혀 아니었어요. 앞서 말했지만, 녹음은 이미 중반 쯤 진행된 상황이었고, 이미 만들어져있던 곡들을 앨범 발매를 위해 녹음하는 과정이었어서… 재명이는 드러머로서 심벌이라던지 그런 개인 악기를 직접 가져와서 사운드적인 면을 보강하거나, 아니면 녹음 할 때 드럼 소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뭐 그랬어요. 예를 들자면… 막 심벌 위에, 목걸이 같이, 금속 올려놓고, 이제 칠 때의 마찰로 그 떨림을 녹음하고요. 그렇게 한 곡이 “긴 머리 쓸어 올리며”랑, “싸이킥”이랑 있고… 그러게 재명이가 녹음한 곡은 한 절반 정도? 나머지는 드럼이 없는 곡이거나, 아니면 제가 직접 친 걸 녹음 했어요.
최소희: 맞아요, 얘가 혼자서 드럼을 쳤었어요. 미디 없이, 혼자 녹음한 걸 오디오 트랙 쌓듯이 해서 만든 게 있어요. 그 외에는 재명이한테 이렇게 좀 쳐달라고 부탁하고. 재명이 처음 본 날이 갑자기 기억나는데, 걔가 너무 낯을 가렸어요. 술도 안 먹고.
박성우: 그랬나? 걔 술 먹으면 재밌잖아.
최소희: 나중에 본색을 드러냈죠. (웃음) 처음에는 너무 낯가리고 이러더니, 조금 지나고 나서 얘가 이렇게 재밌는 애였구나 싶더라구요.

 


“70’s Once More”

 

나원영: 70‘s Once More” 같은 제목의 곡도 있고, 앞에서 잠깐 언급한 “해변으로 가요”와 “Please Please Me”의 리메이크도 있는 등, 잠의 음악을 듣다 보면 부분부분 복고적인 태도, 과거의 다양한 특징들을 현재에 맞춰 끌어오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그것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박성우: 기본적으로는 좋아하는 밴드들이 다 옛날 밴드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나원영: 혹시 “해변으로 가요”를 리메이크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셨나요?
최소희: 원래 공연 때 하기로 했었는데, 성우가 그걸 하자고 정했던 것 같아요.
박성우: 네. 개인적으로 리메이크를 되게 좋아하는데, 동시에 원곡보다 좋은 리메이크가 별로 없는 게 문제라고도 생각을 해요. 그래서 최대한 노력을 했던 편이에요.
정구원: 리메이크곡을 원곡과 굉장히 다른 결로 바꾸어 버리시는데, 이것이 뭔가 옛날 노래를 잠만의 방식으로 뒤트는 느낌이에요.
박성우: 그런 것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노래다 보니까 리메이크를 하게 되는 것도 있죠. “이거는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좋을 수가 있겠다!” 이런 노래가 있고, “이건 도저히 건들 수가 없다.” 이런 노래도 있어요. 연습실에서는 혼자서 정말 많이 커버하고 녹음 리메이크도 해 봤어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냥 그대로. 그게 너무 재밌더라구요. 혼자서 기타 치고, 드럼 입히고. 벨벳 같은 밴드를.

 

최소희: 산울림도 커버한 적이 있는데,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같은 곡을 커버했던 적이 있어요. 사실 산울림을 좋아하게 된 건 어렸을 때는 아니고 성인이 되고 나서였어요.
박성우: 저도요. “산할아버지” 동요 정도로 인상에 남아 있었어요. “아니 벌써” 정도는 알고 있었고… 앨범이 너무 많았는데, 그 중에 좋은 노래가 분명 몇 곡은 있어서 그런 걸 좀 살려보고 싶었어요. 2집 활동하면서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를 거의 똑같이 커버했죠.
최소희: 똑같이는 아니지. 너가 노래를 속삭이듯 부르는데 그게 어떻게 똑같이 한 거냐? (웃음)
박성우: 아직까지 기억나는 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방영될 무렵에 남윤이가 거기 참여했어요. 거기에 이나영이 남자 주인공이랑 대학로를 걸으면서, “어? 내가 좋아하는 밴드다!” 하는 씬이 있었는데, 저희가 거기 섭외가 됐어요. 남윤이랑 기완이 형(성기완) 통해서. 근데 씬이 아예 짤렸어요. (웃음) 촬영 중에 드라마고 하니까 산울림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를 연주했어요. 딱 한 곡 연주했는데, 갑자기 스태프가 오더니 저한테 “아, 저기… 죄송한데 드라마랑 어울리는 걸 좀…” 이러더라구요. 거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제가 충격이었던 건 그 분이 그 다음에 “좀 산울림 같은 노래 없을까요?”라고 하는 거에요. (웃음)
최소희: 산울림 노래를 했는데 (웃음) 야, 네가 노래를 그렇게 하니까 너 노래인줄 아는 거지. 진짜 웃긴다…

 

나원영: 저희가 PDS를 인터뷰할 때에는 PC통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90년대의 PC통신 시절,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들어왔을 때 큰 차이를 느꼈다는 점에 대해 개인적으로 흥미가 갔는데. 혹시 두 분도 그 당시에 비슷한 걸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소희: 저는 PC통신 안 썼어요.
박성우: 저도요.
최소희: 인터넷 같은 경우도, 인터넷 처음 시작될 무렵에 그냥 PC방 가서 “와 신기하네” 이 정도? 이메일 같은 거 확인하는 정도였지, 저희의 음악 활동이 PC통신이나 인터넷하고 연계되진 않았어요.
나원영: 음악을 찾아서 듣거나 하는 것도 없었나요?
최소희: 네, 저희는 그냥 CD 사서 들었어요. 사람 만나는 것도 정말 직접 만나는 식으로만.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도 없었고요.
박성우: 인터넷으로 음악을 찾아서 듣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그 때 유튜브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 경우에는 MTV나 뮤직비디오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봤었죠. 그리고 신촌 백스테이지에 많이 갔었고.
최소희: 백스테이지라는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뮤직비디오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였어요. 한쪽 벽면에 커다란 스크린으로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데, 저희가 신청을 하면 신청한 노래를 틀어주는 식이었어요.
박성우: 저는 중학교 때부터 거기 갔었는데, 지점마다 스타일이 달랐어요. 백스테이지 1이 있고 2가 있었는데 1은 헤비메탈이나 이런 쪽을 주로 틀고, 2는 요즘 음악 틀어주고. 저 같은 경우에는 집에서 MTV가 나오다가 채널 V로 바뀌었어요. 그 당시가 브릿팝 인베이전 시절이라 그 쪽 음악들이 많이 나왔죠.
정구원: 그 때 MTV나 채널 V같은 곳에서는 해외 음악을 주로 틀어줬나요?
박성우: 당시에는 해외 채널 위성방송이었으니, 당연히 해외음악을 틀어줬어요. 백스테이지에서는 그 부분을 편집을 해서 영상을 틀어줬어요. 거기서 정보를 많이 얻었죠.
최소희: 예전에는 엠넷이나 MTV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그걸 녹화해서 비디오테이프로 다시 보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백스테이지에 가면 그걸 신청해서 볼 수가 있었고요.
박성우: 백스테이지는 위성을 달고, 녹화해서 그런 걸 전문적으로 저장을 했던 것 같아요. 소희가 음악 잡지에 했던 것처럼 저도 백스테이지에서 소규모 모임 구인을 했던 적이 있어요. 우리 때 세대들은 아마 음악을 조금이라도 했었거나 관심이 있다면 그런 기억이 있을 것 같아요. 백스테이지의 그 기억.

 

박성우: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weiv]에서 진행했던 부분에 대해서 조금 불만이 있는 것이,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에서 PDS와 피와꽃, 잠을 함께 다뤄 주셨잖아요. 그런데 세 밴드 사이에는 활동 당시에는 그리 큰 연관이 없었고, 교류도 없었어요. 사실 그 부분은 조금 확실히 해 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희: 야, 그런데 그걸 연관 짓는 것은 그걸 듣는 사람이 짓는 거지. 듣는 사람이 받는 느낌 등에 뭔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부분을 짚을 수도 있는 거잖아.
정구원: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우선 저희는 모두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 당시 인디 씬을 경험하지는 못했어요. 잠이나 PDS, 피와꽃 등의 공연을 직접 보고 동시대를 살면서 직접 그 시기를 산 건 아니죠. 과거의 음악들을 찾아 듣고 평론을 하다 보면. 그리고 포스트록이란 큰 줄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중요한 뮤지션들을 선정하고 계보를 세우는 과정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론가들이 어떤 뮤지션을 특정 장르의 틀로 다루려 할 때 뮤지션들이 “난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냐”라고 반응하는 건 상당히 많이 발생하는 일이고, 그 점은 저희가 평론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한계라고 생각해요. 또한 저희가 그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후대의 사람들로서, 남아 있는 레코딩을 우선적 토대로 하여 글을 쓰는 점에서 발생하는 한계도 있을 것이고요. 이 인터뷰의 목적 중 하나가 그러한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원영: 저도 그 점에 있어선 아쉬운 게 있습니다. 잠처럼 음원이 있거나, 아니면 영상이라도 남아 있는 밴드는 접근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그때 활동했던 밴드들 중에서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결과물을 접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았거든요. 제 입장에서도 그걸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좀 더 면밀한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최소희: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해당 글에서 PDS나 피와꽃하고 저희가 같이 소개된 부분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음악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많이 교류했던 모레인이나 채송화 등의 밴드가 소개되었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요?
박성우: PDS는 사실 그 당시 라이브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이 저희랑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최소희: 만약 PDS가 공연을 많이 하셨다면 스팽글이건 빵이건 우리가 마주쳤을 수 있었을 거에요. 아마 교류가 많이 없었던 게 그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대신 저희는 말씀드린 채송화나 모레인, 데이슬리퍼 등 라이브 활동이 많았던 밴드들하고 친했었어요. 참 이래서 앨범이 중요한 것 같네요.
박성우: 그래서 좀 아쉬운 게, 저희가 언급했던 밴드들, 저희 주변에서 음악 하던 친구들이 정말 실력 있고 감각 있고 열정도 있는 친구들이었는데, 결과물이 남아 있지 않아요.
정구원: 앨범을 만드는 게 그냥 딱 해야겠다,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상황 같은 게 다 맞아 떨어져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박성우: 그런 면에서 되돌아보면, 그 친구들이 잠을 정말 많이 지지해 줬어요. 공연하면 항상 와주고 그랬거든요. 공연을 잘 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 하고, 그런 식으로 교류 관계를 정말 많이 쌓았어요.

 

나원영: 다음 질문도 그 부분과 관련이 있는데, 지속가능함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이 당시에 음반을 세 장이나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판단을 하셨을 텐데 실제로 그것을 해내셨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면서 활동을 하신 것이 어떻게 가능하셨는지, 그 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최소희: 저도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이 딱 드는 건데… 보통은 어딘가 레이블에 소속이 되거나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 사장처럼 위에 있는 사람들이 쪼잖아요. “야 앨범 해야지, 이제 할 때 됐잖아” 이런 게 있죠. 그런데 우리는 “야, 앨범 할 때 됐어. 앨범 해야 해” 이런 게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그냥 진짜 성우 말대로, 뭔가 주변에서 지지해주는 게 있었고,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면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앨범을 만들게 되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정구원: 성우 씨는 어떤가요?
박성우: 소희 말대로 정말 주변에 많은 밴드들이 있었어요. 소희랑 도순주 씨가 함께 했던 프랑켄위니 같은 밴드도 있었는데, 그런 밴드들을 일일이 다 언급해 주고 싶네요. 그 사람들이 계속 와주고 교류를 하니 그것이 일종의 커뮤니티처럼 됐는데, 그 중에 잠이 약간 대표성을 띤 것이 없진 않았어요. 연습실도 있었고, 잠이 공연하면 이 팀도 같이 하고. 되돌아보면 그런 종류의 책임감이나 그런 게 약간은 있었던 것 같아요. 데이슬리퍼 같은 경우에도, 음악적으로 친하다기보단 축구나 위닝 일레븐 같은 거 같이 하는 식으로 친했는데 (웃음) 아무튼 정말 친했었어요. 처음에 데이슬리퍼 공연을 봤을 때 빵에서 봤는데, 제가 소희랑 민수한테 얘네 진짜 좋다, 좀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랬다가 나중에 잘못 봤다, 술이 좀 취했었다, 하면서 후회하기도 했고. (일동 웃음) 아무튼 공연 보면서 정말로 좋다고 생각했던 밴드들이 많았습니다. 데이슬리퍼, 모레인, 채송화, 주변 지인들 밴드들…
최소희: 모레인 앨범이 없나? 그렇게 오래 했는데 어떻게 앨범이 없대…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과 연관되는 장소가 모두 있었어요. 만나게 되는 장소들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 각자의 연습실이 있었고요. 연습실에서 모여서 놀거나 하는 게 있었고. 예를 들자면, 아까 말했던 프랑켄위니가 순주 언니랑 같이 한 팀이에요. 앨범도 안 내고 잠깐 하다가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 팀이 저희 합주실에서 연습한 다음에 공연을 했거든요. 그런 식으로 모일 장소가 있고,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흰 약간 아날로그였네요.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

 

나원영: 블로그 같은 데서, 2003년 즈음에 쓴 글에 올라온 이름이 있는데 검색해 보면 계속 이름만 뜨지 곡은 안 나오고, 그런 게 제 입장에선 아쉬웠어요. 그런 아티스트들은 누구랑 공연을 했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거든요. 영상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최소희: 그 때는 영상을 찍는 시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지금은 누구나 다 카메라 들고 찍을 수 있는데.
나원영: 그 시기에 활동하신 분들의, 아주 화질이 안 좋은 영상이라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게, 그것이 그 당시 씬에 대한 인상을 희미하게, 조각조각처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최소희: 근데 어떻게 보면 지금이 더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은 너무 다들 찍으니까 콘텐츠가 넘쳐나잖아요. 그게 과연 좋은 걸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부족한 시기를 살아왔는데, 그런 시기를 살다가 지금 넘쳐나는 시기를 사니까, 이게 과연 좋은 건지를 모르겠어요. 꼰대인가? (웃음)
정구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버가 터지거나 하지 않는 한 기록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 그거 하나는 좋다고 생각해요.

 

 

나원영: 마지막 질문으로, 현재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거울놀이]가 나온지 15년이 지났고, 처음 밴드를 시작하신 지 20년 정도가 지났어요. 지금 시점에서 그 당시를 기억하자면 어떠한 느낌이 들었는지, 반대로 당시에 2019년 지금, 혹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셨는지, 시간의 변화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최소희: 잠 활동 당시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어떻게 보면 IMF 전 세대에요. 어린 시절에 IMF를 겪은 게 아니라 거품 경제 시대를 겪었던 거니까요. 그래서 IMF 당시, 잠 한창 할 때 제가 스무살 초반이었는데, 직격탄을 맞았어요. 집이 망해가지고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날 합주가 있었어요. (웃음) 이사를 막 울면서 했는데 끝나고 나서 그냥 합주하러 간 거에요. 그 때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저는 미래에 낙관적이었어요.
박성우: 진짜?
최소희: 응, 나 잠에 대해서 정말 낙관적이었어. 너랑 나랑 달랐나봐. 우리가 이렇게 비대중적인 음악을 하지만, 뭐 외국에서 알아줄 수도 있고, 어쨌든 되게 많은 가능성들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활동을 했어요. 지금의 세대가 미래를 바라봤을 때의 그런 불안함, 부정적, 이런 거랑은 미래상이 약간 달랐어요.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하고, 더 올인하고 이랬던 거 같아요. 다들 “야, 음악하면 못 먹고 살아” 이렇게 말해도… 아냐, 그래도 길은 있을 거야, 그냥 내 입에 풀칠할 길은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해왔던 거 같아요.
박성우: (웃음) 제가 지금 너무 아쉬움이 들고 소희한테 미안하기도 한 게, 소희가 느낀 게 백이었으면 저는 한 백만이었을 거예요.
최소희: 긍정이?
박성우: 응. 그리고 저는, 당시에 20대 초반이었으니까 나이가 훨씬 더 어렸는데… 한 마디로 되돌아보자면 개념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근데 그 당시에 소희는 그래도 미래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하고, 그래서 계속 활동을 할 여건을 끌어오고 그랬던 거 같아요.
최소희: 내가 더 현실적이지. (웃음)
박성우: 예를 들자면 연습실 월세를, 사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인데… 저는 그걸 또 못 내서, 아니다, 안 낸 거죠. 소희가 막 내주고…
최소희: 진짜? 야, 갚어! 뭐야, 난 기억에도 없는데! (웃음)
박성우: (웃음) 뭐 그런 식이었던 거죠.
최소희: 맞아요, 얘가 더 긍정적이었어요.
박성우: 뭔가 하는 대로 하는 느낌이 있었죠. 그렇지만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일종의 대표성, 책임감 같은 건 가지고 있었어요. 동료들의 서포트도 많이 받았었고… 그리고, 정말, 나름 간절하고 치열하게 열정을 다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소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게 저희가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네요.

 

* 본 인터뷰는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1. 도순주, 옐로우 키친
  2. 성기완. 1990년대 말 당시 99의 프론트 퍼슨으로 활동
  3. 이새롬, 99의 [스케치북]에 래퍼로 참여
  4. 이우람, [Requiem #1]에 드럼으로 참여
  5. 이후 스트링스, 피리과, 피기비츠에서 활동
  6. 김영은. 펜잘스(penzals) 멤버. 잠 3집의 공연 세션으로 참여한 김민균이 기타를 맡았었다.

3 Responses

  1. stupidbear

    아까 회사에서 댓글을 짧게 남겼는데 사라졌네요.
    페북에서 이 웨이브 기사 글을 보고는 순간 잘못봤나 했어요.
    예전 기사를 실수로 다시 올렸나 보다 하고 자세히 보니 정말로 두 분의 인터뷰 기사였네요.
    2019년에 잠의 인터뷰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지금도 종종 잠 음악을 들어요.
    몇일 전에는 10살 아들 축구대회에 데려다 주다가 아빠가 좋아하는 축구 음악이라고 하면서 no.20, red devils를 들려주기도 했구요.
    음악에만 빠져 살던 시절을 함께 했던 음악이라 그런지 편안하기도 하고 그리운 마음도 들고 그러네요.
    커버했던 venus in furs, beginning to see the light, night cruising 등의 노래들도 다 기억이 나요.
    혹시나 하고 하드를 뒤져보니 2004년 2월 21일 빵 공연, 2004년 3월 6일 쌈지 공연 사진이 남아있네요. 초점이 다 나간 조악한 화질의 사진이지만…
    이렇게 인터뷰라도 다시 두 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이런 기사 실어준 weiv에도 감사합니다.

    응답
  2. 캠프

    이런 장문의 잠 인터뷰라니 너무 행복한 선물입니다. 70’s once more만 들으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거울놀이를 처음 들었던 그 날 그 시간의 공기를 잊을 수 없네요.

    응답
  3. 김성일

    멋진 인터뷰 잘 봤습니다. 음악 전문 잡지에 실린 인터뷰처럼, 솔직 담백한 느낌이 전달되어 좋네요. 옛 생각도 나고요. 이러한 글, 자주 부탁드립니다.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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