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그리고 뮤직 페스티벌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이 있는 6월이면 런던 곳곳의 상점가엔 텐트와 침낭, 장화 등을 한데 묶어 판매하는 패키지 상품이 내걸린다. 이는 여름의 시작과 함께 페스티벌 시즌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일종의 징조다. 6월 초의 오투 와이어리스(O2 Wireless)나 아일 오브 와이트(Isle of Wight) 같은 메이저급 페스티벌들의 개장과 함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하 글래스토Glasto)에 관한 기사로 <NME>가 도배될 즈음이면 비로소 영국의 여름은 음악 팬들에게 본격적인 축제의 나날로 그 풍성함을 더해간다.

레딩 앤 리즈(Reading & Leeds Festival), 브이(V Festival), 티 인 더 파크(T in the Park), 래티튜드(Latitude)와 같은 대형 페스티벌뿐 아니라 런던 시내 곳곳에서 영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음악 관련 행사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한국이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영국의 문화적 인프라를 침 튀기며 예찬할 필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이면서도 다채로운 음악 엔터테인먼트 환경이 잘 구비되어 있는 영국의 음악산업 현장은, 그것을 처음 맞닥뜨리는 이들에겐 다소 놀랄 만한 광경임이 분명할 것이다. 런던 외곽의 2차선 도로에서 대형 광고판을 통해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나 막시모 파크(Maximo Park) 같은 밴드들의 신보 소식을 흔히 접할 수 있고, 지하철역이나 길거리에서 배포하는 무가지들에선 상당량의 공연 정보와 뮤지션들의 가십을 접할 수 있으며, 중간 규모의 훵크(funk) 음악 페스티벌인 러브박스 위켄더(Lovebox Weekender) 광고가 빨간 이층 버스 후면에 크게 걸려 있는 장면 같은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음악 애호가들에게 영국의 여름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더 특별하다는 일각의 해석도 나름의 근거는 있어 보인다. 밤 열 시는 돼야 어둑어둑해지는 ‘긴 낮’도 그러한 여건에 기여하겠지만, 앞서 말했듯 대중음악과 관련한 공급 체계가 그 어느 국가보다도 탄탄하고 그에 응하는 수요자의 밀도 역시 높은 편이기에,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북적이는 축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같은 플랫 하우스(flat house)에 머물던 호주인들도 글래스토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북반구의 여름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주된 거처를 런던에 얻은 가장 큰 이유로 ‘비싼 물가를 감안하고서라도 그 이상의 메리트가 있는 런던의 문화적 기반’을 꼽았다. 주변 국가로의 교통편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영국, 특히 런던의 트렌디하고도 풍요로운 대중음악 씬은 여전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티켓 전쟁

6월 22일(금)부터 24일(일)까지, 3일에 걸쳐 열린 ‘2007 글래스토’는 작년 한 해를 건너뛰고 2년 만에 찾아온 행사였다. (농장의 목초지 보호와 좀 더 안전한 페스티벌 환경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주최측은 2001년에 이어 2006년에도 휴지기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올해의 글래스토에 대한 매체와 대중으로부터의 기대는 연초부터 부풀어 있었고, 그것은 4월 1일 입장권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약 세 시간 만에 일부 코치(coach, 고속버스) 티켓을 제외한 수량이 매진으로 기록됨으로써 입증되었다. (배송 착오로 반송된 글래스토 티켓을 받으러 직접 우체국엘 갔었는데, 한 아주머니 직원은 우편물의 겉봉을 보더니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디 가는지 알아요. 티켓을 구했다니, 정말 부럽네요!”)

2년 만에 열린 2007 글래스토의 가장 획기적인 요소 중 하나는, 티켓 판매 방식으로 보인다. 사실 영국처럼 방대한 공연 비지니스의 장에선 티켓 예매 시작일에 표를 사재기한 뒤 경매 사이트를 통해 값을 올려 팔아먹는 수법이 성행하곤 하는데(문제의 심각성에는 다수가 공감하나, 뒤늦게 표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구매자의 의지도 워낙 강하기에 마땅한 해결책이 모색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최측은 그 점을 보완하고자 전례 없는 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입장권 예매 시 개개인의 간략한 정보와 함께 증명사진을 반드시 업로드하도록 하여, 티켓의 앞면만으로 구매자의 자기 증명을 필수 항목으로 지정함으로써 꼼꼼하게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영국 내 유명한 경매 사이트에서조차 다른 페스티벌의 표는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반면, 글래스토 입장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암표 장사에 대한 소문도 올해에는 유난히 듣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표를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피해자가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애쓴 점만큼은 성공적이라 할 만했다. 결국 티켓 판매 직전까지 라인업을 (공식적으로) 일절 공개하지 않는 페스티벌로서, 그에 응하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조처가 아닐까 싶다.

 

2007 글래스토의 시작

글래스토는 잉글랜드 남서부의 소머셋(Somerset) 지역, 워시 팜(Worthy Farm)이라는 농장지에서 1970년부터 열려온 음악 축제다. 2007년 현재, 자신의 농장지에 글래스토를 처음 유치시킨 농부이자 페스티벌 사업가인 마이클 이비스(Michael Eavis)와 그의 딸 에밀리 이비스(Emily Eavis), 그리고 영국의 저명한 음악 프로모팅 회사인 민 피들러 뮤직 그룹(Mean Fiddler Music Group)에 의해 기획되고 있다. 최근 들어 글래스토는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그 규모를 확장하고 있는데, 올해의 글래스토 역시 약 110만 평이 넘는 부지에 재작년보다 3만여 명이 늘어난 18만 명에 달하는 관중을 끌어 모으며 또 한 번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페스티벌로 기록되었다.

이 글은 이토록 거대한 규모의 농장 페스티벌에서 며칠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서 기록한 글래스토 체험기다. 나는 ‘음악 페스티벌’이기 이전에 ‘캠핑 페스티벌’인, 단지 음악 공연이 아닌 다양한 문화 행사가 난무하는 난장으로서의 글래스토를 체감할 수 있었다. BBC에서 만든 실황 중계 TV로는 파악할 수 없는, 줄리언 템플(Julian Temple)이 만든 다큐멘터리 <Glastonbury>(2006)가 뒤늦게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 그런 깨달음으로서의 매 순간이 축제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글래스토를 음악 공연이라는 부문으로만 그 범주를 좁혀 묘사한다거나 글래스토만의 비대한 라인업을 격찬하는 건 오히려 부족한 설명이 될 것이다.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이 먼 곳까지 자신을 잠시나마 완벽하게 방목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 득실대는 글래스토는, 대규모 스테이지에서의 공연들까지도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콘서트라기보다는 ‘북적임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축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피라미드(pyramid) 및 아더(Other) 스테이지와 같은 메인 무대에서 공공연히 발생했던 사운드 불량에도 절대 다수의 청중이 그토록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 테고 말이다.

 

알비온, 그리고 기후 변화

글래스토측은 이 페스티벌이 중세 시대의 주술적 의의가 잔존하는 ‘성지’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팸플릿이나 리플릿을 통해 강조한다. 또한 알비온(Albion)이라는 고대 영국의 ‘성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1970년대의 히피 문화가 지녔던 두루뭉술한 반항의 표어를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글래스토의 참가자들 중 아서 왕(King Arthur)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라든지 ‘영혼의 중심지’라는 신화적(종교적) 배경을 기술해놓은 부클릿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벤트상의 의미 정도로만 남아 있는 히피의 상징성만큼이나, 혹은 아발론(Avalon) 스테이지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북미 인디언식 촌락의 생뚱맞은 이질감만큼이나, 겉으로 보이는 딱 그만큼만이 그러한 의의들과 그럭저럭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한편 글래스토가 후원한다는 그린피스(Greenpeace), 옥스팜(Oxfam), 워터레이드(WaterAid) 등의 ‘제휴 자선 단체’ 목록에도 눈길이 갔다. 이들은 대체로 중도적 성격의 주류 NGO들이라 할 수 있는데, 기후 변화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하며 실천해가기보다는 ‘자선’과 ‘착한 자본주의’를 기조 삼아 기업 친화적 활동에도 상당 부분 집중하는 단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6월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물러난 자리를 꿰어 찬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환경 대책만큼이나, 그 브라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자선 사업체들의 실질적 역할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듯하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습도 글래스토 내부에서 여전히 펼쳐지고 있었음을 간과할 순 없을 것 같다. 마지막 날(24일) 오후에 호기심으로 찾아간 레프트 필드(Left Field)에선, 핵무기 반대 캠페인과 반전 및 기후 변화에 대한 심각성과 행동론을 강조하는 리플릿이 꾸준히 배포되고 있었고, 1980년대 노동당 내 좌파 진영의 수장 토니 벤(Tony Benn)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는 오밀조밀 모여든 청중들이 맥주를 마시며 그의 열띤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입장했을 때는 토니 벤이 시위를 탄압하는 경찰에 관한 조롱 섞인 에피소드를 퍼붓고 있었는데, 나는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수백여 명의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연신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또 글래스토 무대에 오른 상당수의 뮤지션들은 환경 파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는데, 일례로 크립스(The Cribs)의 라이언 자먼(Ryan Jarman)은 ‘적잖은 밴드들이 글래스톤베리의 무대 뒤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해 많은 얘길 하고 있다’며 참가자들에게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재차 촉구하기도 했다.

 

 

소머셋까지로의 여정

글래스토는 다른 도시 내 혹은 도시 근교에서 열리는 축제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글래스톤베리 축제의 엄연한 일부로서 ‘소머셋으로의 여행 과정’을 빼놓을 수 없기에 그렇다. 하루를 꼬박 투자해 이국땅에서 날아온 이들의 가슴만이 여행의 설렘을 만끽하는 건 아닐 것이다. 여름에 열리는 영국의 수많은 페스티벌들 중에서도 런던으로부터 네댓 시간을 차로 이동해야 하며 행사장에 도착해서도 마땅한 텐트촌을 물색하기 위해 적잖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글래스토의 특별한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기 때문이다.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며칠 전부터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온갖 짐 꾸러미를 둘러매고선 버스나 기차, 혹은 자가용이나 캠핑카를 타고 입구에 도착해 캠프 구역까지 걸어 들어가 캠핑 준비를 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글래스토의 엄연한 주요 코스인 것이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참가자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그중에도 적잖은 수는 글래스톤베리측에서 준비한 코치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 일행의 경우처럼 코치를 예매하지 않아 약간은 불편한 방법으로 글래스토에 당도해야 할 상황도 생기는 법. 우리는 먼저 지하철로 빅토리아(Victoria) 코치스테이션으로 가 일반 코치를 타고서 브리스톨(Bristol)로, 그리고 브리스톨에서 다시 셔틀버스 운행장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글래스토 행사장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결국 총 네 번의 교통편을 통해 이동을 한 셈인데, 비용의 총합은 글래스토 전용 코치보다도 다소 저렴했지만, 꽤나 번거로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루트는 아니다. 1990년대를 회상하며 트립합의 도시라 불렸던 브리스톨을 한번쯤 경유하고 싶다면 모를까. | 김영진 [email protected]

 

관련 글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페스티벌, Glastonbury 2007 [2]


관련 영상


2007 glastonbury & wireless (www.festivalgeneration.com)

관련 사이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공식 사이트
http://www.glastonburyfestivals.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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