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는 소비된다. 정확히 말하면, 잉여의 이미지가 소비된다. 머지않아 잉여의 사회학이나 잉여의 소통과 리더십, 잉여가 해야 할 50가지 따위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농담이 아니다. 벌써 조짐은 보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잉여가 세상을 바꾼다, 잉여는 더 이상 잉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다, 뭐 이런 요지의 심오한 일간지 칼럼을 보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아이러니다. 반자본주의적인 잉여가 상품화되고, 팔리고, 소비되는 것.

이강주의 만화를 오랜만에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녀가 한참 활동했던 1990년대의 공기는 지금과 좀 달랐던가. 지금보다는 좀 숨 쉬고 살 만했던가. 모르긴 해도 지금처럼 세상과 악다구니를 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은 지루하고, 나른하며, 맥 빠진 이강주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80, 90년대에 이미 잉여의 코드를 캐치했던 작가였구나. 그녀의 작품에는 변함없이 잉여로운 자들―그녀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단편 [149 콤플렉스]의 내레이션을 인용하자면 ‘막무가내성 띨띨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 자체가 그런 한가로움이나 멍청함과 어딘가 닮아 있기도 했고. 동주나 정수처럼 중성적이고 무심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 이름(그러고 보니 작가 이름도 좀 그렇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데생 실력을 가졌음에도 뒤로 가면 갈수록 뭘 안 그리려고(?) 애쓰는 듯한 그림체, 치밀함이나 드라마틱함 같은 건 없는 이야기.

이강주의 잉여들은 그냥 잉여들이다. 희화화도 되지 않고 소비재도 되지 않는 순수한 잉여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세상과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물론 연애 사고 같은 소소하고 사사로운 갈등이 있고, 가끔 자신의 잉여로운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민하긴 하지만, 옆에서 고작 어깨 한 번 쳐주는 걸로 다시 행복해지곤 한다. 그들은 딱히 고독하지도 않고 스스로 분열되지도 않으며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속도가 타인과 다르더라도 그냥 살 뿐이다.

초기 단편 [마르소의 행복나들이]는 그런 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명함과도 같다. 백수 마르소는 어느 날 심심하던 차에 신발 빨래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의 친구는 그가 신발 세탁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결국 마르소는 신발 세탁의 명인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누린다. 죽고 싶었던 사람이 마르소가 세탁한 신발을 신으면 삶의 의욕에 가득 차게 되고, 음악가는 영감을 얻는 식이다([녹차향 아침]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요리사 이야기도 비슷하다. “버섯전골이 날 웃겼어! 으하하하!”). 그러나 마르소는 유명세나 부와 반비례해서 자신이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미련 없이 신발 세탁계를 떠난다.

그야말로 만화 같은 이야기다(하긴 만화 맞다). 그리고 그것이 이강주의 세계다. 사회적인 프리즘으로 보면 마르소의 신발 세탁은 아름답고 생산적인 행위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주고, 마르소는 돈과 명성을 얻으며, 어린이들은 그를 롤 모델로 삼는다. 한마디로 다양한 가치를 생산하는 멀티 유즈인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 애초에 신발 세탁이란 즐거운 유희였고, 유희 없이 가치로만 교환되는 노동이란 어떤 대가를 안겨주든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자신을 몇 가지로 분열시킬 뿐이다. 생산성 없는 인간을 축출해내려고 혈안이 된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부여도 가치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쓸모없는 이들은 그렇게, 그저 쓸모없는 채로 존재한다. 신분도 재화도 재능도 없지만, 그럼에도 뭘 애써 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질문 받지 않는 사람들. 이강주의 세계는 그들에게 무리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지 않고, 그저 세상의 작은 균열처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자신과 비슷한 짝을 찾는다. 세상 모든 것은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 세상 어딘가의 어떤 수많은(혹은 소수의) 마르소들에게 이런 세계는 비현실도 도피처도 아닌, 평범한 일상인지도 모르겠다. 소비되고 팔려나가는 잉여는 잉여가 아니다.


Pulp – Mile End

만화가들 중에는 음악광이 유독 많은데, 이강주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작품에는 장발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 기타를 둘러멘 캐릭터가 조연이든 주연이든 하나쯤은 예외 없이 나온다. 뮤지션의 이름도, 앨범 재킷도 꽤 많이 볼 수 있다(마르소가 신발 세탁을 하면서 스티브 바이를 듣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런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구체적인 노래 제목까지 나온 건 [캥거루를 위하여] 1권에 등장하는 펄프(Pulp)의 “Mile End”가 유일했던 것 같다. 딱히 작품의 주제나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강주를 [캥거루를 위하여]로 기억하기에 이 노래를 올려본다. 아, 쓰다 보니 생각이 난다. 2003년에 엘(EL)이라는 국내 밴드가 이 만화를 모티브로 만든 “캥거루를 위하여”라는 곡도 있다. | 최승우_[PAPER]에디터 [email protected] / http://twitter.com/theth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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