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V – 그 여자랑 살래요 | [Artist] (2012)

 

카라가 컴백한 지 한 달 반이 못 되어 새 미니앨범 [Pandora]의 활동을 중단했다. 물론 하루 이틀 하는 장사가 아닌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Step” 때보다는 좀 더 오래하고 싶었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결과일 수 있다. 물론 엔화의 젖과 꿀이 흐르는 다른 영토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긴 하지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뒤집어놓은 건 빌보드 ‘Hot 100 Singles’만이 아니다. 2012년 7월 15일 이후로 모든 그룹이나 음악의 인지도는 싸이와 “강남스타일” 아래 평등했다. 번외의 존재로 제쳐두기엔 심적, 물적인 영향력이 너무 큰 상황이다. “강남스타일”에 대해선 대중음악부터 사회학, 인류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글로벌한 규모의 TF팀을 자발적으로 꾸린 모양새다. 필요한 작업임을 의심할 순 없다. ‘오빤 강남…’ 하는 순간 한대 올려붙이는 다크나이트가 등장하는 만화 한 컷이 자연인으로서의 필자에 가깝다고는 해도.

메가 히트곡의 강렬한 섬광안에서 눈에 띄지 않은 채 놓쳐지는 곡들이 나중에서야 발굴되는 건 차라리 섭리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이 과거를 되새기는 이유는 ‘그때 알았던 걸 지금에도 알 수 있다면’ 하는 바람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유브이(UV)의 “그 여자랑 살래요”를 지금 놓치고 지나간다면, 2012년을 읽는 또 하나의 코드를 놓치고 지나가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오, 화려한 물량이여

1980년대 뉴웨이브팝이나 미국의 팝메틀은 말 그대로 자본집약적인 기술의 발전이 투영된 사운드였다. 더욱 많은 전기를 잡아먹고, 보다 막대한 인력과 장비를 투입해 뮤지션들의 성량과 연주력의 최대치를 구현하려 했다. 녹음에서 채널의 디멘션(dimension) 다변화라든가 공간감 구현이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정말로 스튜디오의 물리적 공간감에 의해 구현 가능했던 시대에, 사운드는 그만큼 비용을 정직하게 반영했다. 국내에서는 그런 공연장 자체가 드물었지만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같은 밴드가 공연했을 때 쌓은 앰프의 전력소비량은 엄청났다. 지금도 애용되는 이 당시의 딜레이를 비롯한 공간계 이펙트들은 10분이면 9볼트짜리 배터리 하나를 소진시키고도 남았다.

울림이 깊은 사운드는 그 울림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만큼 화려한 화성과 멜로디의 진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음표의 숫자보다도 인상적인 라인이 필요했다. 물론 전 파트에 걸쳐 적정 수준의 연주력도 필요했지만, 보컬리스트와 기타리스트의 능력치가 특히 더 요구됐다. 전자에겐 출중한 음역 커버 능력이, 후자에겐 충분한 공간감 안에서 난반사에 가까운 멜로디 전개를 구사할 만한 테크닉이 필요했다.

뮤직비디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인기 있는 밴드들은 수시로 항공팀을 동원해 뮤직비디오를 찍었다(Europe의 “Final Countdown”, Firehouse의 “All She Wrote” 등). 특히 미국 밴드들은 미해군의 지원을 받아 격납고를 열었다(Steve Stevens & Harold Faltermayer의 “Topgun Anthem”). 재차 언급하기도 쑥스럽지만, 이 당시 뉴웨이브팝과 그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를 차용한 팝메틀 음악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성격을 가진 삐까번쩍한 입간판이기도 했다.

이 시기 이러한 스타일에 대한 동경과 모방은 단지 한국만의 특이한 상황이라 할 수는 없다.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장비나 물량으로 구현하려던 ‘미국 스타일’에는 ―시나위 2집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안타깝게 만들었던 사운드를 생각해본다면―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음악 자체로만 보면 이 시기가 한국 음악의 ‘쥐라기’였지만, 적어도 이때의 주요한 외피로 보였던 스타일은 벌써 1990년대 초반부터 ‘허리케인블루’ 같은 개그의 소재로 쓰일 만큼 한국 땅에서 완전한 몸을 얻지 못한 영혼이었다. 곱상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던 신대철은 제이크 리(Jake E. Lee)가 될 수 없었고, 신장이 190센티미터를 넘는 김도균도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본의 경우처럼 자신들이 새롭게 소화해낸 변종 비주얼 쇼크가 먹힐 만한 풍토도 아니었다. ‘똥도 미국 것이면 달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였지만, 음악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유브이의 “그 여자랑 살래요”는 태생부터 매니악한 스타일의 리바이벌인 셈이다. 레코딩에서의 확연한 공간감과 믹싱 단계에서 일부러 그 구분을 명료하게 짓지 않은 듯한 사운드소스들 간의 섞임은, 이 곡의 정체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설명이 될 수 있다. 사실 뉴웨이브팝이나 팝메틀에서 사운드 소스가 다양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가뜩이나 부족한 물량의 한국에서 구현했던 당시에는 더 엉성한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니까 유브이에게는 이 엉성함을 ‘때깔 나게’ 구현해야 하는 복합적인 과제가 주어져 있었던 셈이다.

과제의 성격을 이렇게 한정한다면 유브이는 적어도 그 수행에 있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우선 이 ‘때깔’이라는 부분에 있어선 뮤지의 능력과 함께 기타리스트 유승범의 존재가 클 수밖에 없다. 뮤지는 이미 “그 여자랑 살래요”의 서주랄 수 있는 자신의 솔로앨범 [I Am Muzie]로 이러한 스타일의 어레인지 능력을 일차적으로 과시한 바 있다. 또한 후반부에 작렬하는 날렵한 스윕 피킹(sweep picking) 솔로와 페이저(phaser) 계열의 이펙트가 걸린 오버드라이브에서 발견되는 팝메틀의 이디엄, 얕고도 깔끔한 리듬 커팅의 톤에서 들리는 뉴웨이브의 이디엄 조화는, 분명 유승범이 당대에 충분한 평가를 받아야 할 요소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이 곡은 듀란듀란(Duran Duran) 출신의 기타리스트 앤디 테일러(Andy Taylor)가 1986년 발표한 솔로작의 확장형이라는 인상도 받을 만하다.

 

80년대 생과 80년대 음악, 그리고 ‘삼촌’ 윤도현

그러나 이 곡이 재미있는 건, 뮤직비디오 감독 이사강을 포함해 전원이 1980, 81년생(기타리스트 유승범은 1982년생)으로 정작 이런 스타일의 곡이 유행할 때는 채 10대가 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물론 작곡가로 상당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뮤지는 십대 초반부터 왬(Wham!) 류의 뉴웨이브팝을 접해 왔다고 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그 열기의 시대로부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영향이든 자발적 탐구든, 이를 찾아듣지 않았던 다음에야 형성될 수 없는 취향이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건 자신이 어느 정도의 인지능력(?)을 갖추기 전에 유행했던 이 시기의 음악을 같은 취향으로서 공유하는 이들의 유대는, 여타 취향보다도 더 긴밀한 끈이 되는 ‘질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얼마 전 필자가 “그 여자랑 살래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감독 이사강과 다른 매체를 통해 가진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바다. 이사강은 이 곡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위해 만들었던 구체적인 레퍼런스 영상을 아이폰으로 보여주었다. 화이트스네이크부터 건즈앤로지즈(Guns N’ Roses)까지, 80년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밴드들의 뮤직비디오나 공연실황 장면들이 하나의 흐름 안에서 편집돼 있는 영상이었다. 이사강의 뉴웨이브팝에 대한 이해 역시도 유브이 멤버들 못지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레퍼런스였다.

그렇다면 “그 여자랑 살래요”는 80년대 생들이 직접 동시대 문화로서 향수했던 문화적 코드에 대한 동질감과는 다른 무엇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들이 공통으로 간직하고 기뻐하는 80년대 음악에 대한 강한 이끌림은, 어쩌면 같은 전설을 공유한, 흩어진 종족으로서의 재회에 대한 설렘이 아닐까. 일면식도 없었지만 어릴 적에 넘겨받은 전통의 징표들이 일치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동질감.

이 동질감의 발현은 상당히 복잡해서 별도의 지면을 요구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거칠게나마 언급하자면, 이러한 정서를 전해줄 누군가가 존재하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문화계층적 자부심을 서로의 얼굴에서 확인한 것이 첫 번째일 수 있다. 1981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는 분명 ‘외국물’이 어느 정도 계층 구분의 기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팝음악을 좀 안다는 ‘외국물’ 먹은 사람이나,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그에 준하는 정보를 얻을 만큼의 지식 계층이 이때부턴 지근거리에 있다는 것을 뜻했다.

 

 

또 한편으로 80년대는 컨텐츠 생산자들에게 있어 분명히 지금보다는 황금의 시절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 시기의 공간은 자연히 이상향으로 승격된다. 작금 최고 인기 걸그룹인 씨스타는 단독 공연에서 3천 석을 매진시키지 못한다. 한데 웸블리니 매디슨스퀘어니 하는 수만 명 단위의 공연장을 며칠씩 매진시키던 그룹들이 활개 치던 그때는, 자연 가보지 못한 ‘벨 에포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가보지 못한 이상향에 대한 향수는 종족을 묶을 수 있는 신화가 된다. 확대 해석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윤도현의 존재는 이 지점에 이르러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아홉 살 가까이 어린 이들에게 그는 선배이기 이전에 그 시기 팝과 메틀의 열기를 몸으로 겪은, 살아남은 신화의 증인이다. 현란한 색과 패턴의 드레스셔츠가 너무 잘 어울릴지언정 그는 단순히 ‘노는 삼촌’이 아닌 선지자일지도 모르는 셈.

그렇다면 “그 여자랑 살래요”에서 ‘내가 너를 사랑해!’라는 유세윤의 외침은 단지 폭소의 대상이 아니다. 어쩌면 유브이의 음악 이면으로부터 울리는 음성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 속 구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선언일지도 모른다. ““강남스타일”이 얼마나 잘 나가건, 그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피’를 봤건, 그것 자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박을 치면 좋겠지만, 어차피 좋아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음악에 정말로 쏟아졌으면 하는 것은 ‘공감’이 아닌 ‘동감’이다. 나와 ‘동감’하는 사람은 나의 형제다.” | 한명륜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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