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랑의 [욘욘슨]만큼 화제가 된 ‘인디’ 앨범은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호의적인 평가였지만 한편 반대의 평가도 있었다.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당연하다. 이 앨범은 실제로도 ‘좋게’ 혹은 ‘나쁘지 않게’ 들리니까. 하지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쪽은 대부분 “그럼에도 뭔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입장인 듯하다. 이때 그 차이를 단지 취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가장 손 쉬운, 안일한 태도일 것이다. 이번 [pros & cons]에서 이 앨범을 다루기로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이랑 | 욘욘슨 | 소모임 음반, 2012

 

최소한의 요소로 낚아챈 감정들 | 최성욱_[weiv] 에디터

곱씹었을 때 다양한 맛이 발견되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첫인상이 압도적인 음악이 있다. 이랑의 [욘욘슨]은 후자에 가깝다. 고백하건대, 발매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욘욘슨]을 재생했을 때 예전만큼의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랑의 앨범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에는 그즈음 발매된 여타의 포크 앨범과 선연히 구별되는 무엇이 있었다. 귀를 확 잡아채는 요소가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몇 가지 코드로 구성된 단출한 기타 패턴)’ ‘고백(일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가사)’이 돌직구처럼 뇌리에 꽂히는 부분이 있었다.

청각을 가장 먼저 낚는 요소는 이랑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에워싸고 있는 잔향이다. 이랑은 연극배우가 대사를 처리하듯 음을 길게 늘이기도, 짧게 분절시키기도 하면서 중간 중간 악센트를 넣어 강약을 조절한다. 하지만 그러한 ‘연극적’ 발성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기타 반주와 음성의 강약 패턴이 같은 지점에서 만나면서 발성은 리듬을 이루고, 청아한 목소리의 코러스와 조화롭게 중첩되면서 화성을 이룬다. 서정적이고 매끄러운 스타일의 포크 싱어의 음색과도, 꾸밈없이 거칠게 목소리를 내뱉는 안티포크 싱어의 음색과도 궤를 달리한다. 목소리와 코러스는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쳐 더욱 강조되며, 스트레이트한 음색은 에코와 리버브 과정을 거쳐 입체적인 공명을 이룬다. 슈게이징한 기타 사운드와 노이즈의 효과를 목소리가 대체하는 격이다.

이후에는, 달콤 쌉싸름한 노랫말에 한 번 더 낚인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노랫말이 정서를 유혹하는 지점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설명되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작품처럼, 이질적인 소재들이 부딪히며 화학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커트 보네커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칸디나비안 민요와 ‘개똥아’, ‘똥 쌌니’, ‘긔엽긔’ 등의 단어를 발랄하게 콜라주하고(“욘욘슨”), 영화감독의 이름을 나열하다가 불현듯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더니 종국에는 서영춘 선생의 만담으로 마무리 짓는(“졸업영화제”) 방식이다. 노랫말은 위에서 언급한 이랑의 음색, 발성과 맞물려 더욱 도드라지게 들린다.

그런데 “난데없고”(김학선) “명백하게 다른 감수성”(최지호)을 지닌 이 음악이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음악이 묘하게 노스탤지어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미국의 가스펠/포크 같기도 하며,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 노래(“바다새”, “담다디”, “바다에 누워”)가 연상되기도 한다. 유년의 찬란함과 현재의 찌질함이 중첩되기도 하고, 쾌락과 고통이 오르락내리락 시소 놀이를 한다. 나란히 놓일 수 없는 감성들이 뒤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날것에 가까운 기타 패턴과 매끄럽게 보정된 목소리가 뒤섞인다. [욘욘슨]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실재하지 않는 이상한 지점을 향한 노스탤지어다. 이 어슴푸레한 지점이 여타의 포크앨범 가운데 빛을 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최성욱 www.facebook.com/prefree99

 


 
 

쉽게 증발하는 매력 | 최민우_[weiv] 편집장

만약 창작이 ‘자아’와 ‘테크닉’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은 커다란 자아와 미숙한 테크닉 사이에서 벌어지는 악전고투일 수도 있다. 조건은 척박하나 야심은 높다(덧붙이자면 이 높은 야심은 자신의 야심에 대한 초연함까지 포함한다). 때로 그 아마추어리즘으로 인해 회자되는 작품들은 열악한 조건을 한 점에 모아 겨누어 청자의 심장을 꿰뚫는데, 그건 마치 금고의 다이얼이 딸깍 하며 맞아떨어지는 순간에 비유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순간이 ‘기존에 없던 감성’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청자를 홀릴 때 그 작품들의 나머지, 그러니까 비실거리고 무성의하며 얼렁뚱땅 넘긴 부분들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설사 보임에도 무시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이런 행동은 사랑이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평가는 아니다.

나는 이랑의 간소한 데뷔작 [욘욘슨]에 대한 현재의 반응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평자들은 이 음반이 보여주는 아마추어리즘과 극단적인 로파이 사운드 프로덕션, 그에 대조되는 덤덤하면서도 쿨한 정서에 환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럴 때 그러한 태도가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신화’라는 함정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또는 ‘기존에 없던 것’에 대한 환호에 반사적으로 매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그러한 관점에서 ‘제한적인 신선함’과 ‘지속 가능한 매력’의 차이를 분간할 수 있다면 내게 [욘욘슨]의 위치는 전자다. 첫 대면에서 찾아왔던 신선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이 음반에서 이랑의 다음 작업을 기대할 만한 요소를 별로 찾지 못했다.

이는 [욘욘슨]의 가장 큰 매력이 가사라는 점과도 인상을 같이 한다. 이랑은 입말의 매력이 잘 살아 있는 가사를 쓰며, 그것을 ‘스토리화’된 맥락 속에 적절히 위치시킬 줄 안다. 어떤 이들은 김애란 등의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오프닝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음반의 타이틀인 “욘욘슨”, 한기가 돌 정도로 냉정한 “럭키 아파트”, 그리고 웃기면서도 씁쓸한 “졸업 영화제” 등에서 이랑은 재잘거리듯, 때로는 극적으로 자신의 위트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의 재기와 관찰력은 햇빛을 받은 모래알처럼 반짝거린다. 그러나 맥북 내장 마이크를 사용하여 녹음했다는 사운드는 이 재기를 돕고 있을까 방해하고 있을까? 이를테면 뭔가 정리하다 만 것 같은 “프로펠러”의 경우, 이랑은 정말 이 정도면 음반의 마무리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욘욘슨]의 어수선한 녹음과 단조로운 편곡들, 그리고 명료하고 잘 넘어가지만 종종 쉽게 질리는 1980년대풍의 선율들을 들으면서, 더 좋아질 수 있는 지점, 즉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는 지점에서 이랑이 그냥 손을 놓아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욘욘슨]에서 듣고 있는 건 로파이 인디 포크라기보다는 이벤트성 데모 음원이다. 그것이 때로 선명한 효과를 발휘하고 시선을 끄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욘욘슨]에서 그 효과는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휙 증발한다. 다시 한 번, 이 음반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그게 ‘뮤지션의 매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 최민우 [email protected]

 

2 Responses

  1. Stephen Kang

    최민우 씨의 말씀에 공감해요. 이 앨범에 대한 호평이 이전의 장기하 ‘현상’때 드러났던 환호와 본질적으로는 별반 다른 것 없다는 생각입니다. 재밌는 가사와 (일견 보기에는) 신선(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진부한 멜로디인..)한 사운드와 같이 눈에 띄는 요소들이 쉽게 회자될만한 무언가로 만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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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ye kim

    영상원학생이라고하니 차라리 인디영화 ost앨범이라면 미덕이  크게 증가했을지도;;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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