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 모든 의문부호에 마침표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한때 불사의 존재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뱀파이어 같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그랬던가. “인간의 모든 문제는 유한성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그 말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격하게 공감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사는 건 인간에게 무엇보다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도 안 죽을 거라고, 최소한 천 오백년쯤 살고 싶다고.(지금 생각하니 자다가 허공에 드롭킥을 날리고 싶어진다)

불사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결정적인 계기는 사무라 히로아키의 [무한의 주인]이다. 혈선충이 몸에 박힌 만지는 탐미적이고 권태로운 기존의 불로불사 캐릭터와 딴판이다. 애초에 이 만화는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무사도를 읊는 사무라이가 아닌, 저잣거리에서 굴러먹는 낭인들의 이야기다. ‘일대일 싸움이라면 어떤 무기를 쓰든, 어떤 방식으로 이기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모토를 지닌 아노츠 카게히사의 일도류는 유파라기보다 야쿠자 집단과 흡사하다. 쌍신도, 삼지창, 도끼, 사슬낫, 갈고리 등 이름도 모를 희한한 무기가 다 등장하고, 모든 싸움은 진흙탕에서 뒹구는 악다구니를 닮았다.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살고 네가 죽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싸움 와중에, “죽지 않는 몸이 되니 검술이 자꾸 무뎌진다”는 만지의 말처럼, 그의 몸은 점점 도구화된다. 그러니 싸움에 ‘간지’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매번 사지가 날아가고 배가 갈라진다. 죽지만 않을 뿐이지 고통은 똑같이 느낀다. 2권에서 만지는 자신처럼 혈선충을 지닌 시즈마 에이쿠와 싸우는데, 두 사람이 칼로 서로의 심장을 꿰뚫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 모습은 [무한의 주인]의 테마를 가장 확실하게 담고 있는 장면이다. 육체가 그저 도구가 되고, ‘목숨을 건다’는 인간적인 조건조차 내세울 수 없는 그들의 싸움은 공허 그 자체이며,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건 고통 뿐이다. 죽지 않는다는 건 만능에 가까운 능력이지만, 그걸 담고 있는 그릇은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무한한 생명은 한없는 자유, 한없는 자유는 절대적인 고독이다. 시즈마는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벌레(혈선충)를 줄 수 있었다면, 나는 아무도 잃을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건 처음부터 나와 같은 인간뿐이란 걸 깨달았다.” 만지와 시즈마가 몇 천 년쯤 살았다면, ‘불사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싸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마음을 죄다 도려내서 고통에도 무감각해지고, 허무에 잠식당하지도 않는 완전체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인 강인함이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어도 되고, 또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이야기가 서서히 끝을 향하고 있는 가운데, 만지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궁금하다.

[무한의 주인]은 1993년부터 연재가 시작되어 29권까지 나왔다. 작가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모든 에너지를 데뷔작인 [무한의 주인]에 쏟아 넣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첫 손에 꼽히는 특징이라면 그림체다. 연재 초기부터 이미 인체의 비례나 컷의 구도가 균형이 잡혀 있고, 호흡하듯 거친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하기 짝이 없는 작화는 한마디로 탁월하다. [양의 노래],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의 토우메 케이와는 타마미술대학 동아리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이ㅡ 그림체나 분위기가 흡사한 것도 사무라 히로아키가 토우메 케이에게 연필화의 노하우를 배웠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우울한 토우메 케이의 작품에 비해, 사무라 히로아키는 비교적 개그 센스가 있고 ‘드립’을 칠 줄 안다는 게 차이점이다.

[무한의 주인]과는 다른 사무라 히로아키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게, 일본 대학생들의 소소한 연애담을 그린 한 권짜리 중편 [이사]다. 작품 초반쯤에 여자주인공 고바루카와 레이코가 스쿨밴드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첫 곡이 “바나나 쉐이크”라는 노래다. 허밍 어반 스테레오의 첫 EP [Short Cake]의 수록곡이며, 요조의 데뷔곡인 “Banana Shake”는 바로 이 노래의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다. 만화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원곡’은 훨씬 로킹한 쪽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앨범 정보에도 ‘작사 Samura Hiroaki’라고 표기되어 있다.

ps. [이사]에는 [소녀만화가무숙 눈물의 일기]라는 단편이 같이 수록됐는데, 이거 상당히 웃긴다. | 최승우_월간 [PAPER] 에디터. 음악과 영화, 스포츠 등에 관해 이런저런 글을 쓰는 중 [email protected] / http://twitter.com/thethawing

 

 

허밍 어반 스테레오 – Banana Shake | Short Cake EP (2004)

 

바나나 껍질을 다섯 개로 벗기면 사람이고
네 개로 벗기면 원숭인걸 원숭이라도 좋아
귀엽기만 하면 귀여운 바나나나

우유가 가득한 한 컵 랄라랄 라랄라라
달디 단 바나나 쉐이크
하나도 안 남길 바나나 쉐이크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마음을 담아서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힘차고 조심히
휘저어 휘저어 바나나 쉐이크

바나나 나나 나나나나나 나
랄랄랄 랄라라 라랄 라라라 라

그 녀석이 또 바나나를 까는군
세 개를 까다니 원숭이보다 더하네
그래도 귀엽기만 하면 귀여운 바나나 나나
우유가 가득한 한 컵 라랄라 라랄 랄랄라

꿈에서 배운 요리법은 7분간의 쿠킹
달콤한 향기 코에 닿는 이 향기

그러나 망했다 망했어 너무 휘어졌어
망했다 망했어 너무 휘어졌어
망했다 망했어 너무 휘어졌어

바나나나 바나나나나 바나나
바나나나 바나나나나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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