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는 몇 가지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중에는 ‘음악’과 ‘노래’의 정의도 있고 ‘TV가 음악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도 있다. 또한 ‘가창력’이라는 흔히 쓰는 개념의 정의부터 ‘음악의 서열화’라는 난제도 있다. 혹은 옥주현에게 왜 그렇게 많은 비난이 쏟아졌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요컨대 <나는 가수다>는 단지 일개 프로그램의 지위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신드롬으로서 <나는 가수다>는 대중문화와 산업, 미디어와 팬, 시장과 소비 등의 관점을 정리하게 만든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는 가수다>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권위는 보장받고 고민은 사라진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말함으로서 뭔가를,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수다>를 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이 든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토록 ‘가창력’에 목을 매고 있을까, 라는 의문과 <나는 가수다>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그럼에도 동시에 음악이 지나치게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는 것 정도다. 여기에 임재범이란 보컬리스트는 이미 대중에게 시나위나 아시아나의 보컬보다는 “고해”와 “너를 위해”의 임재범으로 기억된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각성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창력’이 어째서 좋은 가수의 본질로 여겨지는지와 또 미디어와 음악의 공생관계다.

애초에 대중음악이 미디어 친화적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현대 대중음악의 발원지라고 할 만한 미국과 영국에서는 TV와 영화가 대중음악(그러니까 록과 팝)의 배급을 주도했다. 비틀스를 필두로 한 1960년대 말의 브리티시 인베이전 역시 <에드 설리반 쇼>가 없었다면 그렇게 빠르고 넓게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엑스펙터>나 <아메리칸 아이돌>같은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가 없었다면 소니 엔터테인먼트의 신인 카탈로그는 이 정도로 풍성해지지 못했을 것이다(소니 엔터테인먼트는 <엑스펙터>와 <아메리칸 아이돌>의 제작사다). <플래시 댄스> <탑 건> <보디가드> <타이타닉>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으로 대변되는 8, 90년대 미국 팝의 세계시장 지배력은 UIP직배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거나 훨씬 더 늦게 이뤄졌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미디어와 대중음악의 관계를 ‘지배-피지배’가 아닌 공생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TV와 같은 대표적인 매스미디어는 대중음악을 널리 ‘퍼뜨리는데’ 가장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인기 드라마의 주제곡이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삽입곡이 한 시대의 음악이 되는 경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중앙집권적인 사회에서는 매스미디어, 대표적으로 TV가 대중음악의 거의 유일한 배급채널이 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1980년 군부에 의한 강제적인 언론통폐합도 단행된 전례도 있는 바, 한국의 미디어 환경은 지역성보다는 획일성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발전해왔다. 물론 인터넷 환경이 빠르게 구축되며 매스미디어에 대항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어의 한계로 인한 필연적인 포털 중심의 재편으로 오히려 인터넷 환경은 협소한 영역으로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리얼리티 쇼를 필두로 한국의 미디어 환경이 엔터테인먼트 중심으로 급속하게 재편된 상황은, 매스미디어가 사회 전반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만든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놀러와>의 ‘세시봉 특집’으로 포크가 재조명되고, 또 당시 음악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나 <슈퍼스타K>의 시청률 급등 혹은 <위대한 탄생>의 제작 배경은 모두 납득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게 거의 유일하다는 데 있다.

지인 중 하나는 요즘 사람들이 TV를 너무 많이 보고, 또 보는 게 너무 비슷하다고도 말했다. 물론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5~60%를 웃돌던 2~30여 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오히려 TV를 덜 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TV에 의존하는 정도의 체감이 훨씬 더하다는 사실이다. TV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면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시대, 트위터나 포털 뉴스마저 TV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그로 인한 결과보다 한국의 미디어 환경의 기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먼저 요구한다. TV에서 트위터로, 혹은 인터넷 언론 기사에서 댓글에서 다시 뉴스와 TV로 이어지는 ‘소문의 순환 구조’는 한국 사회 특유의 속도감과 그로 인한 여러 폐해를 상기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가수다>의 기이한 신드롬과 대중음악의 서열화, 그리고 음악이 노래로만 이해되고 수렴되는 분위기를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나는 가수다>의 반향에 대한 양가적인 입장과도 연관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프로그램을 통해 ‘좋은 노래’가 새삼 주목받고 차트에 등장하는 현상에는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음악이 노래로, 음악성이 가창실력으로 치환되는 구조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사실 아무리 좋게 봐도 <나는 가수다>의 한계는 명백하다. 대중음악의 복잡한 산업 구조와 맥락을 단지 노래하는 기술로 치환시킨 다음 거기에 순위를 매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가 일종의 ‘기능 올림픽’에 불과하다는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의 비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런 현상이 가수만 부각시키는 ‘가요계의 보수적인 관습’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 사회에 이미 오랫동안 체화된 구조라는 점을 지적한다. 동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가수다>가 실제로 음원 판매나 공연을 통해 음악시장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긍정적으로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노래 부르는 능력이란 뜻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이다)는 외국어로 변경되지 않는, 한국에서만 그 의미가 통하는 단어기도 하다. 보편성이 없는 불투명한 개념이 노래(와 음악)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셈인데, 그로 인한 혼돈은 현재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는, 출연할 예정의 가수들을 에워싼 소모적이면서도 파괴적인 논쟁과 논란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냉정하게 말해, <나는 가수다>는 가창력을 볼모로 대중음악에 서열을 매기고 장르를 차별화하는 폭력적인 경쟁구조를 정당화한다. 이런 구조라면 제 아무리 음악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고 해도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특히 만드는 사람이든, 보는 사람이든, 혹은 그걸 전달하거나 평가하는 사람들 모두가 <음악여행 라라라>나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프로그램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 수많은 공연은 외면한 채, 마치 <나는 가수다>가 유일한 라이브 무대인 것처럼 들썩거릴 때면 말이다. | 글 차우진 [email protected]  20110612

 

note. 이 글은 [주간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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