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숫자들 | 유예 | 튠테이블무브먼트

9와 숫자들 | 유예 | 튠테이블무브먼트, 2012

 

9와 숫자들의 [유예]는 내게 두 가지 슬픔을 환기한다. 수록곡들이 겨냥하는 슬픔, 그것은 대부분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상, 후회,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에 머문다. 가벼운 리듬의 “몽땅”과 “그대만 보였네”, 어쿠스틱으로 바뀌어 실린 “낮은 침대”마저도 이 슬픔의 내러티브에 휘말려 길지 않은 분량의 앨범에 인터미션을 주는 역할을 맡는다. 수록된 8곡, 특히 “눈물바람”, “유예”, “아카시아 꽃”, “착한 거짓말들”과 “플라타너스”를 다 듣고 나면 한낮의 이별 통보 같은 페이소스에 휩싸이는데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전의 일들이 쭈욱 스친다. 2009년의 전작에서도 9와 숫자들은 이런 감상주의를 영리하게 조율했다. “선유도의 아침”과 “석별의 춤”, “실낙원”이 그 지점을 다소 직설적으로 찍어 눌렀다면 이번에는 좀 더 세련되고 느긋하다는 인상이다.

또 다른 슬픔은 소리 때문이다. 데뷔작에서 감지되던 스톤 로지스 풍의 기타 사운드나 ‘캠퍼스 그룹사운드’ 시대의 작법을 반영한 곡은 곳곳에 활용된 신시사이저 효과나 공간계 이펙트로 조율된 소리의 부피감 덕분에 묘한 노스탤지어를 형성했다. 동시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련한 정서를 자극했는데, ‘삼청동’이나 ‘선유도 공원’ 같은 지명이 그 정서를 더 강조했다. 그런데 [유예] 앨범에서는 소리에 대한 이런 실천이 좀 더 촘촘해진다. 특히 아름다운 멜로디와, 그 위로 6-70년대의 록 음악을 연상시키는 퍼즈(fuzz) 톤의 기타, 곳곳에 은근히 들어간 공간감이 겹쳐지며 우아한 잔상을 남긴다. 소리를 안으로 삼키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아련한 발성의 9(송재경)의 음색도 여기에 한 몫 한다. 그런데 이 ‘톤’이 환기하는 정서야말로, 내게는 슬픔에 가깝다. 그 슬픔은 과거지향적인 노랫말과 함께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장소’를 힘주어 겨눈다. 요컨대 이 모든 소리의 ‘효과들’이 지목하는 건 ‘록 밴드’가 ‘(캠퍼스)그룹사운드’로 불리고 ‘한국 대중음악’이 ‘가요’로 불리던 어떤 시절이다. 이장희나 김창완, 송창식과 배철수, 김민기나 양희은 같은 ‘젊은이들’이 활동하던 시절의 음악이라고 하면 뜻이 보다 분명해질 것 같다. 덕분에 내겐 이 노랫말과 사운드 효과가 한국의 대중음악이 산업화되기 이전의 노스탤지어를 겨냥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노스탤지어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정서다. 의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물리적 불가항력을 체감하게 되는 감상이다. 그럼에도, 그리운 것은 그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어쩌지 못하는 감정이 슬픔으로 대체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앨범에 스며든 슬픔, 그러니까 수록곡이 겨누는 향수와 그리움은 ‘내’가 겪지 못한 일인 동시에 무슨 수를 써도 결코 겪을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퇴양난, 불가항력의 압도적인 권력은 향수와 슬픔을 낭만적 감상으로 바꿔놓는다. 돌아갈 수 없다는 각성과 슬픔은 돌아갈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름답게 미화되고 아련하게 뭉뚱그려진다. 특히 드라마틱한 구조와 문학적인 수사가 지배하는 곡들이 이 점을 보다 구체적인 감정으로 치환한다. 요컨대 이 음반을 듣는 사람의 감정이 경험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자연스럽다는 점, 또한 그 과정에서 미학적 성취마저 이룬다는 것이야말로 [유예]의 미덕일 것이다. 특히 타이틀인 “유예”는 선명한 기타 리프를 주축으로 현악기와 드럼, 화음과 박수 소리를 겹겹이 쌓으며 이 감정을 구체화하는데 ‘조약돌’과 ‘바위’, ‘종달새’와 ‘부엉이’의 선명한 대조, ‘연체’라든가 ‘유예’같은 문어체 표현들이 작위적이지 않게 들리는 점이야말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지나가버린 혹은 방금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애련을 멋스럽게 바꿔놓는 노련한 타이틀이자, 9와 숫자들의 음악적 방향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9와 숫자들 “유예”

작은 조약돌이 되고 말았네 잔물결에도 휩쓸리는
험한 산중 바위들처럼 굳세게 살고 싶었는데
작은 종달새가 되고 말았네 하릴없이 조잘거리는
깊은 밤중 부엉이처럼 말없이 살고 싶었는데
연체되었네 우리 마음은 완전함은 결코 없다고 해도
부족함이 난 더 싫은데 내일, 모레, 글피, 나흘, 닷새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빛을 잃은 나의 공책 위에는 찢기고 구겨진 흔적 뿐
몇 장이 남았는지 몰라 무얼 더 그릴 수 있을지도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중 하나의 색만이 허락된다면
모두 검게 칠해버릴 거야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끔
연체되었네 우리 마음은 완전함은 결코 없다고 해도
부족함을 난 견딜 수 없어 자꾸 떠나기만 했는걸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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