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음악웹진 [보다]에 “한국 대중음악평론의 내일을 묻는다”는 제목의 칼럼이 게재되었다. 서정민갑이 쓴 이 장문의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시기별로 구분한 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역사(와 현재), 2)21세기와 비평(가)의 위기 3)위기에 대응하는 비평적 실천(과 역할)이 그것이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나는 한국 대중음악 비평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이고 성실한 요약문이 드물었다는 점이 이 글의 미덕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밝힌다. 게다가 오랫동안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걸 정리하려던 때에 마침 이 글이 공개되어 개인적인 자극이 되었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이끄는 논조가 나와는 다르다는 점 또한 밝혀둔다. 나는 서정민갑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이 글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현재 음악비평의 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90년대와 본격적인 대중음악 비평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혐의에 대해서다. 다른 하나는 장황한 문제제기에 비해 현재 대중음악 비평과 그 주체에게 요구되는 어떤 역할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다는 점에 대해서다. 그 두 개는 하나의 맥락으로 엮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1)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역사를 새로 정립할 필요성과 2)산업적, 환경적 맥락에서 지금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역할 변화와 자기성찰에 대한 논고가 될 것이다.

1.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

<보다>에 게재된 글의 본문에서 서정민갑은 1990년대 등장한 진지한 대중음악 비평이 소련의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 1980년대 좌파(혹은 운동권) 지식인들의 관심이 사회혁명에서 대중문화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현상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혁명론을 폐기한 지식인들의 이념적 투항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또한 서구의 팝 음악 역사에 무지한 자신들의 안목을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숨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의 해석은 부분적으로 옳다. 그래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면 내 관점에서 이것은 1990년대 한국에서 문화 비평이 요구된 시대적/산업적 변화를 간과한 결과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는 한국 문화산업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시기였다. 그 이유는 군사정권이 몰락한 결과라기보다는 직접적으로 1980년대에 거둔 경제성장(혹은 한국의 버블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거치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그 기간 동안에만 매년 12%를 상회했고 1인당 GNP는 1963년 100달러에서 1990년 5,659달러로 증가했다. 게다가 1995년 당시 한국은행이 발표한 민간소비행태변화분석에 따르면 1989~1995년의 기간 GNP는 7.7% 성장을 기록했지만 민간소비 증가율은 8.5%로 역전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IMF 이전까지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간 소비율의 지속적인 증가로 인한 대중들의 문화 생활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 산업의 발전은 대중의 요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대중의 욕망이 경제적 뒷받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에 걸쳐 이뤄진 한국의 경제성장(그것이 비록 거품경제였다고는 해도)과 대중문화 산업 전반에 투자된 대규모의 자본의 역할은 간과되어선 안 될 일이다.

일례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회사답게’ 운영된 기획사라 평가받는 SM기획(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은 1989년에 설립, 당시 트렌드의 최전방에 위치한 현진영을 제 1호 아티스트로 삼아 그의 1집 앨범을 제작한 바 있고,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 시리즈로 유명한 LG미디어는 1990년대 내내 다양한 분야의 음반 제작과 유통을 담당했으며, 영화 [쉬리]를 제작한 삼성영상사업단은 1995년에 설립되었다가 1999년에 해산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대중이 경험한 것은,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대중문화 시장을 인식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등장하는 풍경과 대기업이 문화 시장에 투자한 자본이 기대 이상의 결과물로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모두 긍정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와 무관하게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배경에 산업의 질적/구조적 변화가 있으며 그 변화로 야기된 대중적 취향과 태도 변화(1990년대는 글로벌한 관점에서 새로운 세대: X세대가 등장한 시대다)가 존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1990년대에 대중문화 비평에 대한 전반적인 환기가 이뤄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서정민갑의 말대로, 당시 문화 비평을 주도한 것이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좌파) 지식인들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대중문화로 눈을 돌린 것은 전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으로 인한 방향상실 때문이 아니라, 198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산업적 변화라는 맥락 아래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비평가들이 대중문화 자체를 한국 사회의 구조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중요한 해석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따라서 서정민갑의 주장대로 1990년대 전반에 걸쳐 진행된 비평적 실천을 단지 ‘계급혁명론을 폐기한 지식인들의 이념적 투항’으로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그들은 대중문화와 동시대의 관계를 지나치게 직접적인 것으로, 그래서 필연적인 것으로 강조한 나머지 문화예술 자체의 고유한 자율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했다는 맥락에서 비판받아야 합당하다.

2. 비평의 오래된 위기, 부재한 비평가(의 역할), 그리고 21세기

1990년대의 비평가들은 대중문화를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대중음악에서 강헌과 이영미가 서태지로부터 새로운 세대의 혁명적 에너지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 대표적이다. 서태지를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대체하며 사회적 징후를 읽어내려던 노력은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대중음악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이른바 ‘고급음악인 클래식’에 비해 저급한 음악양식)를 전복시키는 데는 유효했지만 동시에 음악적 실천과 혁신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경제적 맥락과 산업적 조건들을 간과해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H.O.T.를 비롯한 아이돌 댄스 그룹에 대한 사회문화적 비평에 대한 요구를 이데올로기적 편견과 이분법적 태도로 대체시켰다. 한국에서 대중음악 비평의 ‘비평적 위기’는 이로부터 기인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서양 대중음악 비평의 역사에서 케케묵은 것으로 간주된 진정성 논쟁은 그 용어 사용에 대한 합당한 담론조차 부재한 채로 반복 재생산되었고 음악저널 역시 그 기조에 따라 동시대 대중음악을 이분법적인 틀로 구분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대중음악 비평의 위기가 21세기의 징후라고 주장하는 서정민갑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된 ‘무엇보다 대중음악평론을 주도하는 평론가들이 30대 후반과 40대로 접어들며 전업적 비평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대중음악 평론에 소홀해지거나 대중음악평론의 거점으로 만든 웹진에 주력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시작되는 후반부 전체는 그 자체로 현재 상황에 대한 몰이해와 불성찰을 드러낸다. 그는 현재 음악 비평의 전반적인 위기가 곧 비평가의 생계에 도래한 위기, 음악 웹진의 자체 수익구조의 부재와 음악 전문 매체의 소실, 비평가의 권위 상실, 음악을 가볍게 다루는 미디어에 포섭된 비평의 역할과 함께 이런 현실에 대한 비평(가)의 문제의식 부재, 인상비평에 안주하는 비평적 실천 등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평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비평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발견되는 징후들이다.

이미 1980년대에도 음악 비평가(혹은 칼럼리스트)들은 음악 비평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대부분은 방송이나 저널, 전문 DJ로 출발했으며 그들의 활동 영역은 방송, 저널, 공연기획, 매니지먼트 사업 등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있었다). 또한 음악 전문 매체의 등장은 대중음악에 대한 비평적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확장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였고, 시장의 요구이기도 했다. 음악 비평이 시장에 영향을 미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21세기에 이르러 대중음악 비평의 권위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리 크지 않았던 음악 비평의 권위를 상상하며 추억하는 낭만적인 태도일 따름이다. 비평(가)의 내부적 고민이 부재하다는 주장이나 인상비평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2004년 이후 앨범에서 싱글 시장으로 재편된 가요 산업의 변화와 그에 적응한 매체의 생존방식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음악 비평의 위기는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음악 비평이 시작됨과 동시에 내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며 대중음악 비평 주체들이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역사적 결과로 되돌아온 것이다.

3. (음악)비평의 한계에 주목한다

서정민갑의 글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 글의 성실함이 그 논조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또한 현재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제시함에 있어 당위론만 동어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실천, 요컨대 텍스트 비평과 장르비평을 넘어 새로운 철학적 예술적 담론을 생산해야한다는 주장이나 음악언어 중심의 주관적인 비평(무엇을 일컫는 말인지 잘 모르겠으나)을 극복하자는 주장, 무엇보다 ‘대중음악 평론은 단순히 좋은 음악의 선별자와 해설자 역할만이 아니라 음악창작물과 대중, 매체와 환경, 창작자와 시스템을 아우르는 분석과 담론의 생산자로서 일상적인 평론과 구체적인 연구 결과물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그의 글에서조차 모순되는 이 논조(앞부분에서는 대중음악 비평가들의 비평적 성과를 논했으나 후반부에서는 그걸 부정하는 걸로 보인다)는 현재 음악 비평이 90년대에 비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비평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푸념으로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소녀시대의 대중적 성공을 예로 삼아 ‘대중음악평론에 문화평론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한 것은 이제까지 소녀시대에 대해 쏟아진 다양한 분야의 담론들(이들은 음악적으로 제대로 된 비평적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문화학 혹은 사회학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왔다)을 무시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이런 논조의 흐트러짐은 애초에 음악 비평이라는 지적 실천과 그걸 수행하는 비평가라는 주체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서정민갑의 관점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 요컨대 비평의 역할이 아니라 비평의 한계다. 사실 비평은 기대와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플라톤 이후로 예술을 규정하거나 해석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비평이 단순히 국어, 미술, 음악 시간에 선생님(전문가)으로부터 듣는 지식이 아니라면 말이다) 예술가들은 늘 비평가의 해석을 비껴나가거나 조롱했다. 예술가들 뿐 아니라 예술 자체도 그러했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언급은 예술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반복적으로 해석된다.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언급된 대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를 탈출하는 수단이지만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반동적이고 뻔뻔스럽고 비열하고 숨통을 조이는 훼방’인 것이다. 해석이라는 행위에 내재된 이 모순은 비평의 위기 혹은 역할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전환시킨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비평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객관(비평)과 주관(감상)이라는 너무 오래되어 폐기된 지조차 오래된 구도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평가 자신에게 집중해야한다는 나의 주장은 비평가의 정의를 ‘남들보다 훈련된 감수성을 가진 존재’라고 할 때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비평가, 감상자 혹은 수용자 모두가 결국 동시대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내 관점에서, 비평이란 곧 개인의 취향을 감상자나 수용자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 논리적으로 풀이하는 지적 실천이다. 대상이 영화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이 점은 동일하다. 비평이 완전히 실패하는 순간은 그 작품에 숨어있을 거라 상상하는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 따위를 찾으려는 순간이다. 1990년대의 대중음악 비평의 한계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당시 왕성하게 활동하던 대중음악 비평가들: 강헌과 이영미, 임진모, 박준흠, 신현준 등의 비평 작업들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반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로부터 거의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받은 동시대의 비평가들 역시 이런 비판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나는 비평가가 작품 대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더욱 더 들여다볼 때 훨씬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리라고 믿는다. 개인의 취향이야말로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되고 존재하는 것이며 산업적/미학적 영향력조차도 거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점은 ‘예술 작품이 있어야할 자리를 빼앗는 대신 그에 이바지할 비평’의 필요를 주장한 수잔 손택의 문제의식과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나로서는 그녀의 제안: 대안적 비평은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해야하고 그를 통해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었는지, 나아가 예술작품은 단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란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비평의 역할보다는 한계에 주목하는 것이 더 긍정적일 수 있으며 그를 통해 비평가 개인의 취향을 경험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야말로 소위 ‘비평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실천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 글 차우진  [email protected] 201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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