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8, 2012 @ Union Lake

September 28, 2012 @ Union Lake

사람은 누구나 특별함을 꿈꾼다. 아니, 소리 내 말하지 않을 뿐이지, 어쩌면 누구나 가슴 한 구석 ‘나는 특별하다’는 환상 하나쯤은 품고 살 것이다. 게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청춘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이라면? 아서라, 말을 말자. 내가 쉬는 숨 하나하나, 내가 딛는 걸음 하나하나, 내 귓가에 울리는 멜로디 하나하나가 16부작 대박 미니 시리즈 아쿠타가와상 수상에 빛나는 일본 소설이다. 가끔 내가 모르던 나만의 특별함을 발견하고는 코끝이 시큰할 정도로 감동받거나 이 거대한 특별함을 도무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버거운 마음에 숨조차 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아아. 제인 에어며 카르멘의 삶 따위는 댈 것도 없는 거대한 우주의 운명 앞에 그저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 아무리 유치한 풋사랑의 상대일지라도 기어코 다아시며 히스클리프가 되고 마는 이 지독한 XX 유전자 종특 돌림병. 잠깐, 지금 거기, 모니터 앞에서 숨넘어갈 듯 비웃고 있는 당신, 날 속일 생각은 마시라. 나는 확신한다.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늘이, 달이, 새가, 세상에 존재하는 색채 이 모두가 나의 특별함을 위해 존재한다 여기는 삶의 한 터널을 지나고야 만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문제는 그다음이다. 과연 감히, 그런 소녀가 실은 자신이 조금도, 아니 병아리 눈물조차도 특별하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극의 극한 체험이다. 빛나는 우주에서 세상 가장 밑바닥으로의 추락이다. ‘나’는 딱히 반짝이지 않는다. ‘나’는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을 가질 팔자도 못 되고, 운 좋게 행운을 주워 설사 그런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해도 그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근성이나 내구성 따위는 쥐똥만큼도 없다. ‘나’는 윤심덕도, 전혜린도, 오노 요코도 아닌 것이다. 보통의 소녀들은 당연하게도 게으르고, 겁 많고,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쓴다. 우리 삶은 호남평야보다 평탄하고, 설혹 끝내주는 운명이 찾아오더라도 둔해 놓치거나 두려워 피해버리고 만다. 만에 하나 소박한 재능이라도 가지고 있는 소녀라면 이 권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름다운 말이나 멜로디, 나긋한 몸짓으로 표현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 구르는 재주조차 없는 이는 ‘그냥 지나가세요’밖에 생애 더 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불공평한 게임이 어디 있냐고 몸부림쳐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 봤자 가뜩이나 저질인 체력만 소진할 뿐. 남는 건 그저 나보다 특별한 무언가, 혹은 특별한 에피소드를 가진 선택받은 소녀들을 바라보는 선망과 질투의 눈 흘김뿐이다.

아름다운 시애틀의 한 여름 어느 날, 어느새 일상에 익숙해진 내게 열일곱 소년이 물었다.

“그런데, 너 몇 살이야?”
“뭐? 갑자기 왜.”
“그냥.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것 같아서.”
“모르는 게 좋을걸.”
“말해봐. 난 정말 상관없어.”
“놀랄걸.”
“나만큼 놀랄까.”
“서른하나.”
“Old.”

정도 없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 녀석 덕분에, 나의 아이덴티티는 이후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한국에 돌아오는 마지막 날까지 학교에서 나를 ‘Old’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아이는 없었다. 혹시 자신이 조금쯤 특별한 건 아닐까 참 깊고도 오래 고민했던 늦둥이 소녀는 그렇게 벼락처럼 나이를 먹었고, 시기와 후회와 눈 흘김의 세계로 원치 않는 한 발을 내딛었다. 삶의 깨달음은 언제나 그렇게 예고 없이 온다. | 김윤하 [email protected] / @romanflare

note.  [김윤하의 사운드스케이프]는 음악 칼럼리스트이자 라디오PD인 김윤하가 2012년, 시애틀에서 보낸 일상을 사진 한 장과 음악 한 곡으로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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