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SM 엔터테인먼트의 총 매출액은 약 1686억 원이었다. 전년 대비 53% 증가한 액수다.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배 이상 오른 약 478억 원이었다. YG 엔터테인먼트는 2012년 1000억 원 이상이 확실시되고 있다. SM의 절반 수준이었던 2011년보다 220억 원 이상 증가했다. JYP, 큐브 및 FNC 엔터테인먼트 등도 400억 원 수준이라 예측되지만, 그 역시 적은 규모는 아니다. 바야흐로 K-POP 산업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이때, SM 엔터테인먼트는 K-POP 산업의 1인자일 뿐 아니라 그 원형과 토대로서의 지위를 얻고 있다. K-POP과 SM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단 얘기다. | [weiv]

 

왜 SM인가? 

‘K-POP’이란 용어가 국제적인 지위를 얻게 된 것은 분명 싸이의 “강남 스타일” 덕분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2010년과 2011년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참조 1). 하지만 K-POP이 보다 보편적인 용어로 쓰이게 된 데에는 분명 “강남 스타일”의 성공이 크게 기여했다. 이 싱글의 히트를 기점으로 K-POP이란 말은 특히 해외 언론에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애초에 K-POP은 외부를 겨냥한 명칭이었다. 지금이야 형식이니 구성이니 K-POP이 ‘장르’처럼 다뤄지지만, 이 말이 등장한 2001년(그해 ‘K-POP’이란 댄스 그룹이 데뷔했고, SM엔터테인먼트는 일본의 에이벡스와 함께 자사 싱글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현지 발매하며 ‘K-POP 100%’라는 제목을 붙였다)에 그 단어는 명백히 국적을 가리키는 용도였다. 그런데 애초에 국적과 언어적 정체성을 가리키던 이 말이 J-POP과 비슷한 방식으로, 차츰 장르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 꽤 시사적이다. (이 얘기는 다른 기회에 다뤄보고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10년 사이에 이 용어의 밀도는 상당히 높아졌고, 앞으로 그 강도는 더 커질 것이다. 이런 팽팽한 압력 속에서 K-POP의 양식적, 미학적 특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자연스럽다. 그 방향이 마침내 SM을 향하는 것 또한, 자연스런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SM을 주목하는 이유는 ‘K-POP을 대표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란 순환논리 때문은 아니다. 이러한 얘기는 2001년 이후로 숱하게 반복되어왔다. (내 관점이지만) 오히려 SM에 대해 살필수록 ‘강박과 분열’이 중요한 키워드처럼 여겨진다.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선진적인 음악’이라는 강박(어쩌면 이것을 ‘이수만의 엘리트주의’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은 국내/해외 시장의 여러 차이들 때문에 상당 기간 일종의 실험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의 모험은 적어도 보아가 일본에서 성공하기 전까지 위태롭게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과 1997년에 나란히 데뷔한 H.O.T.와 S.E.S.가, 1년 만에 상이한 방식으로 발전했던 것을 예로 삼아도 좋겠다. 그러한 진행이 ‘리스크 관리’의 방편이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두 개의 다른 지점을 (지도도 없이) 동시에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부담은 분열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90년대보다 위험성은 줄었지만 현재 이들이 관리해야 할 가수는 더 늘었고, 진입해야 할 시장은 더 넓어졌으며, 여전히 선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런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내적 갈등이야말로 SM의 긍정적인 동력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강박과 분열’이야말로 SM이 나름의 음악적 양식을 정립한 동력이자, 이후 상당수 기획사들에 영향을 주며 총체적으로 K-POP이라는 브랜드를 형성하게 된 근거라는 얘기다. 이러한 점에서 SM은 K-POP에 있어 더욱더 중요한 이름이 될 텐데, 여기엔 산업뿐 아니라 음악적 양식들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SM이 K-POP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것은 수차례 언급된 바 있다. ‘오디션’을 통한 인력 선발과 ‘연습생’으로 지내며 음악 전반에 대해 교육받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훈련은 소속 그룹의 가창과 안무뿐 아니라 작곡 수업으로도 연결된다. H.O.T.가 3, 4, 5집 모두 멤버들의 자작곡으로 채웠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황상 당시 SM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이 그룹을 ‘아티스트’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때 한국 음악계에서는 ‘아티스트’야말로 시장성이 높았다는 맥락도 염두에 둘 만하다.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던 아이돌 그룹과의 경쟁에서 ‘창작’이야말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H.O.T.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3집 이후엔 멤버들이 전원 작사와 작곡을 하는 그룹으로 발전했다. H.O.T.와 S.E.S.의 본질적인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S.E.S.는 2집부터 외국 작곡자의 곡을 받아 노래했고(“Dreams Come True”를 작곡한 스웨덴의 리스트로 아시카이넨은, 샤이니의 [루시퍼]와 조권의 솔로 앨범에도 참여했다) 일본에 진출할 때에는 일본 작곡가들과 협업했다. 덕분에 1960~1970년대 이후 거의 사멸하다시피 했던 번안곡이, 포지션의 “아이 러브 유”, 김장훈의 “Goodbye Day”, 캔의 “내 생애 봄날은”, 박효신의 “눈의 꽃” 등에 이르며 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할 수 있었다.

‘해외 진출’을 위한 현지화 전략도 S.E.S.와 보아가 모범이 되었다. 무엇보다 SM은 오랜 시간 에이벡스 재팬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북유럽과 영미권의 에이전시들과 연관될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2000년 이후엔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음악 산업 내부로 편입되었다. 초기 SM 내부에서 H.O.T.와 S.E.S.의 방향이 각각 자작곡과 해외 작곡가로 경쟁한 결과 S.E.S.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보아와 동방신기가 일본 시장에 집중하고 성과를 거둔 결과를 그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 SM의 아이돌 그룹이 국내와 해외 시장에 접근하는 방법(혹은 전략) 역시 그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다른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남미 순회 콘서트로 나름의 진지를 구축한 큐브 엔터테인먼트나 이효리, 스피카의 신곡에 SM에서 활동한 국내외 작곡가들을 기용한 B2M 엔터테인먼트 등을 사례로 꼽아도 좋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그러니까 S.E.S.와 보아와 동방신기의 활동을 통해 SM이 국내 음악의 해외 진출이란 실험을 통해 K-POP의 기반을 닦았다면, 2009년 소녀시대 이후엔 북유럽 작곡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으며 한국 음악계의 산업 구조를 바꾸는데 기여했다고 보는 셈이다. 요컨대 K-POP은 2000년을 전후로 이미 지구적인 팝 산업 안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참조 2).

음악 외적으로도 SM의 결과물들은 앨범 아트워크와 퍼포먼스 등에 있어 시장 선두 그룹의 여러 이점과 실험정신이 강박적으로 뒤섞인 인상을 준다. 심재원(이글파이브, 비트버거, 블랙비트)과 황상원(블랙비트)이 SM의 대표적인 안무가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리노 나카소네, 토니 테스타, 질리언 메이어스, 내피탭스 같은 유명 안무가들이 상황에 따라 제각각 결합하는 방식을 취한다. 민희진 디렉터가 총괄하는 앨범의 아트워크는 그룹의 개별 앨범 콘셉트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데, 특히 f(x)와 샤이니의 앨범 아트워크에 하시시 박이나 표기식과 같은, 대중적으론 덜 알려졌지만 안목 있는 패션지를 통해 소개된 젊은 작가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단적으로 원더걸스의 모든 사진을 조선희 작가가 맡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음악과 음악 외적인 부분에 있어 SM의 ‘강박과 분열’이라는 키워드는 융화와 통섭으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어느 쪽이든 이 회사의 포지션과 전략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SM의 동력이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좋은 음악’과 ‘팔리는 음악’을 동시에 얻겠다는 내적 모순에 있다면, 그 생존방식과 전략은 YG, JYP 엔터테인먼트 등과 충분히 구별되는 동시에 큐브, DSP, 플레디스, 로엔 엔터테인먼트 같은 타 기획사들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마침내 SM은 K-POP이라는 지표의 구심점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weiv]의 이번 기획은 K-POP과 SM의 관계를 나름 입체적으로 살피려는 시도의 한 방편이라 생각한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참조 1) 2010년에는 태양의 솔로 앨범 [Solar]가 캐나다와 미국의 아이튠즈 R&B/Soul 차트에서 각각 1, 2위에 올랐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중남미 K-POP 경연대회’(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문화적 관심 행사(Declarado de Interes Cultural por la Secretaria de Cultura de la Nacion)’로 꼽힌 이 대회는 처음으로 ‘K-POP’이란 키워드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가 열리기도 했다. 2011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SM타운 콘서트가 있었고, KBS <뮤직뱅크> 및 MBC가 야심차게 K-POP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같은 해 <NME>나 <SPIN>, <빌보드닷컴>, <피치포크 미디어> 같은 음악 전문 매체에서 거의 동시에 K-POP 싱글, 앨범, 뮤직비디오를 소개한 것도 시사적이다. 심지어 국토해양부는 2010년과 2012년 사이에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도 국제선 이용객이 꾸준히 늘어난 이유 중 하나로 K-POP 열풍을 꼽기도 했다.

참조 2) SS501, 김현중, 애프터스쿨, 포미닛, 조권, 쥬얼리, 에이젝스, 스피카와 최근 투윤 등이 당장 떠오르는 그룹인데, 여기에는 다아시 댄스나 테디 라일리처럼 잘 알려진 작곡가 외에도 토마스 트롤센, 미켈 레미 시그바르트, 라스 애스, 알렉스 제임스, 로렌 다이슨, 로빈 옌슨, 네민 하람바식, 니클라스 룬딘, 마커스 보겔룬트, 요르겐 엘롭슨 등이 있다. 이들은 솔로로 활동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노르웨이의 디자인 뮤직(Dsign Music), 호주의 로울리 뮤직(Rowley Music), 스웨덴의 퍼펙트 스톰 뮤직(Perfect Storm Music Group) 같은 회사에 적을 두고 작곡을 한다. M2M, 켈리 클락슨, 메리 J. 블라이즈, 토니 블랙스톤, 제니퍼 로페즈, 제드워드를 비롯해 아라시, 코다 쿠미, 아무로 나미에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같은 SM 아이돌 그룹의 싱글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 싱글들이 히트하고 음악적 기반과 분석 과정이 심화되면서 이런 작곡가들이 K-POP의 특징적 인상을 형성한 바도 큰데, 더불어 한국의 아이돌 음악 산업도 글로벌한 네트워크에 녹아들어갔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최근에는 저스틴 비버의 “One less lonely girl”을 만들고 틴탑의 [Transform]을 프로듀싱한 작곡가 신혁(Joombas Music Group 소속)이 샤이니의 [Dream Girl]뿐 아니라 소녀시대와 엑소의 앨범에 참여했는데, 이런 국제적인 관계에 속한 작곡가들의 존재감이야말로 SM과 K-POP이 현재 팝 산업에서 누리고 있는, 또한 앞으로 얻게 될 지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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