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평은 늘 실패할 것이다

[weiv]는 창간부터 이제까지 ‘음악 비평’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지속해왔다. 1999년 9월의 에디터스 노트, 2002년과 2005년, 그리고 2009년의 에디터스 노트와 2010년 웹진 [보다]에 올라왔던 ‘한국 대중음악 비평 역사에 대한 글’에 대한 반론까지, [weiv]는 적어도 우리가 ‘음악 비평 웹진’이라 불리는 한 그에 대해 성찰하고자 애써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시도가 메아리없는 울림이었거나 독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거나, 고민에 그쳤다는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다. 하지만 [weiv]는 적어도 이런 문제의식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개편에 맞춰 굳이 ‘음악 비평’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모으고자 기획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 기획에 담긴 글들이 [weiv]의 구성원 뿐 아니라, 안팎으로 음악 비평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정리 차우진[email protected]

 

종종 음악 비평의 쓸모없음에 직면한다. 내면에서도 또한 외부에서도 이런 도전과 압박을 받는데 그때마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스스로 음악 비평, 혹은 비평 그 자체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비평의 역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는데 그 입장에 따라 어떤 비평, 어떤 평론가의 ‘쓸모’가 결정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는 게 비평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숨겨진 음악을 발굴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는 음악 마니아만이 비평가가 될 수 있다거나, 비평가로서 주류(혹은 아이돌)팝과 인디 음악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거나, 혹은 음악을 제발 가슴으로 들어보라는 요청, 혹은 음악 비평 따위 말고 제대로 된 직업이나 구하라는 충고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솔직히 뭐가 맞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때마다 상처받거나 주눅이 들거나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사이먼 프리스(1996)는 “음악학이 관심을 갖는 대중음악은 작곡이나 연주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대중음악이다”라고 주장했다. 텍스트가 청취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관심을 두고 구성된다는 것이다.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즉 ‘음악학자’가 ‘비평가’로 변장하고, 비평가가 또한 ‘팬’의 흉내를 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분석이 직관과 과학적 지식 모두에 근거를 두고 반응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 리처드 미들턴 [팝과 록, 그리고 해석] (2001)

이 글에는 별도의 소제목도 없고, 심지어 이런저런 관련 서적에서 빌려온 단락들이 뒤섞여 있다. 별도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이 글들이 모두 내가 동의하거나 혹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화두로 삼고 있는 텍스트들이라는 점은 밝힌다. 비평의 정체에 대해 말하라면 필연적으로 내 정체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 인용문이 그에 대한 일종의 부연설명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록에 대한 많은 저술과 달리 나는 가사를 분석하지 않는다. 나는 음악을 강조하지 그 일부인 가사를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가사보다는 록 음악가들의 인터뷰와, 빈도는 덜하지만 록 비평을 인용할 것이다. 록을 음악 예술로 취급하면서도 그걸 만든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 테어도어 그래칙 [록 음악의 미학] (2002)

알다시피, 음악 평론은 종종 영화 평론과 비교된다. 문학이나 미술 비평이 아니란 게 흥미로운데 일단 이 비교법에는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암묵적인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대중문화 비평이나 순수예술 비평이 무언가 모자란 채로 절룩거린다는 인상을 받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한국에서 음악과 영화는 90년대 이후 질적 성장과 양적 팽창을 이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비평의 영역에선 좀 다르다. 영화 비평은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대중저널과 상호보완적으로 담론을 발전시켜온 반면, 대중음악 비평은 저널에서 저널로 이동하다가 담론을 만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잡지 뒷부분 어디 쯤에 몇 줄, 요컨대 ‘이 달의 추천 앨범’ 같은 텍스트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추천 앨범 코너는 앨범 배급사/제작사와 저널의 상관관계에 의해 정의될 때가 많으니 현재 우리가 대중음악 비평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이 벌어지는 공적인 공간은 무척 드물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저널에서는 가끔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든가 “K-POP과 한류, 집중분석”같은 글들을 비평가에게 요구한다. 이런 주제는 음악이라는 텍스트가 아니라 사회경제학적 컨텍스트를 주목하게 만든다. 물론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대중음악은 결코 미학적인 관점으로만 수렴되지 않는다. 복잡한 맥락을 효과적으로 추론하고 추적할 때 대중음악 비평이 비로소 비평적인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음악평론가는 타의에 의해 혹은 자발적으로 종종 사회학자나 역사학자, 혹은 무려 철학자의 역할을 떠맡기도 한다.

1990년대 초, 어쩌다가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을 때조차도 나는 음악 산업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듣는 음악들을 해석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 밖의 산업적 컨텍스트들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신현준 [글로벌, 로컬, 한국의 음악산업] (2002)

그러나 대중음악 비평은, 영화 비평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음악 자체에 기반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관건은 음악적 해석을 어떻게 사회학적인 관점과 유기적으로, 세련되게 결합시키느냐는 것인데, 그때야말로 비평이 생산적인 담론을 수행하는 순간일 것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음악 비평가가 드물다는 점이다. 물론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읽히지 조차 않는 음악의 모호한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이를테면 비평의 대상을 어떻게 정하느냐가 화두이기도 했는데 레코딩(음반/녹음)이야말로 그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음악 그 자체’란 바로 이 레코딩/레코드를 뜻한다. 21세기적으로 말하자면 디지털레코딩/mp3음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음악 비평이 음악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재해석’이나 기껏 음반 산업에 기생하는 마케팅의 일환이라 오해한다. 이런 오해에는 대중 저널과 포털 사이트에 앨범에 대해 수사학적 찬사와 적의를 늘어놓은 음악 평론가 자신의 책임도 크다.

이 책은 1990년대에 한때 유행했던 ‘록의 진정성’의 계보를 만들려는 의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즉 ‘한국 팝의 고고학’은 ‘한국 록의 계보학’과는 다르고 신화학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과 무관하게 신화를 덧입히는 작업이 아니라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신화들을 재조명하는 작업, 달리 말한다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덮어둔 채 미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드러내고 감별하는 작업이었다. |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2005)

따라서, 내가 볼 때 지금 대중음악 비평에는 ‘긴장’이 필요하다. 비평가와 창작자, 비평가와 비평가, 독자 혹은 비평가 자신의 내부적 긴장 말이다. 그 위에서 구성된 담론이야말로 대중적 지지든 반론이든 어떤 식의 리액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이, 비평이란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기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야말로 비평가의 역할이다. 이것이 좋은 비평가와 그렇지 않은 비평가를 나누는 기준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왕이면 나는 내가 그나마 좋은 쪽에 있기를 바란다.

35년 넘게 당대의 뮤지션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는 <재즈북>의 여러 개정판에 매달렸다. 예를 들어 쿨 재즈, 하드 밥, 프리 재즈가 급부상했을 때 나는 이런 새로운 스타일과 연주 방식의 영향을 받으며 글을 썼다. 비평가가 음악과 함께 살아가야 재즈 비평이 살아있는 것이 된다. | 요하임 E. 베렌트 [재즈북] (2004/1989)

예전엔 비평이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봤다. 요즘 나는 답이 뭔지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게 차라리 나을 수 있다고 본다. 결국 내가 보는 것은 기껏해야 단면 뿐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경우 우리는 세계의 단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경험의 기반이 다르고, 정체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오해와 단면은 무척 중요하다. 대중적 성공이 상당 부분 오해에 기인한다고 해도 비평은 이 단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전체를 더듬거리는 작업이어야 한다. 이때 대중은 모두 더듬거리는 사람이고, 비평가는 ‘조금 더 잘 더듬거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창작은 ‘사람들을 더듬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를 위해선 일단 사람들을 꼬드겨야 한다. 좋은 작품이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나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야만 그 평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접하는 책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 몇몇 비평가들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환상과는 달리, 책들과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지속적이고 동질적이지도 않고,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 이루어지는 장도 아니다. 오히려 갖가지 추억의 조각들이 집요하게 들러붙는 어떤 모호한 공간이자, 그 가치(창조적 가치도 포함하여) 또한 그곳을 배회하는 불분명한 유령들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2008)

한편 좋은 비평이란, 요컨대 그 역할이란 질문을 던지는 일이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비평가에게 ‘정답’이 없다면 오히려 질문을 던지는 게 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답을 만드는 건 쉽다. 세계를 두 개로 나눈 다음 자신은 이쪽에, 대상은 저쪽에 놓고 그쪽을 가리키면 된다(답이 저기에 있으니 가서 찾으시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비틀스의 모노/스테레오 박스세트는 대단한 것이니 품절되기 전에 얼른 사라고 말하거나 아이돌 가수의 트로트 풍 댄스음악은 도대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을 비평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들이 단지 인터뷰의 기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길고 긴 대화를 통해 구성한 감독론이며, 오늘의 한국 영화에 대한 연애편지(라고 믿는)다. | 이동진 [부메랑 인터뷰] (2009)

이 질문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건 ‘성찰’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성찰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평가의 질문은 쌍방향일텐데, 종종 비평가 자신의 모순과 직면할 수도 있다. 그때 도망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평가의 직업윤리라고 본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그래서 오래 하고 싶다. 악의와 적의를 대할 때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비평가의 권위 따위에 사로잡혀서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때론 악의적인 반응들을 모두 살피고, 필요하다면 관점을 수정하기도 한다(당연히, 관점은 거듭해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힘들고 겁도 나지만,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책임감이 아니라 애정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나는 음악보다 글 쓰는 게 좋다. 그건 중요한 차이다. 만약 내가 그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했다면, 펜이 아니라  악기를 들었을 것이다. 내게 글쓰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음악 비평가는 ‘음악가가 되려다 실패한 존재’가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세계관을 드러내는 사람’일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창작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음 두 개의 명제를 늘 붙들고 있다. “예술에 열광하는 것은 비평가와는 무관하다. 그의 손안에서 예술작품은 정신들의 투쟁 속에서 번뜩이는 칼이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료]) “사람들은 비평이란 말을 들으면, 바로 판단이나 이성이나 냉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애정이라든가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고바야시 히데오 [비평에 대해서]) 이 두 명제를 모두 존중한다. 가능하다면 그 둘 모두를 내 글이 감당했으면 좋겠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008)

하지만 창작과 비평은 결국 다른 영역에 있다. 창작이 1차적이고 비평이 2차적(혹은 부차적)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둘은 목적지가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다. 창작이 순수하게 창작자 본인의 의지와 관점과 고집의 산물이라면 비평은 맥락적이고 사회적인 산물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고 보는 위치와 관점에 따라 맥락은 바뀐다. 비평가도 역시 ‘일개 리스너’이자 ‘개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대중음악 비평이란 마침내 이런저런 자기 모순을 끌어안는 것이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거리고, 모자란 것을 인정하면서 또한 공부와 관찰과 고민을 지속하고, 또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때마다 자기 모순을 들여다보고, 오류를 인정하고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요컨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과정에서 나는 필요하다면 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 놓고 옹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를 구분하고 대중의 취향을 평가하는 것 보다는 자기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세계의 복잡함 속에 우겨넣는 것, 그로부터 세계의 한쪽을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비평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지적 실천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때마다 나는 자신이 없을 테고 또한 비평은 늘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주체가 소리와 효과들을 붙잡아두겠다는 음악 비평의 욕망을 제대로 통제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보다 생산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미국의 록 비평가들은 음악에서 상징을 찾으려 하는데, 이 상징은 대개 미국 문화 전반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이들의 록 비평은 미국 문화 비평으로 쓰이고 읽힌다. 이에 비해 영국의 록 비평가는 여전히 팝 팬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로, 아직도 이들은 컬트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의 글은 기본적으로 자료적인 가치(아마도 미국 대중음악의 가장 열광적인 수집가는 영국인일 것이다) 혹은 연대감의 표시를 중시한다. 영국 비평가들은 젊은 독자들의 욕구에 예민한 감각도 가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평적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개념 규정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록의 사회학은 그 대상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질문은 -내가 여태까지 회피한 것인데- 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 사이먼 프리스 [록 음악의 사회학]

note. 이 글은 애초에 2009년 12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ATU: Cross Talk] 세션(문학평론가 신형철, 미술평론가 반이정, 음악평론가 차우진 참석)을 위한 발제문이었다. 이후 2011년 11월에 발간된 [청춘의 사운드] 마지막 챕터에 수정해 실었던 글을 이번에 다시 수정해서 싣는다. 그 동안 이 고민의 맥락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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