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7, 2012 University way, Seattle

August 17, 2012 University way, Seattle

“제발 좀 닥쳐!”는 아마도 마야가 시애틀에서 가장 자주 쓴, 그러니까 어학원에 다니던 그녀로서는 가장 돈값을 한 영어 문장이었다. 어찌 됐든 제일 ‘싼’ 것만 찾아다닌다는 이유로 한데 묶어 ‘Cheap’이라는 별명을 얻은 나, 마야, 카밀로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 하나 빠지면 팔다리를 잃은 것처럼 허전해했다. 아침마다 빈사 상태로 편의점이나 스타벅스에 갈 때도, 수업 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덕분에 선생님들은 우릴 같은 반에 넣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시애틀 도심의 크고 작은 공원에서도, 주말마다 열리는 바보 같은 술 파티’들’에서도 우린 세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캐피톨 힐의 어느 공원에서 처음 물담배를 나눠 피운 이후, 우리 셋은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시에 하늘의 저주를 받게 되는 운명 공동체처럼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매일을 함께했다.

그렇게 피붙이처럼 붙어 다니다 보니 종종 다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셋 모두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 서로의 ‘누르면 곤란한’ 버튼을 누르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기적에 가까울 만큼 그런 일은 적었던 것 같다. 아무튼 마야의 “제발 좀 닥쳐!”는 특히 우리 사이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녀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삶의 무엇과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나와 카밀로는 밤만 되면 방언이 터지는 밤도깨비들이었다. 특히 모두가 불을 끄고 잠들기 직전에야 우리는 온갖 얘기를 쏟아내곤 했다. 거기에 술기운까지 더해지면 평소보다 열 배 이상의 수다력이 폭발했기 때문에 나와 카밀로는 마야에게 밟히기도 했고, 입에 재갈도 물려봤고, 베란다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는 괴상한 밤도깨비 버릇을 고칠 생각조차 없었다. 결국 마야(와 친구들 모두)는, 취침 시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와 카밀로를 숙소 가장자리에 처박아 버리는 것으로 약간이나마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와 내가 속닥거린 이야기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것들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나누는 게 전부였다. 나는 서울이 얼마나 복잡하고 큰 도시인지, 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해보면 나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한지 등등을 얘기했고, 카밀로는 보고타(콜롬비아의 수도)가 얼마나 무서운 도시인지, 어린 시절에 봤던 가장 끔찍한 테러는 뭐였는지, 그가 자신의 누나를 왜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지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가끔은 선생님이나 반 친구들의 흉을 보기도 했고, 전날 봤던 끝내주는 미남/미녀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했고, 미국에선 과일과 고기가 싸서 너무 행복하다고도 말했다. 우리는 벼라별 시답잖은 얘기들을 나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 시간이 좋았다. 우리가 매일 함께 붙어 다니는 것처럼, 매일 이런 밤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도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가 부를 때마다 어김없이 대답해주는 누군가 있다는 건 정말 소중했으니까.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어느 밤.

“이제 별로 할 얘기도 없네, 그만 잘까?”
“그럼… 우리 아무 얘기나 하자.”
“아무 얘기?”
“정말 그냥 아무 얘기. 이런 거. 난 파스타가 지겨워!”
“하하. 그럼 난 맥도날드를 사랑해!”
“가끔 난 한국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
“우리 누나가 보고 싶어.”
“나도 네 누나가 보고 싶어.”
“넌 우리 누나랑 비슷해.”
“정말? 고마워. 음, 다음 주에 레벨테스트에서 패스하면 5A 반을 택할 거야.”
“아이폰 5가 갖고 싶어. 블랙으로.”
“내년에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어.”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또 그 소리야? 그래. 아마 네 말처럼 우린 다신 만날 수 없을 거야.”
“네 결혼식에 꼭 갈게.”
“……결혼? 결혼 같은 거 안 할 건데. 역시 우린 다시 못 만날 운명이네.”
“갈게.”
“안 한다니까?”
“갈게.”
“어휴 고집… 맘대로 해 오든지 말든지.”
“…안 그럼 정말 다신 못 볼 것 같아서.”
“제발 좀 닥쳐!”

농담처럼 하루에 열 번도 더 주고받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어쩐 일인지 마음 한구석이 찡해져 버렸다. 모를 일이었다. 울컥한 목소리를 들키면 적어도 일주일은 놀림 받을 것 같아서 나는, 이미 잠들어 버린 마야처럼,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둔한 나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찡했던가를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다. | 김윤하 [email protected] / @romanflare

note. [김윤하의 사운드스케이프]는 음악 칼럼리스트이자 라디오 PD인 김윤하가 2012년, 시애틀에서 보낸 일상을 사진 한 장과 음악 한 곡으로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에레나 정 – 밤이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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