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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동 단편선 | 처녀 | 비싼트로피 레코즈, 2013

 

삶의 비애가 아방가르드와 만날 때

[처녀]는 자립음악가 회기동 단편선(본명 박종윤)이 최근 내놓은 음반이다. [처녀]는 다섯 곡이 수록된 EP로 소개되고 있지만, 전체 수록 시간이 31분 31초나 된다. LP가 주류였던 시대라면 정규 음반으로 분류해도 괜찮을 앨범이다. 사실 회기동 단편선의 이름 뒤에는 두리반 투쟁이라든지 자립음악생산조합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회기동 단편선이 자립음악생산조합을 중심으로 펼치는 활동을 시대상황 및 홍대권역이라는 지역 특성과 결부시켜 가늠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음반 [처녀]에 집중한다.

앨범은 재킷디자인부터 충격적이다. 화장을 짙게 하고 원피스를 입은 회기동 단편선이 꽃밭에 앉아 있다. 그리 어울리지 않는 여장을 하고 다리를 모은 채 땅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회기동 단편선의 모습은 괴이한 인상을 노골적으로 풍긴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여성이 똑같은 차림으로 앉았다면, 꽃과 수풀과 어울려 아름답다는 느낌을 발산했을 것이다. 회기동 단편선이 의도한 것은 바로 이런 ‘어긋남’ 아니었을까. 여장 남자라는 존재로 인해, 당연히 아름다워야 할 풍경은 느닷없이 괴상함과 불편함을 퍼뜨린다. 이 같은 의도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회기동 단편선은 음악을 통해 겉은 멀쩡해 보이나 부조리로 얽혀있는 삶을 후벼 파고자 한다. 그는 한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자유연상적인 음악을 통해, 세상 풍경이란 비논리적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순덩어리라고 주장한다. 특히 먹이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공격에 나서며 맹수가 지르는 포효 같은 그의 보컬은, 삶이란 빠져나갈 길 없어 보이는, 차라리 비명을 지르고 싶은 혼돈으로 가득하다는 절망과 울분을 표출한다.

[처녀]의 첫 번째 곡 “공”은 라틴 스타일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시작한다. 노래가 전개되면서도 인트로와 동일하게 급박한 템포를 유지한다. 만약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했으면 록 비트였으리라. 노랫말은 무척 난해하며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회기동 단편선이 아주 구성진 음색으로 울부짖는 바람에, 여기에 심오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이어지는 “노란 방”은 신서사이저와 드럼의 합주로 시작된다. 곧이어 다양한 음색을 내는 심벌즈와 타악기, 기타가 가세한다. 원초적이고 리드미컬한 분위기를 가득 발산한다. 곡 후반부는 태평소 비슷한 이펙트로 국악 분위기도 낸다. 예의 알아듣기 힘들며 무의식의 파편을 모은 듯한 노랫말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람답게 사는’이라는 가사를 보면 어떤 메시지를 드러내려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회기동 단편선은 가사 전달을 일부러 명확하게 하지 않으며 감정 발산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8분에 이르는 대곡인 “언덕”은 포크 풍의 우울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시작한다. 이 노래는 보컬과 기타만으로 승부한다. 이 때문에 회기동 단편선의 보컬 기량이 음반 전체를 통틀어 최고치에 달한다. 이 노래에서 그의 보컬은 걸걸하고 처절하기 짝이 없어, 듣는 이의 숨을 죽이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네 번째 노래 “전통” 또한 8분 57초의 긴 곡으로, 아방가르드 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 노래는 “언덕”과는 달리 보컬보다 연주가 더 부각되고 있다. 국악을 연상케 하는 장단의 드럼 연주로 시작하며, 심벌즈 및 기타의 배킹과 이펙트 들어간 보컬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렇게 몽롱한 연주는 천진한 느낌의 스캣과 악마 목소리 같은 괴음이 교차하는 부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신서사이저·타악기·피크를 활용한 트레몰로 주법의 기타가 웅장하게 뒤엉킨다. 난폭한 연주 한마당이 몰아친 뒤, 기타 연주가 이어지며 침잠하듯 끝난다. 마지막 곡인 “이쪽에서 저쪽으로”는 기타·실로폰·멜로디언·탬버린의 악기 활용이 돋보인다. 정통 포크 곡의 구성을 갖춘 이 노래는 음반 수록곡 중 가장 멀쩡한 분위기로 고요히 전개되며, 심벌즈의 도움으로 웅장하게 마무리된다.

[처녀] 전체에서 드러나듯, 회기동 단편선의 음악은 삶의 고단함과 비애의 정조가 어떠한 여과 없이 돌출된다. 특히 폭탄이 터지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의 위력으로 아방가르드한 음악 세계를 뛰어넘어 정치적인 성격마저 띤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서민의 정서가 짙게 깔린 그의 보컬은, 음색은 물론 드러나는 진정성 면에 있어 한대수·장사익·안치환·백현진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다. 또한 원맨밴드로 무정형 사운드를 거침없이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의 면모는 벡(Beck)이 보여준 재기(才氣)를 방불케 한다. 이처럼 [처녀]는 회기동 단편선의 재능이 일체 망설임 없이 폭발하는 음반이다. | 오공훈 [email protected]

rating: 8/10

 

수록곡
01.공
02.노란 방

03.언덕
04.전통
05.이쪽에서 저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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