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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5, 2012. Troll (at Fremont), Seattle

 

시애틀은, 아무튼지 간에 참 비가 많이 오는 곳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 각종 정보부터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까지 모두가 한 입으로 말해 이미 인이 박히도록 알고 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시-택(SEA-TAC) 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도, 봄이 다 지난 6월에도, 일 년 중 가장 살기 좋다는 한 여름에도 하늘에 자비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날씨는 변덕스러운 편이었다. 오전 내내 울상을 하고 있던 하늘은 정오를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개기 일쑤였다. 변덕 죽 끓는 피곤한 애인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널 뛰는 날씨만큼 재미있었던 건 그 누구도 우산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는 거였다. 안개처럼 내리는 보슬비는 물론 스콜에 버금가는 장대비에도 마찬가지였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후드를 뒤집어 썼다. ‘우산 쓴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관광객’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했다. 그제서야 아베크롬비며 UW 기념품 매장이며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왜 그렇게 다양한 종류들의 후드가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높은 습도 탓에 비를 맞으면 찝찝함을 벗기 힘든 서울과 달리, 비를 맞아도 금방 보송하게 마르는 건조한 기후도 그런 ‘쿨시크’한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시애틀 생활 한 달 만에, 나도 어느새 후드 하나로 비를 다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의 비는 가볍게 다루기엔 무리였다. 친구들 집을 로테이션하며 각 나라의 전통 음식을 만들어 먹는 데 한참 재미를 붙인 우리의 그 날 메뉴는 콜롬비아의 ‘아레파(Arepa)’였다. 베네수엘라가 원조네, 웃기네 너희 나라가 베껴갔네 친구들이 툭탁대는 사이, 창 밖엔 어둠이 짙게 내려왔다. 신세를 진 맨디의 셰어 하우스는 아늑했지만 시애틀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오로라(Aurora)에 위치해 있었다. 예쁜 이름과 달리 해만 넘어가면 골목 구석에 숨어있던 홈리스들이 좀비처럼 튀어나와, 말 안 통하고 걱정만 많은 유학생들의 심장을 덜컹대게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놈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10센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였다. ‘지나가는 비겠지’ 생각한 것도 잠시, 1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애타는 우리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애틀의 대중교통은 정직해도 너무 정직하고 성실해도 너무 성실했다. 어플리케이션으로 확인한 우리의 마지막 버스는, 앞으로 23분 뒤 도착 할 예정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결국 후드를 쓰고 뛰기로 했다. 시간상 비교적 안전하게 탈수 있는 막차가 지나는 정류장은 20분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인적드문 대로를 5블록은 걸어야 했다. 운명을 함께할 멤버는(언제나 그렇듯) 나와 카밀로, 마야였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차양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를 맨디는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봤다. “괜찮겠어?”

“그럼, 걱정 마! 자, 윤하, 마야, 내가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다. 좋아, 하나, 둘… 셋!”

몸에 맞으면 아플 정도로 굵은 빗방울이었다. 망할 놈들! 지옥에나 가버려! 차가워! 아파! 시끄러! 뛰어! 우리는 뜻도 모를 소리들을 지르며 뛰고 또 뛰었다. 다행히 신호등은 우리 편이었다. 네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빨간 불은 한 번도 켜지지 않았다. 이 상황이 황당하고 억울하고 힘들어 웃음이 절로 터졌다. 그리고 전염성 강한 웃음은 우리 셋 모두에게 번졌다. 마지막 사거리에서 ’23분 후의 바로 그 막차’를 발견한 우리는 동물원 원숭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웃어댔다. 저거! 저거야! 저거 타야 돼! 으하하! 맞아! 저거! 저거 타야 돼!

하수구에 빠진 생쥐 꼴로 겨우겨우 42번 버스를 잡아 탄 우리는 웃음도 가쁜 숨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유도 없이 웃음이 계속 비어져 나왔다. “너 이상해!” “웃기지마, 네가 더 이상해!” 미친 사람으로 신고 당해도 할 말 없는 몰골들이었다. 그 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산만한 덩치의 흑인 아저씨가 말했다. “God Bless You”. 정신 나간 웃음을 싹 멎게 할 낮은 저음이었지만, 흠칫 돌아본 그의 얼굴엔 부처님보다 온화한 미소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까닭도 없이 들은 그 축복의 말에, 우린 또 한 번 쓸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땡큐, 그라시아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 김윤하 [email protected] / @romanflare

note. [김윤하의 사운드스케이프]는 음악 칼럼리스트이자 라디오 PD인 김윤하가 2012년, 시애틀에서 보낸 일상을 사진 한 장과 음악 한 곡으로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에니악 – 소년은 달린다 | 소년은 달린다 | 에반스뮤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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