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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토요일 tvN의 <SNL 코리아>에선 게스트 김구라가 “구라용팝”을 불렀다. 8월 7일 수요일 아침엔 <2013 글로벌 개더링 코리아>에 크레용팝이 라인업에 포함되었다는 보도 자료를 받았다(10월 12일에 열린다). 이 뉴스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반나절 만에 1천 건 이상 퍼졌다(심지어 페이스북은 ‘이 글이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니 여기를 눌러 광고하세요!’라며 날 낚았다). 며칠 뒤인 13일에는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와 음반 라이선스 및 전략적 제휴 계약을 체결했다. 9월 9일에는 VEVO에 “빠빠빠(Global Version)” 뮤직비디오가 업로드되었고 5일 만에 100만 뷰를 돌파했다(9월 27일 현재 1,678,694를 기록 중).

내 기준에서, 크레용팝은 특히 두 가지 점에서 시사적이다. 첫 번째는 이들이 길거리와 인터넷으로 기반을 다졌다는 점이다. 2012년 7월에 데뷔한 크레용팝은 연말이 될 때까지 ‘인지도가 바닥’이었다. 하지만 2012년 12월을 기점으로 홈페이지에는 크레용팝 웹툰, 크레용팝 TV, 에피소드 비디오, 뮤직비디오 등의 콘텐츠가 쌓였다. 웹툰은 ‘인지도가 바닥인 걸 그룹의 일상’을, TV는 매주 일요일 저녁 9시에 예능 콘셉트로 미션과 게임으로 구성된 영상을, 에피소드 비디오는 길거리 게릴라 공연부터 방송국 대기실과 연습실의 일상을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기존의 여러 지상파/케이블 예능, 특히 <2NE1 TV>와 <무한걸스> 같은 케이블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된다. 중요한 건 이런 구성이 전략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크레용팝의 기획사인 크롬 엔터테인먼트가 다른 어떤 곳보다 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이는 이유다.

특히 길거리 게릴라 공연이 인상적이다. ‘추리닝’을 입고 거대한 이름표를 붙인 멤버들이 명동, 대학로, 동대문, 강남역, 홍대 앞 등의 번화가에서 ‘크레용팝’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다 적당한 곳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데(그리고 이 의상은 방송 무대에 그대로 옮겨진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같은 예능 프로그램처럼 멤버들을 놀리거나 다독이는 센스의 자막과 함께 영상이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저장된다. 그 모습 그대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이때 (브라운관이 아닌)모니터 앞의 사람들은 대략 이런 반응일 것이다. “고생이 많다.”, “의외로 잘하네?”, “재밌어하는 듯?”, “뭐야 진짜 별 걸 다하네!” 등등. 덕분에 크레용팝은 씩씩하고 열심히 하는, ‘고난의 아이돌’이란 이미지를 얻는데, “미스터”가 성공하기 전 카라(의 한승연)에 대해 지지층이 가졌던 정서적 공감대와도 비슷하다. 이때 (인디)밴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거리 공연을 아이돌 그룹이 실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리 공연(요즘 말로 ‘버스킹’)은 무대에 대한 공포를 없애고, 라이브에 대한 노하우를 훈련하며 궁극적으로 멤버들을 성장시키는 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 거리 공연을 2차 콘텐츠로 만들어 홈페이지와 유튜브로 유통하는 건 자연스런 기획의 산물인데, 여기서 ‘추리닝’에 치마를 덧입거나, 헬멧(혹은 ‘하이바’)을 쓰는 스타일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의 콘셉트 아이돌인 모모이로 클로버 제트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연습실의 거울 앞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경험을 이들이 적극적으로 찾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일종의 팬덤이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스스로 조직화되었다는 점이다. 크레용팝의 특이한, 어쩌면 특별한 정체성은 거기에 있다.

요컨대 이들은 ‘덕후 커뮤니티’를 움직이게 만든다. 특정 분야의 마니아 그룹은 영미권이나 일본 같은 대중문화 산업의 단단한 기반이 되어왔다. 사실 이것은 국가별 인구수나 경제수준, 그리고 젠더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영역이기도 한데, 일단 그런 산업적 토대가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크레용팝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그 영역에 속한 이들이 시장에서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뭔지 모르겠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어떤 가능성’을 느끼게 되는 건 분명하다. 그 점에서 이들은 ‘덕후 커뮤니티’에 내재된 시장성을 발명하게 될 징후이자 아이돌 산업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크레용팝의 팬덤은 거리에서 시작되어 인터넷 커뮤니티로 확산되었다. 미디어에 노출되고 일정한 산업적 성과를 얻는 과정 모두가 빨리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밑단의 지지층, 견고한 팬덤은 어떤 시장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그 범위가 확장될 수 있을까, 가 내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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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의미심장한 건 소위 ‘병맛’ 콘셉트와 달리 음악이 꽤 좋다는 것이다. 크레용팝을 대중적으로 알린 “빠빠빠”는 선율보다는 리듬에 집중한 곡이고, 내용적으로는 그저 “다 같이 뛰어 뛰어”가 전부다. 하지만 반복되는 비트, 중독적인 훅, 아기목소리 같은 귀여운 창법과 음색(여성보컬의 전형 중 하나로 “황성옛터”를 부른 일제 강점기의 인기가수 이애리수로까지 거슬러간다)이 섞여 중독성을 띠며 쉽게 따라 부르게 돕는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무의미한 가사는 정작 ‘크레용팝’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이 곡의 작/편곡자는 3명인데, 그중 김유민은 샤이니 3집의 “떠나지 못해”와 제국의 아이들 2집의 “Hunter”, 2012년 1월에 공개된 EXO의 티저에 쓰인 “Run & Gun”의 작곡자이자 밴드 사운드워시(Soundwash)의 보컬이다. 이 곡의 성공 덕분에 이전의 곡들도 새삼 주목받았다. “빙빙”, “댄싱 퀸”, “Saturday Night”은 모두 프로듀싱 팀 덤앤더머의 작곡인데, 2001년 이현도가 프로듀싱을 맡았던 디베이스의 송지훈과 2004년 데뷔한 그룹 바운스의 강진우가 그 멤버다. 두 그룹 모두 싸이, 유건형 콤비와도 연관이 있다. “빙빙”의 편곡자는 Rocketeer와 이종승인데, 그는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을 표방했던 그룹 뮤턴트의 멤버였다. 이 노래들은 “빠빠빠”와는 달리 디스코와 하우스를 기반으로 중독성이 강하고 듣기 편한 멜로디를 강조하는 댄스 팝이다.

이를 토대로 다시 크레용팝을 살핀다면 자연스레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1년 전만 해도 걸 그룹을 중심에 둔 아이돌 시장은 포화상태로 여겨졌다. 씨스타가 마지막 성공 모델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일반적이었는데, 크레용팝의 등장과 성공은 오히려 아이돌 시장이 바야흐로 분화되고 심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당연히 걸 그룹 포화상태로부터 시작된 이 현상은 오렌지 캬라멜로부터 신사동호랭이의 이엑스아이디(EXID)를 지나 걸스데이와 크레용팝으로까지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병맛 걸 그룹’의 계보라고 할 때, 오렌지 캬라멜은 트로트를 변용한 곡과 의성어 중심의 노랫말에 웃기는 뮤직비디오로, 이엑스아이디는 “오늘밤”의 뮤직비디오를 노래와는 무관하게 ‘토 나오는’ 뮤직비디오로, 걸스데이와 크레용팝은 가사와 안무, 뮤직비디오로 이 차별적인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 차이는 걸 그룹과 보이 그룹이 지향하는 팬덤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이그룹이 보통 10대 초반의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장기적인 전략을 설정하는 것과 달리 걸 그룹은 유동적인 성인 남성 팬덤을 겨냥하게 되는데(PC매거진의 커버와 군대 공연 무대에 서는 익명의 걸 그룹들을 생각해보라) 그때 의도적으로 메이저 기획사의 하이엔드 팝과는 경쟁을 피하게 된다. 크레용팝 홈페이지 ‘에피소드 비디오’의 한 장면 중 “이번 주 뮤뱅(KBS 뮤직뱅크), 음중(MBC 음악중심), 인가(SBS 인기가요) 다 까였으니 뭐라도 해야지”처럼 정말 뭐라도 해야 될까 말까한 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크레용팝에 꼬리표처럼 붙는 일베 논란은 오히려 논쟁적이지 않다. 인지도 없는 아이돌 그룹과 기획사로서는 일단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 자체가 절실한 일이 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 논란은 이들이 일베 유저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오히려 일베 커뮤니티의 용어가 인터넷을 통해 보편화되는 징후로 이해하는 게 더 합당할 것이다. 따라서 일베 논란을 해프닝 정도로 이해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들의 등장과 활동 방식과 대중적 성공이 모두 현재 한국 아이돌 팝의 산업적, 미학적 영역을 통틀어 비평적 관점을 구하는 요청으로 여겨진다. 일단은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와의 해외진출, 그리고 독자적으로 일본에서 어떻게 활동하게 될지가 궁금한데, 무엇보다 국내의 기반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의 걸 그룹이 성공하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크레용팝은 ‘스위치’라고 본다. 이들은 뜬금없는 걸 그룹으로 성공해서가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본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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