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헌진 | 지난 여름 | 블루스맨 인 서울, 2011

애비 없는 자식, 엄마 없는 하늘 아래

하헌진은 그야말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음악가다. 이제까지 겨우 2장의 EP를 발표했을 뿐인데도 독보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슬라이드 기타(와 하모니카 정도)로 연주되는 그의 블루스는 길어야 3분 분량에 불과한데, 짧은 곡은 1분 30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주는 복잡하고 화려하다. ‘리듬을 가지고 논다’는 인상을 주는데 싱코페이션(Syncopation)과 도미넌트(Dominant)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12마디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블루스 연주자인 에릭 클랩튼이나 게리 무어가 아니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델타 블루스의 주자들, 대표적으로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이나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같은 슬라이드 기타 연주자들이 떠오른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음악(가)의 뿌리는 도대체 어디/무엇인가. 또, 이 매혹적인 클래식 스타일이 21세기 한국에서 어떻게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선 차이나타운 블로그의 인터뷰를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 클래식 블루스에 매료된 맥락에 초고속 인터넷과 소리바다, 유튜브가 있는 건 분명하다. 테크놀로지가 그의 음악적 방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첫 번째 EP인 [개]는 아이폰으로 녹음되었다. 그럼에도 하헌진 자신은 LP로만 음악을 듣는다는 고백 또한 흥미롭다. 인터뷰에 언급된 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리지널리티인데, 음악적 가치와 방향성 역시 거기에서 정해진다. 테크놀로지는 그것을 습득하고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사가 더욱 부각된다. [지난여름]에 수록된 7곡을 비롯해 [개]에 수록된 6곡의 가사는 짧게는 하나 혹은 두 세 문장으로 구성되는데, 크게 고민, 고난, 기쁨 등의 테마로 구분된다. 여기에 바이브레이션이 거의 없는, 담백한 ‘쌩(raw)’ 톤의 보컬이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녹음 환경 때문이겠지만 연주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그의 가쁜 호흡은 에로틱한 인상마저 준다. “카드빚 블루스”와 “이제는 함께할 친구가 생겼다네”처럼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의 곡에서 그의 보컬은 훨씬 더 부각된다. 특히 이 두 곡에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데, 하헌진의 블루스를 가장 적절히 설명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12마디 블루스의 탄생은 내러티브에 의한 형식적 변화였다. 무언가를 호소하거나 고발하고 그것을 거듭 강조하다가 후렴구에 결론을 짓는 구조 덕분에 블루스는 ‘내용(과 태도)’으로 판별된다. 같은 맥락으로 하헌진의 블루스는 한 세기 전의 스타일에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담는다. 거기서 그의 오리지널리티가 생긴다. 스타일의 재현이 가진 한계를 가사와 내용으로 돌파하는 셈인데, 최근 발표된 빅베이비드라이버의 “Everyday Blues”나 “Marca’s Wedding” 등과 비교할 때 이것은 더욱 선명해진다. 요컨대 이 블루스는 한국에서 뿌리가 부재한, 에미 애비 없는 천애고아의 블루스다. 그럼에도 그의 등장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새삼 환기시킨다. 21세기의 극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 차우진 [email protected]

info. [개] EP는 완판 되었다. [지난여름] EP는 홈페이지와 공연장에서 직접 판매한다. 음원은 제공하지 않는다.

ratings: 8/10

 

수록곡
1. 지난여름
2. 그대 돌아오는 날
3.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4. 카드빚 블루스
5. 몸뚱이 블루스
6. 토끼 두 마리
7. 이제는 함께할 친구가 생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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