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고코베인의 리더 깜악귀(김남훈)는 [weiv]의 필진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필자가 필자를 인터뷰하는 일이 썩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행히 몇 년 동안 그는 [weiv]와 멀어져 있었고, 실제로 [weiv]에 눈뜨고코베인의 앨범에 대한 리뷰는 데뷔 EP [파는 물건]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 해주지 못하는 경우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당시 [weiv] 필진의 주류가 그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걸 두고 ‘인맥을 고려하지 않는 쿨한 태도’라고 자화자찬한다면 비웃음 받을 일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큰 비웃음을 받을 일은 그가 선도하고 일구어서 마침내 2007~8년 꽃피운 ‘어떤 경향’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소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가까웠던 사람과 작년 여름 장기간 인터뷰를 가졌고, 그것도 모자라 앨범 발매에 즈음해서 이메일로 왔다갔다하면서 인터뷰를 수정하고 보완했다. 분량은 늘어났고, 특히 대학시절의 이야기는 하다 보니 길어졌다. 그래도 애써 줄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싣기로 했다. 흥미 없는 사람은 두 번째 절 “백투더 관악: 1997~2001″은 제끼고 읽기를 권유한다. 그렇지만 음악의 작품뿐 아니라 음악의 실천에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실천의 환경과 조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부분 또한 놓치지 않기를 권한다. 음악과 장소의 관계, 그리고 그 장소의 서사(내러티브)에 관심이 있다면 더더욱….

일시: 2010년 7월 10일 / 2011년 5월 3일 (이메일)
장소: 상수동 <이리카페>
질문: 신현준
정리: 이수연|신현준

살인자의 ‘하이(high)’

[weiv]: 3집 앨범 [Murder’s High] 나온 것 축하합니다. 이번 앨범의 컨셉은 ‘살인’이네요. 적어도 “알리바이”, “당신 발 밑”, “일렉트릭 빔” 세 곡에서 명시적입니다. 깜악귀가 가진 ‘위악’의 결정판인 것 같은데, 이런 심리(학)적 배경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나요?
깜악귀: 음, 사실 전 제가 ‘위악’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앨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도 “난 나쁜 놈이야”라고 말하고 있진 않고, 그보다는 죄악감이라는 테마 자체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냥 우리가(혹은 제가) 항상 밀착해 있으면서 무시하는 상황을 말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유사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범죄를 모른 채 무시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위악적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저는 제가 딱히 스스로를 되게 악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 대가는 치루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인식하지 못한다면 유쾌한 일이고 ‘High’한 일이겠지만 인식한다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전 앨범들도 이런 테마(죄책감) 면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전 앨범들이 이런 부분에서 좀 유쾌한 부분이 있었다면 이번엔 확실히 덜 그런 거 같긴 하네요. 딱히 보도자료에 쓰거나 남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제 마음 속에선 눈코의 1, 2, 3집은 <죄의식 트릴로지> 비슷하게 간주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번 앨범으로 겨우 앞에서 저질러놓은 말들의 문을 닫았다는 느낌입니다.

[weiv]: 전체적으로 앨범의 사운드나 밴드의 연주가 ‘깔끔한’ 느낌입니다. ‘인디 밴드’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아마추어의 느낌은 나지 않습니다. 한때 진지하게 음악하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매우 진지해 보이고, 그 결과 ‘산울림에서 벗어났다’는 느낌과 함께 ‘싸이키델릭’의 느낌은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사운드를 만들려고 한 미학적 지향과 물질적 환경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근육’의 비유는 사용하지 말아 주시고. 🙂
깜악귀: 진지하게 음악하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를 보인 것은 아닌데…. (웃음) 다만 ‘진지하게 음악한다고 내세우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긴 했던 듯하네요. 음악을 진지하게 하는 것과 진지한 태도를 강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보고, 우리 밴드는 음악 자체는 항상 진지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물론 이번 앨범에선 유머의 함량이 많이 줄어든 편이고, 그건 제가 최근 꽤 우울해졌기 때문인 듯합니다. 앨범이 거듭될수록 점점 우울해져서….
이번 앨범에서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줄어든 건 아마도 메인 송라이터인 제가 좀 더 편하게 만든 곡들이 수록되었다는 점이 하나이고, 두 번째는 이전 앨범에서 만들어본 작법의 곡을 두 번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장르에 기초한 밴드라면 그 장르에 해당하는 (비슷비슷한) 곡들로 앨범을 주욱 채울 수 있겠지만, 저희는 그보다 개별 곡의 개성이나 독립성이 큰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중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고, 그런 류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지도….
또는, 이번 앨범에서는 합주로 만든 곡의 비중이 줄었다는 부분도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밴드의 모든 악기 파트가 한 번에 등장하는 식의 편곡을 하지 않다보니, 공간의 여백이 많아졌고 그러다보니 ‘덜 사이키델릭’ 합니다. 또한 건반 사운드의 비중이 많이 줄어든 앨범이 되었죠.

[weiv]: 위 질문의 연장인데, 1집과 2집에 비해 밴드의 작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작곡․편곡, 프로듀싱(김형채), 편곡(나잠수) 등등에 대한 전반적으로 해주면서 깜악귀 외의 멤버들의 기여도 얘기해주시죠? “하나 둘 셋 넷”은 목말라의 곡이죠?
깜악귀: 1집 전곡이 완전히 합주로 이미 만들어진 곡을 라이브로 녹음한 것이라면, 2집은 반반이었습니다. 3집의 경우는 보다 레코딩 과정에서의 편곡에 의존했고 합주에 의해 만들어진 곡의 비중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레코딩 룸에서 이루어진 편곡 과정이 가장 많은 앨범이 되었습니다. 악기의 녹음이나 편곡 작업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진행합니다만, 그게 레코딩 룸에서 변경되는 것도 많았고요. 그렇게 녹음-편곡 단계에서 엔지니어와 저, 둘의 소통이 많다보니 엔지니어인 김형채군의 의견도 많이 작용을 했지요. 편곡 소스를 골라내는 것이라든가 편곡 아이디어의 구현 면에서 그가 기여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공동 프로듀싱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프로듀서로서 녹음된 편곡 소스들을 걸러내고 정리하고 최종적으로 사용할지 안 할지를 결정합니다. 혹은 재편곡이나 재녹음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물론 저는 이 앨범의 메인 송라이터이기도 했고, 다만 ‘하나 둘 셋 넷’은 목말라의 곡이 맞습니다. 목말라가 만든 홈레코딩 데모 버전을 듣고 믹싱만 바꿔서 거의 그대로 수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술탄 오브 디스코의 나잠수의 경우에는 ‘알리바이’의 신쓰-베이스 라인의 편곡 세션을 맡았고, 크라잉넛의 김인수 씨의 경우에 아코디언으로 두 곡(“당신 발 밑”,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에 참여해주었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시스트인 정중엽군은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에서 어쿠스틱 기타 세션을 해주었는데 편곡을 엎으면서 그 트랙은 날아가버렸네요. 미안할 따름입니다.

[weiv]: 앨범의 수록곡들의 길이가 긴 편입니다. 송라이팅은 이전보다 안정되어 보이는데, (아직도) ‘히트곡 만들기’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깜악귀: 앨범 수록곡 길이에 신경을 전혀 안 쓴 건 아닌데… 억지로 줄일 수도 없더군요. 곡이 히트하면 나쁠 건 없지만 ‘히트곡’을 만든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아는 게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안다고 해서 그걸 하게 될지도 잘 모르겠네요.

[weiv]: “알리바이”와 “네가 없다”는 훵크 리듬을 구사했고, “당신 발 밑”에는 레게(혹은 집시?), “하나 둘 셋 넷”은 디스코 리듬을 구사하는 등 리듬에 특히 신경을 쓴 모습이 보입니다. 혹시 이게 ‘이런 공연을 하겠다’는 기획과 관련이 있을까요? 아울러 미디로 드럼을 찍은 2집에 비해 새로운 드러머 파랑의 기여에 대해서도 말해 주시죠.
깜악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 앨범의 경우 라이브 파워를 늘리기 위해 만든 곡들이 좀 있었습니다. 사실 2집의 경우는 1집의 곡들이 펑크나 메탈 밴드에 비해 라이브 파워가 뒤진다는 반성으로 함께 만들어진 곡들이 몇 개 있었죠. 무대 파워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이번에는 이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도리어 라이브에는 좀 불리한 앨범이 되었습니다.
훵크나 레게, 디스코 리듬은 이전 앨범들에도 있었고…. 어떻게 보면 밴드 멤버들이 공통적으로 선호하고 또 적당히 익숙해하는 리듬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만 이런 리듬의 형태를 다듬는데 좀 더 신경을 쓴 부분은 있을 겁니다. 그건 약간 능숙해진 부분이라고 해야 할 테고….
파랑은 앨범에서 드럼 편곡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드럼을 직접 녹음한 경우는 그 연주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제가 만든 드럼 라인 편곡을 ‘좀 더 리얼’하게 다듬는데 참여했죠. 제가 드러머가 아니다보니 제가 드럼 편곡을 하면 아무래도 “실제로는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없는” 드럼 라인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런 것을 다듬는 것인데… 이것은 2집에서 (장)기하가 한 것과 같은 작업이었습니다.
드럼 파트를 전부 가상악기를 사용한 지난 앨범에 비해 이번 앨범의 드럼은 라이브 녹음도 있고 가상악기로 찍은 것도 있습니다. 별로 차별을 두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weiv]: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에요”, “뭐뭐뭐뭐”는 ‘산울림주의’라고 할까, 아니면 1970~80년대 ‘가요’의 잔향이 느껴지는 ‘노스탤직’한 곡입니다.
깜악귀: 네. 그런 점에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합니다. 산울림스러운 부분은 크던 작던 깔려 있긴 한데, 지금에 와서는 별로 의식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향은 남아 있겠지요. 어떻게 보면 어느 곡에든 그 영향이 조금씩 남아 있을 겁니다.

[weiv]: “과대망상증 과학자의 SF적 대량학살”을 다뤘다는 마지막 트랙 “일렉트릭 빔”은 가장 공을 많이 들인 트랙으로 들립니다. 사운드는 이른바 ‘모던 록’인데 중간에는 그렇게 싫어했다는 메탈풍의 리프도 등장하고 키보드의 운용도 다채롭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런 발상을 하는데 영감을 준 최근에 본 작품이 있나요? 나아가 ‘서울폭격’이라는 테마는 정치적 알레고리로 들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요?
깜악귀: 메탈을 싫어한 것은 아니고, 대학 시절에 스쿨 밴드들이 메탈만 카피하는 걸 싫어했던 적은 있네요. 그건 대학 졸업 이후에는 뭐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고, 메탈 자체에 대한 선입견은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메탈 좋아합니다. 하지만 메탈 풍의 정서가 밴드 정서의 기반이 되는 것은 좀 싫어합니다. 머 좀 복잡한 생각은 있지만.. 밴드 음악에 메탈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어요.
<일렉트릭 빔>의 발상을 하는 데 영감을 준 작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본래 만화, 장르 소설 등 대중문화의 마이너한 전 장르를 이것저것 보는 편입니다. <일렉트릭 빔>에서는 소위 ‘전대물’이라고 하는 컨셉을 떠올렸는데, ‘독수리 5형제’나 ‘파워 레인저’ 뭐 이런 계열의 작품들을 말합니다. 그 노래에 여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런 정의의 사도 반대편에 위치한 악역 캐릭터들입니다. 얘네들은 어떤 이념을 가지고 뭔가 하려고 하는데, 그래 봐야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라고 해야 할까.
서울폭격이라는 말에 정치적 함의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뮤지션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곡에 그걸 담는 걸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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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 관악: 1997~2001

[weiv]: 이제 ‘리와인드’를 한 뒤 현재로 돌아올까 합니다. 그래서 1997년으로 가 보고 싶네요. 지금 아니면 다시 또 이야기할 기회도 없을까봐 조금 길어지더라도 ‘대학시절’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눈뜨고코베인이 대변하다시피 한 ‘한국 록의 발굴을 통한 재창조’의 역사를 더듬어 볼까요? 그 발단은 뭘까요?
깜악귀: 글쎄요. 저희가 지금 그걸 대변하고 있진 않지만 당시 초기에 그 팻말을 들고 걸어 나갔던 건 사실이겠죠. 일단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를 비롯해서 (장)기하나 브로콜리 등이 하고 있는 ‘한국말 가사가 있고 과거 복고 한국 록/가요의 영향을 받은 인디 취향 음악’ 밴드들이 몇 년 전에 갑자기 툭 등장한 것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 홍대로 걸어 나올 땐, 우리랑 비슷한 취향의 아이들이 대학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몇 년 후에 그 친구들이 걸어 나온 것이었죠.
이 밴드들 사이에는 공통점만큼이나 차이도 많지만, 공통적인 감수성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고, 사실 저는 그 발단이 당시(1997~2002) 저와 그 친구들이 놀았던 풍토인 대학 문화에 일부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자면 민중가요가 약간의 역할은 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 끝물이긴 했지만 여전히 대학은 바깥과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또 우리가 있던 대학은 더 고립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나 그 친구들이나 대학에서 통기타를 들고 한국말로 노래를 하는데 익숙했습니다. 아무리 혼자서는 너바나(Nirvana)를 듣고 좋아했다고 해도 그것보다는 포크송이나 민중가요를 선택해서 부르는 횟수가 많았죠, 아마도 그게 좀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한국말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홍대 인디 씬의 다른 밴드들이 한국말 가사를 만드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더욱 느끼는 부분입니다만…, 우리가 자란 풍토가 달랐던 것이 그런 이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속에서 저와 제 주변 친구들은 나름대로 크라잉 넛이나 언니네 이발관 같은 인디 밴드들의 문화를 흡수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기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산울림 등 한국 록 취향은 ‘대학의 포크 취향’과 ‘인디 문화’라는 두 문화의 균열을 연결하는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해준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만. ‘브로콜리’의 경우에는 그게 유재하 같은 80년대 가요였던 거 같고. (장)기하의 경우에는 그게 송골매라든가… 송창식이던 것 같고.

[weiv]: 앞에서 ‘주변 친구들’이란 민중가요 노래패(메아리)를 말하는 건가요? 민중가요의 영향이라는 대목은 흥미롭네요.
깜악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쪽(메아리 출신)이 많긴 했습니다. 음. 그런데, 민중가요의 ‘민중성’이 큰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가사가 있는 노래라는 게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음악보다, 혹은 음악만큼이나 가사를 더 중시하는’ 이 취향은, 아마 그게 묻어온 결과가 아닌가 하고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좀 전근대적인 노래 취향이기도 한데….
저희 세대는 민중가요라는 음악 취향이 점점 낙후되어 가면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설득력도 점점 떨어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영향을 받았고, 또 많이 듣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게 진실성이랄까 시효가 만료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고 또 음악적으로는 별로 재미가 없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의 ‘노래로서의 힘’은 인정할 수 있었고 애정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음악성을 이어받으려 한 적도 없고 그 민중성을 이어받으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음악을 더 쿨하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을 좋아했고 열광했죠. 하지만 ‘노래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밑에 깔려 있지 않았나 생각하고, 그래서 여전히 ‘음악’을 한다기보다 ‘노래를 만들고 편곡하고 부른다’라는 개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이 일련의 밴드들의 ‘발생’ 부분에는 여전히 과거의 핏줄이 좀 남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건 ‘혐의’에 불과하고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weiv]: 1996년에 나와 나의 동료들이 서울대랑 다른 몇몇 대학교 캠퍼스를 빌어서 조그만 인디펜던트 록 페스티벌 <소란>을 개최한 일이 있고(서울대에서는 노천극장에서 했다), 1997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수영장을 빌려서 <컬리지 록 페스티벌>을 연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런 파장은 없었나요? 당시 메아리 회원들에게 협조를 청했지만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깜악귀: 파장이 ‘있었다 없었다’라고 말하긴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뭐든지 다 간접적인 거였으니까. 메아리에서 홍대 진출 멤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98학번들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걔네들이었다면 그런 흐름에 시큰둥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때까지는 그 윗 학번들이 동아리의 주역이었겠죠. 사실 우리에게는 좀 외부행사에 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weiv]: 깜악귀에 대한 주변의 증언은 ‘도꼬다이였다. 가끔 멍석 깔아주면 놀라운 걸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그런 ‘멍석’이나 ‘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깜악귀: 글쎄요. 저는 대체로 과방에서 혼자 노래하는 편이었습니다. 기타도 과방에서 배운 것이고. 지금도 그게 할 줄 아는 연주의 전부고요. 늦게 배운 기타가 재미있어서 과방에서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다가 교수님에게 쫓겨나고 그랬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다 2학년 때쯤에 최초의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때 수업 세미나 준비 때문에 과방에서 과 동기 여자애 한 명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한참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요. 심심해서 아무 코드나 잡고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뭔가 노래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고 할까. 그냥 정말 떠오른 가사를 아무렇게나 부른 거였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냥 대자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그걸 가지고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만들고 그랬어요.
이렇게 아무렇게나 만든 노래를 그걸 과 종강파티에서 불렀는데 반응이 매우 좋지 뭡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큰 무대에 서보려고 했고…. 그래서 대학 축제 때 밴드 스테이지에 서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재밌는 걸 하고 싶어졌고 노래를 몇 곡 더 만들고 기회 닿는 대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했죠. 어디에서건. 뭐 ‘손해날 게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거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직접 해봐야 풀리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러다 나중에는 사람들을 더 모아서 이쪽이 아예 문화기획을 하기도 했죠. 그땐 어느 정도 씬이랄까 집단을 이루게 되었고 스스로 멍석을 깔 수 있었죠. 대학 축제에서 독립적인 공연 기획을 하거나 학교 내에서 교내 밴드들의 창작곡 CD를 만들어 유통하거나.

[weiv]: 가사를 ‘아무렇게나’ 지었다고 해도 일정한 음악 형식이나 장르같은 게 필요했을 텐데….
깜악귀: 국내 인디 밴드나 다른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 록, 브릿팝 같은 음악을 이것저것 듣던 시기긴 했지만, 제가 그런 음악을 듣고 자란 것도 아니고, 당시 제가 만든 노래는 대체로 통기타 포크 송과 얼터너티브 록 사이의 사생아 같은 어중간한 형태가 많았습니다. 세련미 같은 것은 별로 없었고.
그 당시 강헌이나 신현준같은 음악평론가들이 쓴 영미 펑크에 대한 책들이 한국에 나오고 있었는데 그런 걸 읽고 하다 보니, ‘기타만 잡을 수 있으면 무대에 올라가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래서 ‘스킬이 없는’ 것에 대한 ‘이념적 정당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네요. (웃음) 크라잉 넛이나 노 브레인 같은 국내 인디 밴드도 좋은 모범이 되어 주었고….

[weiv]: 그렇게 과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청중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을 텐데 그 계기는 어떤 게 있었나요?
깜악귀: 1998년 경에 대학 축제의 밴드 스테이지에 지원을 했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그게 <따이빙 굴비>라는 행사였는데, 외부에서 예능인을 불러오는 행사를 벗어나 대학 내의 밴드를 축제에 세워서 록 페스티벌 같은 걸 하자는 취지였죠. 물론 실체는 그냥 대학의 각 학과 밴드들이 나가서 메탈리카,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혹은 자우림 노래를 부르는 그런 행사긴 합니다만… 아주 드물게 자작곡을 하는 팀도 있었죠.
저는 친구랑 둘이 통기타로 자작곡 두 개를 연주하고 내려왔는데, 그게 최초의 스테이지였습니다. 자작곡은 “그대는 냉장고”랑 다른 하나였는데, 뭐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만들고 버린 곡인 것 같네요. 반응은 아주 좋았어요. 마지막에서 두 번째 시간이었으니까 11시 반이었고 사람들이 반 이상 빠져나간 시점이었는데. 그 많은 학과 밴드 가운데 자작곡 했던 게 거의 우리뿐이었어요. 거기서 이후의 문제의식이 시작된 거죠. ‘우리가 연주력은 최하인데 왜 자작곡은 우리밖에 없을까’, 뭐 그런. 그리고 ‘아무리 좋은 연주력으로 카피를 잘해봐야 재미는 전혀 없다’라는 신념이 형성된 시기라고 할까. 왜냐면 저는 자우림이나 메탈리카를 카피하는 밴드를 보는 게 전혀 재미없었거든요.

[weiv]: 본격적으로 ‘록 밴드’를 시작한 건 언제라고 볼 수 있나요? 그 밴드와 ‘붕가붕가 중창단’과의 관계도 조금 혼동스러운데….
깜악귀: 1999년에 신입생이 들어오는데 베이스 친다는 애가 있어서 만나보니 지금 붕가붕가 레코드의 대표인 고건혁(곰사장)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니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이니 ‘지하실, 사이키델릭, 헤비니스’ 쪽 취향이었어요. 베이스를 칠 줄 안다고 하니 이제 드럼하고 베이스를 놓고 일렉 기타가 있는 밴드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들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편성을 만들었는데… 먼저 저랑 같이 데뷔했던 친구가 오락실에서 드럼 게임을 좋아하길래 드러머로 보직 변경을 시켜놓고, 건반 연주자는 좀 알고 지낸 음대 출신으로 하나 섭외하고 여성 보컬까지 놓았습니다. 그때 밴드 이름이 ‘무죄’ 혹은 ‘무죄유미’였던 듯. 나름의 ‘풀 밴드’ 컨셉이었는데…. 금세 해체하게 되었습니다만.
‘붕가붕가 중창단’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만, 결성의 계기는 아마 이자람이 보컬을 했던, 메아리 출신의 밴드 ‘장난양’의 단독 공연에 오프닝 섭외가 저에게 들어오면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본격 밴드 편성이라는 걸 해보니 좀 힘들더라고요. 앰프도 필요하고, 드럼도 필요하고, 악기도 날라야 하고. 연습실도 필요하고.
그래서 일회성으로 좀 더 라이트한 편성의, 게릴라적 공연에 적합한 유닛을 만들었는데, 그게 ‘붕가붕가 중창단’이었습니다. 악기 편성이라고는 통기타 한두 대에 탬버린 정도였고, 나머진 그냥 소리만 지르면 되었으니까 악기를 연주할 줄 모르는 애들도 얼마든지 동원해서 머리수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습실이 필요하지 않았죠. 편했습니다.
그 공연에서 붕가붕가 중창단은, 말하자면 저의 백 코러스 집단이었는데, 나중에는 그냥 독립적인 게릴라 공연 집단 유닛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저도 그 멤버 중 하나가 되어서 그냥 같이 놀았습니다. 그 중에는 나중에 저랑 같이 밴드를 만들게 되는 슬프니나 목말라도 있었고. 붕가붕가 중창단은 나중에 제가 졸업한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그 네이밍은 ‘붕가붕가 레코드’로 이어지게 됩니다.

[weiv]: 붕가붕가 중창단에서는 어떤 노래들을 했나요?
A. 제가 만든 노래를 했고, 나중에는 저도 그냥 멤버의 일원이 되어서 저 말고 다른 친구가 만든 곡(나중에는 청년실업의 멤버가 된 이기타의 ‘포크레인’ 같은 곡. 이 곡은 이후 청년실업 앨범에 수록됩니다)을 같이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 대중가요를 개사해서 뽕짝풍으로 부르거나 뭐… S.E.S.의 “Dreams Come True”를 뽕짝풍 리듬에 부른다거나 하는 짓을 했습니다.
제가 붕가붕가 중창단을 나가고 나서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The Wall]에 수록된 노래를 개사한다거나, 그냥 멤버들끼리 재밌겠다고 생각하면 뭐든 하는 분위기였죠. 연주하는 사람이 한둘 밖에 필요하지 않은 유닛이다보니 간주 부분 같은 데에서 코러스들은 할 게 없으니까 뭔가 퍼포먼스 같은 것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음악 외적인 퍼포먼스에 좀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목적은 오로지 그냥 맘대로 하는 엔터테인먼트였고, 그냥 아무 스펙이 필요하지 않은 음악 유닛이었어요.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었고. 뭔가 얽매이지 않는. 지배적인 것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무가치한 것일수록 더 끌리는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왜 이런 걸 하면 안 되는데? 상관없잖아?” 물론 그 때는 이런 걸 10년 후에 누가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weiv]: 2002년에 나온 컴필레이션 [밴드 밴드 짠짠]에는 깜악귀 프로젝트 이외에. 토마토, 이반, 퓨즈 같은 밴드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제까지 말한 깜악귀 주변의 흐름들 외에도 다른 흐름들이 모여서 집단적 흐름이 형성되었던 건가요?
깜악귀: 집단적 흐름이 형성된 건 아닙니다. 사실 그 밴드들하고 친했던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 때 우리는 그 때 우리는 ‘스누나우(SNUnow)’하는 인터넷 언론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공연 관람 칼럼을 쓰다 보니 공연이라면 대체로 다 찾아보는 시기였고, 그래서 어떤 밴드가 어디 있는지 꽤 알고 있었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누가 자작곡을 가지고 있는지 대체로 알고 있었던 거고. 그래서 ‘이런 노래들을 모아 앨범으로 하나 내보자’라고 생각했고 지금 밴드를 같이 하고 있는 슬프니랑 같이 추진을 했죠.
그게 하나의 씬이 되는 것으로 발전하진 못했는데 서로 마인드의 괴리가 컸기 때문입니다만. 말하자면 우리는 좀 ‘망쳐가면서 노는’ 그룹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고…. 예를 들어 거기 수록된 ‘이반’은 인문대 노래패의 OB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로 알고는 지내고 서로 존중하긴 했지만 저희랑 흐름이 같지는 않았고 훨씬 정치적이었죠. 엘리엇 스미스 풍의 노래를 부르던 정민영군(前 토마토)과는 좀 친해지긴 했지만, 같은 흐름으로 활동하진 않았고.

[weiv]: 스누나우에 대해서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정확히 어떤 위치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본인의 입으로 말해 주면 좋겠습니다.
깜악귀: 저는 창단 멤버였고, 창단 당시에 ‘뉴스면’과 ‘문화웹진’면으로 이분되어 있었습니다만, 저는 창단 당시 문화웹진 쪽의 책임자였습니다. 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마음 맞는 애들을 다 데려왔는데 그 중에는 지금 붕가붕가 레코드의 곰사장이 있고, 같이 밴드를 하고 있는 슬프니도 있었고, 기타 등등 더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메아리 쪽이랑 친해지게 된 것이고…. 나름 손발이 맞는 멤버들이었죠. 문화적 감수성이 비슷한 애들을 주로 끌어들였으니까.
이후에 저는 2대 편집장을 했었습니다. 지금 붕가붕가 레코드의 곰사장도 이후에 편집장을 역임했고. 그곳 동아리방은 대학에서 저희 세력(?)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 사무실에서 통기타도 치고 자작곡도 만들고. 붕가붕가 중창단의 연습도 하고, 남의 공연 보고 괜히 날선 칼럼이나 쓰고 그랬어요. 그렇게 과방과는 다른 어떤 거점이 있다보니 공강 시간이나 수업 끝나고 이런저런 애들이 항시 모여들 수 있었고, 무슨 작당을 하기도 쉬웠어요. 그런 식으로 대학의 마지막 2년을 보냈습니다. 기사 쓰고 노래 만들고 작당해서 이벤트 만들고…. 기사 쓰고 칼럼을 썼죠.

[weiv]: 이런 일련의 음악활동에 대한 학내에서의 반응이 어땠다고 보아야 할까요? 일단 대학문화를 오랫동안 규정한 ‘운동권’에서의 시각이 궁금한데….
깜악귀: 운동원에서의 따가운 시선이 없지는 않았죠. 근데 따이빙 굴비를 처음 기획한 게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주의) 계열이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그 문화국장은 저희가 하는 게릴라 공연 같은 걸 ‘원하던 거다’라고 좋아하더라고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그냥 ‘이상한 짓을 하는 애들’로 보는 시각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감수성으로는 그냥 ‘이해가 안 되는 짓’이었을 테고, 아주 싫어하는 애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운동권’이라면, 궁극적으로 ‘민중민주적 헤게모니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을 하는’ 애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상은 항상 “당장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가득하니까요.
하지만 저도 나름 집회에 나가거나 운동행사에 참여하긴 했지만 결국 운동권이 될 수는 없었는데, 제 생각에 걔네들이 하는 것보다 우리가 하는 것이 더 가치 있게 느껴졌어요. 제가 보기에 대학 문화는 이념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수분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무슨 물이든 뿌려야 한다는 주의였어요. 제 주변 애들도 거기에 동조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운동권 외에는 스스로 뭔가 하는 애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 제가 보기에 그건 죽음과도 같았고 그건 정말 끔찍한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먼저 부끄러운 걸 해볼게. 이것 봐. 생각보다 부끄럽지 않지? 너도 뭔가 해봐.”라고 말하는 짓들을 했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저희는 언제나 정치와 무정치 사이의 샌드위치에 끼어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누나우 혹은 붕가붕가 중창단 근처에 몰려 있던 애들은. 결국은 머리가 다 돌아가고 사회문제에 약간의 관심이 있으면서도 당파에는 낄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죠. 그렇다고 해서 그냥 공부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까워서 뭔가 재미있는 걸 해보려는 애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해요. 운동권 문화가 싫지는 않지만, 그 논리에 제약받는 건 결국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weiv]: 운동권 외의 ‘일반’ 대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깜악귀: 음, 그냥 이념에 아무 관심 없는 일반 대학생들의 반응이 더 좋았죠. 저희는 운동 자체는 존중했고, 그 전체적인 대세에는 공감했지만 저희가 뭘 하면 운동권 애들은 대체로 싫어했던 것 같아요. 최소한 거리를 두면서 조심스러워했던 것 같고. 이 사람들은 ‘명확한 의미’나 ‘가치’가 없는 건 좋아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 시기에, ‘일반 대학생’들은 우리에게 뭔가 ‘특정한 음악’이나 ‘메시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물론 우리는 메시지 같은 거 전달하지 않았죠. 그런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인디 씬에 나오고 나서 그런 청중이 부족했어요. 오히려 대학 식의 대중이 더 순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디 씬의 청중은 꼭 순수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좀 확실한 사람들이었어요.

[weiv]: 홍대 앞의 청중들에게는 이미 ‘미학적 위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인가요?
깜악귀: 그렇죠. 잘 된 음악이라는 게 뭔지에 대한 완성형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저희는 뭐. 그런 생각을 하진 않거든요. 지금에 와서야 인디 씬은 그걸 좀 깨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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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을 딛고 홍대앞으로: 2002~2007

[weiv]: 그러면 ‘홍대 인디 씬 진출’로 이야기를 옮겨 보죠. 2002년에 졸업하고 눈뜨고코베인을 결성하는 과정을 설명해줄래요?
깜악귀: 그렇게 놀다가 졸업 연도의 마지막 대학 축제의 공연을 끝으로 제가 하던 대학 밴드를 해제했어요. 일단은 뭐 연주력 면에서 그리 좋지 않았을 뿐더러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밴드가 아니었으니까.
그 뒤 붕가붕가 중창단이나 몇 번 더 하다가 이제는 상당히 친하게 된 그 메아리의 후배 몇 명이랑 새로운 밴드를 하기로 했어요. 저도 이제 졸업을 하니까 아예 대학을 벗어나 홍대로 나가자… 그런 다짐을 했죠.
그때 주축이 된 건 저랑 메아리에서 베이스 치던 슬프니(안승현)였고, 거기에 기타리스트로 목말라(조병진)가 참여. 그 당시 슬프니와 친하게 지내던 연리목(이유진)이 ‘자기도 하고 싶다’고 해서 참가했죠(그 친구 본인은 ‘그쪽에서 필요로 한다고 해서 자기가 온 거다’고 주장하는데, 뭐….) 그 뒤에 드러머가 필요해서 사회학과에서 드럼을 칠 줄 안다는 장기하를 영입해서 밴드의 구성원이 만들어졌어요.
우리의 목표는 일단 홍대 클럽에서 공연해본다, 였는데 사실 이렇게 오래 할 줄은 전혀 몰랐죠. 그래서 합주실에서 연습을 시작했고, 컨셉은 ‘산울림 같은 노래를 하자’였지만 뭐 그리 잘되진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제가 만든 노래를 손 가는 대로 편곡하기 시작했어요.

[weiv]: 어째서 하필이면 ‘산울림’이었나요?
깜악귀: 대학 입학하면서 산울림을 주의 깊게 들었는데 아마 13집이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쉬우면서도 파격적인 힘이 있는 음악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저는 그 음악을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몇 년은 산울림의 전 앨범에 빠져 살았어요.
저희는 어쨌든 한국말로 노래할 거였고, 실험적이거나 어려운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만 진부하고 식상한 것은 싫었어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산울림에 있었어요. 그래서 슬프니한테 ‘산울림 같은 걸 하면 되지 않을까. 한 3인조로’라는 얘기를 했던 거죠. 결국은 제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3인조가 될 수는 없었고, 건반이 붙으면서 또 5인조가 되더군요. 그러다 정신차려보니 산울림 같은 음악이 아닌 뭔가 좀 다른 걸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EP나 1집 보도자료에는 여전히 산울림 운운하긴 했죠. 왜냐하면 달리 설명할 말도 딱히 없어서….

[weiv]: 산울림을 비롯해 1970~80년대 음악들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 세대에서 당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조금은 신기한데 먼저 음원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요?
깜악귀: 그 무렵 산울림이 13집을 냈는데, 관련해서 산울림 복각 음반이 나와서 백방으로 구해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죠. 저는 나중에 [weiv] 상수동 사무실에 가서 복각 음반들을 CD로 구워 오기도 했고. 그런 것을 서로 나누어서 들었죠. 그런데 대체로 희귀음원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기억해보면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등에 영향을 받았던 듯해요.
그런 점에서 메아리나 저는 약간 쉬운 경로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다른 밴드들은 그 음원들이 손닿는 데 있진 않았을 테니 그것들보다는 라디오헤드(Radiohead)나 외국 음악을 듣는 게 더 쉽긴 했겠죠. 일단 대부분의 뮤지션의 mp3플레이어에 송골매가 있는 경우는 은근히 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린 있었으니까.
물론 그 노래들이 어릴 때도 많이 들어본 익숙한 노래였는데 그 때 외국의 인디 록과 함께 들으니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어요. 다시 들어보니 그건 완전한 형태의 인디 록이었고 저는 본능적으로 ‘이게 어떤 탈출구가 될 거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우리나라의 인디 씬이 외국 음악 씬의 영향을 받기만 하는 순환을 하는 건 전혀 희망이 없다고 봤거든요. 또 전 그런 것에 별로 흥미가 없기도 했고…. 까놓고 말해서 ‘라디오헤드 따라 하는 것’에 별로 흥미가 없었어요.

[weiv]: 산울림의 음악적 지위에 대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산울림이 ‘1990년대 후반 대학생 아마추어’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깜악귀: 음 좀 다른 이야기부터 하면… 저는 한국 인디 씬이 메탈과 투쟁하면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일단 메탈이 우리나라의 음악 하는 이들에게 일차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건 모두 인정하는 거죠) 이제 메탈이 너무 많아져서 지겨워지자 메탈의 펜타토닉 스케일에 훵키 리듬을 가미한 레드 핫 칠리 페퍼스 같은 취향으로 변한 다음에, 또 이 취향이 사운드 톤이나 이펙팅에 대한 흥미를 거쳐 라디오헤드 취향으로 갔다고 저는 생각해요. 단순하게 보면 그렇다는 거지만요.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음악 취향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절규하는 듯한 신파적 취향의 보컬, 꽉 들어찬 사운드, 하이 테크닉의 기타 연주(혹은 사운드), 쪼개는 리듬이라는 제반 요소에 대한 선호는 변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요소들은 결국 메탈 취향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국 인디 씬은 2000년대 초까지 메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저게 좋은 음악의 절대 요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밴드들이 저런 요소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희, 혹은 저는 저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금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저런 음악을 하는 밴드들은 다 비슷비슷하고 개성이 없어 보였어요. 홍대 인디 공연장에 가서 처음 느꼈던 것도 그거였어요. “저 사람들은 왜 저 곡을 부르지?” “앞의 밴드랑 뒤의 밴드랑 차이가 머지?” 기대를 많이 했지만 의외로 획일적이었고…. 밴드들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분명 연주하는 곡은 다른데, 제가 듣기엔 ‘같은 것’이었어요.
좌우간 그런 음악 취향에서 보자면 산울림은 저가(低價)의 음악이죠.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요소는 사실 밴드 음악이 값싸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장갑 무장’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건 일종의 고급화 전략이고 본능적인 서구화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런 무장이나 화장기가 없는 음악을 원했고, 거기에는 산울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은 산울림과 그 시기의 어떤… ‘음악에 어떤 거대한 의미를 담거나’ ‘록의 역사를 짊어지려 하는 의식 없이 그냥 음악을 하는’ 그런 밴드들이 있었죠. 그건 메탈 취향과 그 이후의 라디오헤드 취향이 탈피하려고 했던 한국의 음악 역사였지만, 저희에게는 오히려 그게 감성적으로 더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weiv]: 그런데 아무래도 산울림 음악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건 식자층에 국한된 것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는 없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깜악귀: 산울림 음악 자체가 노동계급하고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약간 사치스러운 면, 다다이즘스러운 면이 있죠. 그런 점에서도 저와는 맞았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산울림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이건 내 시대의 음악’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냥 ‘난 저걸 알 수 있어’ ‘저게 뭔지 알아’ 그런 거였죠. 물론 이후의 영미 밴드 몇몇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국내산하고는 달랐죠.

[weiv]: 여담이지만 [파는 물건]이라는 EP의 타이틀은 김창완이 종종 했던 언급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인지? ‘누나야’도 산울림의 곡 제목인데….
깜악귀: ‘파는 물건’은 김창완 씨 인터뷰 중에서 어떤 대목을 인용한 게 맞아요. ‘누나야’는 오마주는 아니고 그냥 노래 메시지가 그래서 붙인 것이고 연관이 없고요.

[weiv]: 그 무렵 [weiv]의 필자로 참여한 것 같은데 막상 눈코 밴드의 앨범에 대해서 [weiv]의 주류 필진들은 냉담까진 아니라도 그리 환영하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맞나요?
깜악귀: 그건 좀 예상은 했어요. (웃음) 그 점에 별로 섭섭해 한 일도 없고, 오히려 좋아했더라면 당황했을 것 같은데…. 음악에 대한 이해 기반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고, 제가 만든 것이 베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weiv]는 ‘좋은 음악’의 기준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그 틀에 맞춰서 리뷰를 쓴다는 생각이 드는데, 필자마다 다르다고는 해도 미묘하게 공유하는 기준이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좋은 음악’의 기준에 별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미묘하게 달랐어요.

[weiv]: 그러면 반대로 [weiv] 필진들만이 아니라 홍대 앞에서 음악 듣는 사람들 일반에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깜악귀: 그건 그랬죠. 2004~5년까지만 해도 저희 음악에 유리한 환경이라는 느낌은 없었어요. 뭔가 홍대의 주류가 원하는 음악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죠. 물론 당시 우리 밴드 음악이나 연주가 그 때 지금보다 더 불안하긴 했는데.. 근본적으로 뭔가 괴리를 느끼긴 했어요.
적어도 당시에는 홍대 인디 씬에 ‘홍대 인디 씬 관객층’이라는 게 더 확고하게 있었고 이쪽에는 ‘좋은 음악’에 대한 기존의 틀이 좀 확고하게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8, 9년부터 좀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2집 앨범 만드느라 1년 좀 넘게 쉬고 다시 나왔더니 뭔가 흐름이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후 홍대 관객들은 점점 더 다양해졌고 기존의 관념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weiv]: 나는 오히려 눈뜨고코베인의 초기에 봤을 때는 ‘불친절하다’, ‘도도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부당한 평가인가요?
깜악귀: 글쎄요. 불친절해보였던 건 그냥 무대 매너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고. 도도하다는 건 그냥 수줍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저희 자신이 모순적이긴 했어요. 실험적인 음악을 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인디 씬에서 나름 대중적인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바깥세상에서 대중적인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을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대중친화적인 자세는 어떻게 가지는지 몰랐어요.
홍대의 인디 스테이지에 선 사람이라는 낯선 정체성을 해결하는 것도 바빠서 우리를 봐주는 대중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몰랐다고 할까. 사실 홍대 인디문화라는 것 자체도 우리에겐 낯선 것이었으니까. 당시에 누가 사인을 받으러 와도 쭈뼛거렸어요. 심지어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사인을 한 일도 있었는데… 그게 무시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예요.
저로 말할 거 같으면 연예인인 척 하는 인디 밴드들은 싫어했고, 그렇다고 ‘나 뮤지션 가오’도 잡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러다보니 무슨 정체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건 지금도 모르겠고.

[weiv]: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청년실업 2집에도 참여했는데….
깜악귀: 2집은 아니고 싱글 앨범이었어요. 이기타(이정수)가 저희 밴드의 목말라랑 (장)기하랑 같이 하던 프로젝트였는데, (장)기하가 군대가 있는 동안 제가 끼어서 잠깐 한 거죠. 결손 멤버를 메우기 위해서 한 거였고 큰 의미는 없었어요. 몇 번 공연을 같이 했죠.

[weiv]: 밴드 눈뜨고코베인이 못했던 ‘대중과의 접속’을 (장)기하는 솔로로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깜악귀: (장)기하는 사람을 대하는 면에서 장점들이 많아요. 남한테 상처주고 싶어 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는데, 저는 그런 걸 좀 싫어하고…. 노래에서 그런 차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일단 제가 만든 노래는 상당히 냉정한 구석이 있는 반면에, (장)기하 노래는 관조적이라 해도 냉정하진 않고 좀 친근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음악적 코드나 리듬 구성도 더 팝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면에서 (장)기하는 저희 밴드가 홍대에 나가면서 겪은 체험을 같이 겪었고, 그런 면에서 체험적인 레퍼런스를 이미 잘 갖추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 밴드를 오래 같이 하면서 얻은 어떤, 우리 밴드가 가진 장점도 이미 녹아 있었겠죠. 그런 부분들을 자기 감성 안에서 아주 잘 대중화했다고 생각해요. 뭐 잘된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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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인디 밴드’의 경제학: 2008~

[weiv]: 장기하가 독립한 뒤 눈뜨고코베인의 이야기를 묻기 전에 이전 앨범들에서 음반사가 자꾸 바뀌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1집은 비트볼에서 음반을 냈고, 두 번째 앨범은 파고뮤직이라는 레이블이 붙어 있네요.
깜악귀: EP를 낼 무렵 비트볼이랑 접촉을 했고, 그쪽에서 1집 작업을 하자고 해서 1년 가까이 함께했죠. 그렇게 활동을 같이 했는데 서로 썩 맘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희를 데려간 사장이 공동 사장이었는데 이 분이 그때쯤 영화를 만든다고 운영에 관여를 하지 않기 시작했어요. 다른 한 명 사장의 취향은 저희랑 잘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음 앨범은 그냥 저희끼리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2집은 제 방에서 녹음했고, 드럼도 [MIDI로] 찍었어요. 그리고 송재경군(그림자궁전, 9와 숫자들의 ‘9’)에게 파고뮤직을 소개받아서 거기에서 배급을 했죠. 레이블은 자체였고 배급만 파고뮤직.

[weiv]: 달리 말하면 그때 붕가붕가에서 음반제작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깜악귀: (장)기하가 뜨기 전에 붕가붕가는 그냥 소규모 작업소 겸 수공업 싱글 음반 전문 레이블이었고 ‘밴드’를 감당할 수 있는 레이블이 아니었어요. 나중에라도 같이 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럴 이유가 없었어요. 거기에서 한다고 해도 어차피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는 건 똑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언젠가 뭔가 같이 하자는 공감대는 계속 있었고, 이번 3집은 붕가붕가에서 낸 건 암묵적인 약조 같은 게 있기도 하다고 해야 하나.

[weiv]: 3집은 붕가붕가로 돌아온 셈인데, 붕가붕가의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곰사장은 장기하 이외에는 잘되는 게 없다고 말하던데….
깜악귀: 모색기? ‘농한기’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장)기하 말고는 대박이라 할 만한 게 없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괜찮은 성과들을 건진 앨범은 있다고 알고 있어요. 다르게 말하면 (장)기하가 없이도, 대박 없이도 레이블을 운영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붕가붕가 레코드의 과제일 테고, 그렇게 안정화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모색하고 있는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수공업소형음반도 새로이 영입된 신인 밴드들의 싱글이라는 범주에서 계속할 것 같아요. 공연하면서 작은 앨범을 싸게 팔기 좋고, 데모라는 점에서 밴드의 명함 역할도 할 수 있고.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꾸준히 잘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weiv]: 한편에서는 2010년부터 붕가붕가 레코드에서 나온 음반들이 산만해진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아침(Achime)의 음반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깜악귀: 음, 앞에서 말한 ‘비슷한 출생’을 가진 밴드들은 이미 더 이상은 없으니까, 이제부터 붕가붕가에 소속되는 밴드들은 다른 출생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거 같아요. ‘불나방’ 같은 경우는 우연히 쿵짝이 맞았던 경우였던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비록 기존 밴드들의 색이 어느 정도 균일해 보인다고 해도 앞으로는 점점 더 다양화되지 않을까요? 사실, 캬바레에서 페퍼톤스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람들은 예전까지 캬바레가 오!브라더스 같은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어쨌거나 기존 밴드의 음악 색깔도 계속 바뀌어갈 수밖에 없는 거겠고, 저희만 해도 이제 더 이상 복고 어쩌고 하기 어려운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 레이블 소속 밴드들의 색채도 점점 변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싶어요. 역시 제가 직접 관여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weiv]: 눈뜨고코베인은 앞으로는 이른바 ‘복고’를 더 이상 밀고 나가지 않는다는 의미인가요?
깜악귀: 밀고 나가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럴 게 있나요? 예전에도 딱히 복고로 밀고 나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보도자료에 ’70년대 한국록을 좋아하는 취향의 밴드’라고 한마디 썼을 뿐이지. 우리는 복고 음악을 하는 밴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어요. 지금의 노래는 지금의 노래일 뿐이고, 지금 사람들이 듣는 음악일 뿐예요.

[weiv]: 그럼 마지막으로 답이 없는 질문이겠지만 CD가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뮤지션은 어떻게 생계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
깜악귀: 들이는 시간만큼의 돈은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올바른 인식이라고 보지만, 저는 공연을 하고 앨범을 내는 것 외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운다는 주의예요. 뭐랄까, 얽매이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weiv]: 그게 가능하려면 다른 일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깜악귀: 그렇죠. 혹은 애당초 돈이 있거나. 근데 그건 어떤 예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음, 물론 (장)기하나 브로콜리 너마저처럼 잘 돼서 음악만 하고 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걸 위해서 음, “인생에 승부를 걸듯이”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한테 음악은, ‘잘되건 잘되지 않건” 그냥 하는 쪽에 가까워서. 그리고 성과를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도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이건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는 걸 만들면 그걸 내놓고 싶을 뿐이지.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하는 말로 미루어보면, 사람들은 보통 음악에 생계를 걸어야만 음악에 열정이 있는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거 같은데…. 저는 반면에 ‘잘 안되면 음악을 포기하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게 과연 좋은 건가?’라고 묻고 싶기도 하거든요.
음악은 음악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과 내가 하는 음악을 헷갈리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weiv]: 문제는 밴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여부일 텐데 다른 멤버들의 경우는 어떤가요?
깜악귀: 다른 멤버들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더 성과를 얻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죠. 예를 들어, 저는 약간의 대가도 별로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멤버 중 한 명은 (그 애는 다른 작업 없이 음악 작업만 하는데) ‘음악을 하면 그에 따른 성과는 얻고 다녀야 된다’고 하더군요. 엄청난 성과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늘이는 노력과 시간만큼의 보상이라는 건데, 저도 그건 물론 동의해요. 무상봉사를 하는 건 아니니까. 공연을 하면 그만큼의 수익이 있어야 되고. 밴드라는 건 멤버 수도 많기 때문에 노동력만큼의 대가는 받아야 힘이 빠지지 않을 수 있죠. 레이블이랑 같이 하는데 레이블에 아무런 수익이 안 된다는 건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 딱 그 정도 선이라고 할까. 그 나머지 자신을 위한 충분한 수익은… 스스로 마련해야 해요. 저는 그게 오히려 이상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weiv]: 혹시 디지털 음원 시장이 생기면서 밴드에게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있나요? 이런저런 말이 많은데….
깜악귀: 돈을 조금 받기는 하죠. 그렇지만 많다고는 볼 수 없고. 아무래도 인디 밴드의 경우 음원보다는 음반이 조금 더 큰 편이에요. 인디 밴드는 공연을 통해 음반을 파는 게 은근히 크거든요. 클럽 등에서 공연을 많이 하면 일단 음반 판매량은 조금씩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저흰 공연도 잘 안 하는 밴드이긴 하지만. (웃음)

[weiv]: 그런데 요즘 조금 규모가 큰 공연장엘 가보면 어느 정도 사람들이 들어차는,데 오래된 소규모 클럽들은 사정이 나아진 것 같지 않네요. 눈뜨고코베인만 해도 클럽 공연은 더 이상 매력이 줄어든 건가요?
깜악귀: 음, 저희도 초반에는 클럽 공연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지금은 매력이 줄어들었다기보다, 밴드가 1~2집을 내고 나면 클럽 공연을 자주 하는 게 효율이 떨어지긴 해요. 물론 지금도 가끔 클럽에서 공연을 하지만, 그건 클럽이 특별히 불러서 기획공연 했을 때고, 상시 공연을 하는 건 과거에 비해 좀 의미가 떨어진달까. 새로운 관객이 끊임없이 오지는 않거든요. ‘그 관객이 그 관객’인 순간이 오는 거죠.
그리고 클럽 공연은 보통 준비해서 하는 공연이 아니니까 밴드의 대여섯 개의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식이 되는데, 그걸 4, 5년 하다 보니 스스로도 매너리즘에 빠져서 자극이 되진 않는 측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좀 준비해서 하는 공연’쪽에 신경을 쓰자는 이야길 했어요. 직장인이 늘었다는 밴드 내부 속사정도 작용을 했고. 밴드 스스로가 하는 기획공연이나 컨셉을 가지고 클럽에서 하는 공연 쪽에 집중하는 건 그런 사정도 있어요. 그것만 해도 그리 쉽진 않으니까요. 그래서 기획공연은 오히려 더 많이 준비하게 되고, 점점 공연의 볼륨이 커지는 반작용도 있어요.

[weiv]: 잘 들었습니다. 이제 ‘베테랑 밴드'(!)가 된 만큼 그 경험이 후배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길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치죠. 3집은 지속가능한 히트작이 되시길! 20110430 | 신호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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