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건 궁금증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의구심이기도 했다. 사비나앤드론즈의 포지션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예술가’다. 그녀는 비극, 운명, 모순, 진정성, 모진 삶 같은 단어들로 자신의 음악을 설명하고, 즉흥적인 순간의 느낌을 원테이크로 녹음해 앨범으로 발표했다. 솔직히, 처음에 나는 그녀의 음악을 앞에 두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예술가적인 자의식을 드러내는 수사는 일견 불필요하게 과장된 옷처럼 보였다. 하지만 앨범을 듣다 보면 음악이 생의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그 말이 허투루 들리지가 않았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모호한 언어로 부르는 노래에서 무언가 절박하고 뜨거운 것이 전해졌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내가 의심하는 ‘예술’과 그녀가 믿는 ‘예술’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직접 만나본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더 유연한 사람이었다.

일시: 2011년 3월 6일
장소: 유어마인드
질문: 이수연
정리: 이수연
사진: 사비나앤드론즈 제공

[weiv]: EP를 처음 들었을 때 노래를 한 30년 부른 사람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니 20대 초반이라 놀랐다. 노래는 언제부터 부르기 시작한 건가?
– 워낙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는 게 꿈이었다. 음악을 하려면 생계를 꾸릴 방법이 있어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고민을 하다가 대학 진로도 간호사로 결정을 했고. 원래는 간호사 3년차까지 마치고 음악을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응급실로 들어갔었는데, 6개월 정도 지나니까 더는 못 참겠다 싶어 음악을 시작한 거다. 그때가 2008년 9월이었으니까, 2년이 조금 넘었다.

[weiv]: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많은 선택지 중 택한 것이 왜 간호사였나?
– 꾸준하게 창작을 하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선 자격증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면허증이 있으면 나이 제한 없이 취업이 쉽고 외국에 나가더라도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 일이 좀 힘들다 뿐이지 유리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적성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EP 만드는 과정에서는 3교대 근무를 소화하면서 작업실을 왔다갔다했다.

[weiv]: 음악이 잘 안 되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일종의 보험 같은 건가?
– 잘 안 되면 어쩌나 그런 문제를 생각했던 건 아니다. 음악에 경제적인 문제가 합쳐지면 자율성이 침해받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기 위한 생업 같은 것으로 본다.

[weiv]: 그러고 보면 엄청 신중하고 주도면밀하다. (웃음)
– (웃음) 아무래도 목표가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우선 3년간 일을 하겠다는 목표를 채웠고, 미국 간호사 준비를 하면서 앨범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많이 했다. 외국에서도 음악을 하려면 먹고 살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weiv]: 그렇다면 외국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거나 활동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씬이 있는 건가?
– 나에게 맞는 시장은 미국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살고 싶은 곳은 유럽 쪽이다. 일을 그만두고는 바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개인적으로는 스위스, 특히 알프스를 꿈의 낙원이라고 생각한다.

20110401054352-1111_DSC0009

그러니까, 이것도 ‘가요’입니다

[weiv]: EP는 여러 가지 장르를 욕심껏 소화해 본 작업이라는 인상이었다. 이게 프로듀서의 역량일 수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여러 장르를 체화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다. 평소에 어떤 음악을 많이 듣나?
– 내가 좋아하는 시대를 꼽는다면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다. 처음에 작업실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도 40년대 빌보드 차트부터 듣기 시작했다. 장르별로 많은 음악을 단시간에 접했다. 사실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는 가요만 들었었다. 한국 음악이 좋았다. 서양 음악을 많이 듣기 시작한 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부터였다. 사부는 70년대를 좋아하고 나는 40년대에서 60년대를 좋아하고.
사실 EP나 앨범이 나의 취향이냐고 했을 때는 나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화학작용인데, 나와 사부님의 개인적인 취향, 혹은 사부가 나를 바라봤을 때의 느낌 같은 것들이 합쳐진 것이다. 앨범을 만들 때에는 ‘이 방향으로 가자’ 하고 만들었던 게 아니라, ‘오늘 저 휴무입니다’ 하고 와서 ‘오늘은 어떤 걸 해볼까?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해서 나온 결과물을 엮었다.
앨범 안에 그렇게 다양한 장르가 있는 것은 아직 내 색깔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하나의 앨범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다양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나 또한 하지만, 아직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과정이다. 20년 정도 지나면 내 색깔이라는 게 생기지 않을까.

[weiv]: 그러고 보면 이번 앨범의 제목도 ‘Gayo’ 아닌가. 사실 일반적으로 ‘가요’라고 부르는 노래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인데. 예전에 주로 들었다는 한국 가요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 김현식, 김광석의 음악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랐다.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셔서. 그래서 그런 음악에 굉장히 익숙하다. 거의 항상 들었던 것 같다. 토이나 이소라 씨 음악도 많이 좋아한다. 90년대 한국 가요와 같은 서정적인 음악에 끌렸다.
그리고 앨범 타이틀을 정할 때는 고민이 많았다. EP 때는 타이틀 곡도 없었다. 그냥 올렸더니 첫 곡이 타이틀로 뜨더라. 장르도 굉장히 다양하게 분류되고. 어떤 곳에선 록, 어떤 곳에선 재즈, 심지어는 국적이 영국으로 뜨는 데도 있었다. (웃음) 장르라는 게 필요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경계라는 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때 ‘아, 이것도 가요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것이 가요다’가 아니라 ‘이것도 가요다’라는 의미다. 사실 한국 대중가요의 뿌리는 한국 음악에 있지 않다라고 볼 수도 있다. 가요는 어떻게 생각하면 외국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것으로 나온 게 아닐까. 현재 나와 있는 곡들도 거의 그런 식이고. 앨범에 실린 우리 음악도, 내가 한국에서 불렀고 그렇다면 이것도 가요라는 생각이었다.

20110401054352-1111COVER-5-2

“혼자 하는 것은 오히려 쉽고 편하다, 그렇지만”

[weiv]: 사부님이라는 호칭이 이미 여러 번 나왔다. 더더밴드로 유명한 김영준 씨가 프로듀서를 맡았고 앨범의 많은 과정을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서로 유대가 남다른 것 같다. 맨 처음에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
– 앨범에서 키보드를 치는 친구가 물렁곈인데, Poe라는 밴드에서 프로듀싱도 하고 음악을 만들면서 활동하고 있다. 그 친구가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간호사 일을 6개월간 하다가 그 친구라면 어딘가에서 음악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무작정 연락을 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털어놨다. ‘나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일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한계인 것 같다’라고. 정말로 그때는 꽃이 시들 듯 나라는 사람이 시들어가는 시기였다. 암흑기라고 할까. 이러다 죽겠다 싶더라. 그래서 친구한테 구조요청을 한 거다. 사실 누구한테 연락하고 이러는 스타일이 못 돼서 뜬금없이 2년 만에 연락한 내가 아마 그 친구로서도 의외였을 거다. 친구는 ‘우리 스승님이 있는데 한번 와볼래’라고 했고, 가이드 녹음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한다고 하기도 해서 갔다. 거기에서 만난 사부는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한 달만 지켜보고 있다가 제자를 할지 말지 정하자고 했다. 나야 음악을 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는 것이었고, 그러자고 했다.

[weiv]: 궁금한 게, 왜 ‘사부’라고 부르는 건가?
– 나도 내가 왜 사부라고 불러야 되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처음에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됩니까, 라고 물었더니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고 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호칭을 안 썼다. 그냥 안녕하세요, 이러고.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서 이제부턴 ‘스승, 제자’ 하자고 하길래 그때부터 그렇게 불렀다.

[weiv]: 그 호칭은 사실 매우 도제식인 시스템에서 가능한 건 아닌가? 사부라고 부르는 순간 내가 제자가 되는 거고. 음악을 앞으로도 계속 해야할 텐데, 그 점에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것 같기도 하다.
– 사부와 내가 열네 살 정도 차이가 나긴 하지만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어른이긴 한데 존경할 수 없는 사람도 많이 봤다. 병원에서도 그랬고. 누군가를 내가 왜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것도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흘러가다 보니 갑자기 이렇게 된 건데. 내가 왜 이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내다 보니 좀 알겠더라. 나는 발성 연습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노래만이 아니라 음악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시대별로 이 음악은 어떤 음악인지 서로 토론도 하고.
사실 나는 누구에게 연락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타입인데, (사부는) 처음에 나한테 어디어디 이동하는 것까지 매번 문자를 보내라고 하는 거다. 이를테면 ‘저 방에 갑니다’, ‘화장실 갑니다’, ‘병원에 갑니다’ 이렇게.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던 거다. 내가 누구와도 소통이 잘 안 되는 타입이고 말도 잘 안 하는 편이라서, 그걸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음악과 생활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편이라, 내 음악에 대해 말로 표현하는 것을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음악에 대해서도 그렇고. 누군가 내놓은 음악도 한 권의 책이랑 비슷해서, 그걸 듣고 각자가 느끼고 상상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있을 텐데, 음악을 내 놓은 후에 나오는 반응은 결국 듣는 사람의 자유라고 생각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서 말을 하는 역할은 평론가 같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었다. 나는 그저 음악을 할 뿐이니까. 근데 사부는, 네가 만든 음악이면 거기에 대해 어느 정도 얘기를 할 줄 알아야 된다,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익혔다. 작업실에는 팀도 여럿 있는데 어떤 일을 할 때 소통이 안 되면 부딪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런 면을 많이 배웠던 거다.

[weiv]: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보도자료에서의 ‘스승’ 혹은 ‘사부’라는 표현을 접했을 때는 이게 권력관계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뜻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했다. 그런 포지션을 취하는 게 약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 나는 사실 작업실에서 좀 돌연변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사부님 오셨습니까, 하면서 가방도 들고 뭐 이런 느낌이었는데, 나는 가자마자 말다툼부터 일으킨 거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뭐 이런 것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을 프로듀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걸 배우고, 그러면 내가 또 다른 일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굉장히 개인적인 것 하나하나까지 터치를 하니까.
그치만 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음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음악이라는 것도 하나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런 부분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사부님과는 직접적으로 내 음악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이라며 부드럽게 말하기보다는 ‘그거 아닙니다’, ‘그거 싫어요’라는 식으로 자기 주장이 강하게 나가기도 한다.

[weiv]: 그래서 야수라고 불리게 된 건가? (웃음)
– (웃음) 처음엔 많이 심했다. 그런데 상호작용이 되는 것 같다. 사부가 어떤 쪽으로 너무 치우칠 때 내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을 들어 주시고. 관계가 거의 동등하다. 사부도 나에 대해 많이 배려를 해주는 편이다. 기를 안 죽이고 내 성격도 꺾지 않기 위해서. 많이.

[weiv]: 그렇다면 밴드와 같이 활동하는 건 어떤가. 이번에 1집을 내면서 ‘드론즈’라는 이름으로 밴드를 구성하기도 했다. 면면을 살펴보면 ‘황보령=SmackSoft’의 멤버인 정현서(bass)와 서진실(drum), 밴드 포(Poe)의 리더 물렁곈(keyboard)과 하이미스터메모리의 기타리스트 조용민(guitar)이다. 모두 쟁쟁한 분들이다.
– 처음에는 밴드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게 있었다. 사회생활하는 것도 힘든데 음악까지 사람 신경 쓰면서 하는 건 더욱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팀을 만든다는 건 생각도 안 했고 지금도 사실 솔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음악이라는 게 정말 목소리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드럼, 베이스 같은 악기들이 소리를 만들고 그걸 녹음한 상태에서 내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불러서 감싸게 되는데, 연주 없이 내 목소리만 있을 수는 없는 거다. 이걸 만약 세션을 써서 만든다면, 지금도 세션과 밴드의 중간 형태이긴 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나를 모르고 내 음악에 대해서 모르면 음악이 50% 수준 이하로 나올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내가 공연을 하고 다니다 보면 ‘어, 같이 합시다’ 하는 사람이 한두 명씩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먼저 음악을 듣고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 일년 정도 물렁곈이랑 둘이서만 했는데, 벨로주에서 공연하다 그분들과 만난 거다. 정현서 씨의 베이스 연주를 들었는데 ‘아, 저 사람은 저 음악을 전체적으로 듣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만나서 인사하다가 ‘같이 해보자, 사비나’, ‘어, 저도 좋아요’ 이런 식으로 얘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정현서 씨와 연습하다가 그 다음에 드럼 치는 서진실 씨가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조용민 씨가 합류했다. 조용민 씨는 처음에 내가 약간 고집이 세 보이고 남의 말 안들을 것 같아서 같이 하기 싫다고 했다고 한다. (웃음) 그걸 정현서 씨가 설득해주셨다.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보니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시간을 많이 보내고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지금은 방패막이도 되어 주고 힘도 되어주고 해서 정말 많이 고맙다.

“음악을 만든 그 순간들을 그냥 녹음해서 담은 거다”

[weiv]: 누군가 알아봐줄 거라는 직감을 갖고 기다렸다고 했는데, 홍보 방식도 좀 그런 편이었던 것 같다. (웃음) 프로모션을 많이 한 편이 아닌데도 네이버 뮤직에 소개되거나 여러 매체에서 2010년의 신인으로 손꼽히기도 했는데.
– 예리하다. (웃음) 두 가지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이건 굉장히 나의 개인적인 음악들인데, 사실 EP는 가이드 녹음에 가깝지 않나. 음악을 만든 그 순간들을 그냥 녹음해서 담은 거다. 악보도 없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반 이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테이크로 간 결과물이다.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개사를 안 하고, 그때의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물론 영어 가사 같은 경우 내가 다시 번역을 해서 인터넷에 올려놓긴 했지만, 사실 영어도 아니고 그냥 튀어나온 말들이다. 이를테면 방언이라고 할까. 발음도 좀 애매하고 국적도 좀 애매하고.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는 쓰고 싶은 가사가 되게 많았다. 그런데 음악을 알아가다 보니 소리 자체로 좋고, 또 그 소리 자체에서 내 감정이 충분히 느껴진다면 이건 충분히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건드리기가 어려워졌다. 그냥 이대로 하자, 라고 사부님이 말씀하셨을 때 불안하기는 했다. 이걸로 소통이 가능할까.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들을 거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내가 느끼기에는 좋은 음악이지만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거다.
그러나 이번 정규앨범을 내면서는 가요라고 아예 앨범 제목을 지은 점도 있고 해서, 녹음 전날 가사를 쓰고 다음날 그걸 보면서 한 번에 녹음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어쩌면 라이브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어떤 사람들은 홈레코딩 아니냐, 어설프다,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좋은 스튜디오에서 곱게 다듬은 사운드라고 해서 다 훌륭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만의 사운드, 색깔을 거르지 말고 한번 내보자, 이런 생각이었다.

[weiv]: 처음 EP를 들었을 때는, 그래서 이걸 어떻게 봐야 되나 고민이 많았다. 즉흥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를 그대로 녹음해서 앨범으로 낸다면 순간의 감정을 여과 없이 전달하거나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들을 다루기에는 적합할 것 같다. 그렇지만 보통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더 다듬어나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나. 멜로디도 손보고, 가사도 붙이고, 편곡도 진행하고.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는 게 어떻게 보면 성실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걸 예술적인 수사로 감싼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래를 만드는 게 되게 쉬웠다. 오히려 나에게는 노래를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의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중간에 한 번 난청이 왔었다. 나는 그게 시끄러운 걸 많이 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원인은 소음성이 아니었다. 건강이 많이 나빠져 있었다. 간호사 일을 하면서 3년을 계속 그렇게 살아서 그랬던 거다. 3일에 세시간 잔 적도 있었으니까. 내가 일했던 병원은 노숙자나 술취한 분들도 많이 오시고, 거의 막노동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점점 음악이 더 간절해졌던 거다. 계속 음악을 듣고 싶은데 출근해야 되고.
하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겠다고 그렇게 사는 과정에서, 나는 오히려 너무 성실했던 것 같다. 노래를 하는 데 있어서도 음악 자체에 몰입해 목소리를 내는 데 성실했고, 나를 조금 변형시키더라도 내게 주어진 음악을 어떻게 감싸면 좋을지 매 순간 집중을 하는 데 있어서도 굉장히 성실했다.
그래서 그 다음 과정들이 어찌 보면 성실하지 못했다고 비춰질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른 부분에서 최대한 성실했다고 생각한다. 그 뒤의 부분까지 완벽하게 채우고 싶지는 않다. 음악에 채워질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이다.

[weiv]: 앨범에도 기타, 쉐이커,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만든 노래가 많다. 단출한 구성이지만 전달력만큼은 남다른 것 같다. 그리고 아까 방언 얘기를 했는데. 가사를 들여다보면 상당히 파편적이다. 하나의 서사로 이어진다기보다는 파편적으로 내뱉은 말들이 합해져서 어떤 분위기나 말하고 싶은 바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음악이나 공식 사이트에 올라가는 글들을 보면, 삶이 힘들고 고단해서 거기에서 받은 상처를 음악으로 치유한다거나 이런 게 느껴진다. 되게 예민한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상처를 받았을 때 내가 왜 아픈지 그걸 조근조근 말로 쓸 수 있으면 그건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거나 치유된 거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상처가 치명적이거나 극복하기 어려울 때 논리적인 말이 아니라 방언 같은 게 나오는 건데, 그런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이게 왜 이럴까 궁금하다. 내가 평소에 말하는 습관도 좀 그렇다. 갑자기 뜬금없이 막 내뱉는다든가. 그러면 다들 앞뒤가 있게 말을 하라고 그런다. (웃음) 일기 같은 걸 쓰면서 거기에 있는 단어들을 채집하는 편이기도 하다. 확실히 한국말로 가사를 번역해서 쓰려면 소리를 다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한국말이 좀 딱딱하다. 입이 많이 벌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소리도 살리면서 의미도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이게 가장 최선이었던 것 같다. 부족하지만 이것이 나만의 방식이지 않을까.

20110401055429-1111_DSC0021

[weiv]: 기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악기를 배워서 음악에 대한 장악력을 더 높이고 싶은 건가. 프로듀싱을 배우고 싶은 욕심 같은 건 없나.
– 같은 레이블에 있는 친구들은 기계적인 것도 많이 배우고 하는데, 나는 노래에 편중돼 있어서 그쪽을 많이 배우지 못하기는 했다. 사실 나는 워낙, 사람은 그냥 개인이며 각자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맞는 사람이 생기거나 누군가와 같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사람과 작업을 하면 온전히 나대로 나오는 게 아니더라도 그걸 감안해서 믿고 역임을 하자, 라는 생각을 애써 의도적으로 많이 한다.
그래서 처음에 사부님이랑 작업할 때 너무 힘들기도 했다. 내 노래인데 누군가가 손대는 거. 정말 되게 싫었다. 옆에서 눈물이 막 날만큼 싫었다. 그렇지만 내 노래라고 내가 연주하고 내가 프로듀싱하고 내가 앨범 만드는 게 베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비로소 보이는 내 모습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연주는 연주를 좀 잘 하는 사람이, 앨범은 앨범을 잘 만드는 회사가 맡는 것이 맞다고 본다. 공장에서도 좀 만들고. 아, 정말 EP 만들 때에는 내가 좀 많이 울기도 했다.

[weiv]: 한 장 한 장 커버를 손으로 잘라가면서 EP를 직접 제작했다고 들었다.
– 맞다. 프린터에다 한 장 한 장 넣고 또 자르고. 게다가 프린터가 계속 고장이 난다. 정품 잉크도 안 쓰고 출력을 많이 하다 보니까. 주사기로 뜨거운 물 넣어가면서 했다. 내가 만드는 걸 잘 못한다. 물렁곈이 많이 도와주긴 했는데, 그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부님에게, 제가 돈 많이 모아놨다고, 앨범 만들 때는 그러지 말자고, (열악한 가내수공업 방식은) EP로 충분하지 않냐며 설득했다. 처음에는 앨범도 한 50장 정도는 손으로 만들다가, 설득하고 설득해서 이렇게 찍은 거다.

[weiv]: 많이 나갈 거다. (웃음)
–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음반은 많이 안 사는 추세라서. (웃음)

[weiv]: 인터뷰하면서 궁금했던 게 많이 풀렸다. 음악에 대한 호감만큼 방식이나 태도에 대한 의구심이 충만하기도 했었는데 (웃음)
– 나도 우리의 녹음 방식에 있어서, 이게 정말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에 신경질도 많이 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음악이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막 화도 내보고. 너무 대충하는 것 아닌가요 하면서 사부님께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면 사부는 그냥 웃으신다. 그런 것도 우리가 만드는 하나의 문화인 것 같다. 사부는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 분이고, 나도 이 사람이 아니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냐는 생각이다. 재밌다. 정말로 같이 음악을 만드는 게, 재미있다.

[weiv]: 그러고 보면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는 몇 안 되는 음악가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요새는 일상적인 걸 많이 다루는 추세이기도 하고, 노래에서 농담도 많이 던지는데 말이다. 십센치(10cm) 같은 경우에는 “음악 하면 월세와 통신비, 커피값, 담뱃값, PC방비, 데이트 비용이 나오는 신세계”를 찾고자 홍대로 왔다고 하지 않았나.
– 나도 고민이다. 진지병이 있어서.

[weiv]: 그렇지만 어딘가 어필할 수 있는 구석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확신이 든다.
– 동감이다. 어디 한번 찾아 볼 생각이다. 20110401 | 이수연 [email protected]

* 위 글은 월간 ‘문화+서울’ 4월호에 실린 인터뷰의 전문(全文)입니다.

관련 사이트
사비나앤드론즈 공식 사이트
http://club.cyworld.com/SAVINANDRO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