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8014047-Untitled-1

 

요즘 나는 카라의 새 앨범을 즐겨 듣는다. 이걸 ‘카라빠 인증’이라고 비꼬아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즐겨 듣는 게 ‘앨범’이라는 걸 주목하면 좋겠다. 나는 카라의 1집과 미니 앨범을 몇 번 듣고 말았다. 일 때문이었다지만 여전히 그 앨범을 듣느라 쓴 돈이 아깝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즐겨 듣는다. 앨범이 좋아서? 당연하다. 왜 좋은지에 대해선 좀 있다 얘기하자.

2집의 제목은 [Revolution]이다. 이걸로 트집 잡고 싶어할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을 돌다니다 보면 실제로 ‘아이돌 주제에 ‘혁명’이라니?’란 식의 비판도 종종 발견한다. 흥미로운 건 이런 ‘트집’이 별로 장사가 안 된다는 점이다. 카라의 팬이 늘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트집’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런 변화가 흥미롭다. 주위에서도 ‘요새 카라 좋지?’란 말을 자주 듣는다. 내 주변인들이 죄다 아이돌 걸 그룹 팬질에 여념이 없어서일까? 역시 아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솔직하게 음악을 듣는다. 자기 취향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다. 함부로 ‘쓰레기’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그들이 좋다면 좋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되새긴다는 얘기다. 카라는 좋다. 안무와 퍼포먼스도 훌륭하고 앨범의 수록곡도 일관된 수준을 유지한다. 물론 여기서 ‘좋다’는 게 음악적으로 세련되고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건 분명히 하자.

솔직히 말해 이 앨범은 클리셰 덩어리다. 멜로디는 관습적이고 스타일은 완고하다. 엉덩이춤(혹은 ‘니콜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란 비명)으로 각인된 “미스터”를 비롯해 신스팝 스타일의 타이틀곡 “Wanna”, 미드 템포의 댄스곡 “마법”과 “몰래몰래”, 그리고 핑클 혹은 베이비복스가 연상되는 비트로 때려대는 “Let It Go”와 카라의 기존 이미지(발랄하고 귀여운 소녀떼)를 재생산하는 “Take A Bow”와 “Aha”까지 이 앨범의 수록곡은 모두 댄스 가요의 전형을 답습한다. 하지만 주류 댄스 가요가 관습적이라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팝이란 원래 관습적이기 때문이다. 그 관습은 견고하다. 그러니까 좋은 팝이란 관습을 깨는 게 아니라 관습을 제대로 재현하는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Revolutiojn]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나 낯설고 새로운 음악에 대해 ‘야호!’라고 외치는 건 평론가다. ‘말할 게 많아서’라고 쓰고 ‘잘난 척할 수 있어서’라고 읽자. 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대중문화의 보편적인 수용자들, 그러니까 내 주변인들 같은 사람들은 귀에 익숙한 걸 제대로 만드는 음악과 창작자를 좋아한다. 토이(유희열)가 그렇고 테디(YG엔터테인먼트)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카라의 새 앨범은 성공적이다.

물론 이 얘기가 “카라 앨범 좋아, 팬클럽 고고싱!”이라는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난 몇 년 간 한국 대중문화 수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어떤 변화에 대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제 아이돌에 대한 트집을 잡는 게 촌스럽게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에 대해서 좋다/나쁘다 가치판단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변화가 일어난 배경과 그게 야기할 다른 어떤 변화들이다. 그게 비평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돌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지지에 대해 ‘기획사의 상품 따위는 비평적으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일갈하는 것보다 그게 더 생산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상징적이지만, 카라(혹은 다른 아이돌 그룹)의 앨범과 시규어 로스(혹은 여타 ‘예술적’인 록 밴드)의 앨범을 동시에 소비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건 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아일랜드나 북유럽 어디쯤의 ‘듣보잡’ 인디밴드를 추천하는 블로거도 카라와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한다. 이게 단지 기획사의 물량공세 때문일까. 아니다. 부분적이지만 주류 아이돌 그룹의 음악적 성과가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장르적 엄격함보다 개인의 솔직한 취향이 더 합리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2009년은 신비하고 놀라운 시대가 된다. 21세기의 음악 비평은 음악의 ‘수준’이 아니라 이런 변화의 근거와 과정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Xao0K5TUD5
그래서 내가 볼 때 2009년 한국 대중문화 전반의 의미있는 변화는 바로 ‘취향에 대한 관대함’이 보편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 변화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도 그렇고 타인의 취향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관대함이 맹목적이지 않다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 아이돌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게 아이돌 산업의 모든 면을 지지하는 건 아니란 얘기다. 아이돌에 대한 취향과 무관하게 아이돌 기획사에 대한 평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뤄진다. 동방신기에 대한 호불호가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이뤄지는 것, 그런 식으로 취향이 작동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결국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태도에 있다. 그건 자신의 취향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보통 이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진행된다. 따라서 나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변화들이 일종의 ‘문화적 똘레랑스’를 실천하는 과정으로 보고 싶다. 이건 정치적인 실천의 과정이기도 하다. 취향이란 게 환경적, 계급적, 지역적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취향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다. 이런 태도 변화를 취향에서 삶으로, 문화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비약해서 확장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과대해석일까. 그럴 수 있다. 오히려 망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태도 변화를 통해 기껏 망상에 지나지 않을 생각을 하고 또 한다. 여전히 세상이 바뀌리라고 기대하고 여전히 사람이 그 중심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일개 아이돌 때문에 야기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게 올해 내가 얻은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카라 혹은 아이돌 음악의 질적 변화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저런 반응을 보고 들으면서 마침내 이 괴상한 생각에 확신을 갖는다. 언젠가 내가 2009년이 흥미로운 해였다고 말하게 된다면 그건 바로 카라 때문일 것이다. 20090818 | 차우진 [email protected]

* [PD저널]에 쓴 원고를 일부 수정하고 보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