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재외 한국인 콘서트 후기 : Connection

한국은 생후 4개월 만에 미국으로 이민 간 아이가 한국을 ‘고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무책임하고 편리한 발상이 태연하게 가능한 나라다. 증명하듯이 이 공연의 홍보 기사는 “한국 혼을 노래하는 동포 뮤지션, 고국 무대에”였다. 이 기사를 보고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이들이 노래하는 것은 ‘한국 혼’이 아니라 어디에도 확고한 자리가 없는 자신들의 초상에 가까울 것이며 혹은 그것조차도 아닌, “그저 한국계 외국 뮤지션의 공연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두어야겠다.

뮤지션은 음악을 할 뿐이고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마이크 박(Mike Park)의 경우 실제로 자신의 불안한 국적과 민족 정체성을 테마로 노래를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함께 등장하는 ‘나인(Nine)’의 음악을 굳이 ‘한국계 일본인 3세’인 다케나리와 일본인 2명이 함께 만든 밴드라고 호명해야 할 이유도, 그런 인식을 가지고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이 날의 공연은 그냥 ‘그런 테마를 빌미로 좋은 뮤지션들을 한국으로 초정해서 공연을 보자’라는 정도가 적합하고 또한 충분하다. 나머지의 인식은 관객들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나는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뮤지션들의 앨범이나 음원도 들어보지 않은 채로 공연에 갔다. 그리고 보았던 인상을 거의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은 ‘별다른 정보 없이 공연을 보러 온 누군가가 이 공연을 어떻게 보았는가’로 보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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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바람에 오프닝을 맡은 ‘3호선 버터플라이’나 ‘사토 유키’의 공연은 제대로 보지 못하였으니 제외하고 말하자. 본공연 첫 번째 타자로 등장한 일본계 나인의 음악은 그 성실함이 대단히 돋보였으며, ‘많은 라이브를 통해 단련된 관록’의 힘이 느껴졌다고 총평할 수 있었다. 한국 인디에서는 보기 드문 꽉차고 성실한 라이브였다. 모든 연주가 밀도있고 정확하고 힘이 있었으며, 기타 톤은 라이브인데도 마치 녹음의 그것을 듣는 듯이 깔끔했다. 이것을 일본인다운 성실함과 깔끔함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음악 스타일은 미국 인디록의 영향을 받은 일본 펑크의 느낌이었다. 가끔씩 스매싱 펌킨스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본 펑크든 스매싱 펌킨스이든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도 익숙한’ 종류의 음악일 수 있고, 결국 ‘일본 밴드의 낯선 음악’이라는 용어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밴드의 연주는 듣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자신들의 음악의 좋은 점을 전달하기 위해 정성들여 노력한’ 흔적이 있었고 되려 그 점이 낯설었다고 해야겠다. 기본적인 부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편곡과 연주는 분명 기분 좋은 것이어서, 관객을 ‘완전히 존중’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기꺼이 호응했고 마지막에서 3곡 정도 전에는 관객들을 일으켜 세우고 함께 놀기 시작했으며 어렵지 않게 흥겨운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만족스럽게 공연을 마무리했다.

무대를 떠나는 이들을 보며 떠올린 것은 ‘…일본의 라이브 클럽에서는 앰프 세팅 등 여러가지를 전부 보조요원이 해준다는데 저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런 게 없어서 직접 하려니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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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박은 혼자서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는데, 미국 인디팝의 느낌에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생후 4개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초상 그 자체를 테마로 노래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my eyes are small, but your eyes are closed”(From Korea) 같은.

마이크 박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는 음악적으로 거의 충분히 전달되었지만 어쿠스틱 기타 하나와 목소리 하나만으로만 공연하는데 있어 언어의 장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쿠스틱으로 미국 인디 풍 기타 코드를 연주하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노래에서 내용의 디테일이 전달되지 않은 것은 장애가 되었다. 이런 경우, 자신의 리스닝이 원망스럽긴 하지만 “영어 못 한다”고 콤플렉스에 젖어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공연의 취지에 맞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마이크 박이 중간중간 넣은 멘트는 적절했고, 자신의 노래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도움을 주는 가이드의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멘트 중에 자신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며 그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더러 “이 바보새끼’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노래는 이러한 기억과 성장의 체험이 엮어져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활동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음악을 통해 미국내 인종정치의 문제에 대해 아시아계의 입장에서 누구보다 뚜렷하게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weiv]의 모 글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 실제로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뚜렷한 부분이 있었다.

마이크 박이 부른 노래의 송라이팅 자체는 솔로 기반이라기보다 밴드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듯 들렸다. 혹은 다른 세션 악기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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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Sanawon)’의 음악은 드럼과 건반의 단촐한 편성으로 연주되었는데, 이 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드럼은 동종업계 종사자가 놀랄 정도로 강하고 안정감 있는 굉장한 퀄리티의 연주를 들려주었고 제니 초이(Jenny Choi)의 건반과 목소리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소울이었다. 헤비메탈을 연상케 하는 드럼에 텐션 가득한 건반과 보컬의 조화는 불안정하면서도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앨범([Tiny Airplane])의 음악을 들어보았을 때는 어느 정도 스탠다드한 토리 에이모스 풍이라고 생각했으나 라이브는 그와 전혀 별개의 사운드를 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한다면 라이브 쪽의 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사나운의 음악은 진솔하고 소탈하며 특정 장르에 귀속된 무드를 잡으려는 시도가 없고, 마찬가지로 손쉽고 멋지게 들리기 위한 편곡도 거의 없었다. 능숙하지만 그다지 가공되지 않은 사운드였다. 그 말은 자신의 음악을 좋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짜임새를 반복’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뜻이다. 굳이 말하자면 하드록 형 실험음악과 토리에이모스 형 건반 보컬송의 결합 같다. 그러나 앨범은 훨씬 인디팝에 가깝게 되어 있다. 아마도 의도적인 절충인 것 같기는 하다.

제니 초이의 목소리는 피해의식의 과대전시도 없었고 “난 항상 어두운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라는 자아도취도 없으며 “내가 너무 중요하고 내 상처가 너무 중요하다”라는 식의 편협함도 없었다. 이 여자는 무슨 일이든 2/3의 절실함과 1/3의 유머를 무기로 헤쳐 나갈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사나운이라는 밴드의 라이브는 다른 뮤지션과 손쉽게 비교되기 어려운 독자성이 있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피가 묻어 있는, 통째로 씹어삼키는 횟감에 가깝다.

최근에 본 중 가장 좋은 공연 중 하나였다. 사나운의 라이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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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초이는 공연 중에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서 부끄럽다는 말을 했다. 마이크 박도 자신의 순서에서 같은 멘트를 했다. 이 멘트가 나올 때마다 부끄러워지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그들을 그렇게 말하게 하느니 차라리 이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제니 초이의 말은 이 모든 것의 자연스러운 해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저한테는 음악이 있고 음악으로 ‘커넥션’ 할 수 있어요. 다행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 이 공연의 취지와 핵심을 충분히 요약해주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인의 ‘타자’에 대한 인식은 복합적인 국적과 민족문제를 다루어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있지 못하다. 그것은 이 공연에 대해서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하나 같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고국을 찾은 한국계 뮤지션들’이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숱한 폭력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민족과 국가주의의 모든 한계를 안고서도 음악은 그 나름의 전달력을 가지고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으며 전달할 것은 전달되고 전달되지 않은 것은 여분의 힘으로 남겨졌다.

공연을 보면서 한국계를 한국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닐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상념에 빠졌다. ‘뿌리가 같다’라는 식의 상투적이고 편리한 인식은 진실보다 오류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계라는 것이 외국인이라는 것과 뭐가 달라?’라는 것도 조금 아쉬운 태도일 터다. 오히려 한국계라는 부분을,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다른 모습’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그들에게 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다. 결국 그런 식으로의 ‘커넥션’이다. 20060519 | 김남훈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