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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키(Yoonkee) – I Worry, Too – 타일뮤직, 2006

 

 

한국에서 나갔다/한국에 들어왔다

2000년 윤키의 데뷔는 충격적이었다(그 충격을 느낀 사람이 아주 소수이긴 했지만). 윤키 음반은 아방가르드한 힙합 혹은 테크노에 가까웠다. 팝 음악에서 일상 생활의 잡음, 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거나 혹은 난삽한 샘플이 짜깁기 되어 있었다. “뭐야, 이거 장난이야?” 혹은 “이건 장난이 아니군”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음반이었던 것이다. 이런 음악형태가 ‘독창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음악에 독창성을 빼면 뭐가 남느냐”라고 하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6년이 지나 나온 윤키의 네번째 앨범 [I Worry, Too]는 보다 노말해졌고, 보다 ‘노래’라고 할 만한 트랙들로 충실하다. 리듬은 비트박스로 연주된 레게 비트로 정해져 있으며 이 그루브를 기반으로 이것저것 자유로운 어쿠스틱 사운드를 배치하고 중얼중얼 읊조리는 보컬을 얹어 넣는다. 그의 앨범 중에 가장 파퓰러하며, 장르 컨셉이 명확하고, 알기 쉬운 정조를 가지고 있다. 이 앨범에서 잘 드러나는 바, 생각해 보면 윤키 앨범의 핵심은 사실 사운드라기 보다, (이 사운드가 너무 생경하게 들려서 누구나 거기에 붙들렸던 것 같지만) 아방가르드한 일상 소품과 비트에 근거한 ‘국제주의적 정조’가 아닐까 싶다. 그루브야 말로 가장 국제주의적인 음악 언어이고, 아방가르드한 일상 소품의 배치는 보편적으로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사운드 약호다. 이런 특징으로 보면 일본 시부야계의 국제주의적 모양새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떠돌이 한국인이고 로우하게 발현한 한국산 시부야 혈통이다.

이것은 윤키 만은 아니다. ‘아마츄어 증폭기’가 피쉬만즈(Fishmans) 등을 자신의 페이보릿으로 꼽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0년 들어 한국 인디에서 발현된 가장 골수적인 섹터는 그것이 ‘국적과 민족’을 완전히 넘어서서 그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1990년대의 인디밴드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서구선망형’ 사운드를 넘어서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일국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인디에 출현한 몇 밴드들은 서구선망을 갖지 않음으로써(아예 “그런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라는 사고방식), 동시에 ‘완성도’라는 강박에 얽메이지 않는다(우리가 ‘완성도’라는 개념에서 서구 근대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한국적이면서 이국적인 정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지 않는’ 사운드이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고 노래하던 윤도현 밴드가 “대한민국”을 외치며 주류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을 생각해보라. 나는 이 골수성이 2000년대 한국 인디의 가장 소중한 성취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윤키는 이 흐름의 선도주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곤충스님 윤키’ – ‘다방밴드’ – ‘아마츄어 증폭기’를 세 축으로 몇 밴드를 더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몽구스 1집). 그리고 이것과, 이상은이 ‘공무도하가’에서 내놓은 ‘코스모폴리탄’적 감각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I Worry, Too]는 일부러 서투르게 노래하고 연주하기 보다, 연주의 느낌을 내기 위해 서툴러지는 것에 개의치 않는 사운드를 담고 있다. 이 앨범을 듣기 위해서는 이런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요컨데 ‘음악은 장인정신이다’ – 라는 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좀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개의치 않을 수 있다면 이 앨범은 레게송으로 이루어진 오브제로 들릴 것이다. 오브제는 국외자이며 동시에 국적으로는 한국인인 누군가의 무덤덤한 일기를 전시해놓고 있다. 데뷔 앨범 [관광수월래]가 그랬듯이 이 앨범도 서울과 런던, 기타 등등을 오가며 느낀 자신의 일상적 감상을 특정한 정조로 이끌어나간다. 그것은 지역적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자의 애수와 낙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방밴드 등의 앨범을 듣고 역시 비슷한 정서를 포착했다면 이것이 한국에서 “‘국적 경계자’의 정조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공유점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시도해 볼 만도 할 것이다. 성기완은 한국가요의 전통적 핵심이 ‘애수의 정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밴드들은 민족성과 일국성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기묘한 방식으로 이 전통을 이어간다. (그리고 ‘대중가요’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공을 차는 발에 맞추어 하나 같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시대다. 그런데 몇몇은 그런 대목에서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인디가 시부야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들이 가지는 것은 무국적성이라기 보다 국제주의적 국적성이다. 이들의 음악은 민족주의와 다른 맥락으로, 황인종 내에서 구현한 인종적 혼종성을 상상하는 행위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하에 전부가 황인종의 똑같은 혈통을 자랑하는 사회보다, 몇몇은 흑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몇몇은 동남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편이 좋고 몇몇은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편이 좋다. 내가 고교 시절 슬래쉬(Slash)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아아, 그러고보면 단순히 “자메이칸처럼 레게를 연주해보는 것이 소원”인 드럼 연주자는 생각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음악이 우리에게 자극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상상력이고 아마 그것은 음악 만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상상력일 것이다. 당신은 춤을 추면서 당신이 흑인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결국 음악의 힘은 우리가 그것을 연주하고 들으면서 ‘무엇인가 되게 해주는’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다. [I Worry, Too]는 윤키의 디스코그라피 중에서 그루브를 기반으로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상상을 전해준다. 이러한 상상력이 일상화되기 전에는 한국에 진정한 의미에서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축제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음반은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무엇”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줄 여지를 준다. [I Worry, Too]는 대단한 음반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지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앨범이다. 20060330 | 김남훈 [email protected]

8/10

수록곡
1. London – Seoul
2. I Heal You, You Heal Me
3. 싸울 필요가 없네 We Understood Each Other
4. Sometimes You Can Cry
5. 지구는 울고 있다 Earth Is Crying
6. 서우울 Seoul City (Feat. 각나그네)
7. From West To East (Feat. 김반장, 정상권, 용)
8. 길을 가다 Walking On The Street Of Seoul
9. Child Smiles (Feat. Naoyuki Uch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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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윤키 홈페이지
http://yoonkee.com
타일 뮤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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