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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풀 하우스(Full House)]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평균 타율은 예나 지금이나 2할이다. 그러나 1941년을 마지막으로,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4할 타자는 없다. 어째서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

이 글에서 필요한 내용만 뽑아내자면,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만약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표준정규분포곡선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인간의 신체적 능력에는 생물학적 한계, 즉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예전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평균 타율이 2할이었을 때, 이 2할이라는 평균은 생물학적 한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이때 정규분포곡선은 좌우 대칭이 비슷한 언덕 모양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타자들의 경기능력(신체적 능력)은 향상되었고, 야구의 규칙들은 이에 맞춰 타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했다(예를 들면 넓어진 스트라이크 존 같은. 물론 투수를 비롯한 수비진들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타자들의 평균 타율은 예나 지금이나 2할이지만, 오늘날의 2할은 이른바 ‘넘을 수 없는 벽’에 바싹 붙어 있다. 즉 정규분포곡선의 모양이 오른쪽으로 치우친, 왼쪽은 완만하게 상승하고 오른쪽은 급격하게 떨어진 낭떠러지 형태가 된 것이다. 4할대 타율이란 평균의 오른쪽에 있는 타율이다. 예전에는 2할과 생물학적 한계 사이의 공간이 넓었다. 4할 타자가 나오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그러나 오늘날 2할과 생물학적 한계 사이의 공간은 좁다. 4할 타자가 나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 늘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보고 싶다. 음악은 스포츠와 다르다.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비상한 판단력 같은 요인들이 성공적인 음악 작업의 여부를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그렇지만 그런 요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투어, 녹음, 기획 등의 과정에서는 이런 요소들의 중요성이 정말 크다). 우리는 헤로인에 찌든, 자기중심적이고 철없고 연약한 인간들이 만든 감동적인 음악을 즐겨 듣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근의 음악 중 광기와 정념에 기댄(것처럼 들리는) 음악을 얼마나 떠올릴 수 있는가? 도어스(The Doors)의 싸이키델릭과 라디오헤드(Radiohead)나 LCD 사운드시스템(LCD Soundsystem)의 싸이키델릭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다. 전자는 제어되지 않은 광기를 내뿜는 것처럼 들린다(혹은 그런 음악이라고 홍보된다). 후자는 예민하고 감각적인 인간의 엄격한 자기 제어를 거쳐 나온 소리 같다. 무아지경도 있고 반복도 있지만 불필요한 부분이나 패턴을 거역하는 부분은 없다. 그것은 자신이 벗어나도 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바로 그 부분에서만큼은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만약 우리가 음악의 물질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즉 음악이 만들어지는 물질적인 조건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오늘날의 대중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팻 분의 시대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불과 10∼20년 전에는 메이저 음반사만이 만들 수 있었던 사운드를 저렴한 장비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여간한 뮤지션들을 제외한다면 작곡된 결과물 자체에 흠을 잡기란 어렵다. 샘플 시디는 넘쳐난다(표절과 인용의 경계는 늘 애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나온 음반, 특히 이른바 ‘음악성 있는’ 가수들의 신보에 대한 리뷰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쓰여진다. ‘사운드도 잘 뽑았고 노래도 잘 하고 곡도 괜찮다. 그러나…’ 이 때 이 리뷰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러나’다. 이 ‘그러나’에는 어른의 논리에 반박은 못하지만 여전히 뭔가 억울해하는 어린 아이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 담겨 있다. 훌륭한 기술적 만듦새에 미치지 못하는 음악적인 감흥에 대한 아쉬움과 좋은 시절에 대한 향수 어린 눈길. 변변한 숙박 시설 하나 없이 기차 화물칸에서 자면서 원정 경기를 해도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같은 괴물을 탄생시켰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초호화 호텔에서 경락 마사지를 받으면서 3할조차 제대로 따내지 못하는 특급 선수들에 대한 실망. 그러나 아무리 이런 감정에 공감한다 해도, 이것이 어린 아이의 감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리마스터링된 리이슈 음반을 듣는 대신,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런 몽상에 빠져 있다. 만약 오늘날 4할 타율의 음악인들(비틀스, 밥 딜런, 섹스 피스톨스, 등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음악의 창조성이 고갈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음악들이 발휘할 수 있는 물질적 능력의 평균치가 한계라 부를 수 있는 수준에 근접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몽상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다. 극복 불가능한 생물학적 한계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한계를 표시하는 어렴풋한 막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요 라 텡고의 기타 노이즈처럼 희끄무레한 그런 막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음악이 발견보다는 신선함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로큰롤과 같은 음악은 애초부터 창조했다기보다는 뒤섞으면서 시작한 음악이다. 그것은 늘 주변의 음악적 질료를 흡수하며 신선함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대중음악에서 멋지게 들리는 음악은 음악적 질료들의 신선한 배치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혁신적인 레코딩 장비와 기술, 녹음 과정의 번쩍이는 아이디어, 기발한 실수, 등등. 이러한 것들이 같은 노래를 전혀 다르게 들리게 만들 수도 있다.

동시에, 이것은 반드시 수많은 자본이 투입된 음악이 멋지게 들린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페이브먼트, 섹스 피스톨스, 아프리카 밤바타). 설사 그럴 가능성이 큰 편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로큰롤이란 음악을 위해, 힙합이란 음악을 위해,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와 아름답고 달콤한 댄스 팝을 위해 바친 시간과 노력과 그것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이다. 즉 문제는 역사와 축적이다. 평균치가 높아졌다는 것은 음악이 진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이 그만큼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대답을 얻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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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에서 ‘높은 수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음악이 진보했다는 식으로 글을 썼다. 이제 이 말을 좀 더 정확히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높은 수준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조각들이 높이 쌓였다고. 이것은 발전도 진보도 아닌, 진화다. 진화가 경험의 축적이고, 그 축적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특정한 상황에 반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진화란 일직선으로 뻗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튀어나오는 어떤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시대에 너바나가 튀어나왔던 것처럼.

즉 진화는 시간과 관계된 개념이지 싸구려 진보주의와 야합하는 개념이 아니다. 음악이 진보했거나 퇴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인정을 하건 하지 않건, 음악을 돈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다. 반응-이윤이 나오면 진보, 나오지 않으면 퇴보. 음악의 진보와 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만약 음악이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것이라면, 물질적 능력의 경험이 한껏 축적된 오늘날의 음악은 3류 댄스 팝 음반이라 해도 비틀스의 음반보다 위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아바의 음악이 지닌 매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끊임없이 착취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리멸렬한 현재의 음악에 환멸을 느끼기 전에, 진화와 진보를 섬세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점은 창조는 진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화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이 빠진 것처럼 들리는 유명 아티스트의 화제작들 앞에서,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정말 뭔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없었던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이런 몽상의 끝에 이르게 되면, 오늘날 음악의 창조력은 고갈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우리 손을 빠져나간다. 왜냐하면 창조력은 고갈되거나 충만해지거나, 둘 중 어느 상태에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란 단지 드러날 때만 있는 그런 것이다. 나는 조직적이고 잘 짜여졌지만 큰 감흥을 주지 않는 음악이 판을 치는 현 상황에서 그런 음악들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창조력을 성급한 삼류 진보주의자들의 예단(요즘 음악이 예전같지 않다는 불평으로 드러나는)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분명 막이 있지만 그것은 반투과성이다. 뭔가는 분명히 그 밖으로 나간다. 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20051205 | 최민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