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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전쯤 그동안 여기저기서 모았던 아시아 각국의 젊은 밴드들의 음반에서 음원을 추출해서 CD 1장에 담아 ‘아시안 모던 록(Asian Modern Rock)’이라는 타이틀로 젊은 후배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있다. 태국의 모던 독(Modern Dog), 필리핀의 이레이저헤즈(The Eraserheads)와 뱀부(Bamboo), 중국(본토)의 와 푸슈(朴樹: Pu Shu) 등으로 내가 찾아본 정보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각국에서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는 밴드들이다.

그런데 나눠 준 지 열흘 이상이 지났지만, 아직껏 아무에게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하다 못해 “들어봤더니 별로에요. 역시 팝/록은 영국이나 미국 말고는 들을 게 없어요”라는 반응이라도 나오면 참고라도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 CD는 ‘언젠가 들어 봐야지’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머리 속의 리스닝 리스트의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일단 가사의 언어가 생경할 뿐더러(물론 필리핀 밴드의 경우 영어로 된 가사가 있다) 사운드의 품질도 ‘글로벌 스탠더드’ 이상이기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하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사운드가 한국산 음반보다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왜 나는 요즘 아시아의 팝과 록을 뒤지고 다니고 있을까. 그것도 일본,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처럼 나름대로 쌔끈한 사운드가 나올 법한 지역의 음악도 아니고, 중국,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등 ‘한국보다 후진국’의 음악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일까. 아마도 음악 애호가들은 “음악을 음악 자체로 듣지 음악외적 관심으로 듣느냐”고 핀잔을 줄 것 같다. 또한 “자기가 10년전쯤 영미권 음악을 소개한 장본인이면서 이제 와서 웬 ‘월드’고 ‘아시아’냐”라고 투덜댈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비난을 일단 논외로 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직관적 표현일 뿐이지만 ‘아시아’의 음악은 ‘구린’ 느낌, 혹은 ‘뽕끼’가 있다. 영미권을 비롯한 서양 대중음악에 비해서 그럴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와 비해서도 그렇다. 노래의 창법에, 악기의 주법에 묘하게 스며들어 있는 이 기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예 유구한 토착 대중음악이면 차라리 ‘로컬 플레이버’가 느껴지므로 차라리 낫다. 하지만 록이나 힙합처럼 ‘서양’에 뿌리를 두고 갈래를 친 음악을 한답시고 하는데 뽕끼가 느껴지면 그건 참 난감하다. 요즘은 ‘왜색’조차 찾기 힘든 J-pop도 1980년대만 해도 ‘뽕끼’가 사라지지 않았다. ‘빠다끼’를 내고 싶어도 그걸 방해하는 이 뽕끼의 기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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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내가 공감을 얻고자 후배들에게 나누어준 음악들은 ‘뽕끼’가 적잖이 사라진 음악들이다. 아시아 각국의 음악산업들이 탈취제산업과 제휴를 한 건지 아닌지까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분명 1990년대 이후 이런 변화가 눈에 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런 쌔끈한 방향으로의 변화가 음악 매체의 변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어렵지 않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음악 매체의 지배적 형식이었던 카세트 테이프는 사라지고 CD(및 그 변종들: VCD, DVD)가 정착한 것 같다. 이제는 아시아 각국에서 길거리에서도 CD를 팔고, 온라인 CD 샵도 생기고, 데이타베이스 비슷한 것도 만들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매체가 CD로 표준화되는 현상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산물인 셈이다(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도 음악을 듣는 주요 매체가 CD나 DVD가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길게 잡아도 10년이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7~8년 전부터일 것이다). 음반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음반 레이블이 EMI, 소니, BMG, 워너 등의 다국적 음악기업의 것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고, 자료를 뒤지면 이들 다국적기업의 현지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자료를 더 뒤지면 아시아 각국에서 방송 등 미디어의 탈규제가 일어났음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제 아시아 각국의 대중음악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 생산되고, 글로벌(적어도 ‘리저널’)하게 배급되고 있다. 나처럼 외국에 자주 나가지 않는 사람도 여기에 앉아서 음반을 어렵지 않게 구하고 “구한 음반들로 뭘 해 볼까…”라고 궁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없)을까?

그런데 무엇을 할까 궁리하기 이전에 이상한 심보가 작동한다. 막상 아시아의 대중음악에서 ‘뽕끼'(아시아적 정서?)가 사라지는 현상을 접하니 무언가 허전하다.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토록 뽕끼를 탈취하려고 애쓰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도대체 무슨 심사일까. 글로벌리즘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토착주의에 대한 열망인가. 그러니 이건 그리 쌈빡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될 것 같다.

“그래서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하면서 글을 마쳐야 할 텐데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좋게 본다면 이제 ‘팝’은 이제 ‘(앵글로)아메리카’나 ‘서양’이라는 본래의 영토를 벗어나 지구적으로 산포되어 있다. 어떤 유식한 개념을 동원하면 ‘탈영토화’되고 있고, 싫든 좋든 이것이 새로운 음악적 실천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이 되고 있다. 각국의 나라를 앞에 붙인 조어들, 예를 들어 칸토팝, 만다린 팝, 제이팝, 타이팝, 인디팝, 케이팝 등이 상용화되는 현상이 이를 잘 나타내 주는 현상일 것이다. 그전에는 이런 조어가 없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때는 ‘팝’은 기본적으로 서양 음악이었고, ‘우리’ 음악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다소 모순적이다. 아시아 각국의 음악에서 ‘지역적 냄새(local flavor)’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향취든, 악취든 냄새는 모두 사라진 무취성(無臭性)의 미학이 아시아권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물론 무취성이라는 멋진 표현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한 일본 학자가 일본 대중문화의 아시아 진출을 논한 책에서 택한 용어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와부치 고이치, 히라타 유키에·전오경 역(2004), [아시아를 잇는 대중문화: 일본, 그 초국가적 욕망], 또하나의 문화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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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취성 음악이 아시아 팝의 대안이라고 말해버리고 끝내면 될까. 그렇지만 여기서 다시 망설이게 된다. 가사의 언어에 따르는 음악 미학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나름의 음악적 유산에 따르는 감성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정치·경제·문화적 컨텍스트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도쿄와 서울과 베이징과 타이페이와 방콕의 도심의 밤거리에 몰려드는 젊은애들의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하나의 분모로 통분할 수 없는 차이가 관찰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때 떠오르는 몇몇 단어가 있다. 나 역시 영미의 문화적 패권에 젖어 있던 사람에 속하기 때문에 서양의 문헌에서 읽은 단어들이다. 한때 브라이언 이노인가 케빈 쉴즈인가, 혹은 이들의 음악을 평했던 사이먼 레이놀스인가 했던 ‘향기를 머금은 안개(perfumed fog)’라든가 ‘미아스마(miasma)’라는 단어다. 그래 향취도, 악취도 아닌 어떤 독취(毒臭)가 없어서 허전한가보다. 그건 서양 팝이든, 동양 팝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걸 발견해서 느끼고 또 공감하려면 ‘음반’을 구해서 돌려 듣는 것만 가지고는 힘든 것 같다. 무책임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 될 것 같다. 20041210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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