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민속음악과 예술음악

그리스 음악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나이든 ‘팝송 팬’이라면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라고 대답할 것이고, 1960~70년대의 록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은 반젤리스(Vangelis)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족에 지나지 않지만 나나 무스꾸리는 이미 ‘한국 가요처럼 들리는’ “하얀 손수건”을 부른 인물이고, 반젤리스는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를 이끌고 “Rain And Tears”같은 국제적 히트곡을 남긴 뒤 1980년대에는 전자음악가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프랑스의 ‘샹송 가수’이자 ‘뜨루바도르(음유시인)’인 조르쥬 무스타키(Gerorges Moustaki)도 그리스 태생이며 그의 음악에 ‘지중해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그리스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누구?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가네”라는 뜻의 “To Treno”를 작곡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테오도라키스의 곡을 많이 부른, ‘지중해의 조운 바에즈’ 마리아 파란토우리(Maria Farantouri)의 이름도 ‘포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이들의 이름과 더불어 마노스 하치다키스(Manos Hatzidakis)나 지아니스 마르코풀루스(Giannico Markopoulos)의 이름까지 안다면 그리스 음악에 대해 뭔가 좀 아는 사람일 것이다.

테오도라키스와 하치다키스같은 음악을 ‘엔테흐노(enteknno)’ 음악이라고 부른다.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예술적(artistic)’ 음악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들은 클래식 음악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예술’은 서양음악의 어법과 그리스의 음악적 전통을 융합시키고, 나아가 그리스의 풍부한 시적 전통을 음악에 융합시켰다. 그래서 그리스의 ‘순수 음악’은 서양 음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여타 나라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 점에서 테오도라키스와 하치다키스 모두 렘베티카(Rembetika)의 팬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렘베티카(Rembetika). 지금은 그리스를 대표하는 음악이지만 박해받은 역사를 가진 이 음악이야말로 가장 그리스적인 음악이다. 렘베티가가 종종 블루스와 비유되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일까.

렘베티카 소사(小史)

렘베티카가 탄생한 것은 20세기 초라고 한다. 그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속음악이 존재했고, 그리스 내륙의 민속음악은 디모티코(Dimotiko)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리스 내륙도 그렇거니와 수많은 섬들에도 고유의 민속음악이 존재했다. 이를 일별하기는 힘들지만 세 줄이 현악기인 리라(lyra), 우드(oud)와 유사한 라오우토(laouto), 클라리노(klarino) 등이 그리스의 악기들이다. 물론 부주키(bouzouki)와 바글라마스(baglamas)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네크가 길고 프렛이 달린 이 악기들은 20세기 이후 그리스를 대표하는 악기가 되었다. 비슷하게 생긴 사즈(saz)가 터키를 대표하는 악기인 것처럼…

렘베티카는 20세기 초 음악 카페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렘베티카가 결정적으로 전기를 맞은 것은 1919년부터 3년 간 전개된 그리스와 터키와의 전쟁이다. 전쟁 이후 ‘인구교환’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그리스 영토로 ‘아시아 소수자(Asia Minor)’가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아테네나 테살로니키같은 도시의 빈민촌에서 거주했는데 그 결과 렘베티카 특유의 무드가 형성되었다. 렘베티카의 가사에 삶의 고통과 과절, 술과 약물의 복용, 경찰의 탄압 등이 등장하는 것은 이들 ‘아시아 마이너’의 지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마초와 비슷한 하쉬쉬(hashish)라는 약물이 렘베티카 음악에는 필수적(?)이었다. 렘베티가를 왜 블루스와 비유하는지는 알 수 있는 사연들이다. 또한 렘베티카가 ‘유럽’ 음악보다는 ‘동양’ 음악처럼 들리는 이유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렘베티카는 1930년대 황금기를 맞이했고, 마르코스 밤바카리스(Marcos Vamvakaris)와 아르테미스 델리아스(Artemis Delias)라는 작곡가이자 부주키 연주인이 활약한 게 이 때 쯤이다. 물론 전설적 인물들이다. 불행히도 그 뒤로 렘베티카는 핍박의 세월을 보냈다. 1936년 메탁사스(Metazas)의 독재하에서는 부주키를 가지고 있는 일도 터부시되었고 유명한 렘베티카 음악인이 투옥되는 일도 있었다. 우파 독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좌파들도 ‘데카당트’하다는 이유로 렘베티카를 경원시했다.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의 지배, 그리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내전은 그리스 전체의 문화 발전을 억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으며 1967년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도 문화적 암흑을 안겨다 주었다.

렘베티카가 리바이벌을 맞이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군사정권 치하에서 자라난 대학생들이 금단의 열매를 찾듯이 렘베티카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974년 군사정권이 물러난 뒤 렘베티카의 본격적 리바이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전쟁 이전의 1930년대의 음악적 분위기를 재현하려는 분위기가 그리스의 음악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런 ‘복고’의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라이코(Laiko) 그리고 죠르쥬 달라라스

라이코는 앞서 언급한 엔테흐노(entekhno)와 대조적인 용어다. 즉, 엔테흐노가 예술 음악(순수 음악)이라면 라이코는 대중 음악, 즉 ‘팝’을 말한다. 팝이라면 이제 더 이상 음지에 서식하는 문화가 아니라 양지의 대중문화라는 이야기다. 맞다. 1983년에 두 번에 걸쳐 80,000명의 청중을 모은 공연을 한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요르고스 달라라스(Yorgos Dalalras)이고, 그가 ‘라이코의 제왕’이다. 그의 국제용 이름은 조르쥬 달라라스(Georges Dalaras)다. 그는 20년간 “동지중해 지역을 강타한 대중음악 중에서 가장 거대한 현상”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조르쥬 달라라스는 일찌감치 음악인의 길을 들어선 유형에 속한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아버지인 루카스 엔타랄라스(Loukas Ntaralas)가 유명한 렘베티카 음악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5살 되던 해인 1965년에 아버지의 음반에서 레코딩 데뷔를 한 그는 1968년 첫 솔로 앨범 [Expectations]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직업적 음악인의 경력을 밟았다. 그 결과는 약 30년 동안 50종에 가까운 음반의 발매와 700만장의 판매고로 나타났다. 그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같은 현대 그리스 음악의 거장들의 음악, 그리스의 민속음악, 렘베티카(rembetika)와 스미르네이코(smirneiko)라고 불리는 ‘아시아계 소수민족’이 가져온 음악들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했다. 물론 10대 시절 비틀스, 롤링 스톤스, 조운 바에즈, 밥 딜런 등의 국제적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이 모든 것이 내게 영향을 미쳤고 한 아이에게 불가항력적인 감정을 야기했다. 그 아이는 그가 태생적으로 음악인이라고 느낀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나는 뒤에 이 모든 영향들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영향을 나의 음악적 방향으로 변형시키고자 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 결과 그의 음악은 유럽과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점이지대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반영하듯 ‘내셔널’하면서도 ‘트랜스내셔널’한 것이 되었다.

서구의 악기인 기타(guitar)와 (동)남구 악기인 부주키가 함께 연주되면서 현대적으로 프로듀싱된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자로부터 끓어올리는 듯한 그의 신실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달라라스의 음악은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달라라스의 라이코는 렘베티카를 ‘버전 업’시켜며 젊은 세대에게도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94년 신축된 아테네 콘서트 홀에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리스 음악의 역사를 추적하는 다섯 차례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 공연은 무대에 오른 인물이 모두 225명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객석에서 박수를 친 인물 중에는 ‘정치 영화’로 저명한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bras)도 앉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의 몇 차례에 걸친 공작도 그의 음악에 대한 신용을 더했는데,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시인 오디세아스 엘리티스(Osysseas Elytis)의 시에 음악을 붙인 [Axin Esti](1988)는 국민음악의 거장의 작품에 신예 음악인이 참여한 명작으로 꼽힌다.

달라라스는 국민적 음악인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 혹은 범(凡)유럽적 음악인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 알 디 메올라(Al Di Meola)와 파코 델 루치아(Paco del Lucia)같은 플라멩꼬 기타 거장들과 함께 ‘라틴’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고, 2001년에는 보스니아 출신의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와 프로젝트 앨범 [Thessaloniki Giannena Me Dio Papoutsia Panina (Yannena with Two Canvas Shoes)]를 발매했다. 1980년대 이후 그리스 밖에서 250여회의 공연을 가진 것도 ‘국제적 음악인’이 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르쥬 달라라스 ‘이후’ 등장하는 아티스트들은 뉴 라이코(new laiko)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라이코, 나아가 렘베티카를 속류화시켰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음악적 전통이 현대화되고 있다는 점은 변함없어 보인다. 달라라스의 표현처럼 “그리스는 음악과 노래가 민중의 오래된 표현수단인 나라”이니까…20040821 | 신현준 [email protected]

* 이 글은 [Vox](2003년 5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앨범 소개>

Mikis Theodorakis [All Time Greatest Hits] (Sony CCK-7789, 1986)
그리스 음악의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베스트’ 음반이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세계 순회공연에서 연주했던 18곡을 담고 있다. “To Treno(열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를 포함해서 주옥같은 레퍼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라는 현대 대중음악의 기악편성에 부주키와 사즈같은 ‘민속’ 악기들, 거기에 오보에, 플루트 등이 추가되어 화려하지만 번드르르하지 않은 연주를 들려준다. 마리아 파란토우리 등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한 가수들의 면면도 주목할 만하다.

Thanasis Moraitis [Blood Wedding / Detached II] (FM, 2002)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의 두 작품을 타나시스 모라이티스(Thanasis Moraitis)가 1985년에 연주한 음반이다. [Blood Wedding]의 경우 본래는 스페인의 작가 페데리코 가르씨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의 희곡을 니코스 가초스(Nicos Gatsos)가 그리스어로 번안하여 개작하였고, 그와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협동작업에 의해 1948년 초연되었다. 타나시스 모라이티스가 이끄는 부쿠라나 퀸텟(클래식 기타, 더블 베이스, 바이올린첼로, 오보에, 플루트)은 고전음악의 향기에 대중음악의 서정을 섞은 정갈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엔테흐노 음악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는 음반.

Georges Dalaras [A Portrait] (Hemispher 7243 8 59597 2 1, 1998)
EMI 산하의 월드 뮤직 전문 레이블 헤미스피어에서 발매한 요르고스 달라라스의 대표곡을 모은 음반이다. ‘그리스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가슴에서 긁어내는’ 창법은 처음 듣는 이에게도 인상적일 것이다. 노래 뿐만 아니라 세심한 편곡과 안정된 연주도 인상적이고, 편집 음반답지 않게 앨범으로서의 일관성도 높은 편이다. 플라멩꼬 기타리스트 파코 델 루치아가 협엽한 “Manouella”도 수록되어 있다.

Vassilis Saleas [Fasma] (FM 1253, 2002)
클라리노(클라리넷) 연주자 바실리스 살레아스의 ‘뉴 에이지풍’ 음악. 반젤리스의 곡을 연주한 것으로 유명해진 경력답게 반젤리스의 곡을 포함한 곡들을 자신의 클라리넷 연주에 담고 있다. 어쿠스틱 악기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조화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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