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과 타인을 배척하는 것은 동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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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과 베이비복스 사이에 벌어졌던 설전은 이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것 같다. 베이비복스가 1990년대 힙합의 주류 진입을 이끌어 냈던 (1996년 사망한) 투팍(2Pac)의 곡 “Xcstacy”를 자신들의 7집 음반 타이틀곡 “Ride West”에 샘플링하여 삽입한데서 비롯된 이 소동은, 이하늘의 ‘미아리복스’ 발언과 베이비복스의 소속사 [DR 뮤직]의 조폭 투입 설까지 가세하며 한층 선정적인 자극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단연 이번 소동에서 화제를 끈 것은 이하늘의 여성비하적인 발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하늘의 폭력적인 언어사용에 대해 지적을 하면서도 ‘그래도 이하늘은 순수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도 재미있는 점이었다. 이 소동에 대해 얘기하는 지면에서 그의 단어선택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조금은 편파적인 옹호를 보인) 반응에 대해 논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테지만, 이 글에서는 ‘미아리복스’라는 표현을 제하고 음악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이하늘이 베이비복스가 투팍의 음원을 사용한데 대해 격분하는 것은 그것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져서가 아니다(음원의 사용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베이비복스는 누차 강조했다). 문제는 한갓 ‘싸구려 댄스 가수’에 지나지 않는 베이비복스가 힙합계의 전설 투팍의 음원을 ‘감히’ 사용함으로써 고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점에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하늘의 입장에서는 베이비복스가 ‘도의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추측에 근거를 더해주는 것은 (초대하지 않았는데 파티장에 얼굴을 내민 격일) 김진표의 ‘이하늘 옹호글’에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이 글에서 김진표는 ‘나라면 투팍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라도 감히 그의 곡을 가져다 쓰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약간 어이가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김진표의 이러한 발언(그리고 이에 대한 ‘역시 김진표’라는 칭찬 일색의 반응)은 이번 소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이번 소동은 이를테면 ‘일반 가요’와 ‘작가주의 대중음악’ 사이의 충돌이 선정적인 형태로 가시화된 것이다. 대중음악 씬에서는 “우리는 작가다”라고 생각하는 뮤지션들이 상당수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반적인 소비음악’과 다른 ‘의식’을 가진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러한 ‘작가’들을 영웅시하는 팬들은 이러한 위상을 강화한다. 주로 하드록이나 헤비 메틀에 해당하는 록 음악과 힙합에서 이러한 경향은 아주 두드러진다.

비슷한 사례로 필자는 얼마 전 음악잡지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은 일이 있다. “클럽에는 코드 세 개만 알고 어느 정도 자기 소리를 내지를 줄만 알면 우리도 공연할 수 있다는 식의 록밴드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진정한 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단련된 스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사운드와 진지한 메시지로 우리를 깨어나게 해 줄 진정한 록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런 사고방식은 상당히 확고한 전제를 깔고 있는데, “그 무엇은 진정하고 그 무엇은 진정하지 않다”, “그 무엇은 혁신적이고 그 무엇은 혁신적이지 않다”, “그 무엇은 영웅시 될 만하고 그 무엇은 영웅시 될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가 문제삼으려는 것은 이러한 전제 자체가 아니라 전제에 대한 과도하리 만큼의 집착이다. 이 전제는 그 말을 하는 자신은 진정, 혁신, 영웅적인 편에 서 있다는 점을 그렇지 않은 타인을 공격함으로서 확인 받기 위한 집착에 가깝기 때문이다.

취향을 절대화하기 / 장르를 절대화하기

자신의 취향을 절대화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헤비 메틀 매니아도, 힙합 매니아도, 립싱크 가수의 팬도, 자신의 영웅이 왜 그렇게 절대적인지 설명하려고 든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 그게 뭐 어때서 말인가.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의 취향이 왜 옳은가를 설명할 줄 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설명될 수 있는 음악만을 좋아한다. 그것이 자신이 ‘의식 있는 누군가’라는 자존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취향은 무장되어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취향을 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광경이 항상 벌어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이 숭앙시하는 음악장르에 대해서 오류가 섞인 발언을 할 때, 혹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와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말할 때, ‘무장한 취향’은 그만 참지를 못한다. 그리고 이길 자신도 있고. 그래서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누가 좀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어때서? 베이비복스가 투팍을 “단지 그 부분 음악이 좋아서” 가져다 쓰면 어때서? 자신의 음악 취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모두가 그것을 존중하고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발상은 오만하다. 그 사람 말이 옳은지 그른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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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는 문희준과 팬들과 록 팬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문희준의 록은 가짜 록이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록은 진짜 록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희준의 음악은, 무장한 사람이 자신이 ‘의식있는 누군가’라는 자존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컷 앤 페이스트고 잘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느닷없는데, 그 느닷없음을 근거로 그를 천재라고 해 주기에는 너무 감성적으로 진부하다. 하지만 문희준의 록이 록 팬들의 록에 대한 환상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록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팬들과 연대한 뮤지션의 자아도취 문화는 록에서 가장 들끓는 무드였다. 지금에 와서 이전에 누가 더 솔로를 빨리 치나를 자랑하던 그 분위기를 돌아보라. 그 때에 그렇게 절대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던 가치에 절대성이 있었나? 많은 음악 감상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한 음악 장르의 다른 음악 장르에 대한 ‘본래적인 우월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클래식, 그건 댄스가요보다 우월함에 틀림없어!). 그리고 하나의 장르를 핵심적으로 규정짓는 ‘태도’나 ‘의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록은 청년의 저항 음악이야!).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위와 같은 경우로) 비난을 받는 가수들이 ‘∼∼를 하면 작품성 있어 보이겠지’라는 식으로 장르를 착취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의 이면에는 “왜 너희의 얄팍한 상술로 인해 우리가 즐기는 ‘작가주의 대중예술’이 난도질을 당해야 하느냐”는 억하심정 또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장(편향)된 취향’이 정당성을 얻은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일 수도 있다. 록, 혹은 힙합에 대한 ‘작가주의적 강박’이 없었다면(혹은 지금보다 많이 유연했다면) 장르의 권위에 편승하려는 문희준이나 베이비복스의 얼치기 음악이 설 자리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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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된 취향이 음악발전을 저해한다

무장된 취향은 음악적으로도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무장된 취향은 어떤 음악 장르의 역사를 전설화하는데(니가 투팍님을 알어?!) 그것은 장르를 박제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힙합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강령으로 이어진다(즉 베이비복스는 힙합이 아니다). 강령은 장르의 자아도취와 연결된다. “힙합, 그것은 역시 훌륭한 음악인 것이다!”

무장된 취향이 일으키는 장르에 대한 강령화는 장르라는 것이 어차피 편리한 구분짓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한다. 예술에 대해서 이토록 강령적인 사고를 즐겨 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함을 필연적으로 저해한다. 우리에게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도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도 메탈리카(Metallica)도 필요하지만, 아마도 한국에서 데이빗 보위 같은 인물이 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정 장르에 대한 애착이 다른 장르의 유입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표현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게다가 장르적 배타성의 근거가 이번 소동의 원인이 된 ‘진정성’과 같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모호성에 근거한다는 점은 더욱 문제가 된다. 사실 모호한 것이야말로 신성화시키기에 적합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우리는 ‘진정성’이나 ‘작가주의’와 같은 모호한 단어를 너무 울궈먹는 평론가를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성이 있으면 좋은 음악인가? 작가주의로 만들면 좋은 음악인가? 그런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이런 것을 상식인 듯이 유포시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치로 취향을 무장해서 어떤 음악취향을 절대화하는 현상이다. 서로 논쟁할 때 있어 취향이 정치를 이기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기에 정치는 취향을 무장화하는데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언제나 지켜낼 수 있는, 싸워서 지지 않는 취향, 침해받지 않는 취향이 구성된다. 이러한 취향은 지지않음으로 인하여 발전이 없다. 그리고 음악 씬 전체를 그 강령화로 압박한다.

한 여고생이 댄스그룹 D.O.G의 리더가 정말 힙합 천재라고 생각하면 좀 어때. 그게 당신에게 무슨 해를 끼치나?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가 힙합 천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를 힙합 천재라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사랑스러워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걸 박살내지 못해서 안달인 ‘무장된 취향’이 인터넷에서, 혹은 그녀의 버스 좌석 뒷자리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무장된 취향’은 그녀가 취향을 바꾸지 않으면 세계의 역사가 부정되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 것이다. 한 여고생이 세계의 역사와 싸워야 할 정도이니 참 험난한 세상이다. 그녀는 이 때의 상처로 결코 힙합은 듣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강력한 무장으로 개종을 강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유치하다.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자존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향을 지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취향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취향은 그런 식으로 전파되고 발전한다. 때론 서로 갈등하고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취향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 ‘그 자부심을 내세우는 것’과 ‘그 자부심으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셋 다 다른 문제이다. 또한 ‘작가의식을 가지는 것’과 ‘작가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과 ‘다른 음악인을 깔아뭉개는 것’ 역시 상당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이 셋은 항상 혼동되곤 한다. 그런 것이 문제다. 20040701 | 깜악귀/김태서

* 이 글은 웹진 [컬티즌]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