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홍대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는 밴드의 일원이다. 때문에 인디밴드들의 데모앨범 등을 다른 이보다 쉽게 접하는 편이다. 이런 위치에 있다보니 요즘 어떤 밴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남들보다는 아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2003년이 어떤 흐름이 가장 두드러졌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2003년은 밴드들이 EP앨범으로 데뷔하는 사례가 부쩍 많은 해였다.”고 대답할 거 같다. 그건 EP라는 포맷 자체에 대해서 낯설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특이한 흐름이고 지금까지 인디씬에서 항상 있어왔던 흐름도 아니다.

현재는 상당히 지명도를 높인 ‘피터팬 컴플렉스’가 1집 발매 이전, 2002년 12월에 EP를 발매한 것이 전초전이었던 느낌이다. 3월에 발매한 ‘참피온스’의 [Tournament EP](거북홈레코딩스)도 관련 장르팬들의 눈길을 모았다. 8월에는 ‘라이너스의 담요’가 EP [Simester](비트볼 레코드)를 발매하여 최근 가장 주목받은 데뷔 EP의 사례가 되었다. 이 세 EP정도는 기획사가 홍보력이 있거나, 입소문이 잘 났거나, 멤버 중 누군가의 지명도 있는 활동 경력으로 인해 부수적인 홍보효과를 누렸거나 하는 경우로, 그나마 존재하는 장르 팬들에게는 알려질 수 있었던 듯 하다.

그보다는 덜 알려진 EP의 사례들을 보자. 이들은 밴드의 자체제작-유통의 케이스이거나 혹은 기획유통사가 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정도의 영세한 케이스들이다. 6월에는 ‘페니레인(Penny Lane)’ 역시 자체 레이블로 [Driving Anywhere]를 내놓았다. 8월에는 ‘엘(El)’이 [Soft Breezes](Fish Eye studio)를 9월에는 ‘프리키(Freaky)’가 [b1.](bubble gum sound)를 발매했다. 10월에는 ‘위스키 리버(Whisky River)’가 [Oldness-Style Confusing]를, ‘눈뜨고코베인’이 [파는 물건]을 자체 레이블로 발매했다. 11월에는 ‘럼블 피시(Rumble Fish)’가 [Rumble Fish]를 내놓았다. 12월에는 마지막으로 ‘잔향’이 [섬 leaving isle](에그뮤직)을 발매했다. 필자가 알지 못하는 사례들도 물론 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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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EP의 명단이 인디밴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노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처음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가 실리지 않는 이상에야 알릴 방도가 없다. 밴드의 팬카페에 들르면서 밴드의 동향을 확인하는 팬이 아닌 이상 발매 정보 자체를 접하기 어렵다. 밴드 자체의 제작-유통-홍보 능력에 한계가 명확한 것은 당연하다. 몇 백장을 찍어서 홍대 주변의 한 두 군데 매장에 뿌리고 인터넷 통신판매를 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나마 겨우 존재하는 장르 팬들(펑크-모던록-메탈 커뮤니티 등)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지 않는다면 알려질 기회도 없이 그 밴드의 주변 친지(!?)와 팬들 사이에서 몇 백 장 팔리다가 잊혀질 확률이 높다.

이에 대해 “밴드들이 실력이 있으면 어차피 소문이 나게 되어 있다.”라고 치부하는 것도 나름대로 공정한 태도일 것이다. 혹은 저런 앨범들을 많이 사주어야 인디가 발전하므로 음악팬들은 일단 CD를 사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뜨거운 애정의 발로이다.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지만 이와는 별도로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인디밴드들의 독립적인 데뷔 EP발매가 요즘 들어 ‘부쩍’ 늘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디 밴드의 데뷔는 대부분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데뷔음반으로 이어지는 수순이거나, 아니면 자금력이 어느 정도 있는 기획사를 통해 정규음반으로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첫번째 사례의 경우에는 클럽 ‘빵’의 컴필레이션 앨범이라거나, 하드코어 펑크 공동체의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알리고 역시 그 클럽의 레이블이나 공동체의 레이블에서 서서히 정규앨범을 준비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 밴드가 소속된 토양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밴드의 독립적인 운항의 경우에는, 아예 운 좋게 자금력이 있는 기획사와 계약을 체결, 앨범을 내는 케이스들이 대부분이었다. ‘언니네 이발관’이나 ‘델리 스파이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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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된 데뷔 EP앨범들을 낸 밴드들은 그 중 대부분이 자금력이 있는 기획유통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즉,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못한?) 밴드들이며 동시에 “기존 인디씬의 특정한 토양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은 듯하다. 그들은 그 두 진영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주류씬의 자본에 힘입은 홍보-마케팅의 수혜를 받을 수도 없고 기존부터 있어왔던 인디씬의 흐름에 몸을 같이하여 동반효과를 누리지도 않는다. 즉, 이들은 주류는 물론이고 특별한 밴드 커뮤니티나 공동체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앨범을 발매했다는 느낌을 준다. 위의 밴드들 중 많은 사례가 “어떠한 골수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은” 밴드들이며 그러면서도 “주류적이라기 하기에도 좀 무리가 있는” 밴드들이라는 것도 한 번 음미해 볼 만한 일이다.

첨언하자면 예전같으면 컴필레이션 등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을, 충분히 기성 인디씬의 흐름과 맥이 닿고 있는 밴드들도 – 언니네 이발관이나 델리 스파이스 등의 감성과 맥을 같이 하는 ‘챔피언스’ – 지금은 데뷔 EP를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듯 하다.

이들 일련의 데뷔 EP앨범들은 단순히 몇몇 밴드들의 흐름이기보다는 한국 인디씬의 물리적인 흐름이 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기성의 인디 밴드 데뷔 시스템 – 클럽 컴필레이션/인디 공동체 컴필레이션에서의 데뷔 → 정규 앨범 발매 – 자체가 90년대 중후반에 비해서 많이 쇠락했다. 공연장은 최근에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로 보이지만(올해 Geek Live house와 Soundholic이 생겨났다. 둘 다 ‘클럽’보다 큰 규모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클럽’ 자체는 거의 노쇠해 있으며 새로운 변화없는 정체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주류에 소속되지도 못하고 기성 인디씬의 힘있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밴드들은 스스로 앨범을 녹음하고 클럽 공연 외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방안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물질적인 근거는, 홈레코딩의 간편화, 그리고 그에 따른 스튜디오 비용의 저렴화일 것이다. 예전에는 인디든 주류든 시스템에 소속되지 않으면 앨범 제작 자체가 힘들었다. 최근에는 유통과 홍보의 영세함을 빼면 앨범의 제작 자체는 밴드 혼자서의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데모보다는 나은 수준이지만 아직 “밴드의 모든 것을 담은” 정규앨범이라고 호언장담 하기에는 좀 불안한 지점에서 “데뷔 EP앨범”이라는 아이템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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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EP앨범’인가? 정규앨범을 낼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위에서 이야기한 데뷔EP들 가운데에서는 정규1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곡 수와 구성을 가진 것들도 없지 않다. 이유는 아마도 물리적인 것보다는 심리적인 데에 있을 것이다. 정규앨범은 밴드가 녹음의 과정을 한번도 거치지 않고서 “홀로” 도전하기에는 좀 부담이 있는 아이템이다. 자신들끼리 해서 좋은 사운드를 뽑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한 것이다. 정규앨범에 잘못 녹음된 곡은 다음 앨범에서 구제될 수도 없다. 녹음-믹싱이 잘못된 곡은 그대로 “그런 곡”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EP앨범에 잘못 실린 곡은 1집에 다시 수록되어 구제될 수 있다. 그래서 저 EP들은 밴드의 녹음-시험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밴드의 자체발매의 경우, 홍보와 유통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자신들의 정규1집을 어둠의 자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심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잖은가..

따라서 데뷔 EP앨범의 발매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일단 혼자서 데뷔하겠다”라는 포석에 가깝다. 주류와 기성 인디씬의 피로함 사이에서 밴드 자신은 어떠한 식으로든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뷔 EP앨범은 밴드의 ‘데모음반’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동시에 포트폴리오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데뷔 EP앨범들을 이해하는 가장 적합한 방식은 밴드가 대중에게, 혹은 그 밴드 음악을 듣고 가능성을 가늠할 사람들에게 들이미는 ‘명함’이라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앨범을 기다리는 소수의 팬들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기성의 흐름이 노쇠한 가운데에서 나온 최근의 방법론이라는 추론은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을 지원할 수 있는 인디의 시스템은 전무하다. 나아진 것은 밴드가 자체로 녹음할 수 있는 홈스튜디오 환경 뿐인데 그것은 의식적인 열정의 산물로 일구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기계의 발전으로 ‘주어진 것’에 가깝다. 하지만 유통과 홍보가 각 밴드의 각개전투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체질은 오히려 이전의 ‘클럽 공동체/컴필레이션 앨범’ 시기보다 후퇴한 것이 명확하다. 이러한 체질은 쉽게 개선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결국 인디라는 것은 환경을 탓하거나 주변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먼저 해놓고 보는 것이 그 시작이 아닐까.

좌우간 일단은, “마음만 먹는다면” 좀 더 많은 밴드들의 데뷔음원을 들어볼 수 있게 되는 쪽으로 환경이 변화하는 듯 하다. 음반을 구할 수 없다면 인터넷으로라도 말이다. 밴드의 질이 과거에 비해 떨어졌든 그렇지 않든, 어떤 밴드는 열심히 홈레코딩으로, 혹은 저렴한 스튜디오에서 데모를 녹음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데뷔EP의 자체발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내년에도 데뷔EP는 계속 나올 것이고 어쩌면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밴드는 “이것만으로 우리를 판단할까봐’ 밤 잠을 못 이룰 것이고 듣는 이들은 열정과 냉혹의 줄타기를 반복하거나 혹은 무관심하겠지. 결국 중요한 것은 당장 좋다/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20031211 | 김남훈 [email protected]

[부록] EP앨범 제작비용 – 과연 얼마나 팔아야 흑자?

홈레코딩을 전제로 하고 녹음비용이 없다고 치자(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녹음장비의 비용을 합하면 아무리 홈스튜디오라도 우울해질 만한 액수가 나온다). 필자는 예전에 CD 완성본을 800장 정도 찍는데 80만원 정도가 들었다. 속지가 펼쳐서 한 장인 경우이다. 속지가 두꺼우면 비용은 더 늘어난다. 참고로 800장이면 많이 찍은 편이다. 아래는 필자가 알아보았던 특정 업체의 액수 산출법이다. 업체마다 다르다.

사례)

기본금 200,000원 / 한 장당 450원 /
CD딱판인쇄 외의 속지는 밴드가 인쇄소에서 따로 인쇄해올 것. (함께 해주는 곳도 있다)

500장을 찍는다고 해보자. 450*500=225,000

225,000(인쇄비) + 200,000(기본금) = 425,000원

여기에 속지 인쇄 비용이 17만원이 든다고 치면.

합계 595,000원, 약 60만원.

그렇다면 CD한 장에 6000원에 판다고 예상하고
밴드가 자체로 100장은 판다고 치자.

100*6,000 = 600,000원

만일 CD샵에 유통한다면 2000원을 유통처에서 가져간다고 치자.
50장을 판다고 치면

4,000*50 = 200,000원

80만원을 건질 수 있다.

즉, 장비 비용을 뺀 CD제작비용 자체를 뽑는 것은 밴드 혼자의 힘으로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적자 없는 운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비 비용을 뺀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습다. 사실 인건비는 치지도 않았다. 밴드 멤버 3-5명이 몇 달 동안 연습실에서 두문불출한 그 인건비 말이다..

다른 이야기 하나 첨언. 보통, 사람들은 500장 파는 것은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물론 TV홍보 등이 동원된다면 몇 만장을 파는 것도 가능하지, 단지 밴드가 자신들의 손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팔고, 공연하는 클럽에서 팔고, 두 세 군데의 샵에 부탁해서 위탁판매 하는 것만으로 300장을 넘어서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사람들이 “어떤 밴드의 어떤 앨범이 나왔다”라는 것 자체를 아는 것도 어려우니까. 인디밴드들의 CD를 위탁판매 해주는 샵에서도 자기가 잘 팔릴 거 같지 않다고 생각되는 앨범은 매장의 진열대에 아예 꺼내놓지 않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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