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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eelance Hellraiser, “A Stroke Of Genius (Christina Aguilera vs. The Strokes)”

런던의 얼터너티브 록 방송국 X-FM은 1999년에 [The Remix]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이 프로그램은 일부 클럽 하우스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부트렉 리믹스(Bootleg Remix) 또는 매시-업(mash-up) 씬을 보다 폭 넓은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본격적인 화제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2002년 초 프리랜스 헬레이저(The Freelance Hellraiser)의 “A Stroke Of Genius”가 전파를 타면서부터다. 스트록스(The Strokes)의 “Hard To Explain”과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의 “Genie In A Bottle”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 곡은 당시 한창 상승세에 있던 두 아티스트의 인기에 힘입어 세간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곡은 말 그대로 ‘천재적 섬광(A Stroke of Genius)’의 산물이었다. 이 곡 이전에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시도한 곡들은 많았지만 이 곡처럼 기발하면서도 완벽한 작품은 드물었다. “A Stroke Of Genius”의 성공으로 부트렉 리믹스 씬은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메인스트림에도 적지 않은 여파를 미치기에 이르렀다.

The Freelance Hellraiser, “A Stroke Of Genius (Christina Aguilera vs. The Strokes)”

원론적인 의미에서 부트렉 리믹스란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리믹스를 말한다. 리믹스라는 행위 자체는 벡(Beck), 모비(Moby), 팻 보이 슬림(Fatboy Slim) 등이 하는 작업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이들처럼 거대 음반사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아티스트의 경우 이와 관련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적/경제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민사/형사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냥 일단 하고 보는 것이다. 사실 X-FM의 [The Remix]가 일반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영국에서도 저작권과 관련된 논란이 적지 않게 일기는 했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관념이 비교적 느슨한 영국에서는 부트렉 리믹스를 막으려 하기 보다는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지배적이었다. [The Remix]를 통해 방송된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은 EMI 산하의 버진(Virgin) 레코드에서 출반되었고 [The Remix]는 현재 이동통신 업체 T-모바일(T-Mobile)의 후원 하에서 방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첫 발매에서 그리 신통치 않았던 슈가베이브스(Sugababes)의 “Freak Like Me”는 매시-업 방식에 따라 새롭게 리믹스된 뒤 2002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부트렉 리믹서(Bootleg Remixer)들이 저작권 침해를 마다하지 않는 데는 경제적/법적 이유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행 저작권법 하에서는 저작권료만 지불한다고 해서 음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못 쓰는 경우가 있고 누구는 쓰는데 누구는 못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것이 저작권 소유자의 자의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비스티 보이스(The Beastie Boys)가 AC/DC의 허락을 받지 못해 “Rock Hard”를 온전하게 발표하지 못한 일이나 버브(The Verve)의 “Bittersweet Symphony”가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 측과의 끊임 없는 논란을 불러 일으킨 점 등은 이제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저작권 소유자들은 저작권을 통해 단순한 경제적 이득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든 아니든 작품 활동과 내용에도 깊숙한 영향을 행사한다. 창작활동의 보호를 명목으로 만들어진 저작권법이 오히려 그것의 족쇄로 변질된 상황에서 불법 예술(illegal art)의 등장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부트렉 리믹서들의 불법 감행은 표현과 예술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투쟁의 일환이기도 하다.

The Beastie Boys, “Rock Hard (with AC/DC sample)”

부트렉 리믹스의 예술적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법적 저작물에 해당되는 음원이라면 무엇이든 소재로 사용될 수 있고 그 결과도 얼마든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부트렉 리믹서들 중에는 방송의 보도 내용을 샘플하여 나름의 정치 논평으로 재구성하는 이들도 있고 드라마의 대사를 뒤섞어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오시미소(Osymyso)의 “Pat N’ Peg”은 크게 보아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BBC-TV의 인기 드라마 [EastEnders]의 한 장면을 브레이크 비트의 댄스 트랙으로 뒤바꿔놓은 그의 작품은 부트렉 리믹스의 미학을 단적으로 제시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부트렉 리믹스 씬에서 다소 주변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현재 부트렉 리믹스라는 말은 특별한 단서가 붙지 않는 한 매시-업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매시-업은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노래를 병치함으로써 오리지널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느낌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매시-업 작업은 흔히 한 곡에서 반주를 따오고 다른 한 곡에서 보컬을 따서 결합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때 소재가 되는 음원은 일반에 잘 알려진 곡들일수록 좋고 결합되는 노래들은 전혀 다른 계열에 속하는 것일수록 그 효과가 크다.

Osymyso, “Pat N’ 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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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Home Productions, “Rock With Addiction (Ashanti vs. Jane’s Addiction)”

부트렉 리믹서들의 최대 목표는 ‘부트렉같지 않은 부트렉을 만드는 것’이다. 곡들이 어색하지 않게 잘 뒤섞여서 오리지널과 같은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부트렉 리믹스의 이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작품을 만나기란 현실적으로 그리 쉽지 않다. 부트렉 리믹스는 대부분 어느 정도의 삑사리를 포함하며 작품에 따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삑사리로만 일관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부트렉 리믹스를 들을 때 지나치게 기술적 완성도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곡의 아이디어고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그럴 듯하게(‘완벽하게’가 아니라) 작동하는가가 바로 성공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재 가장 주목할 만한 부트렉 리믹서는 영국의 고 홈 프로덕션스(Go Home Productions)다. 그의 작품에서도 삑사리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언제나 흥미롭고 경우에 따라서는 놀랄 만큼 탁월하다. 아래 소개되는 “Kinky Madonna”와 “Ray Of Gob” 그리고 “Rock With Addiction” 등은 바로 이 ‘놀랄 만큼 탁월한’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Go Home Productions, “Kinky Madonna (Madonna vs. The Kinks) / Ray Of Gob (Madonna vs. The Sex Pistols)”
Go Home Productions, “Rock With Addiction (Ashanti vs. Jane’s Addiction)”

영국을 석권(?)한 부트렉 리믹스 붐은 이제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들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미국의 나이프앤드촙(Knifeandchop), DJ 지저스팬츠(DJ Jesuspants), 리셋(RESET) 그리고 호주의 사이코 댓 노 탤런트 핵(Dsico that No-Talent Hack) 등은 현재 가장 흥미로운 부트렉 리믹스를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최근 피치포크(Pitchfork)가 고 홈 프로덕션스(Go Home Productions)의 작품을 잇달아 소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트렉 리믹스 씬은 이제 점차 국제적인 규모와 인지도를 지닌 것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음반산업협회(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RIAA)의 서슬 퍼런 위협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미국에서 부트렉 리믹스 씬의 미래를 낙관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국제적 조류가 미국을 빼놓고 성립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는 단순히 미국에만 국한되는 문제도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부트렉 리믹스는 아무리 성장해 봐야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클럽과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주된 유통 경로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이 씬에 대하여 RIAA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부트렉 리믹스의 앞길에는 어쩌면 엄청난 난관이 가로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RESET, “Sympathy (Mary J. Blige & Ja Rule vs. The Rolling Stones)”
RESET, “Seven Superman Army (Eminem vs. The White Stripes)”

MTV 시대의 음악은 뮤직 비디오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트렉 리믹스에 있어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오시미소의 선구적인 비디오 “Pat N’ Peg”이 약간의 화제를 몰고 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부트렉 뮤직 비디오는 전반적으로 낙후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이는 작업 자체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할 뿐더러 타인과의 협력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혼자 침실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작업하는 부트렉 리믹스의 속성상 협력의 여지는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한 사람이 음악과 영상에 두루 능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 동안 부트렉 비디오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이 분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작품들은 부트렉 비디오에 대한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도록 만든다. 그 중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클렉틱 메쏘드(Eclectic Method)와 슬리지보이(SleazyBoy)의 작품들은 부트렉 비디오의 현단계와 과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SleazyBoy, “Crazy In California (Beyonce vs Red Hot Chili Peppers)” M/V
Eclectic Method, “Dreaming Of Rock Stars (N.E.R.D vs. The Coral)”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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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FM의 The Remix Night 포스터

부트렉 리믹스의 미학은 본질적으로 ‘음악적 농담’이다. 잘 만들어진 부트렉 리믹스는 청취자를 포복절도하게 하거나 최소한 미소짓게 만든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듣는 측에서도 어느 정도의 유머 감각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음악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숙한 태도를 지녔거나 준법정신이 과도하게 발달한 사람은 부트렉 리믹스의 농담을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만일 ‘음악적 농담’이라는 정의가 너무 가볍게 여겨진다면 ‘문화적 기물파괴 행위(cultural jamming)’ 정도의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부트렉 리믹스를 듣는 것이 대단히 즐거운 일이라는 점만은 변하지 않는다. 아마 만드는 사람은 더욱 즐거울 것이다. 지금도 [The Remix]에는 청취자들이 직접 만든 매시-업이 매주 200여 개씩 답지하며 클럽가에서는 DJ들이 자기 나름의 부트렉 리믹스를 날마다 틀어대고 있다. 지금까지 몇몇 ‘유명인사들의 작품’을 위주로 이 글의 논의를 전개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 씬의 진정한 주역은 집이나 클럽 하우스에서 부트렉 리믹스를 만들고 그것에 맞춰 춤을 추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트렉 리믹스는 21세기형 DIY 음악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메인스트림에 완전히 흡수되어 소진해버릴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20031013 | 이기웅 [email protected]

관련 사이트

X-FM 홈페이지
http://www.xfm.co.uk/
The Freelance Hellraiser 홈페이지
http://www.thefreelancehellraiser.com/
Osymyso 홈페이지
http://www.osymyso.com/
Go Home Productions 홈페이지
http://www.gohomeproductions.co.uk/
RESET 홈페이지
http://www.resetmusic.com/
Eclectic Method 홈페이지
http://www.eclecticmetho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