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및 장소: 2003년 2월 14일 서울 마포 소닉스 미디어 사무실
질문: 신현준, 이용우
1차 정리: 남수현, 안병훈, 김정호, 김주혁
2차 정리: 이성식, 배성록, 신현준, 이용우

이응수(1954년생: 항공대학교 74학번)라는 이름은 송골매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장 분명한 사실은 그가 송골매 1집(1981)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구창모와 김정선이 없을 때의 송골매’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룹의 연주인이라기보다는 ‘작가’로 더욱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경망스러운 표현이지만 직접 본 그의 인상은 ‘똘똘이’ 그 자체였다. 항공대학교 캠퍼스 그룹인 활주로(런웨이) 시절부터 동기생인 라원주와 콤비를 이루어서 작사와 작곡을 하던 그는 송골매가 고공비행을 하던 무렵에도 꾸준히 곡을 공급해준 존재다. 배철수와 구창모가 송골매의 양날개였다면, 이응수(그리고 라원주)는 뇌였다고나 할까…

또한 그는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일을 그만 둔 뒤에도 음악과 연관된 비즈니스에 종사했다. 특히 당시 송골매의 소속사이자 굴지의 메이저 음반사였던 지구 레코드에서 문예부장으로 근무하면서 1980년대 한국의 음악산업의 발전에 나름의 방식으로 공헌해 왔다.

이런 경력을 볼 때 그가 ‘정보통’이자 ‘마당발’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인맥은 송골매를 포함한 캠퍼스 그룹 사운드계 뿐만 아니라 주류 그룹 사운드계나 신촌 언더그라운드까지 폭넓게 미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런 사람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땡 잡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와의 인터뷰에서 일부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우리의 조사의 결과인 것처럼 써먹으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건 도저히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장장 5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를 여기 공개한다. 인터뷰 중에 MD가 시간이 다 되어 삑삑거리자 여유있게 공MD 한 개를 챙겨주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인터뷰 중에 MD까지 챙겨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자, 그러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중앙(서울)이 아닌 지방(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낸 이야기, 항공대 런웨이에 ‘특채’되어 캠퍼스를 누비던 이야기, 학생 신분을 몰각(?)하고 고고 클럽으로 진출한 이야기, ‘캠퍼스파(활주로파)’와 ‘신촌파’의 교류와 교감에 관한 이야기, 캠퍼스 가요제 이후 송골매파의 이합집산의 무협지 같은 이야기, 그리고 그 뒤의 여러 비화 등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의사항
1) 모니터로 보기에는 버거우므로 프린트해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형광 메모리팬을 준비하여 밑줄을 긋고 보는 것이 좋다.
3) 인명(人名)이 나오면 무협지에 나오는 인물처럼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발문/ 신현준)

“우리는 밴드 활동은 하지 않고 재야(在野)에 속해있었습니다”: 부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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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향이 남쪽이신 것 같습니다.
– 부모님이 이북 사람인데, 한국 전쟁 때 제주도로 피난을 내려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제주도에서 태어났죠. 하지만 제주도에서 한 1년 정도 살다가 ‘육지’로 건너와서 여기저기 옮겨다녔습니다. 수원, 서울을 거쳐 원주에 자리를 잡았다가 1959년에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죠. 4.19 때는 검정 교복 입은 학생들이 총 뺏어서 트럭 타고 다니는 것도 봤는데, 4.19니 5.16이니 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다 부산에서 봤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부산에서 나왔는데, 중학교는 시험 쳐서 바로 입학했지만 고등학교는 1년 늦게 들어갔어요. 제가 (대학 학번이) 74학번인 건 그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는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Q: 경남고 나오셨으면 김영삼 전 대통령과 동문이시네요. 공부 잘 하셨나 봐요.(웃음) 학창시절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나요. 특별히 팝 음악을 접한 계기는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 초등학교 다니던 1965년 정도로 기억합니다. 동네 작은 극장에서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가 주연한 영화 [틴에이저 스토리]를 봤습니다. 그땐 어려서 깊은 의미는 몰랐지만 인디 스타일의 해적방송을 히트시킨다는 스토리는 어린 마음에도 ‘저런 세계가 다 있구나’하고 감탄하게 했죠. 또 고물 라디오에서 나오는 최희준의 “하숙생”이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같은 노래만 맨날 듣다가 쉐도우즈(The Shadows) 같은 밴드의 음악을 들으니 쇼크를 먹었죠. 그러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서 빽판을 접했어요. 그때 저희 집에는 전축도 없었기 때문에, 과외하고 아르바이트한 돈을 아껴서 턴테이블을 사다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Q: 하드웨어(턴테이블)를 장만하셨으니, 본격적으로 소프트웨어(음반)를 구하셨을 것 같은데요.
– 아무래도 접할 기회가 많아졌죠.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1966) 같은 성인 영화의 주제가나, 올리비아 허시(Olivia Hussey)가 나왔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1968)의 주제곡 “A Time for Us”(Johnny Mathis), 그리고 당시 라디오에서 많이 나왔던 벤처스(The Ventures) 음악들, 애니멀스(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쯤 이웃집 형네 집에 갔더니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빽판이 엄청 많이 있는 거예요. 그 형이 엘비스가 치던 것과 같은 조그만 통기타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기타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본 건 처음이었죠. 그게 기타를 처음 손에 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본도 없이 어깨 너머로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배웠죠. 그렇게 해서 “학교종”을 처음 연주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기분이 좋더라구요. 중학교 3학년 때는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기타 교본을 한 권 사서 쉬운 레퍼토리 위주로 연습했습니다. 근데 제가 중학교 때 ‘코르위붕겐(Chorbungen)’을 했거든요(주: [코르위붕겐]은 음악 학교의 합창 교수를 위한 교본(敎本)으로, 그 책을 가지고 시창(視唱) 연습을 했다는 의미다). 그걸 하다보면 음감도 생기고 나중에는 악보를 보면서 바로 연주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3년간 트레이닝을 받으니까 자연스럽게 음악적 능력이 생기게 된 거죠. 덕분에 기타 칠 때도 다른 친구들은 악보 보기 위해 따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에 1년 정도 쉬는 기간에 또 사건이 하나 터진 거죠.

Q: 어떤 사건인지 궁금하네요. 워낙 말씀이 청산유수라서 듣기만 해도 재미있습니다.(웃음)
– 경남 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 떨어지고 재수 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잘 하는 편이어서, 학원비도 안내고 장학금 받으면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1년을 지냈는데, 제가 허구한 날 기타 타령만 하니까 어느 날 아버지가 떡 하니 기타를 하나 사오신 거예요. ‘마산 기타’였는데, 마산에서 만든 특산품 비슷한 기타인지…(좌중 웃음) 정확한 건 모르겠네요. 통기타이긴 한데 요즘처럼 메이플로 해서 나무도 좋고 그런 제품이 아니라, 쇠로 줄을 껴 가지고 배니어 판을 덧댄 기타였어요. 오베이션 하고도 다르고. 아무튼 덕분에 친구 집에 가서 기타 치던 설움을 씻고 이제는 집에서 연습할 수 있게 되었죠. 뚜아 에 무아의 노래들을 비롯해 포크 송들을 부르면서 재수 시절을 보냈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음악이 정말 좋아져서 매일 기타 쳤습니다. 소풍 가면 친구들이 나더러 기타 좀 쳐달라고 성화였고.

Q: 경남 고등학교에 교내 밴드는 없었는지, 밴드 생활은 안 하셨는지, 당시 고등학생 밴드의 연주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워커스(Walkers)라는 밴드가 있었죠. 당시에 군화가 유행이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은 모양이에요. 한 번은 예식장에서 리사이틀을 한다고 초대하기에 구경을 갔는데, 얘네들이 연주를 너무 못하는 거예요.(웃음) 당시 흔히들 하듯이 “Proud Mary”나 “Have You Ever Seen the Rain?” 같은 C.C.R. 곡들을 연주했는데, 목소리는 안 올라가니까 키(key)는 낮추고 키보드 없이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기본 편성으로 연주하는데 보기에 참 한심하더라구요. 오히려 저랑 친구들이 훨씬 실력이 나았죠. 하지만 우리는 밴드 활동은 하지 않고 재야(在野)에 속해있었습니다. 학교에선 음악시간이면 음악 선생님이 자기 바쁜 일 있다고 청음 시험을 내고는 나가 버린다구요. 그러면 제가 열심히 써 갖고, 반 전체에 돌린다고…(웃음) 워커스 외에도 경남고등학교에 선배들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밴드가 있었어요. 저는 전혀 모르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소문을 못 들었는지 저 같은 재야 인사는 취급을 안 해주더라고.

Q: 당시 부산의 음악 공간, 음악 문화는 어땠는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음악다방이나 생음악 살롱 같은 곳 말이죠.
– 제가 사실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머리 바싹 깎아야 했는데, 저는 고등학생 주제에 모자 쓰고 음악다방 같은데 많이 다녔어요. 그 때 출입하던 음악다방은 백형두, 배경모 등 당시 부산에서 유명한 DJ들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무아’라는 음악 다방인데, 라이브 공연도 봤던 기억이 있네요. 더 자세한 건 아마 부산 음악 히스토리를 조사해보면 나올 겁니다. 생음악 살롱은 사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자주 가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공연 같은 경우는 우리 학교 옆에 있던 동아대학교 강당에서 자주 열려서 담 넘어서 보러가곤 했지요. 벤처스나 C.C.R. 등을 커버한 연주였는데, 장비가 좋지 않아서 지금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사운드였죠. 하지만 일렉트릭 밴드의 사운드를 직접 듣는 느낌은 참 신선했고,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Q: 말씀대로 이응수 님의 학창 시절에는 많은 밴드들이 C.C.R.과 벤처스를 비중 있게 연주했는데, 다른 음악들은 어땠습니까. 비틀스라든지, 신중현 같은…
– 물론 비틀스도 많이 들었죠. 그런데 비틀스의 음악은 스타일이 다양한 반면 하드한 맛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C.C.R.의 음악은 하드하다고까지는 얘기할 수 없어도 음악이 강했으니까 아무래도 젊은 혈기에 더 잘 맞았죠. 우리 때만 해도 고등학교 때 소풍 가면 야전(野電: 포터블 전축) 들고 나가서 C.C.R. 노래 틀어놓고 소주 마시면서 춤추고 그랬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세대에 C.C.R.이나 벤처스는 교과서 같은 존재였죠. 그리고 저는 음반을 많이 사서 듣는 편은 아니었어요. 당시만 해도 여러 곡을 모아놓은 앨범이 하나의 작품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정규 앨범이란 개념이 없었고, 철저히 싱글 히트곡 위주였죠. 싸이키델릭 음악은 보통 8분이 넘어가기 일쑤여서 대중적인 스타일은 아니었고. 아마 제가 처음 산 정규 앨범은 1972년경 빽판으로 산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1971)으로 기억됩니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이 곡 저 곡 편집한 컬러 빽판이 많이 나왔고, 1970년대에 들어선 이후에야 원판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때부터 음반도 사서 듣고 했지요. 대학 때는 학교에 오디오 시스템까지는 아니어도 앰프 정도는 있었어요. 제 전공이 전자공학 아닙니까. 그래서 이리저리 연결해서 음악을 듣곤 했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되었던 것 같네요. 제가 신중현 씨 음악을 처음 알게 된 건 1971년 무렵입니다. 같은 동네에 업소에서 연주하던 형이 한 명 있었는데, 밤이면 동네 우물가에 나와서 기타 치면서 히 화이브의 “초원”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놀았어요. 그 형이 곧잘 부르던 노래가 바닷가 운운하는 심플한 노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애드 훠의 데뷔 앨범에 실린 “바닷가”였어요. 물론 이전에도 신중현이란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애드 훠의 음악을 들은 건 그 때가 처음이었죠. 나중에 친구한테 애드 훠 음반을 빌려서 듣고는 꽤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충격을 받았냐하면, 히트가 안 된 음악인데도 노래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신중현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외국 곡으로는 벤처스나 C.C.R., 국내 곡으로는 신중현이나 히 화이브/히 식스, 키 보이스 같은 음악이 우리의 주된 텍스트였어요. 테크닉에 신경 썼다기보다 즐겨 연주하고 불렀던 곡들이 주로 그 쪽이었죠.

항공대, 런웨이: 고고 클럽과 신촌 언더그라운드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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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제까지 말을 종합해 보면, 고등학교 때까지는 음악적으로 재능도 있고 마인드도 있었지만 밴드 활동을 하지 않으신 셈인데, 말씀하신 대로 ‘재야의 고수’로서 만족하신 건가요?
– 물론 음악에 대해서는 계속 관심을 갖고 음악 듣는 수준도 점차 향상되었습니다. 나중엔 레드 제플린도 들었으니까 C.C.R.이나 벤처스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밴드를 만들지는 않았어요. 이제부터가 중요한 얘기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는데, 전에 알고 지내던 선배가 대학생이 되어서 내려온 거예요. 어느 학교 다니냐고 물어보니까 “임마, 나 항공대학 다니잖아”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만 해도 항공대학교란 학교가 있었나 했죠. 이제 항공대학교와 저의 운명의 히스토리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공대학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국립대학이라 학비도 안 내는데 부산 해양대학교와 비슷한 곳’이라고 설명하더라구요. 내가 고 3이니까 진학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당시 우리 학교는 한 해 서울대에 200명씩 보내는 명문이었어요. 학교에서는 나한테 서울대 가라고 하지, 엘비스 프레슬리 판 빌려줬던 형은 서울에 올라갔다 여름에 내려와서 밴드 한다고 자랑하지, 항공대 다니는 선배는 자기네가 대학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서 3등 먹었다고 하지… 뭐 사방에서 난리인 거예요.

Q: 이응수 님의 음악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이었군요. 갈수록 흥미진진하네요. 그런데 혹시 항공대에 다니던 그 선배가 활주로에서 활동했던 건가요?
– 계속 들어보세요. 1973년도에 고려대 애들이랑 서울대 애들도 참가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가 있었대요(주: 연포에서 열린 대학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를 말한다). 그 대회에서 항공대의 런웨이(Runway)라는 밴드가 “뱃노래”로 출전했는데, 코러스를 화려하게 하고 록으로 편곡해서 3등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나도 항공대에 가면 할 수 있을까?” 했더니 “일단 항공대에 와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로 가면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죠. 결국 입시 때 항공대에 원서를 넣었고(집에서 강권해서 부산대에도 지원했고), 다행히 항공대 전자과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전자과 선배가 배철수 형이었어요.

Q: 배철수 님과의 운명적인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 활주로에는 대학 입학하자마자 가입하신 건가요. 또 작사-작곡 파트너로 활동한 라원주 님과는 동기로 알고 있는데, 활주로에 가입하면서 알게 되신 건가요.
– 아직 입학도 안한 예비 대학생 때, 선배 한 명이 선배들 만나야 된다고 학교 앞 당구장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갔더니 이건 뭐 지저분하고 머리는 기르고, 대학 교복에 골덴 바지 입고…(웃음) 속으로 ‘뭐 저런 사람들이 있나’ 하고 충격을 먹었죠. 그렇게 만남이 시작된 거죠. 아는 형도 있고 해서 “활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하고 물어봤더니 그냥 심부름만 열심히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입생 환영 음악회를 하는데, 제가 뒤치다꺼리를 다 했어요. 나는 밴드 구성원도 아니고 게다가 신입생인데. 정말 악기 나르는 것부터 온갖 잡일을 다 했어요. 그 때 라원주라는 친구도 만난 겁니다. 활주로에 가입하기 전에 테스트를 한다고 라원주가 기타를 치는데, 무지 잘 치더라고… 자기 형(라정주, 71학번, 활주로 멤버)한테 배웠는지 벤처스건 뭐건 그냥 한방에 해내고 악보도 쓱쓱 그려내는 거예요. 악보 그리는 거야 누가 실력이 좋다 나쁘다 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아무튼 기타 하나는 그 친구가 훨씬 더 잘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네가 기타 쳐라, 나는 베이스 치마’ 이렇게 결정했죠. 제가 고등학교 올라갈 때 1년 꿇었으니까 라원주가 어리지만, 학번이 같으니까 친구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특히 음악계는 그렇게 만나면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게 일반적이에요. 음악을 언제 시작했느냐는 것이 중요하니까.

Q: 당시 신입생 중에 라원주 님 외에 다른 멤버들과 관련된 이야기 있으면 들려주시죠. 그리고 당시 활주로의 주축 멤버는 어떻게 되었는지, 주축을 이룬 것은 몇 학년 멤버들이었는지도.
– 활주로 8기를 뽑는데, 저랑 라원주는 거의 정해진 상태였고, 나머지 몇 명을 추가로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지금은 한덕수라는 이름을 쓰는) 한달연이 들어왔는데 이 친구는 신촌 쪽 사람이었어요. 자기는 드럼을 치겠다고 해서 드럼 실기시험을 치려고 하는데, 정작 드럼은 칠 줄도 모르고 테크닉도 전혀 없던 거예요. 근데 다른 친구들은 다 C.C.R.이나 벤처스를 얘기하는데 혼자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밥 딜런(Bob Dylan), 유라이어 힙(Uriah Heep) 운운하고. 일단 특이하니까 선배들이 얘는 뭐냐 하면서 뽑은 거죠. 어쨌든 그 친구로 인해 벤처스나 C.C.R.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활주로의 음악 방향이 소위 하드 록 계열로 많이 바뀌게 되었다고 봐야죠. 그 친구가 신촌의 OX라는 조그만 카페에 드나들었는데, 그 곳은 유지연, 김현식, 이영재, 조덕환 등등을 배출한 정말 중요한 장소였죠. 이렇게 활주로 8기는 저, 라원주, 한달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배철수 형 기수는 활동이 저조했고 우리 바로 위 선배들도 활동이 좀 저조했어요. 반면 우리는 연습도 많이 했고 당시 학교에서 활동을 했던 기수는 우리 8기밖에 없었다고 봐야죠. 그런데 당시 활주로는 기수랑은 상관없이 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축이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항공대는 ROTC로 빠지는 사람도 있다 보니 활동이 이도 저도 아닌 식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Q: 그럼 당시 실제 활동하던 활주로 라인업과 활동 내용을 좀 말씀해주세요.
– 저는 베이스 기타를 쳤고 노래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 팀에 보컬이 두 명 있었는데 그 중에 숙명여고 출신의 고영신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양희은부터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까지 못하는 노래가 없는 친구였죠. 그 때부터 우리는 C.C.R.에서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타나(Santana)의 “Black Magic Woman” 같은 곡도 손대봤는데, 주된 레퍼토리는 고고클럽의 대명사인 “Evil Ways”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 같은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때의 활주로는 어떤 면에서 록 밴드라기보다는 고고 밴드에 가까웠죠. 하긴 그 당시엔 대개가 그랬지만. 그 때 활동하던 장소야 인천에 있는 예식장 가서 연주도 했고. 그런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1974년에 선배 중 한 명이 소개해서 우리가 만리포에 있는 고고클럽에 일하러 가게 됐어요. 그 때 배철수 형은 ROTC 때문에 못 갔고, 저랑 라원주, 한달연, 이봉환(키보드, 보컬), 선배 중에 노래하는 이근형까지 5명이었습니다. 훗날 송골매에서 연주한 이봉환은 경희대에 다녔지만 1학년 때부터 (배)철수 형하고 업소 일을 함께 해서(노래가 특색 있어서 나이트 클럽에서 인기가 좋았어요) 활주로 멤버나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다섯 명이 방학하자마자 만리포로 내려가서 8월말까지 한달 가량 연주했습니다. 외국 영화 보면 바닷가에 클럽 만들고 간판 올리고 하잖아요? 그걸 그대로 흉내내서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대학가 최고 그룹 사운드 런웨이’라고 페인트로 간판 그리고(아참, 우리 밴드의 원래 이름은 활주로가 아니라 런웨이였어요. 활주로란 이름은 나중에 방송에서 국어 순화 어쩌구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아무튼 그 때부터 좀 강한 음악으로 갔는데, C.C.R. 같은 음악은 별로 안 하고 오히려 국내 록 위주로 연주했습니다. 고고클럽에 어울릴만한 노래들로 “한잔의 추억”(이장희) 같은 것 있잖아요? 그렇게 한 달을 열심히 일해서 우리 쪽은 장사가 잘 됐는데, 옆에 있는 카바레가 우리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쪽 카바레 사장이 그 지역 세력가였던 것 같은데, “너희들 우리 업소에서 일해라” 이 한 마디에 잡혀 갖고 그 쪽에서 일하게 됐죠. 그런데 우리가 카바레에서 연주한다고 손님들이 좋아했겠어요? 우리는 당시에는 뽕짝이란 것 자체를 잘 모르는데다가 음악 자체가 뽕짝과는 거리가 먼데 말이죠. 아무튼 8월 중순이 다 돼서 개강 날짜는 다가오는데, 사장이 놔주질 않는 거예요. 등록도 하고 학교도 가봐야 하는데 큰 일 난 거죠. 그런데 8월 15일날 영부인 육영수 여사 서거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날 이후로 전국에 가무금지 조처가 내려진 거예요. 방송에서 나오는 음악도 모두 음음음음~(우울한 음악) 밖에 안 나오고, 당연히 고고클럽 같은 건 다 업무정지 상태로 들어간 겁니다. 결국 사장도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릴 보내주더군요. 하마터면 등록도 못하고 완전히 그 바닥으로 빠질 뻔했는데, 천우신조였죠.(웃음) 악기 같은 것도 우리가 다 갖고 간 건데 큰일날 뻔했어요.

Q: 역사적 사건이 활주로를 구한 셈이네요. 활주로가 고고 음악을 연주한 시절도 있었군요. 그런데 저희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고고 리듬이라는 것이 실제로 정확한 패턴이 있는 건가요.
– 고고리듬이란 것은 8비트, 다운비트를 말하는 거죠. 트위스트도 일종의 다운비트라 할 수 있는데, ‘쿵짝짝 쿵짝 쿵짝짝 쿵짝’ 하는 식으로 두 박자 째에 강박이 들어가는 게 기본이고, 여기에 ‘쿵짜짝 쿵짝 쿵짜라짝짝 쿵짝’ 하는 식이 트위스트의 리듬이죠. 이게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사람들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C.C.R.이나 벤처스로 이어지고, 그러다가 8비트, 다운비트로 발전하게 된 거죠.

Q: 당시 악기를 운반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만리포까지 어떻게 운반하셨는지요. 또 악기는 어떤 것을 주로 사용하셨는지 궁금하네요.
– 1톤 타이탄 같은 트럭에다 다 싣고 날랐죠. 요즘이야 만리포 가는 길이 평탄대로지만 그때는 완전히 고난의 행군이었어요. 더구나 잘못하면 앰프 진공관이 망가질 수도 있어서 꽁꽁 묶고,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서 우리가 짐칸에 다 타서 노심초사하면서 갔죠. 당시 20와트나 30와트 정도면 괜찮은 앰프에 속했어요. 우리끼리 돈을 모아서 청계천에서 앰프를 사는데, 20와트에 진공관 앰프인데도 ‘와, 우리가 20와트 진공관을 쓰게 되는구나’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국산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크기는 150cm이상이니까 초등학생 키보다 조금 컸겠네요. 리버브도 있고 안에 달릴 것 다 달려 있었죠. 기타 이펙트는 와와나 퍼즈는 별로 안 썼어요. 우리가 나름대로 공대 아닙니까. 퍼즈로 팍팍 밟아대는 게 아니라, 앰프로 기술적인 처리하고 오버드라이브로 처리하고 약간 기술적인 노하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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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에 가진 ‘한국 항공대학 기악반'(Runway)의 제3회 정기 연주회 팸플릿(자료 제공: 이응수). 장소는 인천시 경동사거리 신신 예식장. 후원은 인하대학교 Pop Music회, 입장료는 2백원. 이외에도 흥미로운 정보들이 많이 적혀 있다. 당시 라인업은 배철수(보컬), 라원주(기타), 이응수(베이스), 한달연(드럼), 이근영(보컬, 오르간), 홍예선(보컬, 오르간).

Q: 우여곡절 끝에 상경하셨는데, 2학기 때 활동은 어땠나요. 그리고 런웨이는 다른 밴드들처럼 외국 곡을 똑같이 카피하는 편이었는지, 아니면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여름에 그 고생을 해 놓고서도 학교에 다시 나가니까 또 심심해지대요. 마침 한 선배가 다리를 놔서 무교동의 업소 두 군데에 연주하러 다녔습니다. 무교동이 요즘은 별로지만 옛날에는 술 마시면서 음악도 하는 시스템이 잘 되어 있었고 놀기 좋았어요. 배철수 형도 ROTC 훈련이 끝났을 때니까 합류했죠. “Child in Time”(Deep Purple)이니 마운틴(Mountain)의 곡 같은 하드 록 풍의 음악을 많이 연주했어요. 카피 관련해서는, 그때 우리는 일단 똑같이 카피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습니다. 외국 밴드와 비슷하게 분위기 내고 듣기에 좋은 정도면 되는 게 아닌가 했어요. 아무래도 학생이니까 연습을 많이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는데, 뭐 똑같이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잘라낼 건 잘라내고, 필요한 부분은 살리면서 우리 식의 편곡을 했다는 얘기죠. 당시 무교동에서 전업 밴드로 잔뼈가 굵은 어떤 멤버가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가 무교동 생활을 꽤 했는데 마운틴의 곡을 연주하는 팀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자기들은 대가의 음악이라 하고 싶어도 쉽게 못하는 음악인데, 한마디로 우리가 겁대가리가 없다는 얘기죠. 다른 한편으론 우리 나름의 편곡으로 연주하니까 신선하게 비춰진 측면도 있었어요. 아무튼 그때는 밴드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 많이 있는,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시는 클럽 같은 분위기였고. 그렇게 한두 스테이지를 한 시간씩 연주해서 매일 개런티 몇천 원씩 받으면 옆에 있는 돼지고기 집 가서 고기 먹고 버스비 나눠 갖고 집에 가는 식이었습니다.

Q: 런웨이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로 보입니다. 다른 캠퍼스 그룹 사운드도 런웨이와 같이 업소 일을 했는지요. 또 그 당시 봤던 다른 그룹의 공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우리는 8기 시작과 함께 고고클럽 다니고 무교동 다니고 하느라고 다른 캠퍼스 그룹과 거의 교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종로 2가 서울예식장 옆에 신중현 씨가 운영하던 음악 감상실이 있었어요. 거길 한번 갔는데, 신중현과 엽전들이 메인 스테이지고 그 전에 연세대나 서울대 애들이 나와서 연주를 하더라고. 그런데 그 대학 그룹이 좋게 말하면 연주력이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카피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거예요. “Highway Star”를 막 하는데 연주 하나는 정말 잘 하더군요. 그게 기타하고 키보드에 굉장한 테크닉이 요구되는 음악이잖아요. 그래도 다른 한편으론 ‘저건 자기들 음아도 아닌데 저렇게 피나게 연습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우리는 테크닉보다는 필(feel)을 중시하는 편이었으니까. 마운틴 음악 같은 경우도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진 않잖아요? 그러다가 신중현과 엽전들(드럼 권용남, 베이스 이남이)의 공연을 봤는데,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를 비롯해서 정말 기막히게 연주하더라구요. 그 때 신중현 씨 라이브를 보고 꽤나 쇼크를 받았죠. 오비스 캐빈 같은 데서 윤시내의 라이브도 보고, 사계절 같은 팀도 봤어요. 윤시내 씨를 보고는 ‘저 사람이 “나는 열 일곱 살이에요” 노래 부른 사람이 맞나’ 싶기도 하고.(웃음) 사계절은 혼 섹션이 있으면서도 시카고 같은 브라스 록이 아니라 독특한 스타일이었죠. 프로 팀이고 역사에 남을 사람들 아닙니까. 정말 잘 했죠. 연주력만 놓고 보면 우리는 정말 상대도 안 됐지. 그 외에도 나이트 클럽 같은 데서 유명한 팀들의 연주를 보면서 프로로서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됐죠. 사실 활주로 구성원들 중에서 저, 라원주, 한달연 빼면 나머지 친구들은 그다지 적극적이거나 프로페셔널의 마인드가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취미활동으로 하는 멤버들과 그렇지 않은 멤버들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Q: OX가 일종의 아지트였던 셈인데, 당시 OX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또 신촌에서 OX 외에 다른 곳은 특별히 드나든 곳이 없는지, 혹시 홍익대의 구창모 님을 만나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 OX는 지금은 없어진 이대 앞 육교 근처에 있었어요. 그때 있던 것들이 지금은 싹 없어졌지만, 지금도 약도를 그리라면 그릴 수 있어요. OX는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녀석들이 모이는 장소였죠. 조그맣고 깜깜했고, 누구나 디제이를 할 수 있어서 음악도 자기 좋은 곡들 틀고. 탁자는 기껏 네 개 있었으니까 다 앉으면 열 여섯 명이란 말이에요. 모르고 와서는 쎈 음악, 희한한 음악을 많이 트니까 노래 듣다가 이상하다 하면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실 우리가 이전까지는 일정한 울타리 안에만 있었다가 OX를 드나들면서 대인 관계가 많이 넓어진 게 사실입니다. 신촌의 다른 장소로는 홍대 쪽에서 미술 하는 애들이 많이 들락거리며 막걸리를 마시던, 전유성 씨도 자주 온 으악새란 데가 있었어요. 또 홍대 쪽에 주로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많이 틀어주던 까딸리나라는 곳도 있었어요. 당시 신촌에는 그림 그리는 애들부터 시작해서 만화 그리는 애들, 음악 하는 애들 천지였습니다. 거기서 엄인호도 만나고 장끼들의 박동률도 만났어요. 박동률은 미 8군 무대 출신인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하면서 세상과 음악에 눈을 뜬 친구예요. 장끼들의 음반은 거의 역사적인 음반 아니겠어요? 결과적으로 신촌파 친구들은 우리한테 별 영향을 안 받았는지 몰라도, 우리는 신촌 특유의 스피릿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예술가적 분위기, 히피 분위기 같은 것. 자기 개성대로 머리 기를 놈은 기르고 짧은 놈은 짧고. 다른 동네에선 술 먹고 행패부리면 보통 말리지만, 이 동네 애들은 신경을 안 쓰는 식이었어요.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김현식이나 그쪽 친구들 음악에 묻어 있는 거예요. 우리도 계보상 신촌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신촌의 그런 스피릿을 차용했다고 볼 수 있어요. 오히려 들국화 같은 친구들은 신촌 주류가 아니어서 잘 섞여들지 않았으니까 잘 몰라요. 조덕환은 예외였는데 우리랑 가깝게 지냈죠. 구창모는 나하고 동갑이고 해서 1978년 이후에 친구가 되었는데, 신촌 쪽 친구들이 홍대 쪽도 왔다 갔다 하니까 자연히 교류가 있게 된 측면도 있지만,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나중 일이죠.

Q: 활주로 멤버들이 신촌에서 공연도 했을 것 같은데요.
– 1974년에 아현동 부근에 민예 극장이라고 있었어요. 직접 그린 5백원 짜리 티켓을 팔아서, 라이브 콘서트를 연 적이 있죠. 당시에는 웬만하면 리사이틀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외국 판을 많이 들어서 콘서트라고 한 거예요. 저랑 라원주, 한달연의 3인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음악 알기를 우습게 알고 3인조 편성으로 겁도 없이 콘서트를 한 거예요. 마운틴이나 딥 퍼플, 크림(Cream) 등의 곡을 연주하고 엽전들의 “미인”도 커버한 기억이 나네요. 허가 받고 공연한 게 아니라서 금지 곡 따위에는 구애받지 않았죠. 신촌을 굴러다니는 백수들이 다 모여서 히피들 하는 식으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즐기는 식이었습니다. 재미로 한 측면도 있지만, 사실 술 값 좀 벌려고 한 측면도 있고. 콘서트 끝나고 바로 술집에 가서 다같이 술 마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 때 게스트 보컬이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양희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노래 잘 하는 여자 보컬이었는데.

Q: 신촌과 교류하신 게 1975년을 전후한 시점이라면 금지곡이 양산되고 대마초 파동이 벌어진 시기와 겹치는데요. 신촌 분들에겐 당시 별 타격이 없었나요.
– 1975년 12월쯤에 대마초 단속이 시작된 것 같네요. 대마초야 그 당시에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쯤 해봤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촌도 대마초 파동으로 사람들이 없었어요. 잡혀가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아마 거의 다 잡혀갔을 거예요. 음악, 만화, 미술, 문학 작가들 죄다 그 동네 있었으니까. 한동안 분위기가 좀 썰렁했어요. 물론 잡혀간 애들은 거의 다 한달 있다가 풀려났어요. 그리고 나서 대마초가 막걸리나 소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계속 대마초 하는 애들도 있었고, ‘대마초는 약해’ 이러면서 독버섯으로 엑기스를 만들었던 친구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Q: 이후의 활동을 살펴보면 보통 신촌파에 속하는 분들은 방송이나 주류 시스템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활주로나 송골매와는 그런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김현식 같은 경우를 보면, 그 친구도 1980년대까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잖아요? 외람 된 얘긴지 모르겠는데 1981년인가 내가 송골매에서 활동하던 때 방송국에 갔는데 김현식도 왔더라구요. 그런데 완전히 술에 떡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저 녀석 아직도 저러고 있나? 왜 저러나’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게 좀 다른 점이죠. 우리의 경우는 오버로 방향을 정했으면 그에 맞는 시스템이 있으니까 체제에 순응했다고 할까, 시스템에 맞게 활동을 했는데, 그 친구는 시스템에 적응이 안 되는 거죠. 좋게 말하면 자유스러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시스템에 적응을 못 하는 것이고.

“한국적인 것을 지향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참고했고 작품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힌트를 얻은 거지요”: 활주로, 자작곡, 가요제, 독집

Q: 활주로가 자작곡을 부른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 그 당시는 어떻게 하면 외국 것과 똑같이 할까 하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하기보다는 우리만의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싹텄던 듯합니다. 이제부터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의 탄생 비화가 나옵니다. 1975년에 (배)철수 형은 ROTC를 사정상 그만두고 육군에 입대한 상태였고, 나도 군대 가려고 휴학을 했고 영장도 나왔는데 가기가 싫어서 집에서 벽보고 있었습니다. 라원주는 가까운 데 살아서 가끔 놀러왔는데, 한창 날씨가 덥던 어느 날 라원주가 대낮부터 소주를 사왔어요. 한잔씩 마시면서 기타를 치다가 라디오를 틀었는데, 임성훈 씨의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하는 그 노래(“시골길”)가 딱 나오는 거예요. 멜로디도 그렇고 가사도 너무 단순해서, ‘이런 게 작곡이면 우리도 하겠다'(웃음)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갖고 있던 김소월 시집을 뒤적이다 저녁 노을을 보면서 ‘나는 세상을 모르고 살았노라’ 운운하는 시를 읽는데 느낌이 좋더라구요. 필이 와서 그 자리에서 가사를 만든 거죠. 가사를 잘 보면 원래의 시랑 좀 다를 겁니다. 여기에 라원주가 그 자리에서 곡을 붙여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가 완성된 거예요. 물론 처음 만들 때는 나중에 활주로 음반에 실린 것 같은 강한 음악은 아니었고,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 스타일의 소프트한 포크 록 스타일이었죠. 물론 통기타로 연주한 것은 아니고 록 밴드 편성으로 무대에서 연주했지만, 제대로 된 리프를 넣는다거나 하드한 록 스타일로 연주한 것은 나중 일입니다. 활주로 역사상 최초의 곡일텐데, 임성훈 씨 노래에 열 받아서 만들었다는 게 우습죠. 사실 곡을 잘 들어보면 임성훈 씨 노래와 코드 진행이나 곡의 흐름에서 유사함을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노래 듣다가 즉석에서 만든 거니까요. 나중에 그 곡이 그렇게 뜰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Q: 저희가 보기에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의 노랫말에 다소 삐딱한 면이 있는 것 같던데요. 이런 건 당시 신촌 분들과 교류한 영향 때문이라고 봐도 될까요.
– 그와 관련해서 한 가지 불만을 얘기하고 싶어요. 평론가들이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는 저항적이라고 평가를 하는데, 활주로 노래에 대해서는 그런 면에서 언급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도 일종의 시대상을 이야기하는, 조금 염세적이고 요즘말로 안티적인 발상에서 만들어진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만든 “탈춤”도 그렇고, 다 일종의 메타포란 말이죠. 활주로의 노래 중 몇 곡은 심의가 안 나서 바꾼 것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시대를 반영하기 위해 장치를 이용해서 만든 노래인데, 활주로 노래의 가사는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평론가들도 과문한 탓인지 그걸 못 짚어 내더라구요. 겉으로 대놓고 ‘나는 반항하겠다!’하는 식의 직설적인 곡들만 얘기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래요. 잘 살펴보면 당시에 그런 노래들이 많이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가요 형식을 빌리되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Q: 그렇게 활주로 최초의 ‘역사적’인 곡을 남긴 채 군대를 가게 됐군요. 군 생활을 하시는 동안 활주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 육군에 가면 괜히 보병으로 보직이 떨어질까봐 일부러 지원해서 공군으로 갔어요. 1976년 6월에 입대해서 1979년 4월에 제대했습니다. 참고로 (배)철수 형이 1975년, 제가 1976년, (라)원주가 1977년에 연이어서 입대를 했어요. 요즘 친구들은 음악 하면서 군대 핑계를 많이 대는데 군대 때문에 음악하기 힘들다는 건 정말로 핑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Q: 그럼 이응수 님께서는 군대에서 ”77 mbc 제1회 대학가요제’를 보셨을 것 같은데,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혹시 “탈춤”의 탄생 비화 같은 것은 없으셨는지요. 1978년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연이어 입상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탈춤”이 한국적 정서(의 록이란) 측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런 정서를 드러낸 이응수 님의 가사는 어디서 영감을 얻으신 건지도 궁금하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 공교롭게도 군대 있을 때 (배)철수 형은 산에 있었고 저는 그 밑의 비행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수 형이랑 가끔 만나서 같이 술도 마시고 했는데 대학가요제 이야기도 했을 겁니다. ‘무슨 희한한 음악을 갖고 대회 한다. 저런 곡 가지고도 출전하는데 우리가 못할쏘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네요.(주: 1회 때는 기성곡을 불러도 무관했다.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나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 같은 곡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탈춤”의 탄생비화라면, 아까 신촌 민예 극장 얘기를 했죠? 거기 드나들 때 극단 친구들이 창극 <별주부전>을 연습하는 걸 볼 기회가 있었어요. 창극에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만고강산 유람할제~’ 하는 식으로 국악도 아닌 노래를 합창하는데, 뭔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느낌을 받았죠. 라원주가 구성을 연구하려고 그걸 녹음해서 멜로디를 따고는 했어요. 당시에 누가 그런 노력을 하겠습니까? 아무튼 속을 파고드는데 멜로디가 묘해요. 국악도 아니고 팝도 아닌 경계선에 있는 모호한 느낌이죠. 만약 창하는 사람들이 하면 창으로 나오겠지만 그 친구들은 연극하는 사람들이고 다들 젊으니까 다른 결과가 나왔던 거죠. 그 창극을 보면서 라원주가 가사도 따고 멜로디도 따서 그런 느낌의 곡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일종의 계기일 뿐이고, 진짜로 음악에 반영한 건 나중의 일이죠. 또 중요한 것은 1974-75년경 대학가에 김민기 씨를 시발점으로 해서 일종의 무브먼트 같은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 전통 음악이나 전통 예술에 관심을 갖고 반영하는 현상이라 할까요. 나도 그걸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책도 보고 가사도 쓰고 했으니까. 또 군대 있을 때 부대에 있던 시집 1백 여권을 독파하기 시작하다 [문학사상]이란 잡지의 ‘한국의 탈’ 특집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탈이라는 것이 단순히 가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이 들어있고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내용이었고, 인형극을 다룬 테마도 있었어요. 이런 얘기들이 아주 흥미로워서 남아도는 시간에 좀더 파고들다가 그걸 테마로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이르게 된 거예요. 그래서 1977년도 즈음에 “탈춤”, “탈”, 나중에 그룹 신(新)이 발표했던 “마당” 같은 가사를 쓰게 된 거죠. 아무튼 이 때부터 한국적인 부분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그것만을 지향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참고했고, 작품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힌트를 얻은 거지요.

Q: 이응수 님은 [청구영언]도 즐겨 읽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가사를 쓰실 때 신중현 님의 한국적 록 음악을 염두에 두신 측면이 있나요.
–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책을 전집으로 팔곤 했잖아요? [청구영언]은 아버지가 전집을 사 갖고 오셔서 보게 된 거죠. 그런데 그보다 이어령 씨가 쓴 [한국과 한국인]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청구영언 같은 것들이 재미있게 해설되어 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텍스트를 중학교 때부터 접하게 되니까 잠재적으로 의식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 활동에 있어 하나의 소스가 되었다고 봐야죠. 신중현 씨의 얘기는 별 관계없는 얘기인 것 같네요. 한국적 록 같은 문제는 떠나서, 다른 사람들은 탈춤이나 탈 같은 것에 접근하지 않잖아요. 신(新)민요도 그렇고 가요도 그렇고 죄다 사랑타령이죠. 저는 탈춤, 탈, 이런 것들에 대해 영적으로 접근해 가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평론가들은 한국적 록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난 그렇게 직선적으로 결합하는데는 흥미가 없어요. 음악 자체는 밴드의 록 음악이지만, 우리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모토를 가진 것뿐이에요. 누구에게 영향을 받은 바는 없어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가 김소월 시에서 따온 것이지만, 김소월의 영향은 그걸로 끝이거든요. 그 당시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해야겠다 해서 사용한 것이지 김소월 시가 좋아서 쓴 것은 아니니까.

Q: 이응수 님의 가사를 보면, 음보율이나 음수율 면에서 전형적인 듯하면서도 자연스럽습니다. 즉 라임(rhyme)을 살려서 작사하신 것으로 보이는데요. 보통 가사를 먼저 쓰고 곡을 붙이는 편인가요, 아니면 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편인가요.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임이란 게 팝 음악에서는 ‘거의’ 지켜지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노랫말에는 라임이 없어요. 저는 가사를 만들면서 라임이라는 개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한 편이에요. 운율에는 내재율과 외재율이 있는데, 가사는 시와 달라서 외재율의 비중이 더 크죠. 그것을 의도한다기보다는 최대한 염두에 둔다는 이야기죠. 저는 곡 만들 때 거의 가사를 먼저 쓰고 곡을 붙이는 편입니다. 라원주나 배철수 형도 다 가사 먼저 쓰고 곡을 붙이는 식으로 했죠. 활주로와 송골매가 발표한 곡이 100곡도 넘잖아요? 그 곡들이 거의 다 가사의 이미지에 의해서 곡이 만들어진 거예요. 멜로디가 먼저 나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가사가 먼저 있으면 이미지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이미지가 떠오르면 편곡이나 이런 것도 ‘여기선 어떤 스타일로 리듬은 어떻게’ 식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다만 가사를 쓰고 한참 뒤에 곡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가사를 쓴 뒤 바로 곡이 나와서 붙이는 경우가 있죠. “탈춤”의 경우는 전자입니다.

Q: 다작은 아니시지만 작곡하신 작품을 보면 음악 스타일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가령 “지금 내 마음”은 블루스 풍이고, “오늘 따라”는 전형적인 활주로 스타일이고, “하다못해 이 가슴을”은 하드 록에 가까운데요. 개인적으로 어떤 스타일이 가장 만족스럽습니까.
– 그 곡들 말고도 작곡을 많이 했어요. 가요도 발표하고 광고음악도 조금 하고 같은 프로의 음악도 만든 적이 있고. 또 1980년대 이후에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그 곡 저희가 갖고 갑니다’ 해서 가져간 곡도 꽤 있습니다. 나중에 이봉환 씨가 리메이크 하기도 한 “오늘 따라” 같은 경우엔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곡입니다. 그런데 곡 만든 사람이 만족하는 건 상관없죠. 작곡이란 건 내가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팀이나 음악적 컬러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Q: 활주로는 편곡 시스템이 어떻게 되나요. 공동 작업인지 아니면 주도한 멤버가 있는지.
– 편곡은 각자 자기 파트를 맡았으니까 공동 작업이라고 봐야겠죠. 신중현 씨 때야 혼자 다했다지만, 우리 때는 그런 건 넘어간 단계니까요.

Q: 사소한 질문인데, TBC 해변가요제에서 입상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가 활주로 1집에 실리지 않은 이유는 판권 때문인가요?
– 그렇죠. 원래 MBC가 대학가요제의 음반 판권을 가지잖아요. 이건 요즘도 그래요. 그러면 설령 녹음을 달리 하더라도 그 곡에 대한 권리는 MBC가 당분간 갖는 거지요. 요즘에는 그런 문화는 상상도 못하는데… 그러니까 그 곡 자체의 권리는 개인에게 있지만 그 곡을 녹음해서 파는 행위는 방송사에 있는 거예요. 그 곡이 송골매 1집에 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앨범만 해도 벌써 1년이 지나고 만든 음반이니까 가능했던 거죠. 옛날엔 작사가, 작곡가들이 그렇게 휘둘리면서 살았어요. 1987년도 6월 달인가 그때부터 저작권법이 만들어지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Q: 활주로 연주에서 베이스 기타의 움직임이 활발해 보이는데, 특별히 영향을 받은 베이시스트가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 제가 1974-75년도에 거의 초보 단계부터 베이스를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러다 3년간 군대에 갔다 오고 송골매를 하면서 다시 잡은 거니까 공백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베이스를 전문으로 오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듣고 익히지는 못했어요. 늘 듣던 마운틴 음악을 커버해서 연습하고 그랬죠. 제가 멜로디 위주의 베이스 연주를 좋아했는데 마운틴의 베이스가 멜로디 위주거든요. 또 유라이어 힙 라이브에서 보면 베이스가 막 날아다니는데 그것도 멜로딕한 연주거든요. 그런 영향을 좀 받지 않았나 싶네요. 그래도 직업적인 연주인은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한 곡 가지고 아홉 번이고 열 번이고 연습하긴 하는데 정말 죽겠더라구요. 베이스 기타도 없어서 나중에 녹음할 때는 김국현(당시 블랙 테트라 베이스)이 쓰던 재즈 베이스 빌려서 사용했어요. 저는 체질상 피나게 연습하는 것보다는 머리 좀 쓰면서 쉽게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배철수 형도 “연주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 적도 있고. 20031006 | 이용우 [email protected]

이응수와의 인터뷰(2)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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