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3년 9월 18일
장소: 대구대학교 연구실과 [weiv] 상수동 사무실 사이
질문: 신현준
정리: 신현준

1977년 9월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의미심장한 파란이 발생했다. 다름 아니라 ‘제 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린 것이다. 이 대회는 이후 다른 방송국에서 연이어 만든 대학생들의 가요제와 더불어 대마초 파동으로 얼어붙었던 한국 대중음악에 한줄기 빛을 비춘 행사였다. 비록 ‘관제 행사’라는 일부의 비난이 있었지만 초기 몇 년 간 대학가요제는 ‘순수 아마추어의 경연대회’라는 취지에 충실했다. 대학가요제의 ‘이후’와 ‘현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다른 자리로 미루기로 하자.

그 점에서 이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서울대 농대의 캠퍼스 그룹 사운드인 샌드 페블스는 ‘아마추어의 순수성’의 상징같은 존재다. 이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이들을 실력으로 평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무엇보다도 샌드 페블스가 이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나 어떡해”(김창훈 작사·작곡)는 ‘한 시대의 송가’라고 불러서 손색이 없다. ‘지상파 방송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마추어 그룹 사운드가 연주한 곡이 하룻밤 사이에 이 정도의 파란을 일으킨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샌드 페블스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린 존재였다. 달리 말해 샌드 페블스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산울림, 런웨이(활주로), 블랙 테트라(열대어), 블루 드래곤(청룡), 휘버스(열기들)도 낯익게 되었다.

현재 대구의 한 대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살고 있는 이영득은 ‘1977년 9월 혁명’의 주역이었다. “나 어떡해”에서 ‘생톤’의 깔짝거리는 스트러밍과 정성스러운 아르페지오에 이어 퍼즈 기타의 솔로를 선보였던 인물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보컬을 맡은 여병섭에게 맞추어졌지만, 방송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 ‘록 음악다운’ 사운드를 선보인 주역은 이영득이었다. 물론 이렇게 개별 인물이 아니라 그룹 전체가 조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샌드 페블스는 대중음악의 관점에서는 ‘원 히트 원더’일 것이다. 대학교 시절, 그것도 1년 동안만 활동하는 원칙으로 인해 그것 이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적 음악적 실천이 소멸해 버린 듯한 지금 아마추어가 성공했던 희귀한 역사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는 일은 그 자체 흥미롭다. 물론 공식 활동을 그만 둔 뒤 그가 했던 여러 비공식 활동을 통해 이런저런 뒷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전화로 이루어졌다. 녹취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친절하면서도 조리있게 답변해 주어서 정리를 쉽게 만들어 주었다. 감사드린다.

“학장회의에 초대받아서 교수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죠”: 197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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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mbc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난 후. 왼쪽부터 최광석(키보드), 이영득(리드 기타, 리더), 여병섭(싱어), 김영국(드럼), 김민수(베이스 기타).

Q: 시간 순서대로 질문하지 않고 샌드 페블스(6기)를 기념비적 존재로 만든 사건인 1977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이하 ‘1977 대학가요제’로 약에 대해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떻게 정보를 얻고 참여하게 된 것인가요?
– 제 1년 선배인 김창훈 형이 대학가요제가 열린다는 정보를 가지고 저희(샌드 페블기 6기)에게 참가를 권유했습니다. 아마 그때 김창완 형님이나 김창훈 형은 만들어 놓은 곡이 100여곡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 곡인 “나 어떡해”를 우리들에게 한 번 해 보라고 준 것이죠. 그때 (김)창훈 형이 샌드 페블스의 대표(주: ‘대표’란 한 학년 위의 선배가 맡는 ‘매니저’같은 역할이다)를 맡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죠.

Q: 1977년 당시 예심은 어떻게 보았던 것인지요? 또 참가한 팀 가운데 그룹 사운드(록 밴드)의 비중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그리고 참가 팀 가운데 창작곡을 연주한 비중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곱 팀이나 여덟 팀 정도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대학가요제 참가자격이 창작곡이었습니다. (1977년에는 기성곡으로 참여한 팀도 꽤 있었는데요?) 그런가요? 아무튼 저희는 창작곡으로 참여하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Q: 김창완 님과 김창훈 님에 의하면 산울림이 대학가요제 예선 때 무이(無二)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여 “문 좀 열어줘”를 연주했다고 하고, 예선에서 무이가 1등, 샌드 페블스가 2등을 차지했다고 들었습니다. 단, 김창완 님이 이미 대학을 졸업한 신분 때문에 본선에 나가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만…
– 제가 알기로는 산울림의 전신인 무이는 예선에서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좀 열어줘”를 연주할 때 예선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피식 웃었습니다.(주: 산울림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면 웃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Q: 1977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학교측의 대우가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 일단 대상을 차지한 뒤 저희 기수의 멤버 전체가 전체 교수회의에 초대받아서 교수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습니다. 둘째는 대학가요제 참여하느라고 결석했던 것을 모두 출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써클룸(연습실)에 방음장치를 해 주더군요. 그전까지 ‘시끄럽다’는 평을 들었던 샌드 페블스가 학내 써클로 정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죠.

Q: 대학가요제가 열린 것이 9월이니까 그러면 그 뒤의 활동은 어떠셨나요?
– 10월 경에 남산 드라마 센터(현 서울예대 자리)에서 단독 공연, 그때 말로 리싸이틀을 했습니다. 한 700석 정도 되는 곳이었죠. 이 공연도 ‘기획사’같은 것을 끼고 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드라마 센터를 대관해서 독립적으로 추진한 것이었죠. 포스터도 직접 우리가 부쳤고…. 공연 때 사람이 미어터졌습니다.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전에 했던 학교(서울대 농대) 대강당(1,400석 정도인 곳인데)에서 가졌던 리싸이틀과 함께 이 두 번이 샌드 페블스의 단독 공연이었던 셈이죠. 1977년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무대를 76회 섰습니다.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다음에는 방송 출연 요청도 많아서 방송에도 자주 나갔었고… 1978년부터는 저희 기수(6기)의 공식적 활동은 없었습니다. 물론 비공식적 활동은 몇 번 더 있었지만.

Q: 그렇다면 1979년 3월에 ‘화랑(花郞)’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샌드 페블스 6기 독집’은 비공식적 활동이었다는 말씀이신지요?
– 예, 그렇습니다. 샌드 페블스는 기본적으로 ‘2학년 때 1년 동안’ 활동하는 것이 내부의 원칙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 세대들이 C.C.R. 세대라면 우리는 딥 퍼플 세대죠”: ‘팝송 세대’의 성장기

Q; 샌드 페블스(화랑)의 독집 음반을 포함해서 ‘1978년 이후’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더 과거로 돌아가서 이영득 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먼저 성장기에 어떤 음악을 듣고 즐기셨는지요?
– 제가 중학교 ‘또뽑기 1세대'(주: 무시험 추첨으로 진학할 학교를 배정하는 것을 말한다)라서 중학교는 명문이라고 말하기 힘든 학교를 나왔고, 고등학교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때 유행했던 팝송은 빽판이나 라디오로 많이 들었죠.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C.C.R.이나 산타나(Santana) 세대라고 한다면, 우리는 ‘딥 퍼플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딥 퍼플(Deep Purple)이나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funk Railroad)같은 하드 록을 많이 들었죠. 그리고 하드 록과는 좀 다르지만, 아메리카(America)의 “Sister Golden Hair”같은 음악도 많이 좋아했습니다.

Q: 음악을 들은 것 외에 직접 음악 활동을 하신 경험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요? 특히 기타를 치게 된 것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였는지요?
–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한 사람에 악기 하나씩 연주할 줄 알아야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피아노는 자신이 없으니까 기타를 잡게 되었죠. 클래식 기타와 통기타(어쿠스틱 기타)를 치다가 결국은 그룹 사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물망초(Forget-me-not)이라는 이름으로 경기고와 경기여고 연합 써클을 만들어서 정동에 있는 젠센(Jensen) 기념관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때 모임의 하나로 음악발표회를 했는데 그때 그룹 사운드를 만들어서 연주했습니다. 그때도 팝송을 연주하고 노래했습니다.

Q: 하드 록을 포함한 ‘팝송’ 외에 국내 대중음악은 어떤 것을 좋아하셨는지요? 예를 들어 신중현의 그룹들이나 키 보이스, 히 식스, 트리퍼스, 템페스트같은 그룹 사운드의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당시 이 그룹들도 어느 정도 인기를 누렸던 시기인데요?
– 국내 그룹 사운드에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히트곡으로 알려진 곡들을 들어 보면 외국의 하드 록 음악에 나오는 기타 솔로같은 부분도 없어서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왠지 국내 그룹 사운드는 ‘트로트와 비슷한 음악’으로 간주했던 것 같습니다.

Q: 국내 그룹 사운드는 대단치 않게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포크송’ 계열의 음악은 좋아하셨는지요?
– 오히려 포크송은 좋아했었죠. 이장희, 송창식, 김민기같은… 그래서 친구와 둘이서 송창식의 곡을 한 명은 코드 잡고 반주하고, 한 명은 좀 어려운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식으로 기타 두 대로 치면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Q: 이영득 님이 고등학교를 다닌 시절(1973~1975)이면 이장희, 송창식 등이 전성기를 누린 시기이고 이들의 음반에서 연주를 해준 동방의 빛(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의 사운드가 자주 울려나왔던 시기입니다. 혹시 강근식 님의 기타 연주가 당시 고등학생 기타 키즈에게 영향을 미친 것도 있나요?
– 강근식 씨는 물론 그때 알고 있었죠. 기타를 참 잘 친 분입니다. 그렇지만 그 분은 스튜디오 세션 뮤지션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룹을 만들어서 기타를 치던 고등학생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서울 스튜디오에 샌드 페블스의 음반을 녹음하러 가 보았더니 기타를 엄청 잘 치는 세션맨이 계시더군요. 아티스트는 아니고 테크니션이지만 그거 보고 저는 프로페셔널로 활동할 생각을 접었죠(웃음). 아무튼 1976년 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해서 신입생 환영회 때 친구 한 명과 함께 부른 곡도 송창식의 곡(지금 갑자기 생각하려니 곡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이었습니다. 그게 샌드 페블스 선배들의 눈에 띄어서 ‘야, 저 놈 불러와’ 이런 식으로 된 것이죠.

Q: 그 당시 음악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은 음악감상실 같은 곳에 놀러 다니던 일은 없는지요? 그런 곳에서 함께 어울려 놀던 사람이 있다면 누구였는지요?
– 고등학교 때까지는 음악감상실 같은 곳에 다닌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 다닐 수가 없었던 것 같네요. 단, 대학교에 들어간 뒤 수원의 팔달문(보통 남문이라고 부릅니다.)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 다방’이라는 좋은 음악감상실이 있었습니다. JBL 스피커가 있는 음향장비가 굉장히 좋았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수원에서 음악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은 그곳에 많이 찾아가서 음반으로 틀어주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하도 볼륨을 크게 트니까 30살이 넘은 사람들은 감히 찾아오지 못하고 젊은 사람들만 찾아오는 곳이었죠. 저도 그곳에 자주 갔었습니다.

“그때 대학생들이 놀 때는 생음악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77년 샌드 페블스의 공식 활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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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샌드 페블스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그 당시 서울대 농대의 전반적 문화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 저희 뒤부터는 서울대 농대에 입학하면 1학년 때는 관악 캠퍼스에서 교양과정을 이수한 다음에 2학년 때 수원 캠퍼스로 왔는데 저희 때는 1학년 때부터 수원 캠퍼스에서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수원 캠퍼스에 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조용하고 폐쇄적인 분위기이고 때로 심심하기도 한 분위기이죠. 그대신 단합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겠죠. 샌드 페블스가 팀웍이 좋고 선후배간 관계가 돈독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Q: 샌드 페블스의 선배들에 대해 여쭈어 보겠습니다. 특히 2기의 멤버가 눈에 띄는데 이수만 씨야 워낙 많이 알려진 분이라서 별도의 질문이 필요없겠지만, 김영민 씨 같은 경우 캠퍼스 출신 그룹 사운드의 효시라고 할 만한 스푸키스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김영민 선배는 72학번이고 샌드 페블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스푸키스에서 활동했던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스푸키스는 여러 대학에서 멤버를 모아 구성했기 때문에 샌드 페블스같은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는 조금 다르죠. 그리고 스푸키스는 아마추어 그룹라기보다는 준(準) 프로 그룹이라는 점도 우리와는 다른 점이겠죠. 알고 계시지만 스푸키스는 기본적으로는 박성원의 백 밴드였으니까요.

Q: 스푸키스가 1973년 여름 TBC에서 주최하고 연포에서 열린 ‘캠퍼스 보컬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샌드 페블스는 참여하지 않은 것인지요? 이 대회 외에도 ‘1977년 대학가요제’ 이전에 샌드 페블스가 참여했던 경연대회 형식의 대회는 없었는지요?
– 제가 샌드 페블스 활동을 할 때는 아니지만 그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게 확실합니다. 그 대회도 순수 아마추어들의 경연대회라기보다는 준프로급 그룹들이 나온 대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1976년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에서 열린 캠퍼스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샌드 페블스가 나가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저희보다 한 기수 위의 선배들인 샌드 페블스 5기가 나갔었죠. 이 대회는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별로 그룹 사운드가 출전했는데 에코스나 엑스타스같은 이름의 그룹들이 모두 나왔습니다. 다른 그룹들은 멤버 수가 9명에 육박했던 게 기억납니다. 뭐 그리 멤버가 많이 필요했는지…(웃음)

Q: 샌드 페블스의 일상적인 활동에 대해 묘사해 주십시오. 먼저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악보나 교본같은 것이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구했는지요?
– 저희 6기 멤버들 가운데 악보의 콩나물 대가리를 볼 줄 아는 사람은 키보드를 치던 최광석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멤버들은 음반을 듣고 직접 ‘따서’ 연주하는 식이었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합주를 했습니다.

Q: ‘서클룸’이자 ‘연습실’의 위치나 규모는 어땠는지요? 아울러 악기나 장비 수준은 어땠습니까?
– 써클룸이자 연습실이었죠. 처음에는 학교 캠퍼스에서 제일 외진 곳에 콘센트라고 부르는 미군들이 쓰다 버린 양철로 된 간이 막사에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학교 측에서 건물을 지어 주었습니다. 악기나 장비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때 ‘대표’를 맡은 (김)창훈 형이 참 짠돌이였습니다. 그때 교외에서 연주를 하면 한 5만원 정도를 받았고, 교내에서 연주를 하면 1만 5천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창훈 형이 저희한테는 5천원 쯤밖에 안 주고 그걸 다 모으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시작할 때는 앰프가 세 개 정도밖에 없었는데, 저희가 다음 기(7기)에 물려줄 때는 앰프가 7개로 늘어나더군요.

Q: 교외에서 연주했다는 것은 주로 어떤 무대였나요? 혹시 ‘업소’에서 연주하신 일도 있었는지요?
– 주로 다른 대학교의 축제 때 초대받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판(음반)을 틀어 놓고 노는 게 참 낯설 때였습니다. 대학생들이 놀 때는 생음악이 필수적이었던 때였죠. 그렇다고 대학생 축제 때 프로페셔널 그룹을 부르면 분위기가 영 맞지 않으니까 저희같은 캠퍼스 그룹들이 많이 초대를 받았던 것이죠. 그때는 강한 사운드로 팝송(주로 하드 록)을 연주해야 잘 놀던 때였습니다. ‘업소’에서 연주했던 일요? 한번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저희 기수(6기)의 공식적 활동이 끝난 다음의 일입니다. 성남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3일 정도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Q: 샌드 페블스의 경우 ‘정기발표회’ 형식의 공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정기발표회는 어디서 했는지요? 또 공연을 보러온 청중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요?
– 정기발표회는 1년에 한 번 했습니다. 서울대 농대의 대강당에서 했는데 그곳이 정확히 1,442석인 곳인데, 객석이 꽉 찼습니다. 사실 이 강당이 꽉 차는 때는 1년에 단 한번, 샌드페블즈 공연때뿐이었습니다. 본교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보러올 수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Q: 발표회나 기타 무대에서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했는지요? 김창훈 님의 기수(5기)에서는 “We’re an American Band”, “Black Diamond”, “Sun Rise”, “Who’ll Stop the Rain” 등을 했다고 합니다만…
– 그랜드훵크 레일로드의 “We’re an American Band”와 키스(Kiss)의 “Black Diamond”는 저희 기수에서도 많이 했습니다. C.C.R.의 “Who’ll Stop the Rain”같은 곡은 저희 기수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Simple Man”, 유라이어 힙(Uriah Heep)의 “Easy Living”같은 곡을 즐겨 연주했고, 나자레쓰(Nazareth)의 “Love Hurts”나 레인보우(Rainbow)의 “Temple of the King”같은 느린 곡도 몇 개 연주했습니다. 산타나의 “Evil Ways”도 한번 연습해 보았는데 중간에 키보드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포기했습니다(웃음).

Q: 기타 모델은 어떤 걸 사용했나요? 그리 값비싼 모델을 사용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만…
– 실버톤(Silvertone)이라는 일제 모델을 사용했습니다. 대학가요제에도 그걸 들고 나갔고 음반을 녹음할 때도 그 모델로 연주했습니다.. 나중에 펜더 스트래토캐스터를 장만해서 찬조 출연을 할 때는 펜더를 썼죠.

Q: 1977년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를 연주할 때도 그랬고, 뒤에 화랑의 음반에서도 “달려라”같은 곡에서는 퍼즈 이펙트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특히 기타 솔로가 있는 부분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캠퍼스 그룹들에서 이펙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전반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 그때는 요즘처럼 페달을 몇 개 이어 놓고 이펙트를 구사한 것도 아니고 한 두개를 사용했습니다. 퍼즈와 와와(주: 이영득 님은 당시 발음하던 대로 ‘와우’라고 발음했다)를 많이 사용했죠. 그런데 저는 와와는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퍼즈의 경우는 그걸 써야 기타를 잘 못 치는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죠 하하.

Q: 화랑의 음반에 수록된 “오직 그대만을”이나 “난 영원한 소녀”에서는 당시로서는 듣기 힘든 이펙트 소리가 들리는데 플랜저나 코러스를 이용한 것인가요?
– 아, 그건 플랜저나 코러스가 아니라 페이저입니다. 1977년에 샌드 페블스 활동하면서 조금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장만한 것이었죠. 당시로서는 페이저 같은 이펙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Q: ‘기타리스트’로서 외국의 기타리스들 가운데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었나요?
– 저희가 활동할 때가 ‘빨리 치는’ 것이 잘 치는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가 그때 기타 치던 사람들의 목표였으니까요. 저희는 아마추어 그룹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게 빨리 치는 것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기타리스트는 윙스(Wings)의 데니 레인(Denny Laine)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기타도 좋아했구요. (주: 윙스는 1970~80년대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그룹이었고, 이 곳의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은 1960년대 후반 무디 블루스(The Moody Blues)의 기타리스트였다). 기타 연주에 멜로디감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죠.

Q: 샌드 페블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당시의 사회상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당시가 ‘유신체제’라서 캠퍼스의 분위기가 그리 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지면서 모든 써클(동아리)을 ‘학도호국단’ 산하에 두게 되었는데, 샌드 페블스의 경우 학도호국단 산하에 있다는 게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 글쎄요. 우리가 학도호국단 산하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룹 사운드를 한다는 자체가 반항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였고 저희도 (그때 기준으로) 장발을 하고 다니는 등 반항했던 면도 있지만, 그때 저희 세대는 한편으로 반항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순종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Q: 제가 대학교를 다닌 1980년대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에 대한 ‘운동권 대학생’의 시각이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비해서 1970년대 후반 일반 대학생들의 캠퍼스 그룹에 대한 시각은 어땠다고 생각합니다.
– 그랬다고 하더군요. 후배들에게 이야기 듣기로는 1980년대는 우리 때와는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반면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학생들이 캠퍼스 그룹 사운드가 연주할 때는 함께 즐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음악을 하지 않으니까 근질근질하고 미련이 생겼습니다”: 화랑(花郞)의 독집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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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페블스(화랑)의 데뷔 음반 뒷면에 실린 멤버들의 모습

Q: 1977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후 6기 샌드 페블스는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방송같은 곳에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특히 대학가요제가 해마다 개최될 때 ‘축하무대’에 올라서 연주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요… 아무래도 방송 전파를 탔기 때문에 유명세를 탔기 때문인 듯합니다만…
– 맞습니다. 일단 대상을 차지하다 보니 방송에서 자주 저희들을 불렀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 다음 기인 7기가 공식 활동을 하던 때인데 KBS-TV에서 저희 6기와 7기를 함께 불렀습니다. 그래서 연주하는 것을 녹화했는데 PD가 ‘너희(6기)가 연주하는 것만 방송에 내 보내고 7기가 연주하는 것은 내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느냐’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 안 된다. 그러려면 둘 다 내 보내지 말라’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은 우리가 연주하는 장면만 방송에 내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우리한테 항의를 많이 했죠. 그런데 왠 걸, 그 방송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보더니 “쟤들 뭔데 저렇게 장발을 하고 TV에 나오느냐”고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송국 PD가 징계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발 사건’이라고 우리 샌드 페블스 내에서는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Q: 방송 출연과 관련해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 아,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입니다. 일단 음악 활동을 모두 포기하고 ‘개과천선’해서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교수님들이 저를 보는 눈치가 영 이상하더군요. ‘딴따라’가 뭐하러 대학원까지 와서 공부한다고 그러느냐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대학가요제가 또 한 번 열렸고 저희 기수보고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나가야죠. 그래서 제가 방송에 나간 것을 교수님들이 혹시라도 볼까 봐 선 글라스를 끼고 나갔습니다(웃음). 다행히 별 일은 없었지만… 그때가 아마 1980년일 것입니다.

Q: 1980년에 접어 들면 비공식 활동도 모두 접고 ‘음악인’으로 나아가려는 계획은 포기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1979년 3월에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발표할 때는 아직은 비공식적으로 활동을 계속했다는 이야기인가요?
– 맞습니다. 참고로 저는 3학년 재학 중이던 1978년에 (김)창훈 형에 이어 샌드 페블스의 ‘대표’를 맡아서 후배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하지 않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더군요. 그때 이런저런 미련과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희 기수 멤버들 가운데 여병섭과 김영국의 경우 저보다도 음악을 계속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농교육과를 다니던 친구의 경우 졸업 후에 농고(농업고등학교)의 교사를 해야 하는데, 그룹 사운드를 했던 사람으로서는 재미없고 따분한 삶이라서 다른 길을 걷겠다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길을 모색하던 중 음반까지 발매하게 된 것이죠.

Q: 일단 확인해 둘 것 하나가 있습니다. ‘화랑’이 그룹 이름인가요, 아니면 앨범 제목인가요? 그룹 이름으로 짐작됩니다만 ‘샌드 페블스 6기’라는 부제도 붙어 있어서 혼란스럽습니다. 1978년 대학가요제의 축하 무대에 참여했을 때는 ‘모래와 자갈’로 소개된 일이 있는데 새 이름을 지은 것인가요?
– 화랑은 그룹의 이름입니다. 그때는 저희가 이미 활동을 끝낸 상태라서 샌드 페블스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새 이름을 만든 것이죠. 그런데 아무래도 화랑이라는 이름은 생소하니까 ‘샌드 페블스 6기’라는 것을 적어 놓았죠. 편법을 사용한 셈이죠.

Q: 앨범 발매를 기획하고 주선한 사람은 누구신지요? ‘예맥기획’이라는 프로덕션 이름과 대도레코드라는 음반사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만…
– 앨범을 기획해 준 사람은 저희 기수의 보컬을 맡은 여병섭의 매형입니다. 그분이 대도레코드에 계셨던 분인지 대도레코드와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그 분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주선했습니다.

Q: 화랑의 음반은 1978년에 열린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입상한 항공대학교의 활주로나 홍익대학교의 블랙 테트라의 음반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발매되었습니다. 오히려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활주로나 블랙 테트라의 음반이 나온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아도 될런지요?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 즉 배철수 씨나 구창모 씨는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에 참가할 때부터 연예계에 진출할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입상 직후 곧바로 앨범도 발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저희는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타진하는 정도였습니다.

Q: 이 앨범에는 대학가요제의 입상곡인 “나 어떡해”가 실리지 않았는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건지요? 김창훈 형이 곡을 주지 않으려 했다든가?(농담입니다^^)
– 그게 아니라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곡은 서라벌인가 어딘가에 판권이 팔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 어떡해”를 싣고 싶었지만 실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Q: “나 어떡해”가 최초의 창작곡을 연주한 것이라면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1977년 하반기 이후 1978년에 작곡된 곡으로 추정됩니다. 멤버 대부분이 한두 곡을 작곡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 맞습니다. 앨범을 만들어 보자고 결정한 다음 각자가 곡을 만들어서 가져와 보자고 말했죠. 작사나 작곡을 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Q: 곡이 만들어진 뒤 연습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 아까 말한 것처럼 저희가 업소에서 유일하게 연주한 것이 이때입니다. 곡을 만든 다음 연습을 겸해서 성남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딱 3일 동안 연주한 것이죠. 그런데 저희가 처음 가니까 다른 대학교 출신의 그룹은 세 달 동안 연주하고 있더군요. 처음 몇 번은 주인한테 타박을 들었습니다. 손님들이 춤을 추게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데 영 춤추기 힘든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일이 지나니까 나중에는 ‘더 있어줄 수 없느냐’고 요청하더군요.

Q: 녹음은 어디서 했습니까. 음질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매우 짧게 한 것 같습니다.
– 녹음은 저희가 3학년 겨울방학을 보낼 때, 그러니까 1978년 12월과 1979년 1월 쯤에 했습니다. 이촌동에 있던 서울 스튜디오에서 이틀 동안 녹음을 끝냈죠. 그때는 그룹의 음반이라면 한번에 합주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반주(악기 연주)는 한꺼번에 녹음을 끝마치고 노래만 더빙을 하는 식이었죠. 그래서 무대에서 직접 연주할 때는 참 좋았던 곡이 막상 음반으로 들어 보니 그다지 성에 차지 않더군요.

Q: 상업적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요? 산울림이 한참 인기를 높일 때라서 다소 ‘기대감’을 가지고 제작했을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불행히도 음반에서 ‘히트곡’이 나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 예, 히트곡이 나오지 못했죠. 하지만 “달빛 속에서(저 새)”같은 경우 나름대로 구성을 복잡하게 만들어 보려고 한 곡이고, 제가 작곡한 곡인 “달려라”도 애착이 많았던 곡입니다. “넌 영원한 소녀”는 후배들이 좋아해서 뒤에도 많이 연주한 곡이고, 13기가 1985년 유니세프 가요제에서 연주해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Q: 앨범을 발표한 뒤 방송이나 공연 등의 활동도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예,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순수 아마추어라는 샌드 페블스의 취지에 맞추어 본다면 음반을 낸 것이 잘 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로 만든 곡들은 후배들에게 주어서 연주하게 하는 것으로 끝냈어야 하는데 저희가 욕심을 부린 것이죠.

“원 없이 놀았다는 점에서 학창 생활을 참 잘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연예계’를 떠나 ‘학계’로

Q: 그렇다면 샌드 페블스 6기의 활동은 이 앨범을 내는 것으로 모두 그친 셈인데, 멤버들 가운데 드럼을 치던 김영국 님은 뒤에도 산울림의 김창완 님의 공연이나 음반에서 함께 활동한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요?(주: 1980년대 초 김창훈, 김창익이 군에 입대했을 때 김창완은 박동률, 유지연, 김영국 등과 함께 고장난 우주선이라는 그룹을 잠시 만든 일이 있다).
– 그건 아마도 찬조(게스트)로 참여한 것일 겁니다. 산울림의 막내 김창익이 드럼을 잘 못 쳤거든요(웃음). 그래서 (김)영국이를 불러서 드럼을 치게 한 적이 있는 정도일 겁니다. 사실 (김)영국이는 샌드 페블스 6기 멤버이지만 1학년 때부터 (김)창훈 형이 있는 5기 때부터 드럼을 쳤어요. 그때 5기에서 드럼을 맞던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빵꾸를 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영국이는 샌드 페블스 공식 활동을 1년 반 정도 한 셈이고, (김)창훈 형이나 산울림 멤버들과도 절친한 사이였죠.

Q: 지금 시점에서 회고할 때 당시 샌드 페블스에서 활동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샌드 페블스로 공식 활동하던 2학년 때 제가 과(科)에서 꼴찌를 했습니다. 하하. 3학년 때도 샌드 페블스 대표를 맡느라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구요. 그렇지만 원 없이 놀았다는 점에서 학창 생활을 참 잘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Q: 그때의 활동이 현재 하고 계신 대학교 교수로서의 업무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점일까요?
– 대학교 다닐 때 놀고 다니던 사람도 ‘개과천선’하면 나중에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겠죠(웃음). 그런 게 있습니다. 공부 안 하는 학생들에게 다른 교수가 공부하라고 그러면 잘 듣지 않지만 제가 말하면 귀를 기울입니다. 한때 ‘연예계’에서 놀았던 것을 젊은 학생들이 아니까 오히려 말이 통하는 것이겠죠.

Q: 한번 ‘연예계 생활’을 한 사람이 ‘개과천선’하고 조용히 살다 보면 가끔씩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합니다. 마치 ‘마약 같다’고 하던데요?(웃음) 게다가 대상까지 차지하고 음반까지 발매한 분이라면 이런 증상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 지금도 가끔은 그렇지만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교수가 되는 일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유학 다녀오고… 바쁘게 살다 보니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고사하고 음악 듣는 일도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다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학교 연구실과 집에 꽤 고급 오디오를 구비하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단 종목이 바뀌었습니다. 재즈나 클래식 쪽으로. 요즘의 록 음악은 몇 개 들어보기는 했지만 제가 젊었을 때 들은 록 음악처럼 멜로디가 좋거나 신선하지는 않더군요.

Q: 샌드 페블스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 보컬을 맡았던 여병섭은 L모 대기업 계열의 광고 회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해서 자기 사업체를 차렸습니다. (여)병섭이가 저곳에 들어간 것은 샌드 페블스 2기의 김영민 선배가 미리 그곳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죠. 다른 멤버들도 직장 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Q: 요즘도 가끔 모여서 연주할 기회는 없으신지요?
– 샌드 페블스가 5년 혹은 10년마다 기념 공연을 하는데 그때 무대에 섭니다. 2001년 10월 6일에는 남대문 메사 팝콘 홀에서 샌드 페블스 창립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했고, 1991년 1991년 9월 10일에는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20주년 기념 공연을 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샌드 페블스 홈페이지에 가면 나와 있을 겁니다. 일종의 ‘동문회’같은 행사인데 그렇다고 꼭 샌드 페블스 출신들만 보러 오는 것은 아니고 비교적 자유롭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행사입니다. 기념 콘서트를 열 때마다 저희 6기한테는 꼭 무대에 서라고 부탁을 해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Q: 예, 앞으로 무대에 선 모습을 직접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활동하는 샌드 페블스의 후배들도 이영득 님 때같은 영광스러운 순간을 다시 한번 맞이하기 바랍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20030926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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