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2년 2월 23일
장소: 강원도 평창의 한 펜션
질문 및 참석: 신현준과 그의 가족
정리: 배성록, 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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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매의 양 날개가 구창모와 배철수였다면, 김정선(1954년 9월 14일 충북 옥천 생)은 송골매의 부리였다. 능숙하면서도 날카로운 부리같은 그의 기타 사운드가 없었다면 1980년대 초중반 송골매의 정상 등극은 일어날 수 없었다. “어쩌다 마주 친 그대”의 훵키하게 깔짝거리는 기타의 리듬이나 “모두 다 사랑하리”의 뿌연 톤으로 전개되는 기타 인트로를 떠올려 본다면 그가 송골매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대부분 설명될 것이다. 단지 ‘송골매에서의 지위’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프로페셔널의 능숙함과 자기만의 색깔을 갖춘 밴드 기타리스트가 얼마나 되는지를 손꼽아 보면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근황을 물으니 ‘강원도 평창에 있다’는 답변이 들려 왔다. 송골매가 활동을 중단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그곳으로 은둔하여 조그만 카페나 레스토랑이라도 운영하고 있는 것일까. 직접 통화를 해 보니 카페나 레스토랑이 아니라 ‘펜션'(이것도 ‘가든’처럼 콩글리시가 된 것 같다^^)이었다. 뒤에 나오겠지만 음악 해서 번 돈으로 사업을 했지만 ‘다 말아먹은’ 다음 그곳에 펜션 사업을 하는 친척과 함께 동업을 하고 있었다. (글로벌한 관점에서 볼 때) ‘로컬 슈퍼스타’였던 록 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의 삶과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말에는 짙은 회한이 배어 나왔다. 10대 시절 기타를 손에 쥐고 손이 빨리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누군들 뽀대 나는 영미의 기타리스트를 꿈꾸지 않았으랴… 그리고 마음이 많는 사람들을 모아 그룹(밴드)을 결성하면서 누군들 영미의 폼 나는 록 밴드가 되겠다고 생각지 않았으랴… 이런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7년간 기타를 쳐다 보지도 않는’ 현실로 되어가는 이야기를 여기 옮긴다. 이런 이야기가 능력과 기회가 오지 않은 불운한 음악인들 뿐만 아니라 한때 정상에 섰던 사람에게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정선의 이야기는 지금도 기타를 둘러 매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절실하게 들릴 것이다. 나아가 지금 방송이나 공연에서 박수를 받으면서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경청해야 할 이야기일 것이다. 기타를 치는 일이 ‘소모품’으로 대접받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약속을 했죠. 나중에 함께 모여 그룹을 만들어서 뜻을 이루자고”: 기타잽이의 성장기

Q: 간단한 인적 사항 말씀해 주시고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와 학창 시절 어떤 음악들을 즐겨들으셨는지도 말씀해 주세요.
– 옥천에서 살다가 어머님의 친정인 서울로 올라와서 중고등학교는 모두 배재를 나왔습니다. 그때 배재중고등학교는 이화여고 앞에 있었답니다. 중학교 때 알음알음 친구인 권오승을 만나면서 음악의 길에 빠져들게 됐지요. (권)오승이가 어느 중고교 나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제 중학교 친구의 동창이었어요. 그게 중학교 2학년 때니까, 한 1968년쯤 되겠습니다. 그 당시엔 C.C.R.이 인기 절정이었고, 쓰리 독 나이트(Three Dog Night)도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는 “Proud Mary”나 “Have You Ever Seen the Rain”, “Who’ll Stop the Rain” 같은 곡을 주로 즐겨 듣고 부르곤 했습니다. 뭐, 그 곡들이야 당시엔 대다수가 즐겨듣던 곡들이긴 하지요. 그러다 나중에 블랙 사바쓰(Black Sabbath)의 음악을 듣고 크게 충격 먹은 적도 있어요. 기존 음악과는 달리 파워풀한게,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었죠.

Q: 그런 ‘파워풀’한 음악은 라디오에 잘 나오지 않았고 음반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구해서 들었는지요?
– 그 시절엔 원판(오리지널 음,반 요즘의 ‘수입 음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지라, 거의 다 빽판으로 들어야 했어요. 종로 4가에 있던 ‘애플 레코드’라는 판가게에서 자주 음반을 구입했고, 거기 주인에게서 음악 정보도 많이 얻고 했었죠. ‘애플’이라고 해서 애플 레코드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판 가게였어요. 도매상도 아니고 그냥 소매상이었고. 판 하나에 300원인가 했을 거에요. 그래서 외출할 때면 1000원 남겨서 항상 거기 들러서 ‘판 새로 나온 것 없습니까?’하고…

Q: 역시 ‘팝송 세대’시군요. 그러면 국내 그룹사운드 음악은 특별히 좋아하신 팀 없었나요? 음악 감상실이나 생음악 살롱 같은 곳은 자주 이용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 저는 팝을 더 좋아해서… 그 때가 라스트 찬스나 골든 그레입스, 키 보이스, 히식스 등이 인기있던 시절이긴 하지만, 특별히 즐겨 듣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엔 국내 음악하는 분들이 꿈만 크고 의욕만 앞서고, 일종의 자아도취에 빠진 면도 있었다고 봐요. 엄밀히 말하면 그분들이 했던 것들이 대부분 외국 음악 카피에 불과했고, 그것도 외국 원판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되지 않습니까. 뭐 그 당시의 시스템 자체가 그런 쪽이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던 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저에게는 특별히 국내 팀 가운데는 모델로 삼는 팀은 없었어요. 음악 감상실은 ‘예스’를 자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븐 클럽이나 UN 클럽 등도 종종 다녔었구요. 이태원 쪽이 최첨단의 새로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거든요. 극장 같은 곳에서 하는 쇼(공연)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Q: 그러면 기타는 언제부터 연주하시게 된 건가요? 다른 악기 제쳐두고 기타를 잡으신 것 역시 권오승님의 영향이 작용했는지요?
– 뭐, 권오승이 때문이라고 봐야죠. 그 친구와 같이 음악을 자주 듣고 그룹 음악에 관심을 갖다 보니까, 자연히 그쪽으로 관심이 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중2때부터 기타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따로 기타 학원이나 음악 학원을 다닌 것이 아니라, 애들하고 어울려 연습하고 빽판에서 카피하고 하는 정도였지요. 처음에는 통기타 위주였고, 그보다 조금 지나서 음악을 많이 접하면서부터는 앰프 기타(‘일렉트릭 기타를 이렇게 표현함)를 만지게 되었죠. 깁슨 레스폴 같은 기종은 서스테인이 긴 감이 있어서, 깁슨으로 앰프 기타를 시작했답니다. 특별히 어떤 정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그 나이 때에는 어떤 자기 색깔이나 컨셉보다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기타가 좋아서 하는 면이 컸으니까요. 권오승이의 경우는 ‘나는 노래 쪽으로 가겠다’고 했던 케이스예요. 그런데 권오승이와 저는 많은 부분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어요. 속마음도 그렇고,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렇구요. 그래서 둘이서 약속을 했죠. 나중에 그룹을 하자고. 대학을 가든 대학을 가지 않든 둘 다 음악을 좋아하고 친하니까 함께 모여서 뜻을 이루자는 취지였죠.

Q: 당시에는 기타 이펙트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정선 님의 경우엔 어떠셨는지요.
–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연주했던 셈인데요. 앰프를 풀로 올리면 오버드라이브 비슷한 효과가 나거든요. 그걸로 때웠던 것 같은데요? 페달은 비싸서 구입하기 힘들었으니까요. 블랙 테트라 시절에 페이저를 많이 사용한 것도 오버드라이브를 걸면 시끄럽다고 하길래,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서스테인을 내기 위해서 좀 과도하게 사용한 감이 있지요.

Q: 그러면 고교 시절에는 밴드(그룹) 활동은 하지 않고 단지 기타 연습만 하신 건가요?
–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주일만에 ‘에피소드’라는 그룹을 결성했어요. 연습은 창고 같은 곳에서 주로 했었고, 중앙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할 때 세컨 그룹으로 참가했는데 그 때 메인 그룹이 트리퍼스였죠. 우리는 팜플렛에도 적혀 있질 않아서 트리퍼스 공연 끝나니까 청중의 2/3가 빠져 나가더만요. (웃음) 악기 세팅하는 동안 관객이 썰물처럼 나가더라니까. 아무튼 그 엄청나게 커다란 강당에서, 저의 첫 라이브 무대 공연을 가진 거지요. 비록 청중은 없었지만. 권오승이 싱어를 맡았는데, 그 애는 자기 입학할 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공연을 한 셈이예요. 권오승이 중대 연영과 출신이거든요. 또 그 외 여러 친구들 모아서, 심지어 음악 못하는 애들도 껴서 일종의 해프닝 비슷하게 치렀습니다. 산타나(Santana)의 “Evil Ways”와 밥 웰치(Bob Welch)의 “Ebony Eyes” 등을 연주했던 것 같군요. 번안이 아니라 영어 가사로 부른 것이구요. 이후에도 명지대에 친구가 있어서 명지대 축제 때도 가서 공연하고 했었죠. 명지대 때는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이승희씨도 같이 활동했어요. 이승희씨는 솔로 가수였는데 우리랑 뱀파이어 활동은 같이 했습니다. 권오승, 나, 이승희씨가 함께 오산 극장과 명지대 교내 행사 때마다 가서 공연했던 기억이 납니다. 뱀파이어 활동은 한 1년 반 정도 지속되었던 것 같군요.

Q: 권오승 님이 중대 출신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외일 것 같습니다. 블랙 테트라 멤버이니까 당연히 홍대 출신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 뭔가 오해가 있군요. 일단 권오승이는 말했다시피 중대 학생이지 홍대 출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부터도 홍대가 아니예요.(!) 저는 단국대학교 학생이었어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블랙 테트라는 홍대 그룹인데, 거기에 저와 (권)오승이 같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껴서 활동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다니던 단국대에도 그룹 사운드가 있긴 했을텐데, 그래도 저는 그쪽에는 별 신경을 안 썼어요. ‘내가 최고다’하는 자만심이 약간 있었던 탓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Q: 그런데 당시 활동하시던 ‘에피소드’나 ‘뱀파이어’와 같은 그룹은 미 8군 무대 출신도 아니고 캠퍼스 그룹 사운드도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 비슷한 형태의 그룹이 왕왕 존재했었나요? 또 뱀파이어는 클럽 무대 등에서 연주했는지도 알려주세요.
– 음, 그런 형태의 그룹이 물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당시 우리 나이 또래에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좀 많았습니까. 그런데 당시엔 정보가 별로 없으니까 정확한 규모나 그룹의 이름 등은 모르겠네요. 그리고 뱀파이어로도 하우스(주: 김정선은 미 8군 클럽을 ‘하우스’라고 표현했다)에서 연주한 경험은 있어요. 거기서 같은 하우스 출신의 오승동이라는 친구도 만나게 되었죠.

Q: 본인의 경력과는 벗어난 질문이지만, 당시 1975년의 대마초 파동의 파장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느낌이 어땠나요?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던가…
– 제가 그룹하기 전이니까 세세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때 당시 가요계가 쑥대밭이 된 것은 분명하지요. 제 사견이지만, 그게 오히려 대학 그룹사운드에게는 호재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대학 그룹들이 활성화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고 봐요.

“이태원에서 하우스 밴드를 하려다가 왜 (구)창모랑 대학 그룹을 하게 됐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돼요. 운명이라고 생각해야겠죠”: 블랙 테트라의 ‘용병’이 되다

Q: 그러면 군 입대는 뱀파이어 활동을 종료한 뒤인가요? 저희가 갖고 있는 자료에서는 군 입대한 시점부터 1977년 블랙 테트라 가입하실 때까지 공백기의 활동 내용이 전무합니다. 그 기간에 하신 활동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해 주세요.
– 군대는 뱀파이어 해산하고 방위로 갔다 왔습니다. 사실 1977년까지는 직장 생활을 하며 지냈어요. 제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 두었거든요. 그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다보니까, 한 때는 야간으로 전과한 적도 있어요. 음악을 너무 좋아한 탓도 있고… 아무튼 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다소 방황하던 시기였죠. 1977년도 즈음인가, 가세가 몰락해서 내가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우스에서 연주하려고 팀을 구성하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구)창모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구)창모도 마침 방위로 군대를 막 제대한 상태였어요. (구)창모야 음악 잘하고 노래 잘하는 것을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죠. 그 친구도 배재 출신이라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거든요. 권오승과 (구)창모를 소개시켜 준 것은 저였구요.

Q: 약간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김정선님이 홍대생이어서 자연히 블랙 테트라 멤버가 되신 줄로 알았으니까요. 홍대생 신분이 아닌데 홍대 그룹 사운드인 블랙 테트라에 가입하시게 된 계기를 좀 상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 그래요. 이태원 클럽에서 연주하려고 팀 구상을 하는 중에 (구)창모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구)창모가 ‘팀 만들려고 하는데 와서 기타 좀 쳐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봤더니 알고보니 오디션이었어요. 저만 있는게 아니라 몇 명 더 있었던 거죠. 만약 오디션인줄 진작 알았으면 자존심 때문에 가지 않았겠죠(웃음) 그래서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봐서 합격됐어요. 난 합격인지 뭔지도 나중에 알았어요. 사실은 내가 그 때 돈 때문에 하우스 밴드를 하려고 했던 건데 왜 (구)창모랑 그룹을 하게 됐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돼요. 운명이라고 생각해야겠죠. 아무튼 다른 애들 다 뿌리치고 (구)창모랑 그룹을 하기로 하고, 1년 동안 연습을 했어요. 그 때 많이 연습한 게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였습니다.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는 사실 (구)창모보다는 제 취향에 가까운 밴드인데, 마침 (구)창모의 목소리가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의 보컬 마크 파너(Mark Farner)랑 비슷해요. 둘 다 키(Key)도 높고 말이죠. 기타야 제가 그 사람들 수준이 안 될지 몰라도 창모가 보컬은 비슷하게 되니까. 그래서 당시에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 곡은 거의 다 했던 것 같네요. “Inside Looking Out”이니 “Nothing in the Sane” 같은 곡들 말이죠.

Q: 정리를 좀 해보면, 저희가 홍대 그룹으로 알고 있는 블랙 테트라는 어떻게 보면 다국적군으로 봐도 좋을 것 같네요. 권오승 님도 그렇고, 김정선 님도 홍대 학생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멤버의 경우는 어땠나요?
– 제 당시 블랙 테트라 멤버 가운데 원조 홍대생은 구창모와 기타를 치는 박현우, 드럼의 임현순이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드럼 치는 오승동은 제가 한창 방황하던 시절, 그러니까 1976년도 즈음에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친구는 ‘난 죽을 때까지 음악할거다’고 했고 전 그냥 취미로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입장이 반대가 되었단 점이죠. 오승동은 UN 클럽에 속해 있었는데, 권오승이 자기 군대가기 전에 오승동을 소개시켜주고 갔지요. 그때부터 서로 음악도 좋아하고 하니까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뒤에 블랙 테트라의 드럼으로 오승동을 끌어들여 하게 되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한번은 활주로의 배철수가 “그런 드럼[주: ‘프로로 활동하는 드러머’라는 뜻]을 데려다 하냐”고 농담조로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드럼을 아주 잘 쳤어요. 블랙 테트라 1집 음반에서 오승동이 드럼을 친 것은“구름과 나”가 훵키 리듬이 깔려있는 곡이라서 연주하기에 좀 어려운 면이 있었거든요. 합주하는 면에서라든가… 그래서 영입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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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매는 ‘전성기’였던 1983년부터 1985년에 걸쳐 몇 편의 ‘청춘’ 영화에 주연급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은 ‘한국 최초의 본격 댄스무비’를 표방한 “춤추는 청춘대학”의 비디오 표지. 송골매 멤버들은 걸식이, 예쁜이, 해파리 등의 별명을 달고 등장한다. 맨 오른쪽에 김정선의 한창 때 모습이 보인다. 자료 제공: 코너뮤직(http://www.conermusic.com)

Q: 또 다른 멤버들에 대해서도 기억나는대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또 블랙 테트라 1기 멤버들에 대해서는 아시는 바가 없는지요?
– 세컨드 기타의 박현우와 베이스 김국현은 둘 다 홍대생이었고 저보다는 후배였습니다. 이계형이도 저보다 후배였고… 나이나 정확한 인적 사항은 잘 기억나질 않네요. 블랙 테트라 1기도 저는 누가 누군지 잘 몰라요. (구)창모랑 내가 2기인 것밖에는 모르겠네요. 그건 (구)창모에게 물어봐야 할 거에요.

Q: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를 연주하셨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블랙 테트라 가입하실 때쯤에는 음악 성향이 많이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약간 하드록 계열로 관심사가 바뀌셨던 건가요?
– 기타 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록 음악에 뿌리를 두게 마련이죠. 록이 좋아서 기타를 치게 되는게 다반사니까. 그런데 제가 추구한 것은 하드 록보다는 흑인 음악쪽에 더 닿아 있습니다. 한 1972~3년 정도부터 흑인 음악이 성행했고, 하우스 쪽에서도 인기를 끌었어요. 훵키한 리듬이 있으니까 인기가 있었던 것이겠죠. 저도 그때부터 흑인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 당시에는 흑인 음악이라도 기타를 주요하게 사용했던 것으로 압니다. 브라스 들어가고 해도 록에 기초를 두고, 리듬은 훵키하게… 기타 디스토션을 걸더라도 훵키한 맛이 있게 표현하는 것이죠.

Q: 사랑과 평화가 연주하던 스타일을 말씀이신가요?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랑과 평화는 자기들만의 음악적 색깔은 약하다고 봅니다. 그 사람들이 카피는 잘 하지만, 카피를 하다 보니 자기 색깔이 없는 거죠. 물론 연주야 잘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그렇게 못 하죠. 그렇게 카피하는 것도 물론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고, 그분들 음악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라면 그분들과는 같이 음악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나는 카피는 잘 못해요. 다만 나만의 음악, 나의 색깔은 충분히 만들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이가 있지요.

Q: 김정선 님께서는 카피보다는 창작 위주의 활동을 했다는데 자부심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김정선 님이 생각하시는 카피 위주의 일반 그룹 사운드와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결정적인 차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이런 겁니다. 그쪽이 카피는 잘 하는데 오리지널리티는 별로라면, 대학 그룹은 연주는 좀 달려도 나름대로의 색깔은 있죠.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우리가 클럽에서 연주할 때 하우스 밴드들이 우리를 많이 무시했어요. 연주력이 그들만 못하다는 것이죠. 물론 그들도 뛰어난 음악인들이죠. 하지만 나는 카피를 그렇게 잘 할 수가 없거든요. 서로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이죠. (주: 여기서 배철수 님의 발언 가운데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를 잘 하던 밴드를 데려다가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려고 했더니 창조력과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잘 안 되더라’는 대목을 언급하자 김정선은 ‘그건 또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캠퍼스 그룹의 창작 위주 활동에 자부심을 가지지만, 다른 그룹 사운드를 폄하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출전한 것 뿐이죠. 거기 나간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했어요”: 1978년 TBC 해변가요제

Q: 1977년 당시 제 1회 MBC 대학가요제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샌드 페블스 같은 그룹을 보면 느낌이 어떠셨나요? 1977년 대학가요제를 보고 1978년 제 1회 해변 가요제에 참가할 생각을 하시게 된 건가요?
– 대학 가요제 나온 팀들이야 당연히 못하는 애들이라 생각했죠. (웃음) 사실은 내가 좀 잰체하는 면도 있고, 그런 캠퍼스 그룹은 무시했어요. 마치 미 8군 카피 밴드들이 우리보고 못한다고 무시했던 것처럼 말이죠. 심지어 산울림 같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무시했어요. 나중에 찬찬히 들어보니까 정말 획기적이고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됐죠. 연주력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 사람들의 창조적인 면은 평가할 면이 많잖아요.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죠. 그건 그렇고…. 해변 가요제는 특별히 1977년 대학가요제를 보고 참가하려 생각한 건 아니고, 그룹에서 그런걸 한번 하자고 하더군요. ‘그런 가요제가 있더라, 한번 해보자’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거죠. 특별한 목적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Q: 그럼 블랙 테트라의 경우 MBC 대학가요제는 정보가 없어서 참가하지 못했다고 봐도 좋을까요?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MBC 대학가요제를 나가려고 하긴 했는데 그 앞에 TBC 해변가요제가 먼저 열려서 그 대회에 나갔고, 거기서 상을 탔기 때문에 MBC 대학가요제는 안 나갔다고 하는 게 구창모 님의 이야기던데….
– MBC 대학가요제는 우리 멤버들이 같은 학교 학생이 아니라서 못 나간 거지요. 물론 대학 가요제는 정보도 없고 신경도 안 쓴 측면도 있지만, 일단은 홍대생만으로 짜여진 팀이 아니니까 자격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반대로 해변 가요제는 누구나 나갈 수 있는 쪽이었구요. 말하자면 MBC 대학가요제는 제약이 엄격한 편이었고, 해변 가요제는 제약이 덜했던 것이죠. 해변가요제 2회가 ‘젊은이의 가요제’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구)창모 말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수는 있겠네요. 이건 다른 얘기지만, 나는 원래 ‘나 같은 사람이 왜 캠퍼스 그룹 사운드에서 연주해야 하냐’고 생각했었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캠퍼스 그룹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블랙 테트라 정기 발표회 때, 홍대 캠퍼스에 구경 온 여고생들이 자지러지는 것을 보고 클럽에서와는 또다른 매력을 느끼게 됐습니다. 캠퍼스 그룹 사운드만의 뭔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Q: 여기서도 정리할 부분이 있네요. 활주로 역시 순수 항공대생으로 꾸려진 팀은 아닌데, 제1회 해변 가요제와 제2회 대학가요제 둘 다 출전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계시나요? 또 제1회 해변 가요제에서 블랙 테트라는 ‘홍대생 그룹 사운드’로 소개된 바 있는데요. 이것도 함께 설명해 주시겠어요?
– 활주로는 해변가요제에서 인기상밖에 못 받았으니까, 거기에 열 받아서 대학가요제도 나갔는지 모르겠네요. (웃음) 그 친구들이 대학 가요제에 어떻게 나갔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블랙 테트라가 홍대생 그룹으로 소개된 거야 당연한 일이죠. 그 때는 나만 빼고 몽땅 홍대생이었으니까. (오)승동이나 (권)오승이도 들어오기 전이었고. 개인적으로 활주로는 해변 가요제에서 만났을 때 좋은 그룹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기타잡이인 입장에서, 그 친구들이 추구하는 한국적인 록이라는 부분, 그리고 배철수의 독특한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사후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가요제 때부터 두 팀이 함께 뭔가 해보자는 교감이 오고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수끼리 고수를 알아본 셈이죠.

Q: 말씀했듯이 1978년 해변 가요제에서 블랙 테트라와 활주로, 구창모님과 배철수님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두 그룹이 그때 ‘처음’ 만난 것인가요? 당시의 에피소드를 좀 이야기해 주시죠. 또 해변 가요제에서 만난 다른 그룹사운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도 말씀해 주시구요.
– 그 전에는 몰랐고, 그 때 연포(해변 가요제 행사장)에서 처음 만났죠. 처음에는 두 그룹이 예선부터 서로 경계했어요. 이심전심이랄까, 서로 우리가 잘 났다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에피소드라면 특별한 것은 아닌데, 활주로가 연포 백사장에 둘러 앉아서 통기타 치며 놀고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서로 라이벌 관계라고 생각하는 블랙 테트라가 지나가는데 배철수가 ‘어이, 같이 놉시다’하길래 가서 앉았다고. 그 때 개인적으로 배철수의 반항아적 이미지를 확실히 알게 됐는데, 배철수가 통기타 치면서 자기 자작곡을 부르더군요. 시조풍의 가사로 된 노래인데, 가사가 무슨 ‘우리는 태초부터 머리가 길었다네~’하는 식이었어요. (웃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이후로 두 팀이 서로 친해지고 잘 대해주게 된 거죠. 또한 활주로 말고도 휘버스, 블루 드래곤스 등과도 통성명하고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휘버스도 좋은 팀이었어요. 약간 대중적인 면이 있어서 충분히 우수상을 탈 자격이 있었죠. 멜로디가 대중에게 어필할 만한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록 음악이라 하긴 좀 그렇고, 통기타로 부를 수 있는 포크송의 멜로디에 반주만 록 세션으로 된 음악을 구사했지요. 중앙대 블루 드래곤스는 리더가 악보나 자료, 프레이즈 등을 열심히 스크랩하는 학구적인 친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블루 드래곤스가 스틱스(Styx) 비슷한 스타일의 연주를 구사했던 것도 기억나네요. 벗님들도 그 때 듀엣으로 출전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개그맨 주병진이나 주선숙, 왕영은 같은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당시 출연진들이 대체로 다 괜찮았어요. 참가곡들이 나중에 많이 팔아먹을 만한 노래들이라는 생각도 했답니다. 하하.

Q: 그 때부터 송골매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군요. 1978년 해변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여타 그룹들 뿐만 아니라 특히 블랙 테트라와 활주로는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김정선님은 기분이 어떠셨나요? 가요제 수상 이후 스타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상금이 어느 정도였고 어디다 사용하셨는지도 여쭤보고 싶네요.
– 뭐 별 느낌 없었는데요. 상금은…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제가 원래는 일제 악기를 썼습니다. ‘그레꼬’라는 까만색 제품의 모델을 사용했죠. 그런데 그걸 블랙 테트라 활동하면서 잃어 버렸어요. 다행히도 해변 가요제 우승하고나서 상금이 100만원 정도가 나왔는데, 창모가 그 돈으로 깁슨 레스폴 기타를 사 줬어요. 가격이 상금 액수의 80% 정도는 됐던 것 같아. 정말 선심 쓴 거죠.

Q: 일각에서는 대학가요제나 해변가요제 등의 축제가 순수한 젊은이들의 무대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순수 캠퍼스 축제라기보다는 프로 데뷔의 발판으로 기능하는 상업적 프로그램이었다는 시각인데요,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지금이야 그런 가요제 하려면 시장조사 다 하고, 수요 공급을 다 고려해가며 일종의 ‘상업적 대상’으로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당시에 그런 게 어디 있었겠습니까. 단지 음악이 좋아서 출전한 것 뿐이죠. 거기 나간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했어요.

Q: 김정선님 개인적으로는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 음악을 각각 어떻게 평가했나요? 또 당시의 다른 학교 그룹 사운드들에 대해서도 대학별 특징 같은 것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죠.
– 활주로가 토속적인 면이 있다면, 우리는 훵키한 측면이 두드러졌죠. 록과 훵키한 리듬을 접합하는 음악입니다. 기타 디스토션을 걸고 훵키 리듬을 치는 식이라고 할까요. 보즈 스캑스(Boz Scaggs)의 영향도 좀 있었던 것 같지만, 분명히 우리만의 스타일이 있었죠. 나중에는 활주로를 보면서 서로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어요. 이런 거죠. ‘맞아, 우리가 헤비한 사운드를 잊고 있었구나’하고 깨달았달까? 그런데 당시만 해도 녹음 시설이 하도 열악해서 원하는 만큼 표현하지 못한 게 많아요. 엔지니어가 시키는대로 해야 했던 시절이니까요. 생톤 기타 소리는 너무 싫은데 오버드라이브 걸면 시끄럽다고 줄이라고 하고, 앰프 볼륨 올리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치면서도 갑갑했죠.

Q: 블랙 테트라 활동에 대해서 몇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선 앨범별로 작사나 작곡의 분업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설명해 주실까요. 또 편곡 같은 것은 누가 도맡아서 했는지, 아니면 멤버들이 각자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한 예로 신중현님 그룹의 시절에는 신 선생 혼자 악보를 다 그렸다고 하는데, 캠퍼스 그룹은 어땠는지요?
– 블랙 테트라 1집 같은 경우 구창모가 곡을 많이 썼고, 3기인 고상록도 많이 썼습니다. 해변가요제 수상곡인 “구름과 나”도 고상록의 곡이죠. 2집에서는 구창모도 물론 역할이 있었지만, 저와 권오승의 입김이 강해졌던 편입니다. 해변가요제 참가한 이후에 곡을 많이 썼어요. 음반 때문에 시간에 쫓겨서 만든 것은 아니고, 나름의 작업하는 방식이 있었죠. 기타 리프를 만들면 거기에 멜로디를 입히는 식으로… 그리고 3집 음반은 고상록이 주도해서 만들어진 음반이죠. 편곡의 경우 각자 자기 파트를 작업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원곡이 있고 주어진 코드가 있으니까 자기 것만 하면 되는 식이었죠. 각자 하다가 안되면 모여서 머리 싸매고 하기도 하구요.

Q: 블랙 테트라의 음반이 나온 것은 해변가요제로 유명해진 이후 음반사 쪽에서 먼저 입질이 들어온 건가요? 또 계약 조건이나 녹음 방식, 사용하신 스튜디오에 대해서도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 음반사에서 찾아와서 음반을 내자고 이야기한 기억이 나네요. 계약 같은 문제는 구창모가 나서서 알아서 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르겠네요. 사실 음반으로 얻은 수입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밥 먹고 여행하고 숙박하다 보면 남는게 별로 없었습니다. 남은 돈으로는 악기를 사거나 했구요. 2집 음반 녹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2 트랙으로 했어요. 멀티트랙 레코딩이 없었던 건 아닌데, 오아시스 직원이 ‘싸게 하라’면서 째째하게 굴더군요. 일명 ‘오도아와세’로,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식으로 녹음해야 했습니다.

“송골매에게 흡수·통합된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음악을 같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4막5장 그리고 ‘2기 송골매’

Q: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의 결합이 처음에는 그다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블랙 테트라 2집 음반 [내 마음의 꽃](1979)를 기점으로 해서 이런저런 내부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 그래요. 두 팀이 합치는 게 간단하진 않았습니다. 일단 블랙 테트라도 그렇고 활주로도 그렇고 다음 기수의 후배들이 있잖아요? 후배들에게 길을 터 주어야 하기도 하고, 대학그룹의 한계 때문인지 먹고 사는 문제도 생기고, 활주로하고 우리하고 같이 뭔가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해서 이야기를 오랫동안 했어요. 그런데 내가 걸림돌이 되었죠. 마침 권오승이 군 제대하고 나온 상태였는데, 나는 (권)오승이를 음악적으로나 친구로서나 좋게 생각했기 때문에 함께 활동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구창모, 배철수, 나, 지덕엽, 김국현에 권오승을 껴서 팀을 꾸리자고 제안했는데 전부 다 반대한 겁니다. 반대로 나는 어떻게든 (권)오승이와 함께 음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요. 이때부터 (구)창모가 중간에서 입장이 곤란해졌어요. 그런데 블랙 테트라 홍대생 멤버들은 (김)국현이 빼고는 거의다 음악 계속할 마음이 없고, 의욕이 있는 나랑 권오승, 그리고 오승동은 홍대생이 아니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결국 구창모 빼고 나와 권오승, 김국현, 오승동으로 4막 5장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창모랑 좀 사이가 나빠졌어요. 우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배)철수는 자기 나름대로 송골매를 결성하고, (구)창모는 배신감에 망월사로 공부하러 들어가고. 이처럼 송골매 완성 전에 일종의 춘추 전국시대가 있었답니다.

Q: 블랙 테트라 2집 활동 기간에 팀내 불화가 있었군요. 구창모님과 권오승님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나요? 2집 당시에 구창모님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서로 감정이 상한 원인이었을까요?
– 권오승이 좀 괴팍한 측면이 있죠. 반대로 (구)창모는 좀 스탠다드한 편이다보니까, 같이 지내면서 점점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예요. (권)오승이가 작곡의 개성적 면이나 음악적인 끼는 뛰어난 친구인데, 성격이 맞지 않았던 거죠. 2집에서 (구)창모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좀 편협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연주할 때 (구)창모의 역할이 거의 없었어요. 노래는 잘 하는데 연주가 달린 탓도 있지만… 제가 기타로 리프나 프레이즈를 만들고 거기에 (권)오승이가 곡을 붙이는 식으로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Q: 말씀하신 것처럼 구(구)창모님을 제외한 4명의 멤버들이 4막 5장을 결성해 활동하게 됩니다. 권오승님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요? 또 권오승님이 개성이 강한 분이라 활동 당시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요.
– 권오승은 키보드와 보컬을 담당했어요. 키보드는 잘 치는 건 아니지만 색깔이 있었죠. 그런데 권오승이는 융통성이 좀 없어요. 한번은 KBS 라디오에 게스트로 초청됐는데, 방송이란 게 시간 관계상 출연이 불발하게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참고 이해하는데, (권)오승이는 그런 상황을 못 견디는 편이죠. 에피소드라면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할 때 일인데, “고추잠자리”란 곡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보컬이 (권)오승이였는데, 한참 연주하다 보니까 갑자기 노래가 안 들리는 거야. 1분 정도 정신없이 하다 보니까 (권)오승이가 없어진 거예요. 알고 봤더니 무대가 엉성해서 밑으로 떨어진 거예요. 무대에서 쇼맨십이 매우 열정적인 친구였거든요. 난 그런 부분을 참 좋아했어요. 도어스(The 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 같다고나 할까.

Q: 김국현 님은 4막 5장에 끝까지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앨범 발매 이후 탈퇴하신 건가요? 4막 5장의 구체적인 해체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
– (김)국현이는 녹음을 다 마치고 군대를 갔어요. (김)국현이가 계속 있었으면 4막 5장이 더 지속됐을지도 모를텐데요. 그래서 1980년부터는 임호붕이란 친구가 가입했는데, (김)국현이의 훌륭한 연주에 비하면 좀 부족했지요. 4막 5장은 1980년 초에 혜은이 리싸이틀 오프닝 밴드로 참여한 이후 깨졌어요. 제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큰 활동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서운해 할 지 모르지만 송골매 못지 않게 4막 5장에 더 미련이 많이 남습니다. 끝까지 계속 활동했으면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작곡할 때도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추구했거든요. 말했듯이 제가 프레이즈를 만들면서 권오승이 거기에 맞춰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붙이는 식으로… 외국 그룹들이 그런 식으로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건 4막 5장이 한 일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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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매의 3기 멤버로 꾸며진 8집 음반 뒷면에 실린 멤버들의 모습. 좌로부터 배철수, 이봉환, 김정선, 그리고 새로운 멤버인 이건태, 키보드의 이종욱, 베이시스트 이태윤.

Q: 이제 두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역사적인 만남, 송골매 2기가 결성되게 됩니다. 구창모님과 김정선님이 어떻게 송골매에 가담하시게 됐는지, 자세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4막 5장이 깨지고 나서 심적으로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 때 가수 노사연이가 찾아왔는데, (구)창모 어디있는지 아냐고 했더니 설악산 오색약수터에 있는 망월사에서 공부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거기나 가서 쉬고 싶어서 (구)창모를 찾아갔죠. 서로 감정이 안 좋은 상태이긴 했습니다만, 난 단순한 편이라… 거기 가니까 (구)창모가 깜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같이 20일 정도 있었는데 또 어떻게 알았는지 배철수와 이봉환이 찾아왔어요. 아마 노사연이가 얘기했던 모양이에요. 같이 음악을 하자고 하더군요. 나도 참 진득한 편은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허락을 했죠. 구창모가 베이스, 김정선이 기타, 이봉환이 키보드, 배철수가 드럼을 맡는 라인업으로 일단 시작을 했습니다. 원래 멤버이던 이응수가 왜 나갔는지는 모르겠네요. 이응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친구인데…

Q: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막 결성된 송골매의 라인업으로 나이트클럽에서 쫓겨난 사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 김현재라는 형이 종로 3가 국일관 옆에 ‘활주로’란 이름의 업소를 신장개업했어요. 거기서 오디션을 봤는데, 그냥 쫓겨났죠. 연주란 것이 오랜 기간 갈고 닦고 해야 하는 일인데, 그렇게 급조해서 잘 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오승동과 김상복도 끌어들이게 된 겁니다. 그 친구들이 하우스 밴드 출신이라 연주력이 좋거든요. 그 무렵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MBC에서 배철수에게 라디오 DJ를 해보라는 제의가 있어서 잠깐 맡은 적이 있어요. 배철수, 구창모, 이봉환, 나 이렇게 넷이 연습하던 시절이니까 팀이 깨지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어요. 런데 얼마 하지 못하고 (DJ를) 금방 짤렸죠(웃음). 지금 DJ로 잘 나가고 있는 걸 보면 우스운 에피소드이죠. 짤린 덕분에 송골매가 재탄생하게 된 거지만…

Q: 그렇다면 또 한번 사실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네요. 일반적으로 2기 송골매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인 홍대 블랙 테트라와 항공대 활주로의 결합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씀하신 사실들을 놓고 보면 꼭 그렇게 보기만도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골매 구성원 중 활주로파(?)에서 항공대 출신은 배철수님 한명이고, 블랙 테트라파에서 순수 홍대 출신은 구창모님 하나뿐이었던 셈이네요.
– 이봉환의 경우엔 배철수와 같이 경희중고등학교를 나온 막역한 사이죠. 항공대생은 아니었지만, 활주로랑은 끈끈한 관계에 있었던 친구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홍대생은 아닌데 블랙 테트라에 속해 있던 경우이고. 오승동과 김상복의 경우엔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는 관련이 별로 없는, 하우스 밴드 출신이구요. 그런데 사실 어떤 사람들은 송골매를 블랙 테트라 출신들이 배철수의 밴드에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흡수된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음악을 같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송골매란 이름이 항공대 마스코트를 그대로 사용한 거라서 그렇게 보는지도 모르겠는데, 만일 내가 보기에 그렇게 생각됐으면 당장 이름을 바꾸자고 했을 거예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거기 참여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Q: 이것 역시 좀 껄끄러운 질문인데요, 일부 평자들은 송골매가 2집부터 대중성을 의식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하거든요? 저희는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분명 음악색이 많이 달라진 면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음악적 변화는 멤버가 바뀐 부분이 가장 큰 이유였을까요?
– (구)창모와 내가 투입된 게 2집부터니까 음악이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대중성을 의식한다는 얘기는 좀 웃기네요. 우리가 그 때 무슨 마케팅 개념을 갖고 있었겠어요. 그 때는 요즘처럼 전략적으로 상업적으로 계산해서 만드는 복잡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어쩌다 마주친 그대”같은 곡 갖고 하는 얘기들 같은데, 우리가 무슨 대박을 노리고 그걸 만들었겠어요? 단지 (구)창모가 갖고 있던 곡을 내놨더니 대중들이 좋아했던 것 뿐입니다. 그게 시류에 우연히 맞아 떨어지면 뜨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죽었던 것이죠. 곡 좋고 노래 잘 불러도 히트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어쩌다 마주친 그대” 뜨고 나서 우리도 깜짝 놀랐어요. 우리가 무슨 앞을 내다보는 마인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이도 어렸는데 운때 좋게 그게 대중들한테 먹혔으니까요. 녹음을 다 해놓고 모니터링 할 때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밀자고 해서 홍보곡으로 삼았던 건데, 어찌보면 지구의 임정수 사장이 상업적인 측면에서 센스가 있는 분이니까 그런 면에서 그분의 공이 있었다고 볼 수는 있지요.

Q: 지구 소속으로 계시는 동안 대우는 괜찮았나요? 음악을 하는 환경은 어땠는지요?
– 돈 문제의 경우, 지금 생각하면 분명 불평등 계약이었죠. 그때는 아무도 음반 팔린대로 돈 받는다는 생각을 못 했던 시절이니까. 돈은 밤무대 나가서 버는 거라고 생각했죠. 다만 고맙게 생각하는 건 녹음실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조)용필이형 팀과 우리는 녹음실을 시간제한 없이 편안히 썼었죠. 하긴 (조)용필이 형과 우리가 돈을 가장 많이 벌어줬으니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뭔가 하나 만들기 위해서 같이 모여서 앉아서 편안하게 하는 작업이 정말 행복했었죠.

Q: 그러면 송골매 2집 음반 [어쩌다 마주친 그대/하다못해 이 가슴을](1982)에 대해 몇 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은 4막 5장 시절에 부르셨던 곡인데 이봉환님이 부르셨네요. 또 “모두다 사랑하리”는 작사는 김정선님이, 작곡은 김수철님이 하신 곡인데 특별한 뒷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시죠. “모두다 사랑하리”에서 기타 톤이 뿌옇게 나오는 부분은 기술적으로 어떻게 하신 것인지도 알려주세요.
– “우리들”은 4막 5장 때 이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봉환이 그 곡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리메이크하게 됐죠. 이봉환이는 그것 말고도 “고추잠자리”, “사랑하고 싶어라”를 불렀죠. 그 친구가 얼굴은 잘 생겼는데 곡을 잘 못 쓰니까, 뭔가 어필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부르라고 했지요. “모두다 사랑하리”는 원래는 가사가 약간 달랐어요. ‘하늘에 구름 떠가네/그 향기도 그 향기도…’ 반복하는 식이었는데 그 가사를 일단 (구)창모에게 줬거든요. 완성된 상태는 아니고 나름대로 끄적거려 놓은 정도였어요. 그런데 (김)수철이가 (구)창모네 집에 갔다가 그걸 본 모양이예요. 나와 (김)수철이와는 그 전부터 친했었고. (김)수철이에게 내 가사라고 하니까 자기가 삭제할 거 삭제해 가면서 곡을 만든 거죠. 고맙게 생각하죠. 그 뿌연 기타 톤의 경우엔 컴프레서를 로우톤으로 잡고, 딜레이를 걸어서 표현했습니다. 괜찮게 들렸나 보죠?(웃음)

Q: 이번에는 몇 가지 ‘가십성’ 질문입니다. 3집 음반 [처음 본 순간/한줄기 빛](1983)에는 “아가에게”라는 곡이 있는데요, 작사자가 임예진입니다. 마찬가지로 6집 [오해/마음의 등불](1986)에서 “내 마음에 비 내리고” 역시 탤런트 김희애씨가 작사한 것인지요?
– “아가에게”는 알고 계시는 그 임예진이 맞아요. 아시다시피 (구)창모랑 임예진씨랑 그 때 가까웠으니까요. 6집에 작사가 탤런트 김희애씨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로는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

Q: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알파 프로덕션의 이종명 님이 송골매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송골매 곡 중에 이종명님이 작사하신 곡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구체적으로 송골매 분들과는 어떤 관계였는지요?
– 이종명씨는 우리가 언더그라운드에 있을 때 결집의 구심점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정신적 지주’였다고나 할까요. 그 분이 작사한 곡은… “우리들”인가요? 그렇군요. 그리고 4막 5장 시절에 내가 프레이즈를 만들고 권오승이 멜로디를 붙이는 식으로 작업했단 얘길 아까 했지요? 가사가 마침 필요했는데 (이)종명이 형에게 도움을 받았죠.

Q: 송골매는 4집 음반 [난 정말 모르겠네/사랑하고 싶어라](1984) 이후부터 음반에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4집에서 참여한 박강호 님, 한정우 님, 윤형인 님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실까요. 또 김창남 님의 곡을 받거나 이종명님과 소리두울이 코러스로 참여한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세요.
– 지금은 고인이 된 박강호는 하우스 밴드 출신인데, 구창모가 데려왔습니다. (구)창모가 나름대로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박강호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예요. 음악적으로 나름대로 센스있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유행을 따른 음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류에 따라가는 것뿐이지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보이네요. 한정호나 윤형인은 키보드를 쳤다는 건 알겠는데 세세한 건 모르겠네요. 사실은 우리가 4집 당시부터 일종의 한계를 느꼈어요. 우리 고집대로 가야 했는데 너무 상업성을 고려하게 되고, 음반 판매에 집착하고, ‘사람들이 뭘 좋아할까’를 생각하다 보니까 음악적인 방황이 좀 있었죠. 정상에 오르니까 중압감 같은 게 생겨서, 김창남 씨나 외부의 작곡가 곡도 받고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다른 사람 곡 받은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송골매 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멤버들의 힘으로 음악적으로 계속 밀어붙였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 했다는 점이죠.

“디스코텍이니 나이트클럽이니 춤추는 곳들이란 것이 춤추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연주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에요”: 송골매, 소진하다

Q: 4집 음반 이후 구창모님은 탈퇴하고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들 외에 특별한 뒷이야기는 없는지요? 나쁘게 헤어지거나 했던 것은 아니죠?
– (구)창모나 나랑 오랜 친구고 동창이니까, 나한테 먼저 와서 얘기하더군요. 그 녀석도 나름대로 자기 꿈을 펼치고 싶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겠죠. 난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나는 거기서 우리도 해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활동하면서 인기 얻고 돈은 벌었는지 모르지만 음악적으로 좀 소모되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죠. 물론 끝까지 그 생각을 관철시키지 못한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해 봤자겠지만. 그런데 다른 멤버들은 ‘(구)창모가 없으니 우리가 뭉쳐야 하지 않겠나’하는 분위기더군요. 헤어지는 것은 서로 좋게 헤어졌어요. 아쉬운 점이라면 (구)창모가 곡을 잘 쓰는 친구인데 솔로 활동하면서 남이 만든 곡만 불렀다는 점이죠.

Q: 송골매는 2집 이후 스타덤에 오르면서 방송에서도 종횡무진 활약을 보여주게 됩니다. 특히 막 신설된 [젊음의 행진]이나 [영 일레븐]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고정출연이라 해도 좋을 독보적인 존재였는데요. 송골매의 방송가 장악(?)에는 배철호 님의 막후 역할도 있었다고 볼 수 있나요? 또 이런 분주한 방송 활동이 밴드에 악영향을 끼친 면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배철호는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배철수가 외관상으론 터프해 보이지만 실은 여성적이고 섬세한 부분이 있다면, (배)철호는 남자답고 터프하죠. 그 친구는 PD 초기 시절부터 우리 음악을 워크맨 끼고 들었을 정도로 음악적인 애착과 정열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아마 자기 형이 멤버로 포함되어 있는 탓도 있었을 겝니다. 그 친구의 막후 후원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배철호가 센스있고, 자기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물론 그보다도, 당시에 송골매가 방송에 많이 나오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대마초 난리가 난 이후 한동안 가수들과 연예인들이 씨가 말랐잖아요? 젊은이 대상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젊은 이미지의 가수나 음악인이 거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송골매가 그런 프로그램에 어울리니까 고정 출연하다시피 된 거라고 봐요. 송골매 초창기에는 거의 매일 방송에 나갔죠. 밤업소 일도 했는데 그게 새벽 5시에 끝나고, 방송국에 8시까지 갈 때도 있었어요. 두세 시간밖에 못 자는 생황을 3년 가량 했던 겁니다. 그게 밴드에 악영향을 끼쳤는지 어떤지는…. 알아서 평가하세요!!!(웃음)

Q: 말씀하신대로 송골매는 방송 뿐만 아니라 나이트 클럽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업소 무대는 매니저 없이 활동하신 건가요? 또 연습은 어떻게 하셨는지, 밤 무대에서는 어떤 곡들을 연주하셨는지도 말씀해 주시죠.
– 나이트클럽은 풍전호텔과 하이야트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많이 연주했는데, 매니저는 필요 없고 우리끼리 알아서 했죠. 방송 나가게 되면 업소와는 자동적으로 연결되니까요. 연습도 나이트 클럽에서 했습니다. 업소에서는 댄스음악만 연주했어요. 이건 사회적 불행인데, 디스코텍이니 나이트클럽이니 춤추는 곳들이란 것이 춤추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연주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에요. 춤추는 데 사용되는 음악이니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도 아니고 말이죠. 나중에는 질려서 하기 싫을 때가 많았어요. 방송에서 우리가 짜증섞인 표정으로 연주했다고 말했죠? 사실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 때는 음반 판매가 수입이 아니라 밤업소 활동을 해야 수입이 생기던 때니까, 거의 ‘노동’으로 했던 거죠. 방송의 경우에는 용달 불러서 악기 세팅하면 돈이 남는 게 없었답니다. 내 꿈은 정말 컸는데, 현실에 부대끼려다 보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되고 인간적인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아마 우리 집안이 계속 잘 살았다면 내 하고 싶은대로 했을 거예요. 그런데 가세가 몰락하다보니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거죠.

Q: 굉장히 살인적인 스케쥴 속에서 활동했던 셈이네요. 4막 5장이나 블랙 테트라 때도 업소일을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스케쥴이 바쁘다보니 음악적인 면에서 창작력에 미치는 악영향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 4막 5장 때는 진짜 상업적인 것 없이 순수하게 음악을 했죠. 그리고 굉장히 창조적으로 음악을 했던 시기예요. 송골매 막판에 뭔가 나랑 같이 서로 노력하고 연구하면서 보조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정말 음악할 맛이 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송골매가 워낙 빡빡하게 움직이다보니까 음악적인 노력을 할 여유도 없었던 거죠. 작곡하는 사람은 코드와 멜로디 만들어서 나한테 넘겨주는 식이 됐어요. 전주가 있고 간주가 있고 뭔가 뼈대가 있어야 녹음이 될 것 아닙니까. 어떨 때는 나 혼자 밤새워 작업할 때도 있었어요. 나로서는 ‘나만큼만 열정적으로 하는 놈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더 잘됐을 거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아까 권오승과 4막 5장 활동이 깨진 것이 아쉽다고 말했는데 이때 그런 심정이 들었어요. 물론 지나고 나니 다른 멤버들도 다 힘들었다고 생각되지만.

Q: 이건 저희의 견해입니다만, 너무도 잘 알려진 배철수 님의 감전사고 또한 2집 음반 이후의 살인적인 스케쥴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 1983년에 송골매는 제12회 동경 가요제에 참가하게 되는데요,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 배철수가 감전사고 나고 나서 나머지 멤버들이 먼저 일본에 가 있었죠. (배)철수는 나중에 가죽 모자, 가죽 잠바, 가죽 바지를 입고 나타났는데 옷차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동경 가요제에서는 상업적 성격이 강해서 엔트리에 유명한 팀들이 많았죠. 참 서양 음악이 많이 앞서 있다는 것을 느낀 계기였습니다. 드럼이 아니라 패드 놓고, 컴퓨터와 건반을 놓고 연주하더군요.

Q: 6집 음반 이후 오승동 님과 김상복 님이 빠지고 이태윤(베이스), 이건태(드럼), 이종욱(키보드) 등을 영입하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연주력 문제라든가…
– 쫓아냈다고 봐야죠. 말했듯이 6집 즈음에서 음악적인 한계를 많이 느꼈기 때문에, 이미지 쇄신하고 뭔가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던 거죠. 그런데 쫓아내고 보니 더 힘들더군요. 내가 볼 땐 쫓아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초심으로 돌아가서 우리 나름의 개성적인 음악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Q: 7집 [인생이란 이름의 열차/새가 되어 날으리](1987)에서는 이응수 님의 곡이 많은데 이것도 이야기해 주시죠. 또 7집 음반부터는 키보드 주자도 두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봉환 님과 이종욱 님이 키보드를 맡게 됐는데요, 새 멤버인 이종욱 님의 연주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이응수씨 경우엔 원래 가사를 많이 써놓고 세이브해 놓기 때문에 7집 때 곡이 쏟아졌던 것 아닌가 싶네요. 악상이란게 항상 잘 떠오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키보드는 하나는 건반의 역할을 맡고 하나는 신서사이저 노릇을 하는 식으로 배분했겠죠. 이종욱은 내가 개인적으로, 음악적으로 좋아하는 친구예요. 정말 음악 잘하고, 칭찬하고 싶은 친구입니다.

Q: 김정선 님의 기타 연주와 관련해서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좀전에 구창모님이 사준 레스폴을 사용하셨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헤드리스(headless)인 일제 호너(Honer)로 바꾸신 건가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원래 쓰던 레스폴은 진짜 좋았어요. 그런데 밤일을 너무 오래하다 보니까, 기타가 하도 무거워서 어깨결림증이 심해진 겁니다. 어깨는 지금도 후유증이 있어요. 깁슨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시죠? 그걸 메고 6시간 있으려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게다가 좋아하는 음악도 아니고 놀러 와서 춤추는 사람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니 천근만근이죠. 그래서 기타 톤은 생각 안하고 가벼운 기타를 찾게 된 겁니다. 결국 최종적으로제일 가벼운 기타를 메게 된 거예요. 그 때는 음악 한다고 생각 안하고 먹고 살기 위해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악기를 쓰냐고 하겠지만 나는 너무 힘들고 어깨가 무거웠기 때문에 호너로 바꿀 수밖에 없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만약 우리 집이 좀 살만 했으면 일찍 때려치웠을 겁니다.

Q: 저희가 듣기에는 송골매 5집 이후로는 기타 소리가 묻히는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 8집 음반이 그런 경향이 있는데요, 특별히 기술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는지요.
– 그게 좀 복잡합니다. 1984년인가 즈음에 일본에서 아라베스크가 공연을 하러 왔어요. 그 때 송골매가 오프닝 밴드를 했는데, 우스운 일이 있었죠. 나야 늘 하던 대로 소리 ‘이빠이’ 올리고 리허설을 하려는데 외국인 엔지니어가 오더니 ‘이렇게 올리면 기계 고장납니다’ 하더라구요. 난 속으로 ‘젠장, 기타 치는 놈이 연주도 맘대로 못하냐’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라베스크 연주를 보니까 걔들은 나름대로 첨단이라 디스토션 이용해서 소리를 작게 하면서도 증폭된 톤을 만들어 내더라구요. 우리가 그런 이펙트가 어디 있었겠어요. 그 공연 이후로 우리도 디스토션을 사용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어요. 녹음실에서 그걸 어떻게 잡는지 아무도 몰랐던 겁니다. 내가 앰프로 찌그러뜨리면 시원하게 났을 소리가, 이펙트로 하니까 모깃소리만하게 나는 거죠. 그 때문에 송골매 후기 음반에서는 기타 소리가 묻히고 조그맣게 들리는 거예요.

Q: 가슴 아픈 사연이네요. 김정선 님의 경우엔 하고 싶은 것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잘 구현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송골매에 제대로 된 프로듀서만 있었더라도 더 잘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 당시에 제대로 된 게 있었겠어요? 좋은 제작자라면 뭔가 주도면밀히 계획하고,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의 음악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타킷이 어떤 층인지 생각해서 제작해야 하는데. 그 때는 그런 게 없었죠.

Q: 외람된 말씀이지만 사실 6, 7, 8집에 가면 도통 ‘송골매 음악’ 같지가 않고 무슨 프로젝트 음반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마지막 9집의 경우에는 끝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만드신 건가요?
– 초창기에는 뭔가 독창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렇지 못했죠. (배)철수도 그런 부분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나는 9집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철수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모여라”할 때쯤엔 거의 장난이었죠. 나도 장난으로 쳤어요. 물론 좋은 친구들 만나서 미력하나마 한국 대중음악에 한 장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합니다. 우린 전부 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다만 방향 제시를 잘못 했던 거죠. 말했듯이 초심으로 돌아가서 연주보다도 우리의 창작력을 살리는 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6집에는 “해변으로 가요” 리메이크까지 있죠? 그렇게 해 봤자 송골매의 의미가 있겠어요? 굳이 누가 잘못해서 깨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어긋났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초창기 때 느낌이 가미되면서도, 뭔가 새로운 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깁니다”: 송골매 재결성의 변(辯)

Q: 그러면 김정선 님은 송골매 해체 뒤 1990년대에는 음악 활동은 안 하신 건가요? 후배를 양성한다거나…
– 송골매를 그만 두고 나서는 너무 지치고 속도 상해서 ‘앞으로 절대 음악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음악에 대한 정열이 없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7년 정도는 기타를 손에 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동안 벌어놓은 것 갖고 사업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음악만 줄곧 했으니 세상 물정을 뭘 알겠습니까. 세상은 또 살벌하잖아요. 결국 다 말아먹었죠.

Q: 외국의 경우 음악인들을 우대하고 아티스트로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기타리스트들 경우에… 송골매 같은 경우에도 일반인들은 (구)창모 님과 (배)철수 님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서운하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 나는 그 때 행복했으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노래부른 사람 이외에 뒷전에 밀리는 듯한 점에 대해 서운한 부분은 없지는 않겠죠.

Q: 요즘 젊은 밴드들, 이른바 인디 밴드 음악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또 2002년에 나온 [Tribute To Songolmae With Originals] 음반은 어떻게 들으셨는지도 말씀해 주시구요.
– 크라잉 넛을 좋아해요. 선배로서 그런 친구들이 편하게 음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게 아쉬울 뿐이죠. 트리뷰트 음반은 원곡에 충실하면서도 나름대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자기들 느낌대로 가서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크라잉 넛이나 김목경이 참여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개인족으로 생각합니다… 제작자를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 음반의 경우는 판단에 약간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사정이 있었겠죠.

Q: 마지막으로 ‘송골매 재결성’에 대해 묻겠습니다. 이에 대한 김정선 님의 입장은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 그 건은 일단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이야기 중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다시 한다면, 뭔가 나름대로 새롭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숙제라고 봅니다. 연초에 우리끼리 가진 모임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다시 같이 음악을 한다면 정말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새로운 방향 제시를 못 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초창기 때 느낌이 가미되면서도, 뭔가 새로운 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깁니다. 실험적인 부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예요. 이제 와서 우리가 뭘 바라겠습니까?

Q: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중요한 정보를 많이 얻었네요. 송골매 재결성 프로젝트가 잘 추진되서 기타 연주하는 김정선 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 이렇게까지 인터뷰를 준비해 온 줄은 몰랐어요. 기록도 별로 없는데 많이 준비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도 잘 물어봐 주고. 제 마음이 후련하네요. 20030901 | 신현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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