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04040442-0513sinchonblues2신촌 블루스 – 신촌 블루스 II(황혼/골목길) – 동아기획/서라벌, 1989

 

 

부유하는 음악 공동체, 신촌블루스의 가슴 뛰는 응시

1980년대 말, 신촌은 장미 여관이 놓인 골목이었다. 온갖 욕망들이 이리저리 뒹구는 음산한 그곳은 보헤미안들의 천국이었으며 마광수의 선동, ‘가자, 장미 여관으로!’가 빛을 발한 곳이기도 하다. 마광수의 선동이 문학과 철학의 담론을 ‘신촌화’하려는 시도였다면, 그곳에 자리잡은 한 무리의 뮤지션들의 또다른 기획인 신촌 블루스는 선전과 선동 대신 대중가요라는 실천의 영역을 ‘신촌화’하고 있었다.

지구 레코드를 통해 발매한 전작과 달리, 동아기획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발견한 덕분인지 음반은 전체적으로 더 자유롭고 실험적이다. 엄인호와 김현식의 조화되지 않은 화음이 날 것처럼 드러나는 “바람인가”와 “빗속에서”를 이음새 없이 연결한 트랙이나 훵키한 리듬에, 이정선’답지 않은’ 거침없는 보컬이 신선한 느낌을 자아내는 “산위에 올라” 등은 신촌 블루스라는 기획이 결코 음산함을 그 지향점으로 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음반 최고의 트랙으로 “골목길”을 꼽는 데 주저할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금속성의 어쿠스틱 스틸 기타가 뮤트와 업다운의 (테누토와 스타카토로 이루어진) 스트로크를 반복하며 ‘짝깍’이는 리듬을 만들어내면, 뒤이어 거친 쇳소리의 질감이 역력한 보컬(김현식)이 너털거리며 얹힌다. 이내 깍깍이던 기타가 서서히 소리를 낮추고 베이스가 출렁이기 시작하자, 보컬은 부끄러운 화자의 이야기를 너무나 당당히 외쳐대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 울려대는 팀발레까지, 전형적인 레게의 리듬을 차용한 이 곡에서 엄인호와 김현식은 신촌 블루스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골목길”이 신촌블루스의 어떤 극단이라면 그 다른 극에는, 이정선의 “아무 말도 없이 떠나요”가 존재하고 있다. 엄인호의 자유가 신촌 블루스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것이라면 이정선은 이 기획의 중심점이 어딘가를 끊임없이 반문하며 확인하려 한다(이정선은 2집 이후 이 기획에서 아쉽게 물러났다). 정갈한 어쿠스틱 기타가 정확히 한 음만큼 줄을 벤딩하며 시작되는 이 곡은 리듬과 솔로를 맡은 두 대의 기타와 베이스로만 이루어진 단출한 악기 편성을 보이고 있다. 리듬 기타가 처음부터 끝까지 갸우뚱한 셔플 비트를 메트로놈처럼 연주하는 동안 부드럽게 베이스가 들락거리고, 자신의 것으로 덧입혀진 보컬 하모니와 함께 기교 없는 목소리가 노래를 이어간다. 신촌 블루스의 실질적인 수장이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했던 그는, 전작을 통해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자신의 실험들을 정리하고, 결코 나직하지만은 않은 목소리로 포크 블루스의 정수를 풀어내고 있다.

장미여관이 부유하는 (신촌의) 외부자의 것이었듯 신촌 블루스 역시 새로운 영역을 탐닉하는 외인들의 무대였다. 전작을 통해 박인수와 한영애가 무대의 중심에 섰듯이 이 음반에는 김현식과 정서용이 각각의 몫을 담당한다. “골목길”에서 날선 칼날 같은 쇳소리로 포효하는 김현식은 신쓰 팝의 영향이 물씬 배어있던 “환상”(엄인호의 1985년 솔로 음반에 실린 바 있다)을 훵키한 리듬에 실어 불러 제낀다. 엄인환, 엄인호 두 형제가 주고 받는 색소폰과 기타의 향연은 이들이 적잖은 소울과 훵크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음을 드러낸다. 1986년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자신의 백밴드를 이끌고 신촌블루스에 가담하기 시작한 김현식은 이 음반에서 보컬로써 최고의 기량을 뿜어내고 있다.

김현식의 보컬이 절제 없는 들짐승의 그것이라면, 이 음반의 여성 보컬로 참여해 “황혼”과 “빗속에 서 있는 여자”를 노래하는 정서용의 다듬어진 목소리는 마치 ‘숨고르기’같은 효과를 갖는 듯 하다. 이 곡은 산울림의 아홉 번째 음반(1983년)에 자리한 바 있는 “황혼”을 ‘일렉트릭’ 블루스로 리메이크한 것인데, 원곡이 목소리의 꺾임을 최대한 자제함으로 ‘뽕’의 기운을 거세하려했다면, 정서용의 보컬은 보다 풍성하고 세련되게 그 기운을 압도해 자칫 “황혼 부루쓰”로 각인될 수도 있었던 운명을 바꾸고 있다. 뉴에이지 풍의 피아노가 인트로를 맡고 블루스, 팝, 퓨전 등이 고루 섞인 “빗속에 서 있는 여자”는 세련된 편곡과 군더더기 없는 연주가 일품이다. 역시, 이정선식 블루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곡으로 정서용은 “황혼”에서의 절창을 이어가고 있다.

음반의 전체적인 흐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은 스탄 게츠 풍의 보사노바 곡이다. 동아기획 소속으로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음악문화의 일원이기도 했던 이들은 신선한 느낌의 보사노바를 깔끔하게 연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냥 스쳐갈 수 없는 엄인호의 “루씰”이 있다. 한영애의 2집(1988)에 담기기도 했던 “루씰”은 엄인호의 곡에 한영애가 노랫말을 붙여 완성한 곡으로 블루스의 거장, 비비 킹에게 헌정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한영애의 목소리와 엄인호의 기타가 함께 했던 버전이 굵직한 느낌의 합주였다면, 이 음반에서 엄인호의 버전은 노랫말처럼 금속 같이 날카로운, 자신의 연주와 노래로 재해석되고 있다.

신촌 블루스라는 기획에서 ‘블루스’라는 이미지를 지우기는 힘들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기획에 대한 평가는 늘 블루스와 관련한 언급이 존재한다. ‘한국적 블루스의 정수’니, ‘가요에 블루스를 접목했다’느니 하는 평가는 그런 이미지의 충실한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블루(blue)한 뮤지션들의 집성체였던 이 기획의 의미는 고정된 어떤 것으로 담아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정선과 엄인호로 대표되는 투 톱의 음악 세계가 상이했으며, 몸을 이루는 뮤지션들의 성향 또한 다양함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신촌 블루스는 유동적인 기표이다. 그것의 기의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그들의 발원지였던 신촌의 풍경을 이렇게 저렇게 묘사함으로 블루스와 신촌을 엮거나 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동아기획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언더그라운드와는 다른 색조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20030630 | 신효동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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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Side A
1. 황혼 – 정서용
2. 바람인가, 빗속에서 – 엄인호/김현식
3. 산 위에 올라 – 이정선
4. 환상 – 김현식
5. 아무말도 없이 떠나요 – 이정선
Side B
1. 골목길 – 김현식
2.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 – 봄여름가을겨울
3. 빗속에 서있는 여자 – 정서용
4. 루씰 – 엄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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