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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 | The Bends | EMI, 1995

 

만신전으로 가는 쓸쓸한 발걸음

“삶은 어둡고, 죽음도 어둡다(Dunken ist das Leben, ist der Tod).”(한스 베트게, [중국의 피리]) 오케이. 얼치기 학생의 설익은 비관주의가 무르익던 시절, 자신에게 적합한 음악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건 어느 겨울밤이었다. 버스의 히터에서 나온 공기는 답답했고, 추위를 각오하고 살짝 연 차창 사이로 스민 바람은 입과 볼을 싸늘하게 붉힌 대신 차갑고 싱그러운 전율을 주었다. 물론 인정받기 위해 모터사이클 위에서 자살할(“High And Dry”)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러면 된 것이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이 자신에게 딱 맞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은 훗날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 음반을 듣고 있는 것이다.

라디오헤드는 어둡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15층에서 매달리는 정도로 내 동정심을 사려하지 마”(“Just”)라고 차갑게 일갈하거나 플라스틱 인형 앞에서 “네가 원하던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Fake Plastic Trees”)이라 되뇌는 밴드를 어둡거나 비관적이지 않다 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그렇다. 지금부터 그 점을 말해보려 한다. 다시 말해, 이 밴드가 세기말을 허우적대던 청승과 신파의 대명사에서 [OK Computer](1997)를 기점으로 하여 뉴 밀레니엄의 예술가로 순식간에 진화했다는 정설을 달리 생각해보자고 제의하는 것이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아니면 누군가 이미 해 두었건.

이제 와서 [The Bends]를 ‘영국식 그런지’라고 부를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처음 이 음반이 소개되었을 때는 ‘그런지에 대한 영국의 대답’이라고 선전이 되었고, 그래서 부쉬(Bush) 같은 밴드와 한 묶음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지글거리는 기타 사운드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Just”, “My Iron Lung”) 다운튜닝으로 빚어내는 그런지 특유의 공식적(formulaic) 긴장감은 들리지 않는다. 이 음반은 다들 알다시피 싸이키델릭한 기타 록 음반, 그것도 정말 잘 만든 음반이다. 세 대의 기타를 사용하여 만들어낸, 압박하듯 조여오는 싸이키델릭 사운드는 차라리 드림 팝의 영역에서 노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우울함은 공식적이라기보다는 계산적이다.

“(Nice Dream)”을 예로 들어보자. 코드를 바꿀 때마다 줄이 끌리는 소리를 강조하는 어쿠스틱 기타 스트러밍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보컬을 전면에, 전기기타를 후면에 배치시킨다. 첫 번째 코러스를 반복할 때 아련하게 잡히는 현악 세션과 합창처럼 들리는 몽롱한 효과음 중, 현악 세션은 두 번째 버스에서 더 또렷이 드러나며, 합창 같은 효과음은 멤버들의 목소리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치가 아니다. 그랬다면 첫 번째 코러스에서 멤버들의 백보컬을 집어넣은 뒤 웅장한 합창 효과음으로 이를 대체했을 것이다. 세 번째 코러스를 반복하기 직전 숨어 있던 전기기타가 싸이키델릭하게 울부짖지만 이는 폭발이라기보다는 내파에 가깝다. 기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의 흥분하지 않으며, 기타조차도 이미 준비된 듯한 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기타가 잦아들면서 모조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휑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이 곡이 표현하는 감정은 진실되지 않지만, 그럼으로써 그 자체로 모조 감정이 넘쳐나는 세계의 소리를 들려준다. “Fake Plastic Trees” 후반부의 폭발 또한 마찬가지다. 이 음반의 싸이키델릭은 감정을 고양하고 연소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싸늘하게 식히기 위한 것이다. 톰 요크의 보컬에 속지 말자.

그렇다면 이 음반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음반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언제나, 이 음반은 자신도 잘 모를 염세주의에 고통스러워하는 1990년대적 청춘을 위한 음반으로 평가받아왔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잘 짜여진 사운드의 결을 따라 흐르는 비감어린 멜로디와 톰 요크의 초현실적 가사이다. 불합리한 이미지들을 불연속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노리는 그의 가사는 ‘구찌 표 돼지새끼들’에 대한 신랄한 공격과 내적 분열을 조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미 그 자체로 심연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다. 유일한 문제는 그가 바라보는 곳에 심연이 없으며, 사실 심연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음반의 가사들이 드러내는 비감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감정을 투사했을 때 되돌아오는 허무와 상실이며, 이것이 그 자체로 1990년대의 정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계산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이 밴드가 한 세기를 넘기는 사이 자폐적으로 붕괴하지 않은 데 대한 대답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 음반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순간에도 라디오헤드의 최고작은 [OK Computer]이다. 그러나 라디오헤드의 음반 중 가장 영향력 있는(influential) 음반은 [The Bends]일 것이다. 부풀려 말하면, 이 음반 이후의 거의 모든 영국산/북유럽산 기타 록은 이 음반이 표면적으로 제시한 정서, ‘라디오헤디즘(radioheadism)’이라고 누군가 부른 바 있는 감상적이고 음습한 마이너 코드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마무리를 짓자. 이 음반을 메이저 코드로 바꾼 뒤 창밖의 빗소리를 노래하면 트래비스(Travis)의 [The Man Who]가 되고, 기타에 대한 세심한 고려를 뺀 자리에 키보드의 아르페지오를 바르면 뮤즈(Muse)의 [The Origin Of Symmetry]가 된다. 어쿠스틱 연주로 바꾸면 콜드플레이(Coldplay)의 [Parachutes]가 되며, 뭉갠 전자음을 두텁게 바르면 엘보우(Elbow)의 [Asleep In The Back]이, ‘이브닝 버전’으로 투명하게 리믹스하면 스타세일러(Starsailor)의 [Love Is Here]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지극히 불행하게 노래한다. 그러나 이 음반들 중 어떤 것도 [The Bends]가 도달했던 경지, 행복에 대한 절망적인 열망이 파탄에 이르는 순간에 행복에 대한 약속을 암시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 최민우 [email protected]

 

Rating: 9/10

 

수록곡
1. Planet Telex
2. The Bends
3. High and Dry
4. Fake Plastic Trees
5. Bones
6. (Nice Dream)
7. Just
8. My Iron Lung
9. Bullet Proof…I Wish I Was
10. Black Star
11. Sulk
12. Street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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