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03081354-0511jodongjin3조동진 – 조동진 3(슬픔이 너의 가슴에/제비꽃) – 동아기획/태광음반(VIP 20015), 19850101(CD 발매: 문화, 1991)

 

 

낮은 목소리로 여기 흐릿하게 불어오는 노래

흐릿하다. 한바탕 비온 뒤 안개가 자욱하게 꼈는지, 는개(霧雨)라도 내리는지 풍경은 아련하고, 한 사내와 멀리 고층빌딩은 축축한 바닥에 낮고 어둡게 비친다. 여의도 광장일까. 넓은 아스팔트 위에서 롤러 스케이트를 신고 지치거나 자전거를 빌려 타던 1980년대 그곳. 그러나 ‘그 복판’에 서 있는 장발의 사내는 점퍼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흐릿하게 지워진, 혹은 콘트라스트가 뭉개진 거친 결의 흑백 커버 사진.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는 시대, 조동진은 늘 그 과속의 행렬에서 한발 비껴나 있는 것 같다. ‘느림'(과 낮음)이란 단어만큼 그에 대한 인상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 있을까. 조동진이 5년만에 내놓은 신작 [조동진 3(슬픔이 너의 가슴에/제비꽃)](1985)은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드는 시대와 삶에 조동진이 들려주는 잠언집(箴言集) 혹은 그가 건네는 차 한잔이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첫 곡 “슬픔이 너의 가슴에”에서 조동진은 말한다. ‘슬픔이 너의 가슴에 / 갑자기 찾아와 견디기 어려울 땐 / 잠시 이 노래를 가만히 불러보렴 / 슬픔이 노래와 함께 조용히 지나가도록 / 내가 슬픔에 지쳐 있었을 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이라고. 그러면서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동화를 연상시키는 내러티브로 한 소녀의 성장을 들려주고(“제비꽃”), 어린 아이의 외로움을 읽어내며 기꺼이 자장가가 되어준다(“얘야, 작은 아이야”). 그리고는 ‘빛과 어두움 사랑과 미움 / 별과 꽃들 슬픔과 기쁨 / 함께 거두’는 나무의 지혜를 얘기하면서(“나무를 보라”), 청년기의 바람과 흔들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질문들을 노래한다(“기쁨의 바다”, “끝이 없는 바람”). 그렇다고 세상에 대한 질문과 번민에 얽매여 그대와 음악이 함께 있는 지금의 소중함을 잊는 것은 아니다(“그대와 나 지금 여기에”). 에필로그 격인 마지막 트랙에서 그는 말한다. ‘음악은 끝나고 시계 소리 / 슬픔도 지나고 바람 소리 / […] 그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 […] 나의 긴 이야기 종잡을 수 없네 / 음~ 차나 한잔 마시지’라고(“차나 한잔 마시지”).

여기 담긴 곡들은 이처럼 (어른들을 위한)동화, 헤세(Hermann Hesse)적인 자기 탐구, 구도자적인 잠언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관통하는 것은 상징적이고 시적인 외투이다. 그렇다면 이 언어들은 어떤 소리로 표현되었을까. 동방의 빛의 옛 동료들이 세션을 전담했던 2집과 달리, 이 음반은 이호준(피아노, 신서사이저), 조원익(베이스, 플루트)을 제외하고는 김광민(피아노, 신서사이저), 허성욱(피아노), 안기승(드럼), 이원재(클라리넷)가 새롭게 참여했다는 정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건반 쪽이 강화된 것과 달리, 기타는 조동진 홀로 연주했다. 그래서 이 음반이 전작들보다는 다채로운 소리들로 채색되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명곡으로 평가받는 두 번째 트랙 “제비꽃”은 섬세하게 배치된 풍성한 사운드를 잘 보여준다. 동화적이고 서사적인 가사의 내러티브와 조응하듯, 잔잔한 아르페지오로 일관하는 어쿠스틱 기타 반주 위에 목관악기들, 아코디언, 하프시코드, 하프 등 다양한 어쿠스틱 악기 소리들(실제론 대부분 신서사이저에 의해 직조되었지만)이 들고나며 아름답게 채색한다. 전작에 이어 동생 조동익이 만든 “얘야 작은 아이야”는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한 청유형 가사답게 어쿠스틱 기타의 단촐한 반주에 영롱하게 출렁이는 소리들이 맑은 느낌을 준다. 다른 한편 “나무를 보라”와 “너의 노래는” 그리고 “아침이 오고 다시 저물고”는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차분하고 명징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신서사이저가 효과음을 장식하거나 빈틈을 메우고, 드럼이 일정한 액센트를 찍어주지만 부차적이다. 전형적인 포크(록) 스타일이지만, 관습적이란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아침이 오고 다시 저물고”와 한동준의 “너를 사랑해”(1993)를 비교해 보라).

반면 음반의 허리에 배치된 “기쁨의 바다로”와 “끝이 없는 바람”은 상이한 결을 가지고 있다. 조동진의 노래가 예의 낮고 느리게 부유하는 가운데,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가는 신서사이저와 작은 파문을 남기는 드럼 연주는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울림을 준다. 2집의 “어둠 속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그와 맥을 같이 하는 곡들이다. ‘정중동(靜中動)’의 내면적인 드라마틱 구조라고 불러도 될지는 듣는 이의 몫이다. “그대와 나, 지금 여기에”와 “차나 한잔 마시지”는 음반의 문을 닫는 노래답게 절충적이다. “그대와 나, 지금 여기에”는 평온하게 시작되어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신서사이저 연주로 고조되고, 소품 같은 “차나 한잔 마시지”는 기타와 신서사이저의 섬세한 소리와 배치가 여백과 침묵의 여운을 남긴다.

이 음반에 담긴 사운드는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다. 이는 1, 2집과 달리 여성 코러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게 적지 않은 이유겠지만, 각 악기의 톤이나 녹음 상태가 중심적인 요인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음반 커버 뒷면에 적혀 있는 ‘녹음: 오리엔트 스튜디오, 제작: 김영(동아기획 사장)’이란 문구는 상징적이다. 조동진 디스코그래피에서 이 음반은 1970년대를 주름잡던 오리엔트(스튜디오)와 그 세션진(동방의 빛)과 결합한 마지막 작품이고, 동아기획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합한 작품이다(물론 이 음반을 낼 때까지만 해도 동아기획이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즉 1970년대부터의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음반이면서, 동시에 장차 하나기획(그리고 이른바 조동익 밴드)이란 또 하나의 음악집단 혹은 사운드의 맹아를 보여주는 음반이다. 조동진의 걸작 중 하나란 얘기는 너무 당연해서 빠뜨릴 뻔했다. 20030612 | 이용우 garuda_in_tho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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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이 음반은 무엇보다 ‘”제비꽃” 음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동화적인 노랫말을 갖고 있는 “제비꽃”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1950)와 앙드레 슈발츠-바르트(Andre Schwarz-Bart)의 [孤獨이라는 이름의 女人(A Woman Named Solitude)](안정효 譯)을 읽고 그 여주인공들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가사를 썼다고 조동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조동진이 모델로 한 여주인공들(니나 붓슈만과 솔리튜드)은 모두 삶의 굴레에 맞서며 적극적으로 생을 개척하는 인물들이다. 조동진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면 뜻밖이란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수상한 시대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곰곰 들여다보면 그의 가사를 사변(思辨)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자의적이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조동진의 낮은 목소리와 가사가 시(詩)적이라면 그런 맥락에서다.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수록곡
Side A
1. 슬픔이 너의 가슴에
2. 제비꽃
3. 얘야, 작은 아이야
4. 나무를 보라
5. 기쁨의 바다로
Side B
1. 끝이없는 바다
2. 너의 노래는
3. 아침이 오고, 다시 저물고
4. 그대와 나, 지금 여기에
5. 차나 한잔 마시지
6. 어허야 둥기둥기(건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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