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진 – 조동진 2(어느날 갑자기/그) – 한국음반(HC 200089), 1980 어둠을 밝히는 시정(詩情) 시조 형식이 사멸한 이래 한국 근현대 시문학은 이른바 ‘자유시’의 지배적인 영향으로 규칙적인 운율의 사용이 퇴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래와 같은 예를 보면 정형화된 운문 예술의 잠재력을 우리말에서 찾기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 그불빛 아래로 너의작은 얼굴 /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 그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가 단순히 ‘좋은 노랫말’ 수준을 넘어 엄연한 문학 작품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할 이유는, 단지 선택된 낱말들이 빚어내는 뛰어난 음악성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가사가 지닌 효과는 청각적인 만큼이나 시각적이기도 하다. 원래 음악이 아니라 미술을 지망했다는 조동진의 말을 충분히 수긍이 가게끔 하는, 다각도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시선 말이다. 위에 인용한 네 행의 짧은 싯구에서도 시선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여러 번 교차하고, 우리는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여러 다른 풍경과 심상을 동시에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에 불과하지만, 이와 같은 조동진의 주지시(主知詩)적 서정은 한국 문학사에서 이 계열의 대표자로 알려진 영랑(永郞) 김윤식을 훨씬 능가한다. 한국 포크 음악에서는 그동안 많은 아름다운 노랫말들이 씌어져 왔지만, “나뭇잎 사이로”에 비견할 만한 시각적 감흥을 주는 것은 정태춘의 “서해에서” 정도를 제외하면 그다지 흔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조차도 전자의 도회적 현대성과 후자의 전원적 전통미가 워낙 대조적이기에 같이 놓고 얘기하기가 좀 어색하다. “나뭇잎 사이로” 한 곡만으로도 이처럼 말이 길어지는 조동진의 두 번째 앨범은 1980년 9월에 처음으로 발매되었다. 그의 ‘주옥같은’ 명곡들이 주루루 박힌 데뷔 앨범이 나온 게 그보다 기껏 1년 반 전이니까, 이 두 앨범은 같은 시기 연속된 작업의 산물들로 이해할 수 있다. 10년이 넘도록 록과 포크 씬에서 활동했으면서도, 그의 성격답게 쉽사리 앞에 나서지 않고 주로 뒤에서 꾸준히 곡들을 써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연타를 터뜨린 것이다. 녹음 작업을 같이한 것은 오랜 친우인 강근식(기타)과 동방의 빛, 즉 이호준(건반), 조원익(베이스), 배수연(드럼)의 베테랑 연주인들이다. 70년대 중반 이래 한국 포크를 그저 ‘통기타 음악’ 이상의 세련되고 다양한 음악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은, 이 음반에서도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해서 2트랙이라는 열악한 녹음환경이 무색해질 만큼 고품격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특히 [별들의 고향] 영화음악이나 이장희, 4월과 5월 등의 작품을 통해 여러 가지 음색을 실험해 온 이호준의 신디사이저는 이 음반에서도 “빗소리”의 영롱함에서부터 “배 떠나가네” 후반부의 배경을 가득 채우는 웅장함까지 다채로운 색깔을 입힌다. 전자음향이라는 게 원래 세월과 유행을 많이 타는지라 지금 와 들으면 구닥다리라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는 없지만, 당시의 한국 상황에서는 한참을 앞서 나간 사운드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이호준이 속칭 ‘갤러그 소리’로 알려졌던 뿅뿅뿅 전자음을 집어넣어 조용필의 “단발머리” 히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한편 강근식의 전기 기타는 앨범의 첫 곡 “어느날 갑자기” 후반부에 들릴 듯 말 듯 어렴풋이 울렸다가, “그”의 중반부에 문득 거친 톤으로 끼어들기도 하고, 조동진의 곡답지 않게 약간 경망스러울 정도로 발랄한 “달빛 아래”에도 슬그머니 자취를 남기는 걸 잊지 않는다. 그래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조동진의 처음 두 앨범에서 가장 ‘튀는’ 사운드는 여성 배킹 코러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 한 곡을 제외하고는 음반에 두루 편재하는 고음역의 코러스는, 본인의 의도였든 아니든 간에 “Suzanne”이나 “So Long, Marianne” 같은 레너드 코엔(Leonard Cohen)의 초기작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조동진의 마르고 가라앉은 목소리, 여러 곡들에서 감출 수 없이 우러나는 감상(感傷),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시적인 가사는 그런 연상작용을 더더욱 강화할 뿐이다. 바로 그 때문이었을까. 1970년대 말에 잘 다듬어진 록 밴드 편성으로 녹음된 음반들이건만, 그 기본 정서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 한국 포크 태동기의 소박한 통기타 음악들에 닿아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청년/저항문화로서 북미 포크음악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기 시작했던 그 때 말이다. 그런 느낌을 더욱 분명히 해주는 건 수록곡 중 여럿이 이미 그 때를 전후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으로 성장한 동료 음악인들과 마찬가지로, 조동진 또한 북미 포크의 좁은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포크를 넘어서 록과 재즈까지 어우르며 1980년대 대중음악을 선도하게 되는 하나의 ‘유파’를 본격적으로 창립하는 건 몇 년 더 지나서 일이지만, 그런 ‘진보’의 징후는 앨범의 마지막 트랙, 연주시간이 8분 가까이 달하는 ‘대곡’인 “어둠 속에서”에서 이미 엿보인다. 오르간과 바람소리 효과음에 이어서 아주 약간 페이저(phaser) 효과를 건 듯 미세하게 앵앵거리는 울림이 귓전을 맴도는 기타 아르페지오 전주는 초장부터 프로그레시브 록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단조의 도입부는 기타, 노래, 키보드를 점층적으로 쌓아가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중반부 드럼 비트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장조로 조바꿈이 이루어지며 긴장은 해소되고 노래는 활기를 찾는다. 간주가 지나고 다시 한번 반복되는 노래의 내용은 ‘어둠’과 ‘안개’ 속에서도 마음을 밝히고 물 흐르듯 노래하면 머리 위에서 내리는 빛에 감싸여 자유를 찾는다는 구도적 혹은 구원적인 것인데, 거기에 마치 결정적인 마침표를 찍듯 ‘새는 하늘 높이 자유로워’라는 후렴은 제너시스(Genesis)의 스티브 해킷(Steve Hackett)을 본뜬 듯한 기타와 더불어 대미를 장식한다. 이 음반의 시대적 배경에는 근 20년간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까지 철저하게 제약하려 했던 폭압적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일대 사건이 놓여 있다. 그것이 음악을 만드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마 그 또한 매우 이상한 일일 것이다. 비록 음악을 통해 드러내놓고 사회적 발언을 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배 떠나가네”와 “어둠 속에서”에서 여느 때보다 훨씬 기운을 뻗치는 조동진의 목소리는 불안해 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희망에 차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증언하는 듯하다. 비록 한 달 후 세상은 더 깊은 암흑과 비탄에 빠져들었으나,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라며 인고의 시간을 예기하던 조동진과 그의 노래는 19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의 첫 번째 불빛을 이미 밝히고 있었다. 덧붙이는 말: 누구나 처음 듣고 좋아하게 된 판본에 대한 애착이 있는 법이기에, 나중에 그와 다른 판본을 듣고 더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시중에서 CD로 구할 수 있는 음반은 조동익, 이병우, 김광민 등 ‘동아-하나기획 올스타즈’ 편성으로 멀티트랙 녹음된 1986년 재녹음반인데, 그것으로 조동진 2집을 처음 접한 경우라면 아마도 그 편이 더 동시대적이고 친근감 있게 느껴질 것이다. 원본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느려진 템포, 리버브(reverb)로 인한 공간감, 퓨젼 재즈적인 악기 음색, 좀 더 부드러워지고 뒤로 멀찌감치 빠진 배킹 코러스 등이다. 그리고 원래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진눈깨비” 한 곡이 추가되었다. 원본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한 가지 재녹음반의 결정적인 개선점이라면, 원본에서 다소 성급히 페이드 아웃시켜버린 “나뭇잎 사이로” 종지부의 은은한 허밍(humming)을 듣기 좋게 늘인 것을 꼽아야 하겠다. 20030522 | 김필호 antieodipe@hanmail.net 0/10 수록곡 Side A 1. 어느날 갑자기 2. 빗소리 3. 나뭇잎 사이로 4. 해 저무는 공원 5. 배 떠나가네 Side B 1. 그 2. 어떤 날 3. 달빛 아래 4. 어둠 속에서 관련 글 조동진 vs 이정선: ‘한국형’ 싱어송라이터의 두 개의 초상 – vol.5/no.11 [20030601] 기나긴 기다림,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여운: 조동진과의 인터뷰 – vol.5/no.11 [20030601] 조동진 [조동진 1(행복한 사람/불꽃)] 리뷰 – vol.5/no.11 [20030601] 조동진 [조동진 2(어느날 갑자기/그)] 리뷰 – vol.5/no.11 [20030601] 조동진 [조동진 3(슬픔이 너의 가슴에/제비꽃)] 리뷰 – vol.5/no.11 [20030601] 조동진 [조동진 4(일요일 아침/당신은 기억하는지)] 리뷰 – vol.5/no.11 [20030601] 조동진 [조동진 5(새벽안개/눈부신 세상)] 리뷰 – vol.5/no.11 [20030601] 조동진 [Best Collection] 리뷰 – vol.2/no.6 [20000316] 배리어스 아티스트 [꿈] 리뷰 – vol.5/no.11 [20030601] 엄인호 vs 조동익: 후광보다 더 밝게 비친 언더그라운드의 두 불빛 – vol.5/no.13 [20030701] 한영애 vs 장필순: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여성적 측면 – vol.5/no.14 [20030716] 관련 사이트 하나뮤직 공식 사이트 http://www.hanamusic.co.kr/ 조동진 비공식 사이트(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http://www.jodongjin.com/ 조동진 다음 카페 사이트 http://cafe.daum.net/chodong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