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02021657-thirteenBlur – 13 – EMI, 1999

 

 

밴드의 가장 내밀한 기록

[Blur](1997)의 예기치 못한 성공 이후,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권 내로 진입한 블러(Blur)의 다음 행보는 [13](1999)을 통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드러났다. 오랜 동반자였던 스테판 스트릿(Stephen Street)을 대신한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의 손길은, (그의 이전 작이자 출세작인) 마돈나(Madonna)의 [Ray Of Light](1998)적인 사운드를 점쳤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할만큼 지독하면서도 독특한 ‘음향의 혼돈(chaos)’을 형성해 냈다. 데이몬 알반(Damon Albarn)의 송라이팅은 어느 때보다도 모호하고 침잠해 있었으며,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의 기타는 앨범 전체의 성격을 규정짓는 극단적인 노이즈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당연히 음반의 대중적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밴드는 전작의 “Song 2″로 어렵사리 열어 젖힌 미국진출의 기회마저 무산시키는 아픔을 맛본다.

[13]은 분명 [Blur]의 미국 인디 록적인 사운드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Blur]가 기존 블러의 것이라 여겨져 왔던 (킹크스(The Kinks)와 비틀스(The Beatles)를 위시해, 영국 팝송의 전통에 충실한) 사운드 형식을 버리면서도 절대 놓치지 않았던 멜로디의 유쾌함마저 과감히 희생시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멜로디의 변화는 데이몬 알반의 개인적인 시련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8년에 걸친 오랜 연인 관계였던 저스틴 프리쉬먼(Justine Frischmann: 일래스티카(Elastica)의 보컬)과의 결별이 가져온 영향은, 블러의 앨범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내성적이며 침잠한 분위기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데이몬 알반은 [13]이 저스틴 프리쉬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최초의 음반이라고 했다).

런던 시립 고스펠 합창단과 함께 한 앨범의 첫 트랙이자 (그나마 대중 친화적인 사운드의) 첫 싱글 “Tender”는 밴드의 말대로 ‘모두가 SF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옷을 입는 시대에 리바이스 진을 걸친 듯한’ 느낌의 곡이다. 음향적인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은 어쿠스틱 사운드와 ‘C’mon c’mon c’mon’을 외치는 찬송가 풍의 후렴구는 블러의 음악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이전의 재기 발랄함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한 것은 삶에 대한 통찰이었으며, 통속적인 메시지(‘Love’s the greatest thing’)만큼이나 강한 설득력을 갖는 보편적 감동이었다(스튜디오 라이브를 촬영한 비디오 클립이 더 효과적인 감상을 전달하는 듯하다).

이어지는 “Bugman”은 고출력의 기타 사운드와 특유의 ‘la la la’ 후렴구를 통해 어느 정도의 흥겨움을 유발하지만, 곡의 후반부 프로그레시브 록의 영향권 하에 놓인 싸이키델릭 후주는 데이몬 알반의 팔세토(falsetto: 가성) 창법과 함께 묘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간다. 이 곡을 비롯하여 “Swamp Song”, “B.L.U.R.E.M.I.”, “Trimm Trabb”을 통해 부각되는 것은, 사운드 메이커로서 그레이엄 콕슨의 자기주장이다. [Blur]를 통해 드러난 그의 기타 노이즈에 대한 애정은, 솔로앨범 [The Sky Is Too High](1998)의 다이노소 주니어(Dinosaur Jr.)적인 사운드를 지나 [13]에 이르러 음반의 사운드 성격 자체를 규정 짓기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13]이 그레이엄 콕슨이 주도하는 ‘기타 음반’인 것은 결코 아니다. 데이몬 알반은 기타 중심 체제를 넘어선 작곡 구조를 종종 구사하는데(“Battle”, “Trailerpark”, “Caramel” 등), 그가 눈을 돌린 영역은 (댄스가 아닌) 일렉트로닉과 재즈에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자칫하면 앨범의 통일성을 좀먹는 커다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오빗의 손길에 의해 [13]은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난다. 일례로 앨범의 핵심 트랙이라 할 만한 새로운 사운드에의 야심이 돋보이는 “Battle”(과 “Caramel”)의 경우, 일렉트로니카의 접근방식을 따르는 와중, 기타 노이즈를 전면에 부각시키면서도 그것을 연주의 기본 골격이 아닌 사운드 텍스쳐로 사용함으로써 기타 중심의 작곡 구조를 해체하고 있다. 귀를 멍멍하게 울려대는 광폭한 노이즈와 섬세한 보컬의 멜로디가, 이를 모두 감싸안는 막대한 공간감의 사운드 속에서 각자의 방향을 향해 부유하는, 음향의 ‘무정형의 질서’를 만들어 가는 듯한 트랙이다([13]이 ‘포스트-록(post-rock)’ 음반이라는 말을 듣는 까닭은 이러한 사운드에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윌리엄 오빗의 섬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곡과 곡 사이 세심하게 선택한 각종 샘플링과 효과음의 (“Bugman”과 “Coffee & TV”/”Swamp Song” 사이의 연결이나 “Battle”/”Mellow Song”, 그리고 “Caramel”과 “Trimm Trabb”을 잇는) 간주 부이다. 이를 통해 다소 산만하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13]의 다각적 사운드는 아슬아슬한 통일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곡을 전담’하는 데이몬 알반과 ‘음향을 틀어쥔’ 그레이엄 콕슨의 격돌은, 점차 양보 없는 대립으로 이어지며 밴드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데이몬 알반과 그레이엄 콕슨의 충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은 (역설적이게도 둘의 듀엣 송인) “Coffee & TV”이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Coffee & TV”는 리드 보컬을 맡은 그레이엄 콕슨의 곡이 아니다(곡의 선율만 봐도 전형적인 ‘데이몬 알반 표’ 팝송임을 알 수 있다). 작곡이 모두 끝난 상태에서 바쁜 일정에 치어 시간이 없었던 데이몬 알반은 작사와 메인 보컬 파트를 그레이엄 콕슨에게 떠넘기게 되었고, 이에 반감을 품고 있던 콕슨은 앨범의 두 번째 싱글이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기타 파트가 강조된) “Trimm Trabb”에서 “Coffee & TV”로 교체되자 강한 불만을 드러내게 된다(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내향적인 캐릭터의 그가 매 공연마다 “Coffee & TV”를 불러야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얘기했듯, 결국 앨범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데이몬 알반의 ‘관계의 파국과 그에 따른 정서적 상실감’을 통한 내면의 변화일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러나 결코 과도하지 않은) 발라드 트랙 “Mellow Song”과 “너로부터 달아날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며 자조하는 “No Distance Left To Run”, 그리고 (블러 앨범들의 전통을 잇는 피날레) 왈츠(waltz)임에도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한 연주곡 “Optigan 1″을 통해, [13]은 이러한 ‘차가운’ 음향실험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영혼(soul)을 가진 음반으로 완성되었다.

[13]은 블러가 겪었던(그리고 앞으로 겪어야 할) 밴드 내부의 갈등이 여과 없이 드러난 음반이자, 결코 하나의 사운드 형식에만 매달리지 않는 밴드의 다양성을 극명히 드러낸 음반이기도 하다(그런 점에서 이 앨범을 블러의 가장 ‘내밀한’ 음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낯을 가리는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코 ‘멜로디’를 버리지 않는 현명함을 과시했으며, 이는 블러가 분명 ‘팝 밴드’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밴드 내부의 주도권 다툼은 서로의 역량을 극한으로 끌어내며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고, 결과적으로 [13]은 이들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물론 이후 드러난 데이몬 알반과 그레이엄 콕슨의 악다구니가 보기에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13]이 그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20030513 | 김태서 uralalah@paran.com

9/10

수록곡
1. Tender
2. Bugman
3. Coffee & TV
4. Swamp Song
5. 1992
6. B.L.U.R.E.M.I.
7. Battle
8. Mellow Song
9. Trailerpark
10. Caramel
11. Trimm Trabb
12. No Distance Left To Run
13. Optiga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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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Tender”

관련 사이트
Blur 공식 사이트
http://www.blur.co.uk/s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