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02021847-blurBlur – Blur – EMI, 1997

 

 

Great Escape From The Great Escape (혹은 자의식으로부터의 대탈주)

블러(Blur)의 앨범 [The Great Escape](1995)는 너무 커져버린 자의식이 자아를 어떻게 삼키는지, 의미의 포화상태가 얼마나 의미 없음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 한 예였다. 차트 1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블러다운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실패작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기묘한 앨범 [The Great Escape]. 이후에 이들은 브릿팝(BritPop)의 사망선고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앞선 U.K. 3부작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는 듯 소닉 유스(Sonic Youth), 페이브먼트(Pavement), 벡(Beck)등 미국 인디씬의 수장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곡들로 앨범을 채웠다.

전혀 블러 답지 않은 나른함과 무성의함으로 만들어진 “Beetlebum”, 초기 그런지(grunge)가 갖고 있었던 에너지를 강렬하게 발산하는 “Song 2”, 따라 부르기 쉬운 아동 체조 주제가 같은 “On Your Own”에는 스크래칭과 힙합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고, 불길한 올갠 소리와 노이즈,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듯한 목소리가 뒤섞인 “Theme From Retro”는 크라우트록(krautrock)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이 직접 부른 통기타 곡 “You’re So Great”는 벡이 불렀으면 더 잘 어울릴만한 곡이다. 이 곡은 그레이엄 콕슨이 최초로 혼자 작곡한 곡이고, 밴드 멤버가 녹음실에 없는 틈을 타 혼자 녹음을 후다닥 해버렸다고 한다. [Modern Life Is Rubbish](1993)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발굴된 “Death Of A Party”는 블러의 그루브와 소닉 유스의 노이즈가 잘 어울린 곡으로 ‘소닉 유스 같은 블러’를 들려준다. 이에 대응하여 마지막 곡 [Essex Dogs]는 ‘블러 같은 소닉 유스’라고 할 수 있을 법한데, 블러의 곡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당혹스러운 곡이다. 6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조롭게 반복되는 리듬과 리듬을 밟고 널을 뛰듯 이리저리 튕기는 기타 노이즈는 듣는 이의 고막을 부주의하게 긁어놓으며, 중간 중간에 들리는 기분 나쁜 낮은 중얼거림… “라라라” 없이도 충분히 의도하던 바가 잘 전달되는 곡이다.

앨범이 발매된 결과 [Blur]는 싱글 “Song 2″의 히트에 힘입어 미국 시장에서 최초의 골드(50만장 판매)를 기록하였고, 블러의 앨범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반응은 해외의 통일된 반응에 비해 평이 분분한 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영국 언론은 블러를 오아시스(Oasis)와 비교하지 않게 되었다(대신에 그런지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주는 부쉬(Bush)가 오아시스를 대체하는 비교항이 되기도 하었다). 국내에서는 뒤늦게 블러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굴지의 게임회사 EA에서 나온 에 “Song 2″가 삽입되면서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모두가 같은 질문 – “너 FIFA에 나오는 우~후하는 노래 제목이 뭔지 아니?” – 을 해대었다.

블러가 [Blur]에서 보여주는 또 다른 변화는 수그러든 뻔뻔함과 잘난 척이다. 블러는 뮤직비디오에서도 지적 허영을 과시하기로 유명하다. “The Universal” 뮤직비디오에서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시계 태엽장치 오렌지>의 몰로코 씬을, “To The End” 뮤직비디오에서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알렝 레네(Alain Resnais)의 <지난 해 마리 앙바드에서>의 씬을 참조하였다. 그러나 이번 앨범의 대표곡 두 곡인 “Song 2″와 “Beetlebum”에서는 단지 협소한 실내에서의 연주장면만을 보여주며 극도의 미니멀함을 보여준다. 게다가 두 뮤직비디오의 세트는 같은 장소이고 밴드의 의상도 같다. 세상을 향한 조롱어린 시선은 독기 빠진 내면 고백으로 변했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이라도 하듯 앨범 속지에서 가사를 없애버렸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정서는 뻔뻔함을 버린 겸손이 아닌 의기소침이었다. 데이몬 알반(Damon Albarn)의 목소리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곡이었던 “M.O.R.”에서 그의 목소리는 곡의 빠른 리듬을 감당해내기엔 이미 허무해져 버린 후였고, “Beetlebum”의 끊임없이 하강하는 기타 소리와 소피 뮬러(Sophie Muller)가 감독한 뮤직비디오 끝부분, 허공을 바라보는 데이몬 알반의 눈과 끝없이 달려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곡의 쾡한 느낌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첫 곡 “Beetlebum”의 허무한 느낌에 필이 꽂힌 이라면 이 앨범의 그 어떤 곡을 들어도 허무해질 것이다. “대탈주”로 너무 지친 탓인가.

첫 곡부터 끝 곡까지 같은 스타일이 하나도 없는 방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앨범은 초기 기획부터 실패의 부담이 더 큰 앨범이었다. 너무나도 영국적인 밴드가 미국의 록을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결과에 대한 보증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종합 선물세트 같은 다양한 스타일은 (비록 이들이 싱글 히트를 타겟으로 하는 팝 밴드라고 하더라도) 앨범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극단적인 산만함은 그 자체로 앨범의 컨셉이 되었고, 앨범 전체에 가득한 노이즈는 앨범의 색채를 통일시켜주는 요소였다. 인터뷰에 의하면 이 산만함과 무성의함은 의도된 바였고, ‘하루만에 만든 것같은 조잡함’은 석 달을 투자하여 뽑아낸 결과라고 한다. 이전의 곡들과는 다른 외래 장르를 받아들이고도 본바탕의 변화 없음은 이들이 앨범 제작 초기에 버렸다고 믿어졌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슈퍼 자의식 때문일 것이다. 자의식을 버렸다고 믿어졌지만 형태를 바꾸어 더 견고하게 커버린 자의식. 어쨌든 아직까지 “자의식에게 경배를”이라는 찬사는 유효하다. 또한 ‘자의식으로부터의 대탈주’라는 이 리뷰의 부제는 오류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20030527 | 이정남 yaaah@dreamwiz.com

8/10

수록곡
1. Beetlebum
2. Song 2
3. Country Sad Ballad Man
4. M.O.R.
5. On Your Own
6. Theme From Retro
7. You’re So Great
8. Death Of A Party
9. Chinese Bombs
10. I’m Just A Killer For Your Love
11. Look Inside America
12. Strange News From Another Star
13. Movin’ On
14. Essex D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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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Beetlebum”

관련 사이트
Blur 공식 사이트
http://www.blur.co.uk/s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