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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으로 빚어낸 견고한 사운드

“전 세계 어느 곳의 사람이든 ‘la la la’의 의미를 알 겁니다” – 데이몬 알반(Damon Albarn)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블러(Blur)가 만들어내는 ‘la la la’는 그의 주장처럼, 단순히 흥겹게 따라 부르기 좋은 ‘la la la’가 아니기 때문이다. [Parklife](1994)의 대성공 이후, [The Great Escape](1995)에서 블러가 택한 방식은 한층 영국적인 멜로디와 날카롭고 냉소적으로 변한 가사,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날이 선 사운드로 이루어진 팝송이었다. [The Great Escape]는 ‘영국 중산층(이는 25평 짜리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 너도나도 ‘나는 중산층’이라 외치는 대한민국의 중산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에 대한 신랄한 분석과 비판’을 가한 음반이다.

“Stereotypes”는 교외에서의 삶과 스와핑(swapping: 부부 교환)을 꿈꾸는 따분한 인생을, “Country House”는 ‘슬프긴 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발자크(Balzac)를 읽으며 프로작(Prozac: 항우울제)을 삼키는’ 도시인의 전원생활로의 도피심리를 표현한 곡이다. (스미스(The Smiths)의 “This Charming Man”에 대한 답가(答歌)라는) “Charmless Man”은 또 어떤가. ‘클라레와 보졸레(Claret, Beaujolais: 와인의 종류)를 구별할 줄은 알지만, 자기 인생이 머리꼭대기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건 모르는’ 이 불쌍한 남자는 “모든 게 공짜고 집집마다 위성 방송으로 연결돼있으니, 더 이상 외롭지 않다”(“The Universal”)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가죽소파에 앉아 비서의 엉덩이를 꼬집으면서 “난 호색한이야, 난 정말 호색한이야”라고 주절대는 “Mr. Robinsons’ Quango”, 가난에 지친 이들에게 “어서 빨리 복권에 당신만의 행운의 숫자를 써 넣으라”며 “그게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공허한) 위로를 던지는 “It Could Be You”,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뿐이라는 “Ernola Same”과, 매일 밤 포르노 방송을 보다 잠드는 “Dan Abnormal”(댄 앱노멀은 ‘Damon Albarn’의 철자를 가지고 장난을 친 것이다)을 지나 블러는 중얼거린다. “당신을 본 적은 없지만 우리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니 함께야, 영원히 사랑해”(“Yuko And Hiro”)라고.

그렇다면 이러한 비관적인 현대 생활에 관한 서사시 [The Great Escape]의 사운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황당하게도 앨범의 사운드는 쿵짝대는 관악 파트와 발랄한 기타 사운드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불편한 신디사이저 음과 어지러운 현악이 얽혀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또한 데이몬 알반의 보컬 역시 (거의 사악하다시피) 강한 코크니(cockney: 런던 사투리) 억양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연주 파트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의 만화경은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우며, 리듬 운용 면에 있어서도 디스코(disco)를 도입한 “Entertain Me”에서 드러나듯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금속성의 기타음에 맞춰 느릿느릿 뽑아내듯 노래하는 “Stereotypes”와, 돌진하듯 달려가는 관악파트 위로 각기 다른 선율을 따라 진행되는 보컬의 “Country House”, 사운드나 가사 면에서 공히 앨범의 성격을 대변하는 “Charmless Man”의 보컬/백 보컬/건반/기타/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화성 구조는 비틀스(The Beatles)나 킹크스(The Kinks)로 대변되는 영국 정통 팝송의 계보를 잇는 사운드라 할 만하다. 또한 “Top Man”이나 “Mr. Robinsons’ Quango”는 백 보컬의 역할을 메인 보컬의 영역까지 끌어올리면서 층층이 겹을 쌓아가듯 복잡한 멜로디 구성을 만들어 낸다. 물론 이러한 열에 들뜬 사운드의 해열제로써 작용할 “Best Days”나 “The Universal”, “He Thought Of Cars”, “Yuko And Hiro” 등의 트랙 역시 존재한다. 특히 “The Universal”을 통해 드러나는 관현악 파트의 세련된 운용은, 블러의 음악이 연출하는 가장 ‘우아한’ 순간일 것이다. 또한 “He Thought Of Cars”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적인 사운드 또한 [Parklife]를 통해 드러난 이들의 다양성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Parklife]가 각 곡의 분위기와 목적에 맞춰 제각기 상이한 악기들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다양한 음향의 꼴라쥬를 만들어낸 것과는 달리, [The Great Escape]는 여러 악기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과장된 기타 사운드 안에 각 악기의 특성을 가두어버림으로써 일관적이면서 응축된 소리를 만들어낸다. [Parklife]가 ‘백화점식 사운드'(상이한 요소들의 나열)의 결정판이라면, [The Great Escape]는 ‘전문 매장식 사운드'(일관된 흐름 안에서의 배리에이션)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곡에서는 마치 사운드의 ‘캐리커처’를 보듯 특징을 과장한 연주를 들려주는데, 이는 사운드와 마찬가지로 특정 성격을 부각시킨 가사 속의 다양한 캐릭터들과 맞물리며 강한 이미지의 상승 효과를 만들어낸다(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이러한 음반의 강렬한 이미지가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칠 수도 있다. 일례로 스웨이드(Suede)의 브렛 앤더슨(Brett Anderson)은 블러를 ‘코미디 그룹일 뿐’이라며 비아냥댔다).

[The Great Escape]는 [Parklife]가 마음껏 열어 젖힌 브릿팝(BritPop) 시대의 중구난방 사운드를 하나의 통일된 흐름 안에 합치고자 했던 밴드의 야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방식은 병적일 정도로 ‘영국다움’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비참한 일상의 삶에 대한 ‘연민 없는 냉소’는 대중들로 하여금 블러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부른다(하지만 미국 시장의 1/3 규모밖에 되지 않는 영국에서 150만장을 팔아치운 [The Great Escape]의 결과가 ‘처참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강한 냉소’는 분명 그 대상에 대한 ‘자기 동일시’와, 그에 따른 –자아도취를 수반한– 자기비하를 의미하는 것일텐데, 이는 아마도 [Parklife]의 대대적인 성공과, 오아시스(Oasis)와의 (비생산적인) 라이벌 구도가 가져온 반작용일 것이다.

[The Great Escape]는 당시 블러가 구사하던 사운드의 극한을 추구한 음반이다. 따라서 이는, 역설적으로 더 이상 밴드가 이러한 사운드 운용으로는 나아갈 길이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질 블러의 사운드 탐색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블러는 이미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고전적 영국 팝 송’에 집착하지 않는 영리함을 보여주었고, 그런 의미에서 상업적으로 실패한 [The Great Escape]는 — 밀도 높은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진화해가는 밴드의 ‘과도기적 작품’으로서 그 의미를 획득했다. 20030515 | 김태서 uralalah@paran.com

8/10

수록곡
1. Stereotypes
2. Country House
3. Best Days
4. Charmless Man
5. Fade Away
6. Top Man
7. The Universal
8. Mr. Robinsons’ Quango
9. He Thought Of Cars
10. It Could Be You
11. Ernola Same
12. Globe Alone
13. Dan Abnormal
14. Entertain Me
15. Yoko And H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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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mless Man”

관련 사이트
Blur 공식 사이트
http://www.blur.co.uk/s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