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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 – Parklife – EMI, 1994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다

영국 평단의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얻어낸 [Modern Life Is Rubbish](1993)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판매고(영국 내 15,000장 판매)로 인해 블러(Blur)를 거의 파산 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인 부담 속에서 밴드는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너무나도 ‘플로어 지향적’이고 ‘라디오 프렌들리’한 (소프트 포르노)댄스곡 “Girls & Boys”를 발표하며 후속작 [Parklife](1994)가 거두어들일 대대적인 성공을 예고하기에 이른다. 예상대로 음반은 캐치(catchy)한 멜로디 가득한 대중적인 사운드로 완성되었고, 블러는 [Parklife]를 통해 전지구적 스타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물론 미국 공략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1994년 영국의 플로어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Girls & Boys”는, 촌스러운 신디사이저 반복음 위로 얹히는 디스코(disco) 리듬의 베이스와 갱 오브 포(Gang Of Four)적인 기타 사운드, 그리고 후렴구의 코믹한 ‘uh-uh-uh’ 반복 어구를 통해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휴일에 그리스로 떠나서 온갖 소년, 소녀들의 전이된 성과 포르노를 즐긴다'(Blur’s Biography [Kino], 김미영)는 가사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그 외에도 ‘일에 치이는 중년의 공무원과 어느 날 그의 집을 뚫고 들어온 불도저’를 노래한 파워팝 “Tracy Jacks”와 감미로운 어쿠스틱 사운드의 “End Of Century”, 필 다니엘스(Phil Daniels)가 영국 액센트로 주절대는 “Parklife”의 과장되면서 각각의 연주 채널을 고스란히 살린 사운드는, 음반의 다채로움을 부각시키는 훌륭한 4연타 팝-파노라마 사운드를 연출한다.

펑크의 날 선 공격성을 주류 팝의 매끄러운 흥겨움으로 변형시킨 “Bank Holiday”와 “Jubilee”, 유로댄스의 키치적 변형인 “London Loves”와, 차분하고 감미로운 “This Is A Low” 등은 [Parklife]의 화려함을 빛내주는 풍성한 팝 사운드이다. 또한 — 스레레오랩(Stereolab)의 래티샤 샤디에(Laetitia Sadier)가 불어 나래이션을 맡은 — “To The End”는 프랑스 고전 영화를 보는 듯한 고급스러운 발라드 트랙이다(데이몬 알반은 프랑스 팝(French pop) 애호가로 유명한데, 그의 프랑스 팝송에 대한 애정은 같은 해, 프랑소아즈 아르디(Francoise Hardy)와 재녹음한 “To The End”의 불어 버전 “La Comedie”로 그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사운드의 다양성은, 갈매기 울음소리로 시작하는 “Clover Over Dover”의 하프시코드나 “Bad Head”의 혼 섹션 등, 다채로운 악기의 사용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다단한 사운드는 음반을 앨범 전체로서가 아닌 싱글 단위로 읽히게끔 만들 위험이 있다. 하지만 [Parklife]는 세세하게 잡아내는 일상에 대한 정교한 묘사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 또한 분명한 보컬 라인과 오밀조밀한 기타 사운드는 개성적인 개별곡들을 ‘멜로디에 충실한 팝’이라는 범주 안에 묶어놓는다. 그로 인해, 상이한 수록곡의 나열식 배치는 ‘방만함’이 아닌 일관된 ‘연속선상’에 놓여지고(데이몬 알반은 [Parklife]에 대해 “낮 시간대의 음악, 라디오 채널을 통한 여행”이라 촌평했다), 앨범은 1990년대 영국의 삶에 대한 ‘컨셉트 앨범’이기 보다는 ‘사운드트랙’으로서의 통일성을 획득하게 된다(이것이 [The Great Escape](1995)와 [Parklife]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또한 전작들의 다소 무거우면서 어두운 이미지가 성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블러는, (소위) ‘쿨’하고 ‘댄디’한 전형적인 ‘팝 스타’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인터뷰에서 “스타가 되고 싶다”는 발언을 공공연히 늘어놓았고, “중요한 것은 음반 발매 당시의 평가가 아니다. 먼 훗날, 얼마나 많은 레코드를 팔았느냐 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라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서서히 끝물을 맞아가던 미국 그런지(grunge)의 몰락과 더불어 세계 팝 시장의 ‘대안적’ 자세로 부상하기에 이른다(물론 블러가 아직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의미에서 [Parklife]는 미국의 그런지에 대한 영국의 ‘반작용’으로써 기능했다.

이런 점은 [Parklife]가 ‘미국 시장을 철저히 배제’한 음반이라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음반은 당대의 조류를 완전히 무시한, ‘전통적 영국 팝 송’의 유산들을 합쳐 놓은 듯한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미국적인 사운드=국제적인 사운드’라는 공식을 완전히 배반(배격)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Girls & Boys”가 나름의 반향을 획득했을 때조차도 블러는 이에 신경 쓰지 않음으로써 미국진출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미국시장에 대한 ‘멸시’는 결과적으로 오아시스의 미국 내 대성공과 더불어, 블러의 발목을 두고두고 붙잡고 늘어질 일종의 ‘원죄’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블러의 태도가 자국인 영국 내에서 그들을 ‘국민밴드’의 위치로 끌어올려 주었음은 분명하다.

[Parklife]가 갖는 가치는 이 음반을 통해 블러가 브릿팝(BritPop) 씬의 맹주로 떠올랐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음반의 진정한 가치는 (단지 1960~70년대의 영국 팝/록에 영향받은 1990년대의 복고적인 영국 사운드를 총칭하는 것일 뿐인) ‘브릿팝’이라는 모호한 장르가 보여줄 수 있었던 사운드 형식의 다양성을 거의 총괄하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광의의 브릿팝이 하나의 ‘경향’으로 묶일 수 있는 태도(attitude)를 규정지었다는 데 있다. 또한 [Parklife]는 1990년대 중반의 팝 씬에서 ‘미국에서의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영국적 특수성을 부각시킨 음악’으로도 충분히 국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증명해 냈다.

마지막으로 이 음반이 갖는 ‘유행가’로서의 가치를 언급하고 지나가야겠다. 사실 [Parklife]의 수록곡은 사운드 면에서 결코 용이한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렴구에 이르면 각 곡이 갖는 멜로디의 흡인력은 놀라울 만큼 강력하며, 이는 ‘록 밴드의 구성으로 팝 음악을 연주한다’는 이들의 모토를 실현시키는 순간이기도 하다(하지만 이러한 ‘캐치’한 면을 부각하기 위해 블러가 택한 것은 사운드에 대한 ‘키치’적인 접근이었고, 이런 점이 이들의 음악을 다소 과소평가 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또한 [Parklife]의 독특한 매력은 댄디 가이들이 저열한 인생의 송가를 불렀다는 점, 이러한 아이러니가 자아내는 삶의 분열이 음악적 결실로 멋지게 성취되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Parklife]는 영국 팝계, 더 나아가서는 세계 팝 씬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음을 선언한 음반이다. 물론 이들이 제시한 ‘새로움’은 기존의 흐름들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으나, 블러는 이를 답습하는 것만이 아닌 ‘확대/해체’로의 문 또한 열어두고 있었다(이들은 결코 ‘심각한’ 경배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예정된) 브릿팝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생명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결과론적인 얘기지만 1997년 당시, 무모하게만 느껴졌던 “브릿팝은 죽었다(Britpop is dead)” 발언은 너무나도 시의 적절한 선택이었다). [Parklife]가 아무 생각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즐길 수 있는 ‘잘 만들어진 팝 음반’의 범주를 넘어, ‘한 세대의 문을 연 기념비적 음반’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 데는, 바로 이러한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기막히게 잡아내는 밴드의 영악함이 있을 것이다. 20030608 | 김태서 uralalah@paran.com

10/10

* Special Thanks To: Sol

수록곡
1. Girls & Boys
2. Tracy Jacks
3. End Of Century
4. Parklife
5. Bank Holiday
6. Badhead
7. The Debt Collector
8. Far Out
9. To The End
10. London Loves
11. Trouble In The Massage Centre
12. Clover Over Dover
13. Magic America
14. Jubilee
15. This Is A Low
16. Lot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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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The End”

관련 사이트
Blur 공식 사이트
http://www.blur.co.uk/s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