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02015447-mlirBlur – Modern Life Is Rubbish – EMI, 1993

 

 

얼룩진 풍자극, 막을 올리다

90년대 초-중반에 영국의 음악잡지들은 한 편의 연극을 담론시장의 무대 위에 올려서 전세계적인 구경거리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연극의 제목은 ‘브릿팝을 기다리며’ : 뭔가 과장된 동선으로 이루어진 이 부조리극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대중들. 무대에는 마이크가 없어서 변사가 배우 대신 대사를 읖어대는데, 변사들의 ‘브릿팝’에 대한 장광설은 배우들의 연기와 불일치하며 극의 부조리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 써놓고 보니 이러한 연극의 은유는 상당히 잘 어울린다. 필자의 생각에 브릿팝이라는 것의 정체가 있다면 연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운드의 연출 방법론에 있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멋진 음이나 심상의 무드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음악의 여러 특성을 이용해서 특정한 시츄에이션을 연출, 청자에게 전달하려는 자세이다. 블러(Blur)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이 “영국에는 기타로 재미있는 것을 하는 애들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도 상통하는 면일 것이다. 미국 밴드들과는 달리 ‘기타를 멋지게 조지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밴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과 사운드, 편곡을 독해 가능한 텍스트로 연출해 내는 문화적 전통이 영국에 굵직하게 존재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바로 비틀스(The Beatles)로부터 보위(David Bowie)를 위시한 영국적인 팝음악의 전통이기도 하다.

블러가 동시대의 밴드들 중에서 이러한 영국적인 사운드의 운용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태도로 임한 밴드임에 확실하다. 적어도 본작인 2집, [Modern Life Is Rubbish](1993)를 비롯해서 이어지는 [Parklife](1994), [The Great Escape](1995)까지의 세 앨범에서 그들은 영국적인 사운드를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연출해냈다.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영국적인 사운드라는 것은 단순히 비틀스를 연상케 하는 복고적 멜로디와 사운드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선배들이 확립한 ‘시츄에이션 사운드’의 특성을 음악의 핵심으로 끌어올리며 영국 중산계급에 대한 한 편의 풍자극을 연출한다. 이러한 의지가 “멋진 노래를 만드는 수많은 영국 팝밴드 중 하나”라는 지평으로부터 블러를 독특한 지점에 위치하게 한다.

3집 [Parklife]에서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대중적이기 그지없는 뽕뽕 사운드는 앨범 전체가 유쾌한 풍자극이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한(사실 잘 들으면 별로 안 유쾌하다) 키치적인 사운드였다. 물론 가사를 알아먹기 어려운 한국인에게야 그저 재기발랄한 사운드였지만서도. 송라이팅에 있어서도 코드의 운용에서 이질적인 텐션(신현준 외,『얼트 문화와 록음악』2권에 의하면 블루노트!)을 부여하면서 화려하고 팝적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어색하고 낯선 느낌을 준다. 구어체로 이야기하면 ‘그거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자연스럽지는 않다’는 느낌이랄까.

3집은 이러한 것들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며 동시에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딘가 오버하지만 어딘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뽕뽕 사운드와 이질적이지만 또 말은 되는 낯선 코드의 운용 사이에서 블러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팝 훅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블러식 시츄에이션 사운드, 혹은 초기 블러 스타일의 완성이다(Uuu~Huu~!).

블러가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사운드의 연출과 코드와 멜로디를 포함한 송라이팅의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블러의 팝에 대한 자세는 결코 얄팍하지 않았으며 데이몬 알반(Damon Albarn)은 연극으로 치면 멋진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연출가’라는 측면에 더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블러의 팝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영국이라는 세상을 ‘연출’했다. 다른 노래의 여기저기에서 멜로디나 훅을 따오는데도 스스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충분히 인정할 만한 자세이다. 이들은 기특할 정도로 잘해냈다. 보위보다 건강하게, 비틀스보다 열심히. 이들은 충분히 냉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자기들이 만드는 풍자극에 빠져 들지도 않았다(그런 의미에서도 이들이 록밴드가 아니라는 점은 옳다).

문제는 이들의 작은 풍자극이 또다른 거대한 부조리극 안에 놓이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 부조리극이 뭐냐고? 이야기했잖은가. “브릿팝을 기다리며” 아니, 이런. 갑자기 액자식 구성이 되어버렸군. 그저 부조리극 안에서 벌이는 한편의 풍자극이라면 그 풍자극은 무엇을 풍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블러의 풍자극은 날이 갈수록 자기조롱이 되어간다. 여기에다가 영국 중산계급의 문화를 풍자한다는 것에 대해 “중산계급이 중산계급을 풍자하는 건지, 노동계급이 중산계급을 풍자하는 건지 스스로 헷갈리고 있다”는 혐의도 있다(사실 이건 좀 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존 레논도 이런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고!). 이들이 팝을 통해 연출해내는 풍자극은 이미 부조리극이 연출하는 풍자극과 구분되지 않는다. 고심해서 연출한 웃기는 사운드는 그저 웃기게만 들리고, 자기조롱은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주)

블러가 스스로도 자기들이 우스워 보인다는 점을 뼈져리게 느낄 무렵, 그들은 ‘브릿팝을 기다리며’의 무대에서 내려오기로 결심하였고(‘브릿팝은 죽었다’ – 사실 이 말도 부조리극의 일부다, 클라이막스랄까) 뒤이어 블러를 되찾기 위해서 만든 [Blur](1997)에서 연출가 데이몬 알반은 더이상 무대연출을 그만하기로 결심한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사랑스러운 뽕뽕 사운드는 사라졌고 촌극을 보여주기 위한 이질적인 코드의 운용은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위해 봉사하며, 메시지는 독방에서 맴돈다.

그러나 필자로 말할 것 같으면 후기의 블러보다 그들이 연출가였던 시절의 이 사운드를 더욱 사랑하며, 그들의 역량 역시 여기에서 가장 뛰어나게 발휘되었다고 주장한다. 후기의 앨범들은 블러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의 2, 3, 4집은 블러만의 업적이며 단지 멤버들의 팝센스만으로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다. 보통 블러가 5집 [Blur]에서부터 갑자기 어려워졌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도 블러는 결코 쉬운 밴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의 블러가 더욱 진취적이고 진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밴드의 디스코그라피 중에 평론가들의 취향에 따라서 명반이 서로 다르게 꼽힌다는 것은 공인된 작가주의 밴드의 특권이다. 블러의 경우 취향에 따라서 3, 4집과 5, 6, 7집이 골고루 꼽힐 수 있지만 1집과 함께 본작인 2집 [Modern Life Is Rubbish]는 거의 선택받지 못했다. 이 앨범에 대해서 언급되는 것은 밴드가 1집 [Leisure](1991)의 영국 내 성공을 기반으로 미국진출에 나섰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후 정신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작업한 앨범이라는 정도일까. 그리고 앨범이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음반사의 요구로 인해 “For Tomorrow”와 “Chemical World”가 각각 영국 내 싱글과 미국 내 싱글 용으로 추가작업되었다는 정도. 그러나 이 앨범은 결코 미국진출 실패의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부산물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앨범은 밴드가 적극적으로 기획한 (그리고 너털너털하게 얼룩질 정도로 매달리게 되는) 영국적인 사운드, 풍자극의 야심찬 시작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는 스무번째 세기의 소년이라네 / he’s a twentieth century boy”(“For Tomorrow”)라는 발언으로 시작하는 [Modern Life Is Rubbish]는 블러가 3집에서 절정에 이르고 4집에서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 블러식 시츄에이션 사운드와 풍자극의 야심찬 시작이다. “Colin Zeal”은 3집의 “Tracy Jacks”에서도 보여지는 전형적인 인물의 형상화를 보여준다. 역시나 블러식으로 뿡짝뿡짝하며 오페라식 사운드를 들려주는 “Sunday Sunday”가 해내는 풍자는 재미있다. 그리고 충분히 매력적으로 귀를 잡아채는 “Advert”를 듣고 이 곡이 3집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면, 이 시기 블러에게 부족한 것은 좀 더 대놓고 뿡짝뿡짝하고 키치적으로 꾸며대는 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앨범에는 3, 4집에서 대중을 매혹시켰던 이질적인 코드를 넘나드는 팝 훅의 요소가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화려하게 꾸며지거나 노래의 전면에 강하게 내세워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후의 두 앨범이나 “Song 2” 등에 비해 이 앨범의 ‘블러식 추임새’는 치고 나오는 힘이 비교적 약하다. 그리고 1집으로부터 이어지는(그리고 5집 [Blur]로 다시 이어지는) 사이키델릭한 요소가 편곡의 여기저기에 묻어있다(“Oily Water”). 때문에 앨범은 풍자극의 희극적인 성격과 묵묵하고 진지한 사이키델릭의 성격이 어색하게 한 자리에 같이 한 모습이기도 하다.

앨범을 독해하는 자세로 듣는다면 이 둘은 서로 그렇게 이율배반적이지 않으며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앨범을 즐기려는 자세로 듣는다면 어느 쪽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될 여지가 있다. 앨범이 평론가들에게는 그럭저럭 호평받았으나 대중에게는 대체로 외면받은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당대의 ‘Nevermind'(!)한 풍토도 이들의 진행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그들이 달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를 이미 대부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의 풍자극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금새 깨달았으며 1년도 안 되는 간격으로 발매한 3집 [Parklife]에서 밴드는 후다닥 달려나가서 브릿팝의 맹주가 된다. 이에 따라서 부조리극도 본격적인 전개부에 오른다. 20030530 | 김남훈 kkamakgui@hotmail.net

7/10

*주: 또 한 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보자면 (눈 질끈!) 너바나(Nirvana)를 위시한 미국 록밴드의 자기몰락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진정성이 가식적인 연극이 되어간다는 것이었고, 섹스 피스톨스(The Sex Pistols)를 위시한 영국 록밴드들의 자기몰락은 의미를 가진 한 편의 연극이 점차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연극 그 자체가 된다는 점이었다. 블러 역시 어쩔 수 없는 영국밴드로서 영국적인 자기몰락을 겪었는데, 그런 자체가 사실 브릿팝적인 것이 아닐까. 그래, 누구인들 부조리극에서 그리 쉽게 내려올 수 있으랴.

수록곡
1. For Tomorrow
2. Advert
3. Colin Zeal
4. Pressure On Julian
5. Star Shaped
6. Blue Jeans
7. Chemical World
8. Intermission
9. Sunday Sunday
10. Oily Water
11. Miss America
12. Villa Rosie
13. Coping
14. Turn It Up
15. Pop Scene
16. Resigned
17. Commecial B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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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Sunday Sunday”

관련 사이트
Blur 공식 사이트
http://www.blur.co.uk/s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