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02020008-blur-lesBlur – Leisure – EMI, 1991

 

 

어느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무덤덤한 탄생

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1996)]은 약물 중독을 정면으로 다룬 내용뿐만 아니라 매니아 취향에 가까운 사운드 트랙의 상업적 성공이라는 화제를 남긴 바 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영화광들과 음악광들 모두에게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국에서 테크노 열풍을 점화시킨 음악으로 다소 황당하게 둔갑한 레프트필드(Leftfield)나 언더월드(Underworld)의 중독성 강한 일렉트로니카 트랙뿐 아니라 이기 팝(Iggy Pop)의 퇴폐적인 목소리에 이끌려 스크린 속으로 질주해 들어가는 경험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OST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대목은 뭐니뭐니해도 블러(Blur)의 “Sing”이라고 말하고 싶다. [트레인스포팅]은 축구에나 광분하고 헤로인에 찌들어 사는 백수 청년들의 난장판 인생을 그린 영화이지만, 이완 맥그리거(Ewan McGregor)와 데이몬 알반(Damon Albarn)을 위한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데뷔 앨범 [Leisure]의 영국 버전에만 실려 있는 “Sing”은 정처 없이 부유하는 드론 노이즈와 “아무런 느낌이 없는 내게 노래해 달라”고 읊조리는 데이몬의 자조적인 보이스가 모호하게 번져가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러나 [Leisure]의 대표곡들은 “Sing”과 같이 다소 난해한 실험작이라기보다는 영국 기타 팝/록의 유산들에서 추출된 친근한 팝송들이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홍보 카피와 대부분의 음반 리뷰에는 맨체스터(Manchester) 사운드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있다. 작법이나 전반적인 연주 스타일 등이 다소 차별적이긴 하지만 과장된 오버 드라이브를 배제한 쟁글거리는 기타 톤과 헐렁하게(baggy) 직조된 그루브는 이를 부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아련한 올갠 소리와 나이브한 보컬 하모니에 훵키한 터치를 가하는 “There’s No Other Way”의 매력적인 기타 음은 소프트한 댄서블 비트를 조성해내고 있으며, 블러의 전신 세이무어(Seymour) 시절에 만들어진 미드 템포의 팝 넘버 “She’s So High” 역시 어디서 들어본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러나 [Leisure]는 상큼한 팝송과 댄서블한 그루브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앨범이다.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 )의 기타 톤은 어둡고 거친 노이즈의 세계를 기웃거리며, 일체의 기교와 과장된 샤우팅을 배제한 채 내성적인 소년처럼 노래하는 데이몬의 보컬은 냉소적인 느낌을 풍기면서도 무미건조하다. 데이몬과 그레이엄의 시선을 신발 끝에 붙잡아 두었을 듯한 “Slow Down”과 “Come Together”의 두텁고 탁한 기타 노이즈는 명백히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을 참고한 듯 하다. 그러나 슈게이저 록(shoegazer rock)의 영향은 이후의 블러의 히트작들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곁가지와 같은 시도에 머문다. 물론 이후 밝혀지듯 이런 심각한 실험을 포기한 것은 안정된 상업적 성공을 위한 영리한 선택이었다.

블러가 데뷔한 때만 해도 영국의 기타 팝/록에 상대적으로 생소함을 느끼던 국내 음악팬들에게 이들은 별다른 참신함이나 충격파를 지니지 못한 심심한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로 인식되었다. 이는 [Parklife]에서부터 노골화되는 특유의 경쾌한 연주와 다소 익살스런 그루브가 아직 구체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 앨범이 “맨체스터 사운드에 대한 런던의 대답”이라는 다소 휘황스런 카피(copy)와 함께 등장한 바로 그 블러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이 정립되기 이전에 서둘러 잉태된 습작의 냄새를 풍기는 점은 음악적 완성도 측면에서의 한계이다.

“Birthday”에서 데이몬은 “아무도 없는 이상한 생일, 나를 작게만 느껴지게 하는 서글픈 날”이라고 우울하게 노래한다. 블러는 결과적으로 그리 축복 받지 못한 채 탄생했으며, 브릿팝이란 이름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기 이전만 해도 다소 초라하고 다급해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며 우리의 인내심은 보상을 받은 셈이다. 멀끔한 외모만큼이나 재능 있는 청년들이 좌절감과 허무에 허덕이지 않고 명쾌하고도 쿨하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능력을, 대중음악의 역사에 또 하나의 또렷한 기념비를 세워 가는 모습을 금새 목격할 수 있으니 말이다. 20030607 | 장육 EVOL62@hanmail.net

6/10

수록곡
1. She’s So High
2. Bang
3. Slow Down
4. Repetition
5. Bad Day
6. Sing
7. There’s No Other Way
8. Fool
9. Come Together
10. High Cool
11. Birthday
12. Wear Me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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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 No Other Way”

관련 사이트
Blur 공식 사이트
http://www.blur.co.uk/si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