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13102736-casker캐스커 – 철갑혹성 – G_records, 2003

 

 

2003년 한국 테크노씬의 현주소

1990년대 말 한국의 테크노씬은 폭발했다. TV 가요프로그램은 테크노를 표방하는 가수들의 음악이 상위권을 차지했고, 외국의 클럽에서 인기있는 음악들은 직수입되어 홍대 앞 클럽가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러한 눈에 보이는 움직임의 반대편에서 (혹은 대중의 높아진 관심에 부흥하여) 그 이전부터 테크노 음악을 좋아하던 매니아들은 한국 테크노 뮤지션들의 순수 창작곡들로 구성된 편집음반 [Techno@Kr](1999)을 발매한다. 요즘도 당시 클럽가에서 지명도와 실력을 갖추었던 참여 뮤지션들의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과연 앨범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이후 솔로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뮤지션들은 소식을 접하기 조차 쉽지 않다. 그 중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캐스커(Casker, 본명:이준오)가 데뷔 앨범 [철갑혹성](2003)을 발매했다.

우선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시부야계’라는 표현이 눈에 띄인다. 하지만 앨범을 들어보면 엄밀히 얘기해 ‘시부야계’로 분류할만한 곡의 수는 많지 않다. 이는 한국에서 영, 미의 테크노 뮤지션들보다 하이브리드에 가까운 피치카토 파이브(Pizzicato Five),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Fantastic Plastic Machine)등의 일본 뮤지션들이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홍보전략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철갑혹성]은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테크노 음악을 담고 있다. 타이틀격의 “8월의 일요일들”은 대중의 접근이 쉽지 않은 테크노의 차가운 비트보다는 따뜻한 보사노바의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보사노바, 라운지 음악등의 영향을 받은 시부야계 아티스트들이 한국에서 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트랙 “1103” 역시 라틴풍 마이너 코드의 진행에 이소은의 보컬까지 덧붙여져 캐스커의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하지만, “Nowhere”부터 캐스커는 대중에 대한 부담감을 벗고,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다. 드럼앤베이스(DrumN’Bass) 리듬을 기본으로 갖가지 샘플이 뒤죽박죽 섞인 이 곡은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며, 또 실제로 데이빗 린치의 영화와 유사한 이미지(imagery)를 남기는데 성공하고 있다. “Luna”는 캐스커 본인이 가장 아끼는 곡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가 진행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국 [지하실]의 시그널 음악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드라이빙 넘치는 드럼비트와 함께 사용된 샘플링, 목소리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기타 솔로 연주는 모두 우울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Skip”은 다른 곡에 비해 반복되는 리듬도 단순하고, 샘플링의 효과도 적으면서, 감정을 배제한 채 담담하게 노래하는 남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이한 트랙으로 캐스커식 사랑 노래라 할 수 있다. 남녀가 같은 가사를 함께 부르는데, 합창의 느낌보다는 서로에게 동시에 얘기를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캐스커에 따르면 남자는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얘기하는 것이고, 그 짝사랑을 받는 여자는 또 다른 남자에게 얘기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참 불쌍한 남자에 대한 노래). 앨범 명이기도 한 “철갑혹성”은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별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철갑혹성”은 만화영화의 주제곡 쓰여도 될 만큼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멜로디를 들려준다(그런데 정작 캐스커는 지하철 안의 지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음악 씬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Discoid”는 로드 피아노(Rhodes Piano)와 베이스(불독맨션의 이한주)가 직접 연주를 하고, 캐스커의 보컬은 보코더을 사용해 왜곡시킨 복고적인 디스코 트랙이다. “Discord”는 역시 [Techno @KR](1999)에 함께 참여했으며, 이미 2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 바 있는 가재발(Gazaebal)에 의해 리믹스 되었는데, 리믹스 버전에서는 원곡의 디스코 느낌보다는 하우스 음악에 가깝게 변하였다.

한국의 테크노씬을 얘기하며, ‘~씬’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기조차 민망하다. 물론 외국의 유명 DJ, 뮤지션의 공연이 한 두 달에 한 번씩 있고, 흥행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토종 테크노 음반이 일 년에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발매되는 현실은 아쉽기 그지없다. 철저하게 소수인 한국의 인디 음반 사이에도 테크노 음반은 약자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본 앨범은 그 의의를 더 한다. 비록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씩 반복해 들으며 자료를 찾아 봐야 했지만, 오랜만에 듣는 한국산 테크노 음반이라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 굳이 감춰야할까? 20030405 | 이성식 landtmann@empal.com

7/10

수록곡
1. Cross The Roads
2. 8월의 일요일들
3. 1103 (Fea. 이소은)
4. Nowhere
5. Luna
6. Skip
7. 철갑혹성
8. Discoid
9. Crispy
10. Complex Walking
11. Alice
12. Vague (Feat.Hey)
13. Discoid (Sick Deep Mix)-Gazaebal
14. Luna (The Verdure Mix)-Skoolgirl Action

관련 글
배리어스 아티스트 [techno@kr] 리뷰 – vol.1/no.5 [19991016]

관련 사이트
Casker 공식 사이트
http://www.casker.co.kr
Casker가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독립음악 방송국 [지하실] http://www.zihasil.com
G-Records
http://www.g-record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