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01015807-scruffs(0)Scruffs – Wanna’ Meet The Scruffs? – Power Play/Rev_Ola, 1977/2002

 

 

잃어버린 파워 팝 역사의 복원

파워 팝은 오늘날 모던 록으로 통칭되는 팝 성향의 로큰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음악이다. 그러나 장르로서의 파워 팝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높은 평판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음악의 홍수 속에서 파워 팝처럼 순하고 예쁘기만한 음악에 매력을 느낄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이 음악이 ‘쿨하지 못한 음악의 대명사’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파워 팝에 한번쯤 눈길을 돌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로큰롤의 모든 음악 스타일 중에서도 파워 팝은 철두철미하게 멜로디로만 승부를 거는 하위 장르다. 다만 멜로디가 음악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은 파워 팝의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멜로디 외에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이 음악은 듣기에 따라 시시하고 지루한 음악으로만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파워 팝 컬트의 일원이 되고나면 이 음악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파워 팝의 기원은 1970년대 초에 활약한 래스베리스(The Raspberries)와 빅 스타(Big Star)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동시대의 밴드인 배드핑거(Badfinger)도 빼놓을 수 없지만 이들은 영국 출신이라는 점에서 미국 출신인 두 밴드와는 음악적 맥락을 좀 달리 한다. 파워 팝은 1960년대의 거라지 록처럼 브리티쉬 인베이전 밴드들에게 매혹된 미국 젊은이들이 창안한 장르인 것이다. 래스베리스와 빅 스타가 파워 팝의 장을 개척한 방식은 상호 독립적이면서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래스베리스의 음악이 남성적이고 힘에 넘치며 강한 멜로드라마를 내포한 반면 빅 스타의 음악은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투명한 서정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이들은 극명한 대조를 나타냈다. 래스베리스가 히트 차트의 상위권을 넘나들며 커다란 인기를 누린 것에 비해 빅 스타는 무명의 늪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발굴된 빅 스타가 오늘날 파워 팝의 영웅으로 널리 추앙되는데 반해서 래스베리스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감이 없지 않다.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스크러프스(The Scruffs)는 드와이트 트윌리 밴드(The Dwight Twilley Band), 칩 트릭(Cheap Trick), 슈즈(Shoes) 등과 함께 파워 팝 2세대를 구성하는 대표적 밴드의 하나다. 파워 팝의 역사 속에서 명멸한 수많은 그룹들처럼 이들도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기고 사라져 갔지만 이들의 유일한 앨범 [“Wanna’ Meet The Scruffs?”]는 파워 팝 서클 내에서 지금도 전설로 떠받들어지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Meet The Beatles]에서 차용한 앨범 타이틀과 [A Hard Day’s Night]을 흉내낸 앨범 표지는 비틀즈(The Beatles)의 영향을 한 눈에 드러내지만 실상 스크러프스의 음악은 래스베리스와 빅 스타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것이었다. 파워 팝이 아직 자체의 전통을 확립하지 못하고 각개약진하던 시기에 이처럼 장르의 전통에 깊이 천착한 그룹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리플레이스먼츠(The Repacements)나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 보다도 10여년이나 앞서 무명밴드에 불과하던 빅 스타의 음악을 파워 팝 전통의 본류에 위치시킨 것은 이들이 얼마나 훌륭한 혜안의 소유자들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사실이다.

스크러프스의 음악에서 래스베리스와 빅 스타의 자취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는 이들이 두 그룹의 음악적 영향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Break The Ice”에 등장하는 ‘비밥-아-루와’ 코러스는 명백히 래스베리스에 대한 오마주이며 “Sad Cafe”는 빅 스타의 [#1 Record]에 수록되어도 손색이 없을만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룹의 두 보컬리스트 스티븐 번스(Stephen Burns)와 데이브 브래년(Dave Branyan)은 각각 래스베리스의 에릭 칼멘(Eric Carmen)과 빅 스타의 알렉스 칠튼(Alex Chilton)을 방불케 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럼에도 이들을 단순한 아류로 단정짓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일 뿐이다. 래스베리스적 멜로디와 빅 스타적 사운드를 결합한 “My Mind”는 두 그룹의 영향을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킨 독창적 면모를 보여주며 쟁글 팝 사운드의 원형을 들을 수 있는 “She Say Yea”는 1980년대의 인디 팝을 예견하는 이들의 선구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파워 팝 계열의 음악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현란한 기타 속주도 이들의 음악에서만 접할 수 있는 멋진 보너스다.

[“Wanna’ Meet The Scruffs?”]는 파워 팝 앨범 치고는 드물게 매우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조용한 분위기의 어쿠스틱 팝(“My Mind”, “She Say Yea”)도 있고 느린 템포의 파워 발라드(“Bedtime Stories”)도 있지만 앨범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스티븐 번스 주도의 격렬한 로큰롤 넘버들이다. 그가 보컬을 맡은 트랙들은 마치 질풍노도와 같은 격정으로 가득하다. 그의 다혈질적인 보컬은 때로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이제 스물 셋인데 내 인생은 벌써 끝났다(“I’m A Failure”)’고 노래하는 그에게 차분한 감정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이 앨범이 지닌 힘의 원천은 이처럼 터질 듯한 감정의 밀도다. 이를 통해 이들은 특별히 데시벨 높은 사운드를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격렬한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시종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이들의 접근방식은 파워 팝 특유의 예민함과 섬세함을 기대하는 팬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힘의 완급조절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는 탓에 이들의 멜로디는 잘 짜여졌으면서도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파워 팝의 지위가 컬트 음악으로 고정되면서 이 계열의 음반들은 그 동안 CD 재발매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파워 팝 서클 내에서 명반으로 간주되는 앨범 중에도 페즈밴드(Pezband)나 페일리 브라더스(The Paley Brothers)의 음반은 아직도 CD 재발매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트(The Beat)나 레츠 액티브(Let’s Active)의 음반은 나오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점에서 파워 팝 음반에 대한 재발매는 어떤 것이 되었든 소실된 역사의 복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스크러프스의 [“Wanna’ Meet The Scruffs?”]도 그 중 하나다. 이 앨범은 몇 년 전 스티븐 번스가 설립한 노던 하이츠(Northern Heights) 레이블을 통해 잠시 재발매된 적이 있으나 그 음반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필자도 그것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끝내는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이유에서 새롭게 재발매된 2002년 레브-올라(Rev-Ola) 버전을 옛 버전과 비교해 평가하기는 어렵다. 단지 새로운 버전이 상당히 준수한 리이슈라는 점만은 말할 수 있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사운드는 흠잡을 데가 없고 발문 위주의 라이너 노트는 아쉽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편이다. 문제는 이 앨범이 과연 얼마나 오래 시장에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음반이 대개 그렇듯 그 전망은 과히 밝다고 할 수 없다. 사반세기만에 복원된 파워 팝의 역사는 또 다시 소실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들의 역사는 언제나 이처럼 허망한 법이다. 20030413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8/10

수록곡
1. Break The Ice
2. My Mind
3. You’re No Fun
4. Frozen Girls
5. I’ve Got A Way
6. Tragedy
7. This Thursday
8. Revenge
9. She Say Yea
10. Tommy Gun
11. Sad Cafe
12. I’m A Failure
13. Bedtime Stories
14. She Say Yea [Bonus Track] 15. Break The Ice [Bonus Track]

관련 글
The dB’s [Stands For deciBels/Repercussion] 리뷰 – vol.4/no.1 [20020101]

관련 사이트
Rev-Ola의 The Scruffs 페이지
http://www.cherryred.co.uk/other/revola_main/artists/thescruffscrrev11.htm